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람들이 한창 싱싱한 청어를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살아 있는 청어는 굉장히 비싼 값에 거래됐습니다. 고기잡이 선원들은 청어를 산 채로 육지까지 가져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청어는 워낙 성질이 급해서 육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한 지혜로운 선원이 청어 수족관 안에 상어를 한두 마리 넣어보았습니다. 순간 상어가 청어 몇 마리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청어가 상어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는 동안 배는 육지에 도착했고 청어는 모두 살아 있었습니다. 지금도 청어잡이 어부들은 이 방법을 통해 청어를 산 채로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상어와 같은 고난이 모순처럼 다가와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도 고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웃고 승리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시집갈때 진주를 주는 이유
서양에서는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풍습이 있다.이 때의 진주를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라고 부른다. 아마도 딸이 시집살이하다가 속상해할 때 조개가 살속에 모래알이 박힌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잘 참고 견뎌내라는 뜻일 것이다. 진주는 조개 안에서 만들어진다.어쩌다 조개의 몸속에 들어온 모래알은 조갯살 속에 박혀 고통을 준다.그때 조개는 'nacre(진주층)’이라는 생명의 즙을 짜내어 모래알 주변을 덮어 싸고 또 덮어 싼다.그렇게 몇달 몇년이 흐르면 바로 진주가 되는 것이다.살아가다보면 우리의 삶에도 이런저런 모래알이 들어올 때가 있다.그것을 우리는 시련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임할 때 ‘내가 지금 값진 진주를 품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자.내가 당하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 내가 품고 있는 진주도 더 크고 더 값지겠구나!’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오늘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내일이면 아름다운 진주로 바뀔 것이다
진주가 겪는 아픔
아름다운 귀금속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진주는 땅 속에서 파 내는 것이 아니라 조개 껍질 속에서 자라나는 보석이다. 조개가 진주를 만드는 것은 여인들의 앞가슴을 치장해 주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다. 모래알같은 딱딱하고 조그마한 이물질이 조개 속에 들어 가게 되면 조개는 안달을 하며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 먹는대로 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조개는 자신의 몸 속에서 나오는 유체(流體)로 그 이물질을 감싸기 시작한다. 한 겹을 감싸고 나서 그것이 굳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또 한 겹을 덮는다. 이렇게 해 가면서 수많은 세월이 흐른다. 그 아픔의 유체덩어리가 아름다운 진주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나 앞으로 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진주의 기원과 그 발전 과정이 주는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고통이 주는 축복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참고 견디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장 좋은 일들은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 있다는걸 알기 바란다.."
결혼선물
진주는 조개의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돌멩이거든요. 보잘 것 없는 돌멩이가 조개 속에서 오랜 시간,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져서 만들어 진거든요. 진주의 의미가 그렇대요. 함께 살면서 고생에 온갖 시련에 고난을 받게 되겠지만, 진주같이더 아름다운 삶이 되라고..부부가 함께 겪는 고난이나 아픔들을 이겨내서 진주같이 예쁜 삶을 만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댑니다^^ 그래서 결혼선물로 진주목걸이나 귀걸이를 많이 하는데요..^^;;
신지애
“상금 10억 돌파, kpga 9승, 골프계의 지존”, 19세 나이어린 신지애 골프선수앞에 붙인 다양한 수식어이다. 이는 막연한 수식어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다. 10억, 9승 이란 숫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155cm 밖에 안되는 어린 소녀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인가? 타고난 소질 때문인가? 신지애 선수에게는 골프에 대한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 뒤에는 아픈 절망과 고난의 과정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시절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로인해 동생들과 함께 15만원 짜리 사글세를 해야 했다. 절망적인 환경에서 그녀는 더욱더 골프에 매진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영정에 우승컵을 바치겠다는 신념으로 골프공에 중했다. 그녀의 승리는 이처럼 아픔을 딛고 일궈낸 승리이기 때문에 더욱더 값지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진주도 상처입은 개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속으로 들어온 이물질을 내밀기 위해서 조개는 물을 내뿜는다. 그러나 날카로운 이물질이 들어오면 물을 내뿜어서 밀어낼 수 없게 된다. 진주는 어쩔수 없이 날카로운 이물질과 함께 생존하기 위해서 진주액을 내뿜는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상처를 입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아름다운 진주가 되는 것이다. 고난과 상처가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낸 것처럼, 신지애 선수의 승리도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낸 진주와 같아 보인다. 올해도 다 지나가지만 취업 결정이 된 학생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대부분 20~30번씩이나 구직활동을 했는데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바늘귀 같은 취업 현실앞에 서있는 취업준비생들의 고통소리가 크게 느껴진다. 이렇게 어려울때 10억을 거머쥔 신지애를 볼것이 아니라, 어린나이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골프공을 친 신지애를 바라봐야 한다.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 진주를 바라보기보다, 조개속살로 들어온 날카로운 이물질과 함께 하기위해 상처받는 조개를 생각해 봐야 한다. 고 함석헌옹도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고 했다. 위대한 인생은 고난의 과정을 통해 잉태된 것이다. 좁은 취업문에 수없이 걸려 넘어지는 고난이 취업준비생들의 인생을 진주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를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것을 본다. 고난을 즐기고 그 고난을 통해서 귀한 인생을 만들길 기대한다.
엘리자베스 머레이
엘리자베스 머레이는 마약중독자인 부모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딸의 외투를 팔아 마약을 살 정도였다. 머레이는 9세 때부터 주유소에서 일해 부모님을 부양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곧 세상을 떠났다. 하루아침에 집도 없는 알거지가 된 소녀는 결심했다. ‘부모님 같은 비극적인 인생을 살지 않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녀는 돈 없이도 다닐 수 있는 뉴욕의 특수공립학교에 입학,4년 과정을 2년에 마치고 하버드대에 합격했다. 그녀의 불굴의 인생이 뉴욕타임스에 알려지면서 감동받은 독자들로부터 20만여 달러의 기부금이 모아졌다. 또 미국의 여러 방송이 인간 승리의 삶을 방영해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 반드시 기회가 온다. 절망은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인내는 연단을,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 최낙중목사(관악교회)
실패를 딛고 일어선 위대하신 분들을 소개해드릴게요~
최고의 인기 영화배우, 톰 크루즈 원래는 레슬링 선수였으나 갑작스런 부상으로 연기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나무랄데 없는 외모와 연기력으로 최고의 스타가 되었지만 그가 첫번째 오디션에서 들은 평가는 '당신은 배우가 되기에는 너무 못 생겼군요.'라는 말이었습니다.
팝의 여왕, 마돈나 '가수로서의 생명은 길어야 5년이다.'란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 그는 고교시절에 농구감독으로부터 '다른 선수들의 짐을 들면 훈련에 침가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올림픽 마라톤을 2연패한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 그는 1969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좌절을 딛고 일어나 1970년 장애인 올림픽 양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싸워 이긴 그는 영원한 승리자입니다. '나는 남과 경쟁해 이기는 것보다 나의 고통과 싸워 이기고자 한다.'
국민타자 홈런왕, 이승엽 1993년 청룡기 야구대회에서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로야구에도 투수로 입단했는데 그가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한 까닭은 중학교 시절부터 계속된 팔꿈치 부상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인생에서 야구는 끝이난 듯 보였지만 굳은 의지와 지독한 연습 끝에 타자로 전향에 성공하여 최고의 타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 그를 지킨 좌우명은 '혼을 담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바로 끝없는 노력이었습니다.
연필 한 자루 살 돈이 없는 가난한 대만 청년, 홍려 남이 쓰다 버린 몽당연필을 주워 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나마도 자주 부러져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연필을 오래 사용하려고 궁리하다가 새로운 필기구를 고안해 내는데 그렇게 만든 문구의 특허권을 한 문구회사에 넘기고 2억원을 받아 가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필기구가 바로 샤프펜슬! 자신의 환경을 비관하지 않고 노력했던 청년의 의지야 말로 가난을 벗게해준 계기가 된 것입니다.
진공 청소기의 발명가, 제임스 스팽글러 1907년 미국,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는 무능한 발명가였던 제임스 스팽글러. 가난에 지친 아내는 결국 그를 떠나고 그는 청소부로 취직했지만 천식때문에 해고 당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선풍기 뒤에 붙어있는 종이조각을 발견하고 진공청소기를 발명해냅니다. 절망과 고난의 순간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이 가져온 성공인 것입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1746~1827) 28세에 빈민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벌이지만 동료들의 배신과 가난으로 학교운영에 실패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전인교육 사상을 남긴 위대한 교육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 공상을 좋아하던 무일푼의 이혼녀, 출판사마다 거절 당했던 소설가였던 그녀는 '해리포터'로 인해 전 세계 2억 7천만 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한국인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 박사 1958년 서울, 축구 시합 중 공에 눈을 맞은 소년은 이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됩니다. 이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게되고 형제들은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 망연자실하던 소년은 그 시련을 딛고 점자를 익히고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장애를 딛고 대학 입학은 물론 1972년 연세대 문과대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화재를 모았습니다. 이 분이 바로 최초의 한국인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는 1979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로 재직했고, 그의 이야기는 미국 타임지에도 실릴 만큼 대단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2001년 미 백악관 국가 장애인 위원회 차관보에 임명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닥친 시련을 꿋꿋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천대와 멸시 속에서, 편견과 차별 속에서 저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의 꿈을 가졌습니다.' 절망과 시련을 물리치는 꿈이야 말로 시력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인 것입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폴 투르니에가 저술한 "장조적 고통"이라는 책에서 그는 많은 환자들, 특별히 정신과환자들을 상담하고 한평생을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이렇다고 말합니다.
"현대환자들의 중증은 바로 자기상실감이다. 용기부족이다. 어느 사이에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명예를 잃어버린 게 아니고 건강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 상실감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자기를 잃어버렸느냐~~ 그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란 누구나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창조성을 알게 하고 나의 나됨을 되찾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가난과 고난을 통해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찾게됩니다. 나의 당한 고통, 이것이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 바로 자기를 찾는 길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단순하게 만들고 단순하게 될 때 거기서 순수한 기쁨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 창조적 기쁨을 얻는 것, 이것이자기존재의 보람이 아닐까요?
고난을 축복으로
한 작가가 있었다.그는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전우들과 함께 투옥됐다.그런데 작가의 얼굴은 기쁨의 미소로 가득했다.전우들이 의아하게 여겨 작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감옥에 갇힌 것이 뭐가 그리 즐거운가” 작가는 대답했다. “이제 나는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됐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작가는 매일 작품을 써서 감옥의 동료들에게 읽어주었다. 전우들은 그의 작품을 들으며 매우 유쾌한 감옥생활을 했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세월을 보냈다. 작가가 형량을 마치고 출감했을 때는 이미 한권의 책을 만들기에 충분한 분량이었다. 결국 이 원고는 책으로 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의 이름은 ‘돈키호테’.이 작가의 이름은 세르반테스다. 고난은 축복을 향한 터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기도 전에 절망한다.
아일랜드의 감자 대흉작
1848년 아일랜드에서는 감자잎마름병으로 대흉작이 일어났습니다. 감자가 주식인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것 이었죠. 100만명이 굶어 죽었고 100만명이 굶주림에 지쳐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미국 호주 영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떠나는 자들의 대서양을 <찢어지는 눈물의 바다>라고 묘사했죠. 케네디의 증조부인 패트릭 케네디와 증조모인 브리짓 머피도 고향 웩스포드를 떠나 보스톤으로 향했습니다. 배안에서 그들은 만나 나중에 결혼해서 고생고생 끝에 케네디家라는 위대한 가문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아일랜드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아일랜드인에게 감자는 주식인 귀리가 흉작이었을 때 목숨을 연명케 해준 구황식품이었다. 감자를 먹는다는 이유로 더더욱 아일랜드인을 깔보던 영국도 산업혁명 이후 감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밀농사만으로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은 감자는 밀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일 수 있었다. 조리도 값비싼 오븐 대신 냄비 하나만 있으면 됐고, 빵을 굽는 것보다 연료비를 아낄 수 있었다. 산업혁명기의 도시빈민과 소작농에게는 연료도 큰 부담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감자는 차츰 유럽인의 주식(主食)으로 떠오르게 된다. 오늘날 유럽의 경제강국으로 급부상한 아일랜드는 감자로 역경을 이겨냈지만 감자로 인해 큰 아픔을 겪기도 했다. 1845년 9월 감자마름병이 아일랜드에 상륙한 뒤 5년간 감자의 90%가 썩어나가자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굶어죽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이민을 떠난 수가 130만명에 이르렀고 그들이 미국에 건너가 또 하나의 개척사를 이룩했다. 케네디의 조상도 아일랜드 이민자였으니 감자가 없었다면 미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아일랜드의 들판엔 참으로 아픈 대기아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상으로 기록될 1845~1851년 사이의 대기아. 불과 오륙년 사이에 대략 백만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고, 백만 명 이상이 조국을 버리고 이민의 길을 떠나야 했던 미증유의 참사였다. 이 참극에는 당시 제국주의 영국의 비정한 식민지정책 역시 한몫을 톡톡히 거들었다는 점에서 또다른 분노를 안겨준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밀과 귀리를 먹고 살았던 아일랜드인들은 때마침 미국과 스페인에서 들어온 감자가 널리 퍼지면서, '아이리쉬 포테이토’라고 불릴 만큼 감자가 주식으로 등장한다. 대대로 허기져 왔던 아일랜드인들은 풍요로운 감자 농사와 때 맞추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 1800~1840년 사이에 4백만에서 8백만이라는 실로 기하급수적인 증가율을 기록한다. 이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는 거의 대부분 절대 빈곤층으로, 감자만으로 연명해야 하는 이들의 수는 1845년 무렵 전체 인구의 삼분지 일. 그런데 때마침 새로운 곰팡이병이 전국의 감자밭을 휩쓸게 되고, 이후 오륙년 동안 참담한 대흉작이 계속 이어졌다. 엄청난 숫자가 굶주림 끝에 죽어가고, 죽음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 대기아의 재앙과 함께 티푸스, 이질, 괴혈병 등이 창궐하여 죽음의 그림자는 전 국토를 휩쓸고 있었지만, 정작 식민통치국인 영국은 경비 부담을 거부, 문제 해결은커녕 담 너머 남일처럼 손을 놓고 방관하고만 있었다. 지구상 가장 부강한 나라임에도 오직 자국의 경제적 잇속만을 위해 속국인 아일랜드인들을 그대로 굶어죽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차라리 특정 종족을 멸절시키려는 정책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이 엄청난 죄악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치욕스런 기록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밀 등의 곡식은 대단한 풍작을 기록했으나 너무 비싼 까닭에 빈민층으로서는 그림의 떡이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듯 수백 만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에도 아일랜드 항구에선 곡물이 계속 수출되고 있었다니, 영국의 비인도적인 작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아일랜드 농지를 거의 대부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인 지주들은 그저 본국의 안락한 집안에 누워서 소작인들이 당하고 있는 참상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 대기아의 결과, 사망자는 백만 명 이상이었고, 이로부터 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 이민들의 승리이자 본국과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아일랜드인들에게 굉장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클린턴 역시 바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이다. 굶주림을 피해 조국을 버려야 했던 미국 아일랜드 이민들의 애국심은 대단했다. 그 말 못할 어려움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공급하는 등 단합된 노력으로 계속적인 지원을 벌여, 마침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한 것도 그들이었다. 17세기 중엽 크롬웰(1599-1658)에 의한 아일랜드 정복 이후 아일랜드의 농민 대부분이 잉글랜드 지주의 지배 하에 놓이면서 연평균 약 100만 톤의 밀을 해외로 빠졌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일랜드은 자신들이 생산한 밀을 먹을 수가 없어서 밭 옆에 심은 감자에 의존 1845년 감자가 말라 버리는 질병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작물이 질병에 걸리자 1-2주 만에 광활한 감자밭이 전멸되었다. 1845년 이 후 수년간 약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기아와 발진티푸스 등으로 사망했고, 1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고향을 버리고 영국이나 미국 등으로 이주했다.난민이 된 아일랜드은 싼 노동력으로 영국의 산업혁명을 진행시켰고, 혹은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일가의 조상도 이 시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감자 농민의 대거 미국 이주가 되풀이 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까지 무려 5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일랜드에서 국외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