05[장자(외편)] 第22篇 知北遊(지북유) : 05.지극한 도는 만물과 자연변화의 근본이다(05/12)
05.지극한 도는 만물과 자연변화의 근본이다
道不可聞(도불가문) 聞不若塞(문불약색) : 도는 들을 수 없으니 듣는 것이 귀를 막느니만 못하다.
공자(孔子)가 노담(老聃)에게 물었다. “오늘은 조금 한가하신 듯하여 감히 지도(至道)에 대해서 여쭙습니다.” 노담(老聃)이 대답했다. “당신은 재계(齋戒)해서 당신의 마음을 소통시키고 당신의 정신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당신의 지혜를 밀쳐 버리도록 하십시오! 도(道)는 아득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장차 당신을 위해 그 언저리의 대략을 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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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晏閒(안한) : 조금 한가함. 晏은 安과 같고 閒은 閑과 같다. 成玄英은 “晏은 편안함이니 편안하고 한가로움이다[晏 安也 安居閒暇].”라고 풀이했다.
○ 汝齊戒(여제계) : 당신은 재계(齋戒)하시오. 齊(제)는 齋(재)와 같다. 재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의 세 句, 곧 ‘疏瀹而心(소륜이심)’, ‘澡雪而精神(조설이정신)’, ‘掊擊而知(부격이지)’이다.
○ 疏瀹而心(소약이심) : 당신의 마음을 소통함. 疏와 瀹(데칠 ‘약’)은 모두 통한다는 뜻. 瀹자가 氵蘥 으로 표기된 판본이 많지만 馬叙倫의 지적처럼 瀹자로 표기된 판본을 따르는 것이 옳다. 林希逸은 疏瀹을 “소통시켜 인도함이다[通導之也].”라고 풀이했다. 而는 이인칭.
○ 澡雪而精神(조설이정신) : 당신의 정신을 깨끗하게 씻어냄. 澡雪(조설)은 깨끗하게 씻어냄. 丁展成은 “때는 닦아내고 뿌리는 끊지 않음이다[治去莩垢 不絶其本也].”라고 풀이했다. 馬叙倫은 雪을 洒의 가차자로 풀이했는데 그 이전에 成玄英이 이미 澡雪을 “洒濯과 같다[猶洒濯也].”고 풀이했다.
○ 掊擊而知(부격이지) : 당신의 지혜를 밀쳐 버리시오. 掊擊(부격)은 밀쳐 버림. 打擊(타격)의 뜻. 〈人間世〉편 제4장에 “스스로 세속 사람들에게 타격을 받는다[自掊擊於世俗].”고 하여 비슷한 뜻으로 이미 나왔다. ‘掊’는 打와 같은 뜻(成玄英).
○ 夫道(부도)窅然難言哉(요연난언재) : 道는 아득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움. 窅然(요연)은 깊고 먼 모양, 멍한 모양, 고요한 모양, 그윽하고 어두운 모양. 窅然은 〈逍遙遊〉편 제3장, 〈知北遊〉편 제10장에도 나온다.
○ 言其崖略(언기애략) : 그 언저리의 대략을 말함. 崖略(애략)은 언저리의 대략. 林希逸은 “崖는 가장자리이다. 崖略은 깊고 현묘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단지 그 주변과 대략을 말할 수 있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崖 邊際也 崖略者 謂深妙者難言 只言其邊際粗略者而已].”라고 풀이했다.
무릇 밝은 것은 어두운 것에서 생기고 모양이 있는 것은 모양이 없는 것에서 생기고 정신은 도에서 생기고 모습은 본래 정기(精氣)에서 생깁니다. 만물은 모양을 갖추고 생성하니 무릇 구멍이 아홉 개인 것들은 태(胎)에서 생겨나고 여덟 개인 것들은 알에서 생겨납니다. 올 때에는 자취가 없고 갈 때에는 끄트머리가 없으며 문도 없고 방도 없어서 사방으로 탁 트여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따르는 자는 사지가 강하고 생각이 순조롭게 이해되고 이목(耳目)이 총명해지고 마음 씀씀이가 수고롭지 아니하며 사물에 대응함에 일정함이 없습니다. 하늘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높아질 수 없고 땅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넓어질 수 없으며 해와 달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운행되지 못하며 만물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창성(昌盛)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도(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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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夫昭昭(부소소) 生於冥冥(생어명명) 有倫(유륜) 生於無形(생어무형) : 무릇 밝은 것은 어두운 것에서 생기고 모양이 있는 것은 모양이 없는 것에서 생겨남. 昭昭(소소)는 밝은 것, 冥冥(명명)은 어두운 것. 林希逸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다[可見者也 不可見者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有倫(유론)은 일정한 규칙이나 모양이 있는 것을 말한다.
○ 精神生於道(정신생어도) 形本生於精(형본생어정) : 정신은 도에서 생기고 모습은 본래 정기에서 생겨남. 精神은 사람에게 있는 정밀하고 신묘한 능력을 의미한다. 成玄英은 “精智와 神識의 마음이다[精智神識之心].”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정신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精神 在人者也].”라고 풀이했다. 赤塚忠은 ‘精氣’를 가리킨다고 풀이했다.
○ 九竅者胎生(구규자태생) 八竅者卵生(팔규자란생) : 구멍이 아홉 개인 것들은 태에서 생겨나고 여덟 개인 것들은 알에서 생겨남. 九竅(구규)는 눈ㆍ코ㆍ입ㆍ귀의 일곱 구멍과 똥ㆍ오줌 구멍을 합(合)하여 모두 아홉 구멍을 일컬으며, 〈應帝王(응제편)〉편에 보이는 혼돈(渾沌)의 7규(竅)에다 몸에 있는 두 개의 구멍을 더한 것. 九竅(구규)는 각각 사람과 짐승들을 지칭하고 八竅(팔규)는 조류를 지칭한다.
○ 其來無迹(기래무적) 其往無崖(기왕무애) : 올 때에는 자취가 없고 갈 때에는 끄트머리가 없음. 無迹은 〈天地〉편 제13장에, 無崖는 〈人間世〉편 제3장에 나왔다.
○ 四達之皇皇也(사달지황황야) : 사방으로 탁 트여 있음. 四達은 ≪老子≫ 제10장의 ‘明白四達’과 유사한 표현이다. 또한 〈刻意〉편 제3장에도 “정신이 사방으로 통달하고 널리 流行하여 세상 끝 어디까지든지 가지 않는 곳이 없다[精神四達竝流 無所不極].”고 하여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之는 而와 같다(赤塚忠). 皇은 탁 트인 모양. 成玄英은 “皇은 큼이다[皇 大也].”라고 풀이했다.
○ 邀於此者(요어차자) 四肢彊(사지강) : 이것을 따르는 자는 사지가 강함. 邀(요)는 따른다는 뜻. 成玄英은 郭象의 주에 근거하여 “邀는 만남이다[邀 遇也].”라고 풀이했지만 兪樾이 ≪說文解字≫에서 “邀는 따름이다[邀 循也].”고 풀이한 것을 따라 循의 뜻으로 본 것이 보다 정확하다(池田知久). 馬叙倫 또한 邀는 順과 같은 뜻이라 했다.
○ 思慮恂達(사려순달) : 생각이 순조롭게 이해됨. 恂(순)은 통함, 곧 이해된다는 뜻. 成玄英은 ‘通’으로 풀이했다.
○ 天不得不高(천부득불고) 地不得不廣(지부득불광) 日月不得不行(일월부득불행) 萬物不得不昌(만물부득불창) : 하늘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높아질 수 없고 땅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넓어질 수 없으며 해와 달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운행되지 못하며 만물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창성할 수 없음.
○ 此其道與(차기도여) : 이것이 바로 도이다! 이것이 진정한 도가 아니겠는가 하고 도에 대한 감탄을 표시하는 내용이다. 宣穎은 “어떤 판본에는 비슷하게 견주고 논의하는 말로 되어 있으니 도를 표현하기가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一本作擬議之詞 甚見道之難言也].”라고 풀이했지만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감탄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도를 알 수는 없으며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반드시 도를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그런 것들을 이미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를테면 보태도 보태지지 아니하며 덜어내도 덜어지지 않는 것은 성인이 보존하는 것이니 깊고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고, 높고 높아서 끝나면 다시 시작합니다. 만물을 운행(運行)하고 포용(包容)하여 버리지 아니하니 군자의 도는 그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물이 그에게 가서 의지하지만 부족해지지 아니하니 이것이 진정한 도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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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博之不必知(박지불필지) : 박학다식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도를 알 수는 없음. 陸德明은 “기이한 책을 보는 것이 박학이다[觀異書爲博].”라고 풀이했고, 福永光司와 赤塚忠 등은 儒家 등의 博學을 야유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老子≫ 제81장에도 유사한 사상 표현이 나온다.
○ 辯之不必慧(변지불필혜) :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반드시 도를 잘 알지는 못함. 慧는 지혜로운 생각, 곧 도를 잘 안다는 뜻이다. 〈齊物論〉편 제2장의 ‘大辯不言’ 등과 유사한 표현이다.
○ 聖人以斷之矣(성인이단지의) : 성인이 그런 것들을 이미 끊어버림. 以는 已와 같다. 以를 已와 통용하는 경우는 ≪孟子≫를 비롯한 고전에 자주 나온다. 呂惠卿, 林自 등도 以를 已로 풀이하였다(池田知久). 斷之(단지)는 끊어버림. 成玄英은 “그런 것들을 끊어버림이다[斷棄之].”라고 풀이하였다. 羅勉道는 “일정한 견해가 있음이다[有一定之說].”라고 풀이하여 判斷의 斷으로 보았는데 옳지 않은 듯하다.
○ 若夫益之而不加益(약부익지이불가익) 損之而不加損者(손지이불가손자) : 이를테면 보태도 보태지지 아니하며 덜어내도 덜어지지 않는 것. 道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 聖人之所保也(성인지소보야) : 성인이 보존하는 것임. 保는 守와 같다(林雲銘).
○ 淵淵乎其若海(연연호기약해) : 깊고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음. 淵淵(연연)은 깊은 모양.
○ 巍巍乎其終則復始也(위위호기종즉복시야) : 높고 높아서 끝나면 다시 시작함. 巍巍(위위)는 높고 큰 모양. 역시 道에 대한 묘사이다. 馬叙倫은 앞의 其若海와 대구가 되므로 여기의 其는 其若山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 運量萬物而不匱(운량만불이불궤) : 만물을 운행하고 포용하여 버리지 아니함. 運量(운량)은 운행하고 포용한다는 뜻. 林希逸은 “운용하고 헤아림이다[運用而量度之].”라고 풀이했다. 不匱(불궤)의 匱가 遺로 표기된 판본도 있는데 두 글자는 통한다.
○ 君子之道(군자지도) 彼其外與(피기외여) : 군자의 도는 그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君子之道는 지금까지 말한 참된 道와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成玄英은 君子之道를 聖人之道와 동일시하여 긍정적으로 파악하였으나 적절치 않다(李勉, 池田知久).
○ 萬物皆往資焉而不匱(만물개왕자언이불궤) : 만물이 그에게 가서 의지하지만 부족해지지 아니함. 匱(궤)는 다함. 匱乏의 뜻(方勇‧陸永品).
○ 此其道與(차기도여) : 이것이 참된 도가 아니겠는가. 위 문장의 ‘此其道與’와 호응한다. 姚鼐는 “노자의 말은 여기에서 끝났다[老子辭止此].”라고 풀이했는데 이하의 내용을 별도의 章으로 간주한 것이다(池田知久).
중국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음(陰)도 아니고 양(陽)도 아닙니다. 천지 사이에 머물러서 단지 잠시 사람이 되었을지언정 장차 사물의 근본으로 돌아갑니다. 근본인 대도(大道)를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삶이란 氣가 잠깐 모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있으나 서로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잠깐 사이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요(堯)임금과 걸왕(桀王)의 시비를 따지기에 충분하겠습니까? 나무의 과실과 풀에서 자라는 열매는 생장하는 이치가 있으며 사람의 윤리를 가지런히 다스리기가 비록 어렵다지만 이빨이 서로 배열되어 있는 것처럼 나란합니다. 성인은 그런 것을 만나면 어기지도 아니하지만, 지나갈 뿐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화합하면서 대하는 것은 德이고 만나서 호응하는 것은 道이니 도와 덕은 제왕(帝王)이 흥기(興起)하는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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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有人焉(중국유인언) : 중국에 어떤 사람이 있음. 郭象과 林自 등은 人을 “성인을 말함이다[謂聖人].”라고 풀이했지만 赤塚忠, 池田知久 등의 지적처럼 굳이 그렇게 보지 않고 일반 사람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 直且爲人(직차위인) 將反於宗(장반어종) : 단지 잠시 사람이 되었을지언정 장차 사물의 조종으로 돌아감. 直은 다만. 且(차)는 잠시, 우선. 林自는 直且爲人을 “마침 이 몸뚱이를 만남이다[適遇此形].”라고 풀이했고, 羅勉道는 “단지 어쩌다보니 우선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但聊且爲人耳].”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宗(종)은 아래 문장의 本(본)과 마찬가지로 도(道)를 가리킨다(成玄英).
○ 生者(생자) 喑醷物也(음애물야) : 삶이란 기가 잠깐 모인 것에 지나지 않음. 喑醷는 郭象과 李頤가 “기가 모이는 모양이다[聚氣貌].”라고 풀이한 것이 무난하다.
○ 雖有壽夭(수유수요) 相去幾何(상거기하) : 비록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있으나 서로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齊物論〉 제1장에서 “天下에는 가을 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太山은 가장 작다. 일찍 죽은 아이보다 長壽한 사람이 없고 8백 년을 살았다고 하는 彭祖는 가장 일찍 죽은 것이다[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太山爲小 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라고 주장하는 논리와 유사한 맥락이다. ‘相去幾何(상거기하)’는 ≪老子≫ 제20장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 果蓏有理(과라유리) : 나무의 과실과 풀에서 자라는 열매는 생장하는 이치가 있음. 果는 나무의 과실이고 蓏(라)는 풀의 열매. 理는 생장하는 이치. 福永光司는 倫과 같다고 풀이했고, 池田知久는 物 속에 있는 본질적 속성이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 聖人遭之而不違(성인조지이불위) 過之而不守(과지이불수) : 성인은 그런 것을 만나면 어기지도 아니하지만, 지나갈 뿐 지키려 하지도 않음. 之는 人倫을 가리킨다(羅勉道). 〈天運〉편 제4장에 나오는 “仁義는 옛 선왕들이 잠시 묵었던 임시 처소인지라 단지 하룻밤 정도 묵을지언정 오래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仁義先王之蘧廬也 止可以一宿 而不可以久處].”라고 한 것과 유사한 사상 표현이다.
○ 調而應之德也(조이응지덕야) 偶而應之道也(우이응지도야) : 함께 화합하면서 대하는 것은 덕이고 만나서 호응하는 것은 도임. 調(조)와 偶(우)는 모두 화합을 뜻한다. 郭象은 “화합을 말함이다[和合之謂也].”라고 풀이했다. 之는 人倫을 가리킨다(羅勉道, 曹礎基).
○ 帝之所興(제지소흥) 王之所起也(왕지소기야) : 제(帝)가 흥성하고 왕(王)이 일어나는 바임. 곧 도와 덕은 제왕이 흥기하는 근거라는 뜻. 〈人間世〉편 제1장의 “우(禹)임금과 순(舜)임금이 지켰던 방법이고 복희씨(伏戲氏)와 궤거씨(几蘧氏)가 죽을 때까지 실천했던 일인데 하물며 이들만 못한 보통 사람이겠는가[禹舜之所紐也 伏戲几蘧之所行終 而況散焉者乎].”라고 한 부분과 유사한 사상 표현이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사는 것은 마치 빠른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지라 순식간에 지나갈 뿐입니다. 줄줄이 쑥쑥 자라나서 생성되지 않음이 없으며 스르르 흘러가서 죽음으로 들어가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미 변화해서 태어나고 또 변화해서 죽게 되면 태어난 사물은 〈같은 무리가 죽으면〉 슬퍼하고 사람의 무리는 〈같은 사람이 죽으면〉 비통해 합니다. 사실은 하늘의 활 통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이며 하늘의 칼집에 매여 있다가 떨어진 것과 같아서 이리저리 흩날리고 이리저리 굴러서 혼백이 막 돌아가게 되면 마침내 몸이 함께 따르게 되니 바로 크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나타나고 나타난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같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막 道에 도달하려는 사람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중인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도에 도달하려는 지인은 말을 하지 않으니 말하면 〈道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道가〉 분명하게 보이는 자는 〈道를〉 만나지 못할 것이니 말 잘하는 것이 침묵만 못합니다. 도는 들을 수 없으니 듣는 것이 귀를 막느니만 못하니 이것을 대득(大得)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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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若白駒之過郤(약백구지과극) 忽然而已(홀연이이) : 마치 빠른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지라 순식간에 지나갈 뿐임. 陸德明을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白駒를 ‘햇빛[日]’이라고 했지만, 成玄英이 “白駒(백구)는 준마이다. 또한 햇빛을 말한다[白駒 駿馬也 亦言日也].”라고 풀이한 것처럼 빨리 지나감이 마치 준마와 햇빛과 같다는 뜻을 포함하는 重義的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郤(극)은 틈. 隙(극)과 같다. 忽然(홀연)은 林希逸이 “잠깐이라는 뜻이다[須臾之意].”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 注然勃然(주연발연) : 줄줄이 쑥쑥 자라남. 注然(주연)은 물을 대는 것처럼 연속되는 모양. 勃然(발연)은 흥기하는 모양. 成玄英은 “注와 勃은 生出하는 모양이다[注勃是生出之容].”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 油然漻然(유연류연) : 스르르 흘러가서 죽음으로 들어감. 만물이 변화 소멸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漻(류)는 변화하는 모양, 물 흐르는 모양. 油然(유연)과 漻然(류연)은 모두 죽음으로 흘러가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成玄英은 “油然과 漻然은 죽음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油漻 是入死之狀].”라고 풀이했다. 한편 赤塚忠은 油然을 두고 ‘油油然’과 같고 평안한 모습이라고 풀이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 已化而生(이화이생) 又化而死(우화이사) : 이미 변화해서 태어나고 또 변화해서 죽게 됨. 〈大宗師〉편 제1장에 나온 “사람의 형체와 같은 것은 千變萬化하여 처음부터 일정함이 없다[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라고 한 표현과 〈大宗師〉편 제5장에서 “변화에 순응하여 사물과 同化되어, 아직 알지 못하는 변화를 기다릴 뿐이다[若化爲物 以待其所不知之化已乎].”라고 한 표현과 유사한 맥락이다(福永光司, 池田知久).
○ 生物哀之(생물애지) 人類悲之(인류비지) : 태어난 사물은 〈같은 무리가 죽으면〉 슬퍼하고 사람의 무리는 〈같은 사람이 죽으면〉 비통해 함. 변화해 죽게 되면 다른 사물이 되는데 변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들은 그것을 슬퍼하고 그중에서도 인간들은 더욱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해서 비통해 한다는 뜻이다. 宣穎은 “죽은 존재와 상대해서 生物이라고 표현했고 다른 사물과 구별하여 人類라고 말한 것이다[對死者言曰生物 別乎物曰人類].”라고 풀이한 것이 명쾌하다.
○ 解其天弢(해기천도) 墮其天袠(袟)(타기천질) : 하늘의 활 통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이며 하늘의 칼집에 매여 있다가 떨어진 것과 같음. 弢(도)는 활 통. 袠(질)은 칼집. 사람의 죽음은 하늘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 紛乎宛乎(분호완호) : 이리저리 흩날리고 이리저리 구름. 紛(분)은 어지러이 변화하는 모양. 宛(완)은 이리저리 변화하는 모양. 羅勉道는 “활 통에 갇혀 있다 풀려나고 칼집에 매여 있다가 떨어지는 모양을 형용한 것이다[形容解弢墮袠之貌].”라고 풀이했다.
○ 魂魄將往(혼백장왕) 乃身從之(내신종지) : 혼백이 막 돌아가게 되면 마침내 몸이 함께 따르게 됨. 魂魄(혼백)은 정신(精神). 林希逸은 “魂魄은 精神이다[魂魄 精神也].”라고 풀이했다.
○ 乃大歸乎(내대귀호) : 바로 크게 돌아가는 것임. 육체만 죽거나 정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가 모두 돌아간다는 뜻. 方勇‧陸永品은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태허로 돌아감이다.”라고 풀이했다.
○ 非將至之所務也(비장지지소무야) : 막 도에 도달하려는 사람이 힘쓰는 것이 아님. 宣穎은 成玄英, 林希逸 등의 견해를 따라 “막 道에 도달하려는 사람이다[將至於道者].”라고 풀이했다.
○ 彼(피) 至則不論(지즉불론) 論則不至(논즉부지) : 저 도에 도달하려는 지인은 말을 하지 않으니 말하면 〈도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임. 彼는 道에 도달하려는 사람, 곧 至人. 道는 논의될 수 없으며 논의가 가능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는 뜻(池田知久).
○ 明見無値(명견무치) 辯不若黙(변불약묵) : 분명하게 보이는 자는 〈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니 말 잘하는 것이 침묵만 못함. 明見은 분명하게 보인다는 뜻. 보이지 않는 도가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은 곧 도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値(치)는 만남. 呂惠卿, 陸長庚은 명견(明見)을 긍정적인 뜻으로 보았지만 옳지 않다. 成玄英이 “만약 분명하게 들리거나 보이면 참된 도에 부합되지 못한다[若顯明聞見 則不會眞也].”라고 풀이한 것이 옳다.
○ 道不可聞(도불가문) 聞不若塞(문불약색) : 도는 들을 수 없으니 듣는 것이 귀를 막느니만 못함. 분명하게 보이는 明見이 도와 어긋나는 것처럼 분명하게 들리는 것도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도는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 此之謂大得(차지위대득) : 이것을 대득(大得)이라 함. 成玄英은 “큰 이치를 깊이 터득함이다[深得於大理].”라고 풀이했다. 福永光司, 赤塚忠 등은 大得을 大德과 같다고 주장했는데 池田知久는 반대했지만 大得을 大德으로 보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다.
본 자료의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 ○ 노자(老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허난 성 루이 현 사람으로 주왕을 섬겼으나, 뒤에 관직을 버렸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고 이름지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고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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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道家 -> 莊子 -> 外篇 -> 知北遊 《知北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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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問於老聃曰:「今日晏閒,敢問至道。」
老聃曰:「汝齊戒,疏𤅢而心,澡雪而精神,掊擊而知!夫道,窅然難言哉!將為汝言其崖略。
夫昭昭生於冥冥,有倫生於無形,精神生於道,形本生於精,而萬物以形相生,故九竅者胎生,八竅者卵生。其來無跡,其往無崖,無門無房,四達之皇皇也。邀於此者,四肢彊,思慮恂達,耳目聰明,其用心不勞,其應物無方。天不得不高,地不得不廣,日月不得不行,萬物不得不昌,此其道與!
且夫博之不必知,辯之不必慧,聖人以斷之矣。若夫益之而不加益,損之而不加損者,聖人之所保也。淵淵乎其若海,魏魏乎其終則復始也,運量萬物而不匱,則君子之道,彼其外與!萬物皆往資焉而不匱,此其道與!
中國有人焉,非陰非陽,處於天地之閒,直且為人,將反於宗。自本觀之,生者,暗醷物也。雖有壽夭,相去幾何?須臾之說也。奚足以為堯、桀之是非?
果蓏有理,人倫雖難,所以相齒。聖人遭之而不違,過之而不守。調而應之,德也;偶而應之,道也。帝之所興,王之所起也。
人生天地之間,若白駒之過郤,忽然而已。注然勃然,莫不出焉;油然漻然,莫不入焉。已化而生,又化而死,生物哀之,人類悲之。解其天弢,墮其天𧙍,紛乎宛乎,魂魄將往,乃身從之,乃大歸乎!
不形之形,形之不形,是人之所同知也,非將至之所務也,此眾人之所同論也。彼至則不論,論則不至。明見無值,辯不若默。道不可聞,聞不若塞。此之謂大得。」
공자(孔子)가 노담(老聃)에게 물었다. “오늘은 조금 한가하신 듯하여 감히 지도(至道)에 대해서 여쭙습니다.”
노담(老聃)이 대답했다. “당신은 재계(齋戒)해서 당신의 마음을 소통시키고 당신의 정신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당신의 지혜를 밀쳐 버리도록 하십시오! 도(道)는 아득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장차 당신을 위해 그 언저리의 대략을 말해 보겠습니다.
무릇 밝은 것은 어두운 것에서 생기고 모양이 있는 것은 모양이 없는 것에서 생기고 정신은 도에서 생기고 모습은 본래 정기(精氣)에서 생깁니다. 만물은 모양을 갖추고 생성하니 무릇 구멍이 아홉 개인 것들은 태(胎)에서 생겨나고 여덟 개인 것들은 알에서 생겨납니다. 올 때에는 자취가 없고 갈 때에는 끄트머리가 없으며 문도 없고 방도 없어서 사방으로 탁 트여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따르는 자는 사지가 강하고 생각이 순조롭게 이해되고 이목(耳目)이 총명해지고 마음 씀씀이가 수고롭지 아니하며 사물에 대응함에 일정함이 없습니다. 하늘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높아질 수 없고 땅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넓어질 수 없으며 해와 달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운행되지 못하며 만물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창성(昌盛)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도(道)입니다!
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도를 알 수는 없으며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반드시 도를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그런 것들을 이미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를테면 보태도 보태지지 아니하며 덜어내도 덜어지지 않는 것은 성인이 보존하는 것이니 깊고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고, 높고 높아서 끝나면 다시 시작합니다. 만물을 운행(運行)하고 포용(包容)하여 버리지 아니하니 군자의 도는 그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물이 그에게 가서 의지하지만 부족해지지 아니하니 이것이 진정한 도가 아니겠습니까!
중국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음(陰)도 아니고 양(陽)도 아닙니다. 천지 사이에 머물러서 단지 잠시 사람이 되었을지언정 장차 사물의 근본으로 돌아갑니다. 근본인 대도(大道)를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삶이란 氣가 잠깐 모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있으나 서로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잠깐 사이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요(堯)임금과 걸왕(桀王)의 시비를 따지기에 충분하겠습니까?
나무의 과실과 풀에서 자라는 열매는 생장하는 이치가 있으며 사람의 윤리를 가지런히 다스리기가 비록 어렵다지만 이빨이 서로 배열되어 있는 것처럼 나란합니다. 성인은 그런 것을 만나면 어기지도 아니하지만, 지나갈 뿐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화합하면서 대하는 것은 德이고 만나서 호응하는 것은 道이니 도와 덕은 제왕(帝王)이 흥기(興起)하는 근거입니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사는 것은 마치 빠른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지라 순식간에 지나갈 뿐입니다. 줄줄이 쑥쑥 자라나서 생성되지 않음이 없으며 스르르 흘러가서 죽음으로 들어가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미 변화해서 태어나고 또 변화해서 죽게 되면 태어난 사물은 〈같은 무리가 죽으면〉 슬퍼하고 사람의 무리는 〈같은 사람이 죽으면〉 비통해 합니다. 사실은 하늘의 활 통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이며 하늘의 칼집에 매여 있다가 떨어진 것과 같아서 이리저리 흩날리고 이리저리 굴러서 혼백이 막 돌아가게 되면 마침내 몸이 함께 따르게 되니 바로 크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나타나고 나타난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같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막 道에 도달하려는 사람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중인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도에 도달하려는 지인은 말을 하지 않으니 말하면 〈道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道가〉 분명하게 보이는 자는 〈道를〉 만나지 못할 것이니 말 잘하는 것이 침묵만 못합니다. 도는 들을 수 없으니 듣는 것이 귀를 막느니만 못하니 이것을 대득(大得)이라 합니다.” [출처] 05[장자(외편)] 第22篇 知北遊(지북유) : 05.지극한 도는 만물과 자연변화의 근본이다(05/12)|작성자 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