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220
古羅村이라 불렸던 충절의 마을
무안읍 고절1리 본고절 마을
高節里는 무안읍소재지에 북쪽으로 3㎞ 떨어져 있으며 보평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高節里’이란 높은 절개를 지닌 마을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하나는 상고절 마을의 입향조인 무안 박씨 朴益卿의 충절에 관련된 유래이고, 다른 하나는 본고절 마을의 입향성씨인 여산 송씨의 열부에 관련된 유래다. 고절리는 백제시대에는 물아혜현의 치소가 고려시대에는 무안현의 읍치가 있었던 자리이다. 또한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는 이 지방 선비들이 호국정신을 보여준 곳이기도 하다. 본래 무안군 외읍(무안)면의 지역으로서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상고절리, 오리정리, 병암리, 평촌리, 유동을 병합하여 고절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본고절 상고절/평촌 오리정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나라에서 지명을 하사 받은 충절의 마을
본고절은 고절1리에 속한 마을로 古羅村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주변에서도 고려물 고려말 등으로 불려 와 고려시대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유재란 당시 이 마을 출신 송씨 부인의 절개와 지조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와 함께 마을 이름도 내려 줘 ‘高節’이라 하였다.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에는 고절리로만 불렸으나 1912년의 자료에는 고절리와 상고절로 분리되었고 다시 상고절 하고절로 나뉘였다가 현재는 하고절을 본고절로 고쳐 본고절 상고절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여산 송씨 宋千鍾(1519-1584. 자-인유, 호-절암)이다. 그는 전라북도 고부군 향제에서 살았으나 정미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자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화를 피해 1547년 이 마을에 들어와 은둔하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참고로 이웃 마을인 상고절은 1400년대 중반에 무안박씨 박익경에 의해서 터가 잡혀졌다. 공의 부친인 송당에게는 1남 2녀가 있었다. 그중 장남이 이 마을의 입향조이며 막내 딸이 무안박씨 박 제에게 출가했다. 또한 입향조의 아들인 송 박(호-愛松) 송 욱(호-愛筠) 등 두 형제는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무안의 여산송씨 문중은 호국정신 뿐 아니라 열부행의 표상이었다. 적과 항쟁하다 죽음은 忠이며 적에게 잡힌 치욕을 씻을 길 없어 유방을 베고 순절한 죽음은 烈이며 적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꾸짖다가 분사한 죽음은 節이며 의려를 모아 세가 궁함에 의롭게 죽은 것은 義이다. 이처럼 一門의 안에서 忠 節 義 烈이 나옴은 드물다 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이 되면 보평산은 꽃산이 되었다
예전에 이 마을은 '무안의 樂鄕은 고절이라 할 정도'로 살기 좋았다. 보평산을 주산으로 앞산인 면산을 안산으로 하고 좌청룡 우백호의 짜임새가 훌륭해 마을이 안정되고 아늑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예로부터 ‘南 林, 北 宋’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쪽에는 배뫼 임씨가 있고 북쪽에는 고절리 송씨가 班村으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각종 개발로 산림이 파헤쳐져 예전의 아늑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마을은 무안에서 최초로 국가에서 내린 마을 이름을 갖고 있다. 충절의 주인공인 여산송씨는 振威將軍 朴 悌의 부인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박제는 수백의 의병을 모아 府使인 최경회 장군의 막하로 들어가 남원과 무주 등에서 적을 소탕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곳 보평산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때 부인 송씨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송씨 부인은 왜군에게 붙잡혀 추행을 당하자 분함을 못 이겨 자결을 하였다.
이러한 송씨 부인의 순절은 의병의 분노를 자극하였으며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왜구를 막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보평산 전투는 왜구로부터 전남지방을 방어하는 큰 격전장이 되었다. 이듬해 왜병이 물러나고 박제의 처 송씨의 절의가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는 1598년(선조31년)에 정려를 내렸다. 아울러 마을 이름도 송씨의 높은 절개를 길이 잊지 않도록 ‘高節里’라 명명하도록 한 것이다.
매년 추석 이튿날이 되면 보평산은 꽃산이 되기도 하고 만남과 이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추석이 되면 인근 마을 뿐 아니라 他郡에서 많은 아낙네들이 이날을 전후하여 음식을 가지고 이 산에 올라와 송씨부인의 높은 충절과 굳은 절개를 가리며 놀다가곤 하였다고 한다. 또한 각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헤어지는 만남의 장소가 되어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평산에 오르는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마치 산에 피어있는 꽃처럼 보인다 하여 꽃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독은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크기가 비록 1미터 안팎에 지나지 않으나 마을의 우환을 막고 주민의 안녕을 기원할 뿐 아니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냈던 당산독이다. 그런데 이 독이 바로 서지 않고 비스듬히 세워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복룡리의 용산 마을은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마을인데 그 마을에서 이 당산독을 보면 마치 성기가 우뚝 서있는 남근석으로 보인다. 해서 용산 마을 여자들이 이 독을 보고 바람난다 하여 그 마을 주민들이 몰래 밀어버리기 때문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 독을 중심으로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이 마을에는 조선조 영조 임금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선비인 여은군 송상후(1700-1776. 자-기중, 호-죽헌)가 있었다. 여은군은 정숙하고 후덕하며 마음이 너그러워 종친은 물론 향당의 추앙을 받았던 선비이다. 제자 중 셋이나 문과에 급제하자 영조가 직접 그를 불러 1768년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1770년에는 여은군에 봉하였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임진왜란 때 군병 만 명이 물을 먹었다는 만수샘이 마을 서쪽에 있으며 그 주변에 서구래라는 들이 있다. 마을 앞에는 궁개들이 있다. 마을에서 용월리 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앞골바지라 하며 그 외에 큰샘 도치밧등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마을에는 1590년 경에 지은 여산송씨종가가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입향조의 재실인 영언재가 무안읍 용월리 약곡 마을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파평윤씨의 효열을 기린 효열각과 입향조인 어모장군 송천종의 유허비가 있으며 효자인 송차섭의 기행비가 들어있는 효자각이 있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