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표충원(甲寺 表忠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갑사 대웅전(보물 제2120호)
▲'계룡갑사' 편액
갑사 중심 영역의 북쪽 계곡을 건넌 곳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표충원은 조선 1738년(영조 14)에 왕명으로 지은 사당으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승병(僧兵)을 조직하여 활약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해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다.
▲표충원
표충원은 갑사 경내에서 약간 떨어진 좌측 언덕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이익공 맞배집이며 24m의 방형으로 경역이 되어 있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60㎝ 높이로 축조하였으며 나머지 3면은 외벌대로 조성하였다. 주초(柱礎)는 자연석 덤벙주초를 사용하여 원주(圓柱)를 올렸는데, 정면 3칸에는 모두 쌍여닫이 띠살문이 설치되어 있다. 포(包)는 무출목(無出目) 이익공으로 양세형을 이루며 익공 뿌리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처마는 겹처마에 부연(附椽)이 있고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용마루는 착고와 부고 위에 5단 쌓기를 하고 내림마루는 착고 위 3단 쌓기로 조성하였다.
▲표충원
표충원 사당은 막돌을 이용해 쌓은 나지막한 기단 위에 세워졌다. 도리통 3간, 양통 1간반의 장방형 평면을 지닌 작은 건물로 정면에만 모든 간에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을 뿐 측면과 후면에 벽을 들여 감실형으로 구성했다. 내부는 통간으로 후면 벽과 양 측면 1간의 벽에 의지해 ?형으로 불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후면 벽에는 각 간에 하나 씩 휴정, 유정, 기허대사의 영정을 모셨으며, 동쪽 벽에는 현은 대화상을 비롯한 11분 승려의 영정을, 서쪽 벽에는 허암당 대선사를 비롯한 네 분 스님의 영정을 모셨다.
▲표충원
초석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원주이고, 기둥 상부에는 이익공식 짜임으로 보를 받도록 하였으며, 주간에는 원형의 화반을 두었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박공부에는 풍판을 달았다. 익공은 초익공과 이익공 모두 앙서형으로 쇠서 위에 연화를 초각했는데, 건물의 규모에 비해 쇠서가 커 과장된 모습을 지닌다. 행공은 교두형으로 직절한 단부 아래를 둥글게 접었다. 또한 보머리에는 봉취형을 조각해 끼웠다. 가구는 무고주 5량으로, 보는 휜 부재를 적절히 사용하였다. 바닥에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휴정과 유정, 기허 세 분의 영정을 모신 후면에는 우물천장 형식으로 닫집을 꾸몄다.
원래 표충원은 갑사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845년(헌종 11) 당시 충청도 관찰사 강시영(姜時永)이 관비(官費)를 모아 옮겨지었다. 이때의 기록이 사당 안에 도광 25년(헌종 11년, 1845년) 을사 8월에 경월 쾌수(快守)가 쓴<公州甲寺騎虛大師書院移建文>이라는 제목의 현판으로 남아있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강시영이 표충원을 옮겨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그 아래는 어제(御製) 현판이 걸려 있다. 현재의 건물은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말 이후의 것으로 보이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894년(고종 31)에 복원하여 갑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표충원은 사당을 중심으로 앞쪽에 넓은 마당이 있으며, 주변을 담장으로 에워쌌다. 사당과 중심축을 맞추어 담장 정면에는 일각문을 두었고, 앞마당의 동측에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 선생이 지은 글로 1973년에 세운 승병장영규대사기적비(義僧將靈圭大師紀蹟碑)가 있다.
▲영규대사
영규대사는 영규는 공주 계룡면 출신으로,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를 하였고, 뒤에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수백 명을 모아 왜적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을 공격하여 수복하고, 1592년(선조 25) 8월 금산성 전투에서 중봉 조헌과 함께 왜적에 대항하다 전사하였다. 묘도 계룡면에 소재하며, 금산 종용사에 영정을 배향한다. 갑사 탐방소 입구근처에 영규대사 토굴지 표지석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서쪽 벽에는 허암당 대선사를 비롯한 네 분 스님의 영정
▲동쪽 벽에는 현은 대화상을 비롯한 11분 승려의 영정
▲어제와 갑사기허대사서원이건비 현판
▲어제(御製)
▲공주갑사기허대사서원이건비(公州甲寺騎虛大師書院移建文)
▲의승장기허대사기적비(義僧將騎虛大師記蹟碑)
▲앞면과 뒷면
표충원 가는 길에 있는
일본식 석등에 통탄한다
일주문을 지나 만나는 다리 입구에서 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맞은편에 보이는 길 양쪽에 서 있는 석등이 일본식 석등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영규대와 서산대사,사명대사를 모시는 표충원이 있는 이곳에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말이다. 스님들이 통탄하고 있지 싶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양쪽에 크게 서있는 일본식 석등
▲일본식 석등
▲다리를 지나 가다가 우측으로 대적전, 철당간 가는 길에 희미하게 쓰여진 영규대사 토굴 표지비
갑사 주차장 입구에 있는 1,600년 된
느티나무 괴목대신(槐木大神)
이 곳도 임진왜란 때 기허당 영규대사 이야기 함께 하고 있다.
아래 괴목대신 유래 참조.
▲괴목대신의 유래(槐木大神의 由來)
괴목대신은 갑사 창건이래 지금부터 천여년 전부터 갑사스님들께서 음력 정월 초삼일에 괴목제(槐木祭)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유래는 갑사 대웅전에 장등을 하였는데 음력 섣달 어느날부터 새벽 세시 예불시간에는 불이 꺼져 있어 사 미승이 어상히 여겨 지키고 있는데 자시경에 구척거인이 대웅전에 들어가서 오등(五燈) 속의 심지를 들어내고 등유를 발에 바르고 절 아래로 내려가기에 사미승이 그 뒤를 미행해보니 이 괴목 앞에 와서 사라졌다. 사 미승은 절로 돌아와 이 사실을 스님께 고하니 큰 스님이 같이 가보자고 하여 이 자리에 와보니 이 괴목 뿌리가 불에 타고 있어 그 불을 끄고 그 다음 해 정월 초 삼일에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중봉선생과 박영규 대사가 금산벌 작전 계획을 이 나무 아래에서 모의 출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주 영규대사비[영규대사지려(靈圭大師之閭)]
시도문화재자료 제56호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아리288-14 계룡면행정복지센터입구
영규대사의 영정각, 순의실적비, 묘소
충남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5번지
▲영규대사 영정각(靈圭大師 影幀閣)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義僧將 騎虛堂 靈圭大師 殉義實蹟碑)
▲묘소
보석사 입구의 의병승장비(義僧將碑)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702번지
▲의병승장비(義僧將碑)
[출처] 공주 갑사를 가면 표충원을 찾아보라|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