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문 (大西門)
의상봉(義相峯) 서북쪽 해발 150m 구릉지에 위치한 성문
북한산성 4방위 중 서쪽성문이자 북한산성의 정문(正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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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쪽에서 바라본 대서문(大西門) 뒷 모습
대서문 육축(陸築) 윗부분에 배수를 위한 시설물로
빗물이 나가도록 성벽에 돌출 설치한 석루조(石漏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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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의상봉(義相峯)과 용출봉(龍出峯) 사이
인근에 국녕사(國寧寺)가 있어 국녕문(國寧門)
또는 국령사 암문(國靈寺暗門)으로도 불리웠다.
암문(暗門)이란 노출을 꺼리는 출입통로
출입문 위에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고
눈에 띄지않게 출입할 수 있게 만든 문
성안에 필요한 병기 및 식량등을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극비리에 구원을 요청
적을 역습할 때 사용.,북한산성 암문(暗門) 7개.
성 밖에서 바라본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성 안쪽에서 바라본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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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나월봉(蘿月峯)과 증취봉(甑炊峯) 사이
북한산성 7개 암문(暗門)중 가장 큰 규모
최근까지 성문 우측에 '소남문'이라는 현판
처음에는 소남문(小南門)으로 불리웠던 듯
근처에 원각사가 있어 원각사암문(圓覺寺暗門)
그리고 부왕동(扶旺洞)이란 이름은 성안 동쪽에 있는
부왕사(扶旺寺)로 내려 가는 계곡 일대를 일컫던 이름
부왕동 암문은 7암문 중 유일하게 홍예문 형태이다.
홍예(虹霓)란 성문 윗머리가 반원형(半圓形) 구조물
그러한 구조로 만든 문을 홍예문(虹霓門)이라고 한다.
성 밖에서 바라본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앞.
홍예 형태로 이룬 성돌 위쪽에 우에서 좌로 '小南門'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
문수봉(文殊峯)과 나한봉(羅漢峯) 사이
의상능선과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
성 밖에서 바라본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 .
청수동암문은 1999년 해체 된 후 보수되었다.
성 안쪽에서 본., 뒷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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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문(大南門)
북한산성 4개 방위중 남쪽을 대표하는 성문
처음 축조 당시에는 문수봉암문(文殊峯暗門)
해발 715m 의 보현봉(普賢峯)과
해발 727m 의 문수봉(文殊峯)이라는
두 거봉을 잇는 능선 안부(鞍部)에 위치
성 밖에서 본 대남문(大南門)의 앞 모습
1991년 첫 번째로 문루(門樓) 성문을 복원
성 안쪽에서 본 대남문(大南門)., 뒷 모습
구기동에서 올라 오는 등산로에서 바라본 앞 모습.
성 안쪽, 대남문 뒷 편 공터에는
두 개의 문루주춧돌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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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문(大城門)
보현봉(普賢峯) 동북쪽 능선에 성문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
원래 소동문(小東門)이라는 암문(暗門)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 행궁(行宮)이 있는 곳에서
이곳을 통과 형제봉과 보토현(輔土峴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하여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편리한 코스에 위치한다.
하여, 임금이 이문을 출입하게 됨으로써
이름도 대성문(大城門)으로 바꾼듯 하다.
※ 행궁(行宮)이란 궁밖 왕이 머물던 별궁(別宮)
북한산성 내 행궁은 조선 숙종 37년(1711년) 설립.
성 밖, 정면에서 바라본 대성문(大城門)의 앞 모습.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의 친필을 집자해서 걸었다.
성 안쪽에서 바라본 대성문(大城門)의 뒷 모습.
대성문은 높이 13척(4m)에 폭 14척(4.5m)으로
대남문(11척/11척)과 대서문(11척/13척)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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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보국문(輔國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의 해발 567m에 위치
그 아래에 보국사가 있었ㅎ기에 보국문(輔國門).
성 밖에서 바라본 보국문(輔國門)의 앞 모습.
보국문은 1993년 완전 해체된 후 복원 되었다
성 안쪽에서 바라본 보국문(輔國門)의 뒷 모습.
성문 안쪽 성돌에는 북한산성을 축조 할 당시인
1711년 공사책임자, 기간, 구간을 표시.,새겨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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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대동문(大東門)
북한산성 4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
우이동 진달래능선이 끝나는 해발 540m에 위치
1993년에 문루(門樓)를 갖추는 등 화려하게 복원.
성 밖에서 바라본 대동문(大東門)의 앞 모습.
대성문과 마찬가지로 1993년 복원 당시 현판 글씨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의 어필을 집자해서 걸었다.
성 안쪽에서 바라본 대동문(大東門)의 뒷 모습.
보국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안쪽 성돌에는 1711년
공사 책임기관과 구간을 기록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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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용암문(龍岩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용암봉암문(龍巖峰暗門)
무인대피소인 지금의 북한산장 부근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 과거 이 일대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龍巖寺)가 부근에 있었다 하여.,용암문이라 한다.
성 밖, 정면에서 본 용암문(龍岩門)의 앞 모습.
용암문은 1998년 보수가 완료되어 복원 되었다.
성 안쪽에서 바라본 용암문(龍岩門)의 뒷 모습.
특이하게 성문 뒷편에도 현판(?)을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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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위문(衛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았다.
현재는 위문(衛門)이라 일컫고 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그렇게 불리워져 왔다.
성 밖에서 바라본 위문(衛門)의 앞 모습
성 안쪽에서 바라본 위문(衛門)의 뒷 모습.
용암문과 마찬가지로 위문 뒷편에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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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北門)
북한산성 4개 방위 중 북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
원효봉(元曉峰)과 영취봉(靈鷲峰 :염초봉의 본래 이름)
사이의 해발 430m 지점 안부(鞍部)에 위치하고 있는 성문
문루(門樓)가 폐기되어 없어진 상태.
문루(門樓)는 성문 위에 지은 다락집으로
유사시 장수의 지휘소이며 성 밖 감시 기능
성 밖, 정면에서 바라본 북문(北門)의 앞 모습
성 안쪽에서 바라본 북문(北門)의 뒷 모습
북문을 4방위를 대표하는 다른 성문들처럼
큰 대(大)자를 앞에 붙여 부르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조선 시대 특유의 관례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서울 도성(都城)도 마찬가지로
동대문·서대문·남대문이었으나 북문만은
북대문이 아니고 숙정문(肅靖門)이라 불리웠다
성문 위에서 바라본 북문(北門)의 바닥이 없는 상단부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다른 성문들 보다 더 고색창연한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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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시구문(尸柩門)
정확한 본래 이름은 서암문(西暗門)으로
대서문 북쪽, 수문(水門)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성안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에게 시구문(尸柩門)이라고 불리웠고
원래 성문이름인 서암문(西暗門) 대신 고착화
현재도 성문에 '시구문' 현판이 걸려있다.
성 밖에서 바라본 시구문(尸柩門)의 앞 모습.
성 안쪽에서 바라본 시구문(尸柩門)의 뒷 모습입니다.
북한산성 암문중 유일하게 뒷편도 홍예(虹霓)형태 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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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문(尸柩門)과 연결된 성벽은 'ㄱ' 모양으로 돌출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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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水門)
대서문 북서쪽 근처 산성계곡에 있었던
폭 50척(15.5m)에 높이 16척(5m) 수문(水門)
1925년 8월 을축년대홍수(乙丑年大洪水)때
성돌과 장대석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유실
현재는 수구정이라는 음식점에서 보이는
시구문과 대서문으로 오르는 계곡 양옆 산비탈에
성곽 흔적만이 수문(水門)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할 뿐
※ 성곽의 배수를 위한 시설로
규모가큰 문의 형식을 수문(水門)
규모가 작은 것을 수구(水口)라 한다.
산성 바깥인 수구정 부근에서 바라본 수문지(水門地).
사진 왼쪽 산비탈에 끊겨버린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산성 안쪽인 덕암사 부근에서 바라본 수문지(水門地).
사진 속 2층 건물은 '수구정'이란 음식점으로 안내표지판
이정표조차 없는., 이곳이 옛 수문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산성계곡에 있는 수구정에서 바라본 수문지(水門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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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중성문(中城門)
원효봉(元曉峯)과 의상봉(義相峯)을 직선으로 그은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현재 산성주차장 일대에서
산성안 중심부에 위치한 중흥동 계곡을 향하여
오르는 중간 지대 길목에 위치한 성문이다.
1998년 문루를 올리고 성벽도 복원.
산성매표소쪽에서 바라본 중성문(中城門)
특이한 점은 문 이름에 가운데 중(中)자를 써 중성문(中城門)
이곳에 쌓았던 중성(重城)은 무거울 중(重)자를 쓴다는 것이다.
중(重)자는 '겹'이란 뜻도 있기 때문인데
북한산성에서 가장 수비가 취약한 부분인
대서문(大西門)방면의 수비를 보강 하기 위해
안쪽에 쌓은 내성(內城)이고., 그 성문이 중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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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수도 하남 위례성 일때 북방의 성.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이다.
11세기 초 고려가 거란 침입을 받았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이전.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와 격전이 있었고,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기 위해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쳤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 장대지·우물터·건물터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북한산성 축성은 숙종 37년(1711) 4월 3일 착수.
축성할 구간을 나누어 삼군문(三軍門)에 분담시킨후
각종 장인들과 도성의 백성들을 축성에 참여시켰다.
축성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히 진행되어
불과 6개월만인 그해 10월 19일 석성을 완성했다.
백운봉, 만경봉, 용암봉, 문수봉, 의상봉, 원효봉, 영취봉등
북한산의 연봉을 연결하는 길이는 21리 60보에 이르렀다.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御營廳)등 삼군문에서 책임 시공.
훈련도감에서는 수문 북측에서 용암봉까지의 구간
성문은 수문, 북문, 서암문, 백운봉암문을 만들었다.
금위영에서는 용암봉 남측에서 보현봉까지 구간
용암봉암문, 소동문, 동암문, 대동문을 만들었다.
어영청에서는 보현봉에서 수문까지 축성을 맡았는데
대서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소남문
숙종 37년 축성 당시
13개 성문을 만들었다
수문(水門),
서암문(西暗門),
북문(北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용암봉 암문(龍巖峰暗門),
소동문(小東門),
동암문(東暗門),
대동문(大東門),
소남문(小南門),
청수동 암문(靑水洞暗門),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대서문(大西門) 등
그후 숙종 40년 취약지점에 대한 보완공사때 중성(重城)을 쌓으면서
중성문(中城門), 시구문 (尸柩門), 수문(水門)을 만들어 모두 16 성문.
성문은 홍예 형식에 육축을 갖춘 채 문루가 있는 큰 문과
문루 없이 성벽 높이에 맞추어 작게 만든 암문으로 구분.
대서문, 북문, 대동문, 대성문, 대남문, 중성문은 큰 성문.
현재 대서문, 북문, 중성문 정도만
본래의 이름대로 불리워지고 있다.
반면에
서암문은 시구문으로,
백운봉암문은 위문으로,
용암봉암문은 용암문으로,
소동문은 대동문으로,
동암문은 보국문으로,
대동문은 대성문으로,
소남문은 대남문으로,
부왕동암문은 원각문으로,
가사당암문은 국녕문으로
잘못 불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서암문이 시구문으로 불리는 이유는
성내에서 발생한 시신을 내보내던 문
나머지 보국문, 원각문, 국녕문이라는 별칭은
가까이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찰이 있었기 때문
산성매표소
대서문
중성문
국녕사
가사당암문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
대남문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동장대
용암문
위문
북문
원효봉
시구문
수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