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변영로∣ 범우사∣ 2015
천하가 봄이다. 대취한 봄이 대지의 구석구석까지 붉게 번져 있다. 꽃과 나무조차 홍안이 되어 흔드니 가만히 있어도 봄바람에 취기가 인다. 호음가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는 내 주력이지만 꽃그늘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마음만은 여느 주객酒客 못지않다.
예로부터 술과 문학은 하나의 길을 걸어왔다. 옛 문인들은 음주기飮酒記 몇 편쯤 거뜬히 기록하였고 포복절도할 주행의 에피소드가 한두 건 있어야만 문사의 반열에서도 더욱 돋보였다. 백주회白酒會를 만들어 하룻저녁에 백 가지 술을 즐겼던 양주동이 그러하였고 스스로 정한 주도 18단계로 주호酒豪의 단을 측정했던 조지훈, 향수병을 양주병으로 잘못 아는 통에 향수를 통째 들이킨 천상병 시인의 전설도 전해진다.
그러나 수주 변영로만큼 유쾌한 문인 호음가는 드물지 싶다. 선생은 음주 해프닝을 해학과 풍자와 기지가 담긴 필력으로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수필집에 담아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명정酩酊’이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곤드레만드레 취한 상태를 뜻한다. 천하의 술꾼인 수주의 주량과 주도는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한 길이 넘는 술독에 기어 올라가 도둑술을 마신 천성적인 모주꾼이다. 이후 그의 선친은 집에서 술상을 펼칠 때마다 막내아들인 수주에게 두서너 잔씩 건네었다고 한다. 부친에게서 조기 주법酒法을 수련한 수주가 주객의 길로 직진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선생은 생전에 술이 천대를 당할 때 몹시 불쾌를 느꼈으며 술병의 술이 줄어들 때마다 생명이 토막토막 끊기는 듯한 비애를 감지했다고 고백했다. 애주 정도가 지나서 탐주探酒, 익주溺酒 그리고 쾌음快飮, 통음痛飮 또한 고래같이 마시는 경음鯨飮 등을 반복하고 기상천외한 풍류행각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나는 그의 수필 중에서 술자리 풍경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백주에 소를 타고>를 가장 좋아한다. 어느 날, 수주 선생의 집에 공초 오상순 시인, 성재 이관구 주필, 횡보 염상섭 소설가가 찾아왔다. 이른바 3주선酒仙의 내방에 주머니를 모두 털었으나 네 주당이 해갈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래서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동아일보사로 편지를 보냈다. 편집국장이던 고하 송진우에게 부탁해서 원고료 50원을 선금으로 당기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 순사 월급이 60원이라 했다니 원고료치고는 꽤 큰 금액이라 여겨진다. 수주의 표현대로 “우화 중의 업오리 금알 낳듯”한 거금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리하여 네 주당은 술과 고기를 사서 성균관 뒷산 사발정 약수터로 야유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산 술은 쩨쩨하게 한두 병이 아니라 한 말 소주였다. 요즘 단위로 18리터이니 무려 작은 병으로 따져 50병이 나온다. 그때의 술은 지금처럼 낮은 도수가 아니고 독주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일 인당 10병도 넘게 마셔댔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주량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객담, 농담, 고담古談, 치담痴談, 문학담을 두서없이 즐기며 야유를 보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삽시간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수주는 그날 산중 취우山中驟雨 장면을 대취大醉한 4나한裸漢들이 광가난무狂歌亂舞하였음을 고백했다. 먼저 공초 선생이 대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간물離間物인 옷을 찢어 버리자는 제안을 했고, 천질天質이 비겁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도 이에 곧 호응하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흥취에 젖은 영웅호걸들이 비를 피하기는커녕 만세를 외치고 합세하여 옷까지 찢는 의기로 뭉친다. 폭우 속에 벌거숭이가 된 주당들은 기분이 고조되어 춤추고 노래하다가 급기야 소나무에 매여 있던 소를 타고 개선장군처럼 종로 거리로 진출하기에 이른다. 물론 대낮 누드 퍼포먼스로 시내 진입은 봉변으로 실패하고 만다.
후일 빈 국제펜클럽대회에 참석한 변영로는 세계 문인들 앞에서 유창한 영어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요절복통한 문인들이 즉석에서 수주에게 ‘동양의 버나드쇼’라는 작위를 내렸다고 하니 그의 주성酒性은 일찍부터 한류 바람의 불씨를 심어놓은 것이다.
자신을 발가벗겨서 타인을 웃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다. 현대 주당들이 아무리 흉내 내기에 돌입하더라도 식민지 시대의 진정한 풍류를 알고 살아간 변영로 선생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어지간한 주호酒豪라도 수주 선생 앞에서는 묵사발이 되고 말 것이다. 참으로 진정한 자유인이다. 남성 문인이라면 어찌 이러한 기개가 부럽지 않을까.
수주의 글에서는 술꾼의 멋과 품격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대취 후 나신으로 소 등을 타고 음주운전을 한 그 시대는 문인文人의 풍류가 허용되었다. 이러한 명정이야말로 문인의 낭만이며 문학의 연장선이라고 치올리기도 했다. 만약 오늘날 문인이 술바람에 옷을 벗고 소를 탄다면 어찌 될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문 가십gossip거리가 되며 탈선 주벽으로 낙인찍힐 것이 틀림없다.
취하지 않고도 광태가 죽 끓듯 하는 야박한 세상이다. 주선酒仙을 넘어 주신酒神의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시대가 허용치 않으면 한낱 광기狂氣에 지나지 않는다. 현세의 술 좋아하는 문인들이 풍류의 시대를 그리워하듯 나 또한 그러한 기인들의 낭만이 그리울 뿐이다. 지금쯤 수주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당시의 치기 어린 광연을 탓하며, 만주벌판으로 나가 말을 타고 쌍권총을 든 독립군이 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있지나 않을까.
불주객인 나로서는 봄비에 젖는 벚꽃잎이나 바라보며 명문名文에 대취하여볼 일이다.(*)
- 김정화 리뷰에세이 ≪말 이상의 말, 글 이상의 글≫에서
첫댓글 이런 거 보면 시절도 잘 타고나야 되는 듯합니다.ㅎ 호방한 기개가 반드시 술과 통한다는 근거는 없으나 또 대개 이름난 문인이 그러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가끔은 주객이 전도되어 그래야만 마땅한 걸로 알고 객기를 부리기도 하니..
그렇지요? 오늘날 그러한 멋(?)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포복절도할 비하인드 스토리 한둘쯤은 알고 있을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