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석의 하나님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1898 - 1963
「20세기 지성의 거장이자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영향력 있는 작가. 존경받는 스승이다. 그는 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있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무신론에 심취했으나 온전한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는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로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오랜 시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1954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 학과장으로 일했다.
30여 권의 폭넓은 저서를 통해 다양한 독자층과 만났으며, 지금도 수많은 새로운 독자들의 손에 그의 작품이 들려지고 잇다. 현재까지 1억 부 넘게 판매되고 장편 영화로도 제작되며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판타지 고전 <나니아 연대기>(시공주니어)를 비롯해,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네 가지 사랑>, <예기치 못한 기쁨>, <영광의 무게>, <기독교적 숙고>, <오독>, <피고석의 하나님>, <현안>, <이야기에 관하여>, <세상의 마지막 밤>, <개인기도>, <시편 사색>, <조지 맥도널드 선집>(이상 홍성사)등이 있다. 또한 최근 그의 글을 모은<기도의 자리로>, <신자의 자리로>(이상 두란노)가 새롭게 선보였다.」
1부
[1] 악과 하나님
지난주에 나온 ‘하나님과 악’이라는 글에서 조우드 박사는 기계론도 창발적 진화론도 타당성이 없으므로 결국 기독교 같은 일신론적 철학이나 조로아스터교 같은 이원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흥미로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기계론과 창발적 진화론을 거부하는 조우드 박사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우주의 상황이 나아진다고 하려면 우주의 흐름 너머, 그 바깥에 자리 잡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준에 가까워지는 것을 나아진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더 나은 상태가 그저 우리가 변해 가는 모습을 뜻한다면 더 나아짐은 무의미한 말이 됩니다. 그건 마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자축하면서 자신이 도착한 장소가 목적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래숭배는 혼미한 종교입니다.
[2] 기적
지금껏 저는 유령을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을 단 한 명 만나 봤습니다. 여자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사람은 유령을 보기 전에도 영혼의 불멸성을 믿지 않았고, 본 후에도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환영을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다고 믿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처음부터 초자연적인 현상을 배제하는 철학을 견지하고 있다면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그 일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이라고 주장되는 모든 사건은 결국 우리 감각에 와 닿은 경험이며, 우리의 감각은 때로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언제라도 우리는 자신이 본 것이 환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이 정말 그쳤든 그렇지 않든, 유물론이 득세한다면 서유럽에서는 기적이 정말 그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묵시록의 말씀 그대로 세상의 종말아 온다고 해봅시다. 현대의 유물론자가 하늘이 말려 올라가고 크고 흰 보좌가 나타나는 광경을 직접 본다고 해봅시다. 그가 자신이 불 못에 던져지는 것을 느낀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는 그 불 못 속에서조차 자신의 경험을 환각으로 여길 것이고 심리분석이나 뇌 병리학으로 그 현상을 설명할 것입니다. 경험 자체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꿈꾸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의심한다면, 어떤 실험도 그의 의심을 풀어 줄 수 없습니다. 모든 실험이 꿈의 일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우리의 선입견에 따라 이것저것을 입증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선입견은 기적이 정말 일어난다 해도 기적을 감지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고, 반대로 일어나지도 않은 기적을 상상하도록 이끌 수도 있을 겁니다.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첫째, 자연의 통상적 안전성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이 받아들이는 데이터가 규칙적인 패턴으로 되풀이됨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자연 너머의 어떤 실재를 믿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다 있어야만 비로소 초자연적인 또는 자연 외적인 실재가 우리의 자연계를 이루는, 시공간의 감각 내용에 침입하고 그것을 교란시켰다고 하는 다양한 보고를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실재에 대한 믿음은 경험으로 입증되거나 반증될 수 없습니다. ~~~~그 논증들의 근거는, 우리가 자연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자연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가정해야 하고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그 무엇에 속한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기적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연 너머의 실재를 하나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동기는 훌륭하지만 잘못 된 두 가지 생각 때문입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기적에 대해 거의 심미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하나님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부과하신 법칙을 친히 어기시는 일은 원시인들이나 감동할 만한, 자의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장치요 우주의 문법을 무시한 파격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자연법칙을 사유법칙과 혼동하여 그것을 뒤집거나 일시 정지시키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2더하기 2가 5라는 말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는 거지요.
저는 첫 번째 반론에 대한 해답을 최근에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 조지 맥도널드의 글에서, 이후 아타나시우스의 글에서도 발견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작은 책(화육론On the Incarnatio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취하시고 인간으로 사신 것은 그분이 친히 감독하고 다스리시는 전 우주에서 그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곳 지상에서 주님이 몸을 입고 행하신 일들을 보며 그 몸 안에 거하셨던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셨음을 인정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기적에 대해 친히 하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저는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피조 세계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활동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대대적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육하신 하나님이 팔레스타인에서 한 인간으로 사시며 행하신 기적들은 이 대대적 활동과 똑같은 이들을 다른 속도로, 작은 규모로 이룹니다. 그 주된 목적 중 하나는 한 인간이 능력을 발휘해 소규모로 이루는 일을 본 자들이 같은 일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그 배후의 능력 또한 인격적 존재임을, 참으로 2천 년 전에 우리 가운데 사셨던 바로 그분이심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기적이란 전 세계에 너무나 큰 글씨로 적혀 있어 일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이야기를 작은 글씨로 다시 들려주는 일입니다. 큰 글자로 적힌 이야기 중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 기적들은 하나님이 이미 보편적으로 행하신 일을 국지적으로 행합니다. 또 어떤 기적들은 하나님이 아직 행하지 않으셨으나 앞으로 행할 일들을 국지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지난 일을 상기시켜 주는 기적도 있고 이루어질 일을 예언하는 기적도 있는 셈이지요.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창조하시고 그것이 뿌리로 물을 빨아올린 후 태양의 도움을 힘입어 그 물을 과즙으로 바꾸도록 가르치십니다. 그 과즙이 발효하면 어떤 특성들을 띠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노아의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매년,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교리와 우주
어떤 면에서 볼 때 최근의 현대 과학은 기독교 교리와 한편이 되었고 고전적 형태의 유물론과 결별했습니다. 현대 물리학을 통해 자연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우주에는 시작이 있었고 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거창한 유물론 체계들은 모두 물질의 영원성과 그에 따른 물질의 지존성을 믿었습니다.
[4] 기독교에 대한 질문과 답변
기독교는 전문 기술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하지만, 요리 교습을 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질문)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찬성하는 그들의 입장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루이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저 자신이 괜찮은 늙은이라고 생각하거나 저에 대해 애정 어린 감정을 갖는 식으로 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제가 특별히 선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나를 사랑합니다. 제가 한 일 중에는 혐오스러운 일들도 잇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인의 명확한 구분은 우리가 자신을 대상으로 태어난 이후 줄곧 해왔던 구분입니다. 우리는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했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애정 어린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의 궁극적인 유익을 가능한 한 한 결같이 바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누군가를 제지할 방법이 그를 죽이는 것 외에는 없는 경우,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 답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답하기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질문) 공장 노동자가 교수님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루이스)기독교는 지금 여기 이 세상의 상황에 대해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가능하면 선하게 만들려고, 즉 개혁하려고 시도합니다. 둘째, 그러나 세상이 악한 상태에 머무는 동안에는 거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신자를 굳게 해줍니다.
(질문)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여러 다양한 부류가 있습니까?
(루이스)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일생에 모든 순간에 모든 측면에서 기독교를 실천한 사람을 뜻한다면, 기록상 그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한 사람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저 정도는 다르지만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정도는 다르지만 실패 후 다시 시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착한 개와 주인의 관계에어 완벽한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관계를(아주 희미하게) 보여 주는 일종의 그림 혹은 패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완전한 그림에 불과합니다. 개에게는 주인과 같은 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불완전하고 자꾸 끊어지는 방식으로나마 하나님의 이성을 공유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개보다 하나님 쪽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개 쪽에 더 가까운 부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건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질문) 자신이 부당한 운명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며 분개하거나 불행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별, 질병, 가정불화, 노동 조건, 다른 사람들의 고통 때문에 이런 감정들을 갖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루이스) 기독교의 견해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는 필연적으로 뒤따라옴) 그리스도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란 경제적 부를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만 행운, 건강, 인기를 비롯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의미의 부가 다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을 가졌으므로 이생에서 이미 행복하고 만족스럽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마음이 나지 않으니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덧없는 행복에 안주하려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진짜 행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모든 부들을 우리에게서 빼앗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계속 그것들을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혹하게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혹한 교리들이 장기적으로 볼 때 실제로는 가장 친절한 교리들임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한때 저는 곤경과 슬픔이 형벌이라는 말을 가혹한 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곤경에 처할 경우, 그것을 형벌로 여기는 순간부터 훨씬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오로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마련된 장소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견디기 어려운 곳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곳을 훈련과 교정의 장소라고 생각하면 그리 나쁜 곳이 아닙니다. 같은 건물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중 절반은 그곳에 호텔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절반은 감옥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곳을 견디기 어려워할 것이고,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놀랄 만큼 편안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조악한 교리처럼 보이는 것이 결국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이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려 애쓰는 사람들은 비관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낙관적이 됩니다.
(질문)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사회를 우울하고 재미없는 상태로 만들어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입니까?
(루이스) 개신교가 우울한지, 기독교가 우울함을 낳는지 대답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저는 완전한 비기독교 사회에서도, 완전한 기독교 사회에서도 살아 본 적이 없고, 16세기에 가본적도 없으며 그 시대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얻은 지식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모든 시기에는 비슷한 정도의 즐거움과 우울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시대의 시, 소설, 편지 등이 그것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저는 해답을 모릅니다. 다른 시대는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질문)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파이를 누릴 자격을 갖추기 위해 불편함과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루이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사람은 불편한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편안함을 발견하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열어 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려고 애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맡기실지,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맡기실지 미리 알 도리는 없습니다. 영웅적인 기질을 타고난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상당히 즐거운 것임을 알고 오히려 실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불쾌한 일들과 불편함도 각오해야 합니다.
(질문) 기독교의 기준을 적용하면 과학적, 물질적 진보가 끝장나거나 상당히 줄어들게 될까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야망을 품거나 개인적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루이스) 무인도에 사는 사람이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살면 어떤 영향을 받을까요? 그가 편안한 오두막을 지을 가능성이 줄어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그에게 오두막에 대해서는 신경을 좀 덜 쓰라고 말하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가 오두막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위험에 처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오두막을 짓지 못하게 막을 거라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야망! 우리는 무슨 뜻으로 이 단어를 쓰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추측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고 싶은 욕구를 뜻한다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어떤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을 뜻한다면 선한 것입니다. 맡은 역할을 최대한 잘 연기하고 싶은 배우의 마음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배우들보다 자기 이름이 더 크게 인쇄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잘못입니다.
※(목소리)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실제적입니까? 선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 문제로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루이스) 기독교 신경들에는 마귀나 귀신들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놈들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는 정말 그런 존재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건 제 경우입니다. 그런 존재들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귀의 권세 안에 있을수록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가 술 취한 줄 아는 사람은 상당히 정신이 또렷한 상태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귀를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선하게 살려고 온 힘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질문) 성경은 수천 년 전에 오늘날보다 정신 발달의 단계가 낮았던 사람들을 위해 쓰인 책입니다. 현대 지식에 비추어 보면 신화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다시 써서 신화적인 부분은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은 재해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이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신화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주로 가르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이야기 부분은 제가 볼 때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구약성경의 신화적인 요소를 빼내는 것 역시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는 내용은 서서히 뚜렷해지는 그림과 같습니다. 죽임을 당하고 부서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의 개념은 상당히 모호하고 신화적인 형태로 전 세계 곳곳의 이방 종교들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가 어디서 살다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는 역사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구약성경이 등장합니다. 종교적 개념들이 좀 더 뚜렷해집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한 특정 민족과 연결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요나와 고래, 노아의 방주는 신화적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의 왕궁 역사는 루이 14세의 왕궁 역사만큼이나 신뢰할 만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이르러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집니다. 죽는 신이 역사적 인물로 나타나 명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실제로 살아갑니다. 만약 이전 단계들에서 그 모든 신화적 요소들을 추려 내어 역사적인 단계들과 분리해 낼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잃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질문) 세계의 여러 종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추종자들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줍니까?
(루이스)세계의 여러 종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추종자들에게 가장 행복을 주느냐고요? 지속 가능하기만 하면, 자기를 섬기는 종교가 최고입니다. 아는 분 중에 80세 정도 되는 노인이 계십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이기적인 태도로 제 잘난 맛에 살아왔고, 안타깝게도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는 그 관점에서 질문에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찾지 않았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건 포트와인 한 병이면 족합니다. 정말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독교는 절대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으로는 특허를 받은 미국 제품들이 분명 시장에 나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질문)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습니까? 그는 심술궂을까요? 담배는 피울까요?
(루이스)최고의 제품이라고 선전하는 ‘하얀 미소’ 치약 광고가 생각납니다. 광고 내용이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를 것입니다. 첫째, 그 치약을 쓰기 시작하면 치아가 좋아질 것입니다. 둘째, 그 치약을 쓰는 사람은 그것을 쓰지 않았던 때보다 치아 상태가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치아가 안 좋던 사람이 치약을 사용한 후의 치아 상태를 한 번도 치약을 안 써 본 흑인의 건강한 치아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심술궂은 노부인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유쾌하고 인기 잇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노부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얼마나 더 심술궂을지, 그 괜찮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얼마나 더 호감이 가는 사람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두 사람의 행동을 단순 비교함으로써 기독교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두 경우 그리스도께서 어떤 원재료를 갖고 작업을 하시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질문) 공장 안의 복권 판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의명분도 상당히 그럴듯하고 당첨 상품 목록도 근사한데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루이스)인생에서 도박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유익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도박은ㄴ 나쁜 것입니다. 작은 돈을 거는 도박이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도박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것은 제가 유혹을 느끼지 않는 거의 유일한 악덕입니다. 그리고 제 기질에 속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일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분열을 일으킨 신학적 차이점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차이점들이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지금이 재결합의 적기라고 생각하십니까?
(루이스) 재결합의 적기는 따로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죄이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재결합을 위해 작은 일이나마 감당해야 합니다. 기도밖에 할 수 없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평신도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늘 전통적이고 교리에 충실한 입장에서 글을 쓰고 생각을 펼쳐 왔습니다. 그 결과, 전혀 종류가 다른 부류로 취급받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한목소리가 담긴 편지들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회 신부, 수도사, 수녀, 퀘이커교도, 웨일스의 비국교도 등이지요. 제가 볼 때는 모든 교회의 극단 분자들은 서로 가까운 반면, 각 교회의 자유주의적이고 관대한 사람들은 결코 연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리에 충실한 기독교 세계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들 수천 명이 계속 같은 얘기를 하는 곳입니다. 관용과 물탄 종교의 세계는(모드 같은 유형의) 소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몇 분마다 생각이 바뀌는 곳입니다. 거기서는 결코 재결합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질문) 과거 교회는 다양한 강제 수단으로 특정 브랜드의 기독교를 사회에 강요했습니다. 교회에 충분한 권력이 주어진다면 이런 일이 되풀이 될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루이스) 예, 저는 스페인에서 들려오는 불쾌한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누구나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박해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종류의 종교적 강제를 혐오합니다.
(질문) 예배에 참석하거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꼭 필요합니까?
(루이스)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냥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4년 전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저는 제 방에 들어앉아 신학 서적을 읽는 식으로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국교회 예배당이건 비국교회 복음관이건 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그렇게 참여하는 일이 깃발을 내걸고 소속을 밝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표적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가려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가족에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른 일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회에 가려고 일찍 일어나면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 집안을 어지럽히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신약성경 가르침 중에서 명령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지 않으면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교회의 찬송가가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건 정말 5류의 시를 6류의 음악에 붙여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는 그것이 지닌 큰 장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사고방식과 교육수준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자만심이 벗겨져 나갔습니다. 저는 고무장화를 신고 반대편 신도석에 앉은 연로한 성도가 그 찬송가들(음악으로는 6류이지만)을 경건하게 부르며 유익을 얻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장화를 닦기에도 부족한 자임을 또한 깨달았지요. 그것은 혼자만의 자만심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지금 제가 신앙생활의 규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평신도일 뿐이고 많이 알지도 못합니다.
(질문) 하나님을 충분히 원하기만 하면 그분을 찾을 수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면 제가 그분을 충분히 원하게 되어 그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루이스)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원하기를 원하고자 왜 그렇게 안달하십니까? 저는 그 원함이 진정한 원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발견했지만 아직 그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인 거지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쨌건,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5] 신화가 사실이 되었다
[6] 무서운 빨간 약
많은 신학자들과 일부 과학자들은 19세기의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은 완전히 끝났다고 선포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그것은 진짜 신학자들과 진짜 과학자들, 즉 교육을 많이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그 갈등은, 교육받은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형태로 머릿속에 자리 잡은 아주 실질적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구체적인 교리와 구체적인 과학적 발견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7] 종교와 과학
[8] 자연법칙
친구가 말했습니다. 가엾은 여자야. 사람들이 저렇게 말할 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어. 저 여자는 자신이 아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아들이 아른험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해. 그녀의 아들이 살아남은 진짜 이유는 그가 총알에서 약간 오른쪽 내지 왼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건 너무 무정한 일일 거야. 그 총알은 자연법칙이 정해준 노선을 따라가고 있었어. 그를 맞출 수 없었지. 그는 우연히 총알의 경로 바깥에 서 있었던 거야.... ~~~~그의 생존은 그저 자연법칙 덕분이었다고.
법칙은 사건들이 따라야 할 패턴일 뿐입니다. 사건들의 근원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연법칙은 사건들의 근원을 제외한 모든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만만찮은 예외입니다.
실제 사건들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어떻게 보면 해답은 간단합니다. 각 사건은 그 이전 사건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사물들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어떻게 해서 사건과 공간과 물질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묻는 것과 정확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문제의 내용은 사물들이 아니라 사건들입니다. 물질의 입자들이 아니라, 이 입자와 저 입자의 충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햄릿>에는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오필리아가 익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녀가 죽은 것은 나뭇가지가 부러졌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세익스피어가 희곡의 그 시점에서 그녀가 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까? 어느 쪽이건 원하는 쪽을 택해도 되고, 둘 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질문이 제시하는 양자택일은 실은 전혀 양자택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셰익스피어가 그 희곡 전체를 만들었음을 기억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9] 장엄한 기적
기독교의 이야기는 정확히 하나의 장엄한 기적 이야기이고, 기독교의 주장은 모든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 지존하며 영원한 존재가 자연과 인간 본성 안으로 들어와 그분의 우주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가 본성을 동반하여 다시 올라가셨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전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기독교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일단 그 기적을 받아들이면, 기독교의 다른 모든 확립된 기적들이 그 기적의 일부이고, 성육신을 예비하거나, 드러내거나, 그것에서 유래한 결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특정 순간, 특정 장소에서 자연의 전체적 특성이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기적은 성육신 기적의 특성을 보여 줍니다.
[10] 기독교 변증론
저는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일을 도와 본 적도 없고, 젊은 시절에는 조직의 일원이 되기를 한사코 피해 다닌 사람입니다. ~~~변증론은 물론 변호라는 뜻입니다.
평신도인 제가 볼 때 사람들은 성공회 성직자들의 입을 통해 성공회 기독교의 교리가 아닌 내용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은 다음 둘 중 한 가지 면에서 성공회와 다릅니다. (1) 너무나 넓거나 자유주의적이거나 현대적 이어서 실제로는 모든 실질적 초자연주의를 배제하고 그로 인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로마가톨릭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공회가 무엇인가는 제가 여러분에게 정의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디에 선을 긋든지, 경계선은 분명히 존재해야 하고, 그 선을 넘어가게 되면 여러분의 교리는 성공회 교리도 기독교의 교리도 아닐 거라는 말씀만은 분명히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자체, 즉 사도들이 선포하고 순교자들이 증언하고 신경들로 구현되고 교부들이 해설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내용과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나름의 강조점들이 있습니다. 각자의 기독교 신앙에 더해 그것과 일관성도 없고 스스로 옳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아마 변증론자들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내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변호해야 합니다.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말할 때는 그것과 기독교 신앙 자체는 다르다고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25절에서 이와 관한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가지 논점에 대해 그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내가 의견”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를 자신의 생각과 구별하려는 양심적인 노력은 변증가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노력은 기독교에서 모호하게 느껴졌던 대목, 거부감이 드는 요소들을 직시하게 해줍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건너뛰거나 대충 보거나 무시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납니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은 기독교 지식을 쌓는 일에 결코 진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새로운 진리는 바로 가장 내키지 않고 가장 이해되지 않는 교리들에 정확히 숨어 있습니다. ~~~(1)나는 신학의 최근 동향을 따라가며, 거기 뒤처지지 않고 있는가? (2) 나는 이 모든 교훈의 풍조 가운데서도 확고하게 섰는가? 저는 두 번째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새 책과 옛날 책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해 선택해야 한다면, 옛날 책을 선택해야 합니다. 옛날 책이 꼭 더 나아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무시하고 있는 진리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변하는 기독교의 기준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고 그 기준에 비추어 모든 현대 사상을 시험해 봐야 합니다.
과학 서적 읽기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어떤 과학 분야에 대해 아신다면 최신 연구 성과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는 100년 전의 과학자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대했는지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현재 과학계의 입장에 대답해야 합니다. 과학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우리는 그것에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힌두교에 대한 어떤 서적 때문에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질학, 식물학, 정치학, 천문학에 대한 입문서를 일을 때마다 그 책들이 힌두교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면 우리는 흔들릴 것입니다. 현대인을 유물론자로 만드는 것은 유물론을 직접 변호하는 책들이 아니라, 다른 모든 책들 안에 깔린 유물론적 가정입니다.
[11] 노동과 기도
당신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도 응답이 이론적으로 가능함을 인정한다 해도, 나는 여전히 그것이 무한히 개연성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 하실 지에 대해 우리 인간들의 무식한(모순되는)조언이 필요하실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전지하신 분이라면, 그분은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인지 이미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그분이 더없이 선하시다면 우리의 기도와 상관없이 그 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지난 수백 년간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위협한 기도에 대한 반론입니다. 이에 대해 흔히 들을 수 있는 답변은 이 반론이 낮은 차원의 기도, 즉, 어떤 일이 벌어지게 해달라고 구하는 기도에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의 기도는 하나님께 조언해 드리지 않고, 그분과의 교통이나 교제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런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낮은 차원의 기도가 사실 터무니없는 짓이고 어린아이들이나 미개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견해에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를 이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대체로 저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기도가 더 고상하거나 진보한 기도라고(그렇게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온전히 하나 되어서 사건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상태라면 대단히 고상하거나 진보한 상태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 낮은 종류의 기도를 그냥 배제해 버린다면 두 가지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첫째, 기독교의 역사적인 기도 전통 주의(주기도문까지 포함해서)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병자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적으로부터 보호를 간구하며, 바깥세상의 회심 등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늘 인정해 왔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욕망을 초월하여 다른 종류의 기도만 한다면 더 고상할지도 모르겠지만, 구해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으로 요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딱히 고상하거나 영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소년이 너무나 고상하고 영적이라서 과자를 일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과자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그게 정말 훌륭한 건지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달라고 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 아이라면 특별히 훌륭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통째로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기도) 저자가 장면과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를 정해 놓았지만 사소한 세부 내용들은 배우들의 즉흥 연기의 몫으로 남겨 둔 연극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실제 사건들의 원인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신비로 남겠지만, 기도를 통해 긍 리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심이 다른 수단을 허락하심보다 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원인자가 되는 위엄을 허락하시고자 기도를 제정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해 기도와 물리적 행위 모두를 고안하셨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작은 피조물들에게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건들의 경로에 조그마한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위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일정한 한계 내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우주의 물질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도 씻을 수 있고, 동료 피조물들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그들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역사 계획을 세우실 때 우리에게 어느 정도 자유로운 행위를 허용하셔서 우리 기도에 반응하여 상황이 달라질 수 있도록 플롯을 만드셨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구하는 것이 어리석고 건방진 일이라면(하나님이 가장 좋은 일을 하실 거라는 근거에서), 방수 외투를 걸치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고 건방진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젖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이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사건들을 일으키는 방법 두 가지, 즉 노동과 기도를 허락받았습니다. 노동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알아서 제공하심을 합당하게 여기지 않으신(적어도 아직까지는) 시대들을 일으키려 노력합니다. 이 점에서 둘은 동일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노동은 기도다 Laborare est Orare"라는 오래된 속담은 새로운 의미를 띰니다. 밭의 잡초를 뽑을 때와 풍작을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밭에 나가 무슨 일을 하건 풍작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잡초를 뽑아내면 그 잡초 하나는 더 이상 그곳에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내용이 언제나(말 그대로 사실적인 의미로 볼 때) 허락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약한 원인이라서가 아니라 더 강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효과를 발휘할 때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내용을 허락하실지 거절하실지 재량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런 조건이 없다면 기도는 우리를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12] 인간인가 토끼인가?
[13] 기독교의 전수에 대하여
[14] 비참한 범죄자
문서로 인쇄된 예배서의 여러 장점 중 하나는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이 언제 변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서의 언어에 참여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물론 우리가 그 내용에 대해 선조들과 똑같은 느낌을 받지 않는다는 한 가지 신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럼 단어를 바꿔요.” 우리가 옳고 선조들이 틀렸다는 걸 안다면 그건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 될 것입니다. 틀린 쪽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만큼은 언제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
통회하는 이란 말은 라틴어에서 번역된 단어로, 으깨지거나 부서진다는 뜻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부서지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들이 비참한 범죄자들임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지만 “그 짐(즉 그의 죄)이 견딜 수 없나이다.”라는 구절을 따라하지 않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견딜 수 없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도서가 우리의 감정에 대해 주로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이 “우리는 비참한 범죄자들입니다”라는 구절에 대해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첫 번째 실수입니다. 저는 우리가 비참하다고 느끼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구절이 비참한 이라는 단어를 옛날 의미, 즉 연민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아도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득 탄 고속열차 두 대가 시속 10킬로미터의 속도로 같은 선로를 따라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높은 곳에서 지켜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40초 후에는 정면충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차들의 승객들이 연민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비참한 존재로 여긴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적절한 연민의 대상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비참한 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서의 구절은 우리가 비참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아니라, 충분히 높은 위치에서 상황을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우리가 합당한 연민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깨닫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 짐이 견딜 수 없다는 구절은 ‘버틸 수 없는’ 으로 이해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기 때문입니다. 난 그걸 버틸 수 없어 라는 말은 그 일이 커다란 고통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 다리는 저 트럭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라고 말할 때는 저 다리가 고통을 느낄 것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저 트럭이 다리 위를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져 내려 돌무더기가 되고 말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고통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
우리가 비참함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아니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우리 각 사람 위에는 짐이 하나씩 얹혀 있고 그것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 짐이 우리를 실제로 부서뜨릴 것이고,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온전한 영혼이 아닌 부서진 영혼으로 내세에 벌어질 일을 맞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부서뜨릴 만한 것이 우리 위에 놓여 있다고 정말 믿습니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내면 상태에 대해 자연적으로 알게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일반적 둘 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긴 끔찍한 문제를 안고 산다고 추측해도 무난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상사나 부하 직원일 수도 있고, 친구나 친척 중 누구일 수도 있으며, 함께 사는 가족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되었건 우리 삶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고 여러 해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지닌 성격상의 치명적 결함 때문에 우리가 거듭거듭 기울인 온갖 노력들이 모두 실패했습니까? 그 사람의 게으름이나 질투나 불끈 하는 성미,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입술, 언제나 험담을 늘어놓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상황, 그 외의 어떤 결함 때문에, 그 사람은 어찌될지 몰라도 우리는 틀림없이 부서지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듭니까?
저는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 두 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외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전쟁만 끝나면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 집만 구할 수 있다면, 시어머니나 며느리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게 된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상황은 분명히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기가 지나가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남편은 여전히 심술 맞고 자기밖에 모를 것이고, 아내는 질투하고 낭비벽이 있을 것이고, 사장은 못살게 굴 것이고, 없어선 안될 직원은 사기꾼일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전쟁이 끝나고 더 나은 일자리와 새 집이 생긴다 해도, 시어버니와 며느리와 더 이상 같이 살지 않아도, 누구누구의 성격에는 여전히 그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괴로운 나머지 가까운 친구에게 그 문제를 약간 털어놓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친한 친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왜 그 사람에게 직접 예기하지 않아? 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 그 사람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쁠 리가 없어.”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도를 너무나 많이 해봤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큰 소동으로 발전하거나 서로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리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는 따로 있습니다. 상대방이 친절하고 온순한 태도로 우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앞으로 달라지겠다고 약속하지만, 그로부터 24시간이 지나면 모든 상황이 이전과 정확히 똑같아지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분노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상대를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라고 해봅시다. 우리가 상당히 진실에 근접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늘 보시는 광경을 잠시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자들을 상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그들의 문제를 상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탁월한 계획도 세우셨습니다. 세상에 선지자들과 현인들을, 마지막으로 자신을, 자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분의 역할을 거듭거듭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들은 사람들의 인격에 깃든 치명적 결함으로 번번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분명 우리보다 훨씬 정확하게 보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의 짐에 대해 어떤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그들이 그 무게에 눌려 보서지고 말 거라는 사실이 우리 눈에도 보입니다. 사그라질 줄 모르는 질투심과 소유욕, 이기심의 영향력 아래에서 그들의 인격이 날이 갈수록 비인간적이 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무실, 교구, 학교, 병원, 공장, 가정을 들여다보실 때 그와 같은 온갖 사람들을 다 보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최선의 시도들을 거듭거듭 좌절시킨 결함이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와 똑같이 치명적인 결점이 있어서 그들의 시도들을 거듭거듭 수포로 돌아가게 했을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제 막 시작했다면 자신의 치명적 결함을 분명히 드러내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입 냄새가 심한 사람이 자기 입 냄새를 압니까? 클럽의 따분한 회원이 자기가 따분한 줄 압니까? 자신이 따분한 사람이거나 기질적으로 질투심이 많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따분한 사람들과 질투심 많은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그 사실을 먼저 알 것입니다. 친구들이 그 얘기를 왜 안 해 주었는지 모르겠다고요? 하지만 그들이 이미 얘기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수차례 시도해 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그들이 이상하게 군다. 괜히 성질부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거듭거듭 시도하다가 이제는 완전히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을 알지 못한다면, 제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 무익할 것입니다. 저는 자신이 아는 결점들로부터 손을 대는 것이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상당수는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보다 훨씬 앞서 나가 계십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성직자에게 고백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직자에게 죄 고백을 하지 않으신다면, 최소한 종이 한 장을 준비해 죄의 목록을 작성하고 각각에 대해 진지한 참회를 해야 합니다.
※[부록]
1. 사순절 첫째 날 본기도, 이날 이후 사순절 기간에 매일 낭독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지으신 만물을 극ㅈ니히 사랑하시며, 죄를 통회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시나이다. 우리 안에 새롭고 통회하는 마음을 창조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죄를 합당하게 슬퍼하고 우리의ㅐ 비참함을 인정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더없이 자비로우시고 온전히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간직하게 하소서. 아멘”
2. 아침과 저녁 기도 시간에 하는 죄의 고백
“전능하시고 가장 자비로우신 아버지.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고 잃어버린 양처럼 주의 길에서 벗어났나이다. 우리 마음의 지혜와 욕망을 너무나 따랐나이다. 우리는 주의 거룩한 율법을 어겼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았고,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했고, 우리 안에는 건강함이 없나이다. 그러나 오, 주여. 당신은 우리 비참한 범죄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오, 하나님. 잘못을 고백하는 그들을 용서하소서. 회개하는 자들을 회복시키소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인류에게 선포하신 당신의 약속에 따라 그렇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오,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가 이제부터 경건하고 의롭고 건전한 삶을 t라게 하시어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아멘.”
3. 성찬례에 하는 죄의 고백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만물의 창조자, 모든 인간의 재판장이시여. 우리는 우리의 명백한 죄악과 사악함을 인정하고 슬퍼하나이다. 우리는 때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하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정당한 진노와 분노를 촉발하였나이다.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고 우리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그 일들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괴롭고 그 짐은 견딜 수 없나이다. 가장 자비하신 아버지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의 모든 지난 잘못을 용서하소서. 저희가 이제부터 영원히 당신을 새 생명으로 섬기고 당신을 기쁘시게 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그런 은혜를 허락하소서. 아멘.”
[15] 소크라테스 클럽의 설립
[16] 교리 없는 종교?
[17] 몇 가지 생각
[18] 그 사람의 문제
하나님은 원하시면 사람들의 인격을 변화시키실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므로 우리와 하나님은 경우가 아주 다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얼핏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격을 강제로 바꾸지 않는 것을 그분의 규칙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격을 변화시킬 능력과 의향이 있으시나,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놓을 때만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진정으로, 참으로 제한하셨습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의아해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은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기계처럼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보다는, 온갖 위험이 산재하지만 자유로운 존재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완벽하게 자동적인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 될지 제대로 상상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지혜를 더 잘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저는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인격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계획이 실패하고 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겪고 계신 상황을 보고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면에서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시야와 아주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분은 우리 집이나 직장의 모든 사람이 정도는 다르지만 다루기 곤란하고 까다롭게 구는 모습을(우리처럼)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집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같은 부류의 또 한 사람을 보십니다. 우리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지혜의 두 번째 커다란 진전입니다.. 우리에게도 인격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계획들이 다른 사람들의 인격적 결함 때문에 깨어졌던 것처럼, 우리의 인격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모든 소망과 계획들이 거듭거듭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에게도 결점들이 있다는 거 알아“라는 식으로 모호하고 두루뭉술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우리 안에 뭔가 정말 치명적인 결점, 즉 다른 사람들의 결점들 때문에 우리가 느낀 것과 동일한 절망감을 그들에게 안겨 주는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본인 말고는 누구도 다 맡는 입 냄새와도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시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인격을 보십니다. 나는 내 인격만 빼고 모든 사람의 인격을 다 봅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점이 있는 사람들을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계속해서 사랑하십니다. 손을 놓아 버리지 않으십니다.~~~~그분은 그들의 안에도 밖에도 계십니다. 우리보다 더 친밀하고 가깝게, 끊임없이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들(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한 생각, 매순간 떠오르는 악심, 시기, 오만함, 탐욕, 자만심은 그분의 오래 참으시는 간절한 사랑에 대항하고 그분의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다면, 우리는 그만큼 진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들과 똑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9]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20] 동물의 고통
[21] 유신론이 중요한가?
역사가 보여주다시피, 이교도는 기독교로 개종하기가 유난히 쉽습니다. 이교도는 본질적으로 전(前)기독교, 하위 기독교적 종교를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날 후(後)기독교 시대의 사람과 옛날의 이교도는 이혼녀와 처녀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릅니다.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는 <뉴스테이츠먼>의 필진보다는 서로 공통점이 훨씬 더 많습니다.
프라이스 교수님의 논문을 다시 읽은 후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는 이 논의에서 신앙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는 (A)확고한 지적 동의를 뜻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또는 믿음)은 자연의 균일성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식에 대한 신앙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념적, 지적, 현세적 신앙이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신앙은 또한 (B) 이런 식으로 존재 사실에 동의하게 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확신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의지의 태도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친구에 대해 갖는 확신과 비슷합니다.
A의 의미에서의 신앙이 종교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점은 대체로 동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믿고 떠는 귀신들은 A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도 A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하는 철학적 논증의 의도는 A신앙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B신앙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당장의 목표, 그들이 입증해 내려는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들이 비종교적 전제로부터 종교적 결론을 끌어내려 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프라이스 교수님의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종교적인 철학자들이 바로 그 일을 시도하고 있다는 주장은 반대합니다.
또 저는 신 존재 증명이 프라이스 교수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A신앙을 이끌어 내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어른이 되어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 대부분은 신 존재를 증명해 주는 논증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증명에 완전히 설득된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테카르트를 통해 A신앙을 먼저 받아들였고 이후 더 나아가 B신앙을 추구하여 발견한 것입니다. 배움이 극히 짧은 사람들 중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이들도 단순한 형태의 설계 논증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통을 받아들이는 결정에도 그것이 옳지 않다면 그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이 믿었을 리가 없다는 논증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A신앙에는 대개 그런 논증들이 보장하거나 보장한다고 추정되는 논리적 확실성을 넘어서는 상당한 주관적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A신앙이 B신앙의 지원 없이도 오랫동안 이 확신을 견지할 수 잇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동의한 사실에 대한 이런 식의 과도한 확신은 드문 현상이 전혀 아닙니다. 자연의 균일성, 진화론, 태양계를 믿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과도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2)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A신앙을 갖게 되면 B신앙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B 신앙이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A신앙을 갖게 되면, B신앙을 하나님께 선물로 구하라고 말합니다. 제1원인이자 최고의 실재이며 부동의 동지에게 구하는 것치고는 참으로 이상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그런 메마른 철학적 하나님일지라도 인격적 접근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뿐, 인격적 접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가능하고 저 역시 그런 주장을 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인격적 접근을 시도한다고 해서 해 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A신앙에 도달한 후 B신앙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적 체험 비슷한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어쩌면 A신앙이 이제까지 잠재적 또는 암묵적으로만 종교적이었던 그 무엇을 종교적 체험으로 바꿔놓는다는 말이 최선의 표현일 것입니다. 이렇게 수정된 형태라면 철학적 증명들 그 자체는 결코 종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프라이스 교수님의 견해를 저도 맏아들이겠습니다. 어떤 준 종교적인 체험들로 마음이 기울어진 경우, 신 존재 증명은 그런 체험들이 진정한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심리적 억제를 제거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준종교적 체험들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라이스 교수님은 거부하지만, 누멘적인 것 the numinous(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을 다룬 오토의 기록이 지금까지 나온 신앙에 대한 분석 중 최고라는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누멘적인 것을 단지 감정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오류입니다. 오토가 그것을 묘사하면서 그것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가리킬 수박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그것이 우리 의식에 끼친 영향의 관점에서만 기술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영어에는 누멘적인 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해당하는 정확한 단어가 있습니다. 독일어로 글을 쓴 오토는 알지 못했던 단어, 바로 경외감Awe입니다. 두려움과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위험을 감지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지요.우리가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놈이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령을 두려워할 때는 다릅니다. 우리는 유령이 이런저런 해코지를 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멘적인 것 또는 외경스러운 존재는 우리가 이런 이해관계를 떠난 맹목적인 두려움, 즉 경외감을 느끼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누멘적인 것은 우리 자신의 경외감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닙니다. 경멸스러운 것 the contemptible이 경멸의 다른 이름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누멘적인 것은 당신은 무엇에 외경심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경외감을 느끼는 대상 그 자체가 경외감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 신앙의 근원은 철학적인 논증만도 아니고, 누멘적인 것에 대한 체험ㅁ나도 아니며, 도덕적 경험만도 아니고, 역사만도 아닙니다. 도덕적 범주를 성취하는 동시에 초월하고, 이교에서 가장 누멘적인 요소들과 연결되어 있고, 많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보다 더욱 큰 존재자의 존재를 그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바로 그 근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 종교적 체험은 이 모든 요소들을 포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단어를 신비적이거나 경건하거나 그저 누멘적인 체험의 순간들을 나타내는 좁은 의미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프라이스 교수님과 더불어 우리는 일종의 보이는 것에 해당하는 그런 순간들이 어떻게 정의상 보이지 않는 것인 신앙과 연결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적 체험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라집니다. 특별한 은혜의 순간들에는 우리의 의지와 지성의 눈에 거부할 수 없고 명백해 보이는 것들을 그 순간들이 지나간 후에도 유지하게 하는 일이 바로 신앙의 역할입니다. 신앙으로 우리는 내세에선 항상 완벽하게 보게 되길 바라는 그것, 현세에선 불완전하게 섬광처럼 보았던 것을 언제나 믿습니다. 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해 논리적으로 추론되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물론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가끔씩 체험하는 영적 실체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의 신앙은 많은 경우 아마 한참 부족할 것입니다. 지상의ㅐ 친구에 대한 저의 믿음조차도 논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섭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저는 친구를 재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22] 피텐저 박사에 대한 답변
[23] 우리의 하나님 상을 버려야 할까?
울리치 지역 주교님의 주장에 대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대부분 주교님의 기대에 못 미칠 것입니다. 우리가 공간적인 천국의 왕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내다 버린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입니다. 교회는 신인동형론이라고 불리는 그 믿음을 먼 옛날에 정죄했습니다. 기번의 책에 이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공간적으로 우주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저 밖에 계신 하나님으로 바꾸어 표현한 어른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이 시공간 바깥이나 너머에 계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폭풍)바깥에 존재하듯이 계신다, 즉 그 작품의 장면들과 등장인물들로 그의 존재가 규명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안에, 위에 계신 분, 그리고 우리 아래 계시는 깊은 바닥 같은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래에서 우리를 품는 영원한 팔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율리치의 주교님이 하나의 상을 절대적으로 추앙하고 나머지를 금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상을 사용하고 싶은 그분의 자유를 인정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겐 두 가지 상을 모두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창’으로 보는 주교님의 견해는 전적으로 정통적인 듯합니다(“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쩌면 그분의 진정한 독창성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그분의 말이 아주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주교님은 하나님이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하시는가? 라는 질문과 궁극적 실재가 인격적인지 묻는 질문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첫 번째 질문에 이미 그렇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각한 언어의 남용 없이 하나님으로 기술될 수 있는 존재라면 분명히 궁극적 실재이고, 만약 궁극적 실재가 인격적이라면 하나님은 인격적입니다.
율리치의 주교님은 하나의 인격이 아닌 그 무엇이 여전히 인격적 일 수 있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만약 ‘하나의 인격이 아닌’이 ‘하나의 인격과 그 이상’의 뜻이라면, 즉 삼위일체의 교리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여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분의 글이 때로 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이 완고해질 위험은 있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바른 곳에 가 있는 듯합니다.
2부
[1] 국가적 회개의 위험
[2] 자아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全文)
자기부인은self-renunciation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에 아주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St. Francois de Sale의 책에 등장하는 ‘자신을 향한 온유함에 대하여’의 내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분개하지 말라고 하고, 자신이 잘못했을 때도 격정이 아니라 동정을 느끼며 “부드럽고 차분한 충고로” 타이르라고 합니다.
노리치의 줄리안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정답고 평온하게”대하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조차도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자아가 단순 단순히 미워해야 할 대상이라면 이것은 끔찍한 명령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참된 제자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모순적으로 보이는 말씀을 대하면서, 자기애는 어느 지점까지 옳고 그 지점을 넘어가면 틀렸다는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혐오에는 두 종류가 잇는데, 초기 단계에서는 그들이 상당히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는 처음부터 틀렸고 또 하나는 끝까지 옳습니다.
셸리는 자기 경멸을 잔인함의 근원이라고 했고, 이후의 한 시인은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질책하는”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리킨 것은 대단히 실질적이고 대단히 비기독교적 자기혐오입니다. 흔한 이기심에 따라 살았다면 그저 동물적인 수준에 머물렀을 사람이 이런 자기혐오에 빠지면 악마적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냉철한 경제학자나 심리학자가 자신의 모습에서 ‘이데올로기적 잔재’나 무의식적인 동기를 발견한다고 해도 반드시 기독교적 겸손을 배우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 영혼을 포함한 모든 영혼을 ‘낮추어 보는 견해’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견해는 냉소나 잔인함, 또는 둘 모두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어떤 형태의 전적 부패의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바르게 읽었다면, 데이빗 린지의 <아르크투르스로의 항해 Voyage to Arcturus>,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3세>의 끝 부분에서 묘사한 그 기묘하게 멍한 상태에서 자아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고통의 숭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리처드는 자기애의 도움을 받아 괴로움을 덜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모든 감정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터라 이 감정조차 꿰뚫어 보고 맙니다.
자아는 두 가지 방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사랑하고 기뻐해야 할 대상입니다. 현재 혐오스러운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가엾게 여기고 치료해야 할 존재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나’, ‘나’를 내세우고, 그것을 근거로 불합리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주체입니다. 이런 주장은 미워해야 할 뿐 아니라 그냥 죽여야 합니다. 조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잠깐의 유예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아ego가 벌이는 이우성에 맞서 끝없는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아의 죄는 미워하고 거부하되, 자아 그 자체는 사랑하고 인정합니다. 그가 거절해야 하는 자기애는 모든 자아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보여 주는 표본입니다. 그가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참으로 배울 때(이생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지요), 그때 비로소 자신을 이웃처럼, 즉 편애가 아니라 박애로 사랑할 수 잇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자기혐오는 자아 자체를 미워합니다. 그것은 ‘나’라는 특수한 자아의 특별한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대상이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발견하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어 처음에는 자신의 자아에게, 다음엔 모두에게 복수를 꾀합니다. 이런 자기혐오는 여전히 매우 자기중심적이되 이제는 뒤집힌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나는 나를 아끼지 않아”라고 주장하고 타키투스의 백부장처럼 “자신이(친히 그것을) 감내했기 때문에 더욱 가차 없게”됩니다. 잘못된 금욕주의는 자아를 고문하지만, 올바른 금욕주의는 자아성을 죽입니다. 우리는 매일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느니 자아라도 사랑하는 편이 낫고,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ㄴ느니 자아라도 불쌍히 여기는 편이 낫습니다.
[3] 제3계명에 대한 묵상
기독교 정당은 어떤 목표가 바람직하고 어떤 수단이 적법한지 언급하는 선에서 그치거나, 거기서 더 나아가 적법한 수단들 중에서 가능하고 유효해 보이는 것들을 선택하여 그 수단들을 실질적으로 지지해야 합니다. 첫 번째 대안을 택한다면 이미 정당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안보, 생존을 보장하는 임금, 질서와 자유의 요구 사이의 최적의 균형 등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목표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정당이 동의합니다. 한 정당과 다른 정당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수단을 옹호하는지에 있습니다. 시민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목표에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평등주의 중 어느 쪽이 그 목표를 실현시킬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서는 정당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정당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경건한 그리스도인 필라르쿠스는 일시적 복지라도 기독교적인 생활에서만 나올 수 있고, 혐오스러운 ‘자유주의’의 영향의 마지막 흔적까지 없애 버린 권위 국가만이 사회에서 기독교적 생활을 장려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파시즘을 악이 아니라 선한 것이 왜곡된 형태로 보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괴물처럼 여깁니다.
스타티부스는 필라르쿠스 못지않게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인간의 타락을 깊이 인식하고 어떤 인간에게도 최소한의 권력 이상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 정당을 결성하면 악마는 뜻대로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조직을 넘겨받게 됩니다. 일단 악마가 성령으로 위장하는데 성공하면, 우리는 그자의 명령을 받아들여 이내 모든 도덕법을 파기하고 기독교 정당의 불신 동맹자들이 원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하는 상황에서 나옵니다.
[4] 옛날 책의 독서에 대하여
[5] 두 강연
[6] 공구실에서 한 생각
[7] 단편들
[8] 종교의 쇠퇴
-옥스퍼드에서- 1900년에는 학생들로 가득 찼던 예배당들이 1946년에는 비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의무 사항이던 예배 참석이 선택 사항으로 바뀐 시기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것은 쇠퇴가 아니었습니다. 급락이었습니다.
지난 50년간 나라의 모든 교실, 모든 부분에서 기독교의 가시적인 예배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나라 전체의 시각이 기독교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주는 현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9세기를 당시에 쓰인 책들로 판단해 본다면, 우리 할아버지 세대(극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의 시각은 우리 시대 못지않게 세속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쇠퇴는 아주 모호한 현상이 됩니다. 쇠퇴한 종교의 정체가 기독교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면 진실의 일면이 드러납니다. 쇠퇴한 것은 완고하고 엄한 규칙을 가진 모호한 유신론이었습니다. 세상과 대립 관계에 있기는커녕 영국의 제도와 정서라는 틀에 완전히 흡수되어 있었던 이 종교는 교회 출석을 (기껏해야)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일환으로, 예절을(최악의 경우) 사회적 지위의 증거로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채플의 의무 참석 철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회적 압력이 사라지면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자유가 처음으로 정확한 상황 관찰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교회에 가지 않을 때, 마침내 진짜 신자의 수를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종교의 쇠퇴는 제게 어떤 면에서 축복으로 느껴집니다. 적어도 이것은 문제를 명확하게 해줍니다. 현대의 학부생들에게 기독교는 최소한 지적 선택 사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회심이 뒤따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종교(기독교와 다른)는 너무 모호해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감정, 예절등과 너무 뒤섞여 있어서 거북스러운 주제의 하나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말해야 할 경우, 사람들은 들릴락 말락 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십자가가 주는 어떤 거리낌은 없앨 수 없고 없애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순전히 사회적이고 감정적인 당혹스러움은 사라졌습니다. 종교의 안개가 걷혔습니다. 양측 군대의 위치와 수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짜 총격전이 이제 가능해졌습니다.
[9] 생체 해부
[10] 현대어 번역 성경
우리는 모든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환영해야 합니다(물론 번역한 사람들이 건전한 학자들이어야 하겠지요) 성경을 난생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흠정역으로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지혜로울 것입니다.
기독교를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사도 서신을 직시해야 합니다. ~~~사도 서신은 대체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최초의 기독교 문서에 해당합니다. 사복음서는 그 이후에 나왔습니다. 사복음서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명제를 담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복음서는 이미 회심한 사람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사복음서가 복잡한 내용들(즉 신학)을 상당수 제외한 까닭은 이미 그 내용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서신은 사복음서보다 근본적이고 더 중심이 됩니다. 물론, 사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그 위대한 사건들이 더 근본적이고 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성육신, 십자가 처형, 부활)이 먼저 있었고 그 일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분석이 사도 서신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직접 알았던 세대가 죽어 갈 무렵, 신자들에게 주님의 위대한 행하심과 그분의 일부 말씀에 대한 기록을 남겨 주기 위해 복음서들이 기록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널리 퍼진 통상적인 생각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반역의 역사를 보면, 초기 단계에서 왕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지요. “폐하는 모두 옳으시다, 그분의 대신들이 틀렸다. 그들이 폐하의 뜻을 잘못 전하고 구분의 모든 계획을 더럽히고 있다. 대신들의 농간만 없으면 폐하의 좋은 계획이 효력을 나타낼 줄 확신한다.” 그리고 몇몇 대신의 목을 베는 것으로 첫 승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단계가 지나서야 본색을 드러내고 왕의 목을 베기에 이릅니다.
[11] 교회에 여사제?
[12] 피고석의 하나님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 할 때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제 역량을 넘어설 뿐 아니라, 한 번의 글로 다루기엔 너무 광범위한 주제입니다. 청중이 다 다르듯 난점도 각기 다릅니다.
제가 군인들에게 신앙을 전했던 단일 상황에서 경험한 내용을 일반화한다면 참으로 성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영국 군대 전체의 지적 수준이 R.A.F의 군인들보다 훨씬 낮고, 그들에게 다가갈 때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저는 R.A.F를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기독교의 유력한 적수가 유물론뿐이라는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인텔리겐치아 사이에서 유물론은 신지학, 심령주의, 영국 선민주의 등 많은 비기독교 신조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물론 잉글랜드는 언제나 괴짜들의 본고장이었습니다.
둘째, 저는 학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역사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것을 R.A.F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볼 때 배운 사람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가장 큰 틈입니다.
저는 청중이 사복음서를 믿지 않는다면 거기 기록된 기적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사복음서를 믿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주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뿐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뿐 아니라 악티움 전투도 같은 이유로 믿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회의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로 인쇄술 발명 이전의 모든 책은 필사와 재필사 과정을 거친 끝에 본문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을 거라는 주장을 종종 듣습니다.
옛날 설교자들이 했던 방식으로 음주와 음행 같은 죄를 길게 늘어놓아 현대인의 이런 태도와 싸우려 해봐야 대체로 소용없습니다.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주정뱅이가 아닙니다. 간음의 경우, 피임의 도입으로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이 죄로 인해 여성이 미혼모가 되어 사회적으로 파멸하게 될 경우, 남자들은 순결을 깨뜨리는 죄를 지었음을 알고 그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결과가 따르지 않게 되었으므로, 저는 남자들이 그것을 전혀 죄로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우리는 듣는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자만, 원한, 질투, 비겁함, 비열함 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했다고 자부할 만한 처지가 전혀 아닙니다.
[13] 무대 뒤쪽
[14] 부흥인가 쇠퇴인가?
[15] 의사소통의 전제 조건
전쟁 중에 저는 한 노동자와 마귀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귀의 존재는 믿지만 “인격적인 마귀는 믿지 않ㄴ느다”고 했습니다. 토론이 진행될수록 대화는 양측 모두에게 점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대화는 양측 모두에게 점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서로 말이 엇갈리고 잇었습니다. 그는 인격적personal이라는 단어를 줄곧 유형의corporeal라는 뜻으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대단히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일단 이 사실을 발견한 뒤로는 대화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ㅐ 둘의 차이점은 어휘의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은 믿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말이 실은 나는 엄격한 의미의 신인동형론자가 아니며 이 부분에 대해 완벽한 정통 교리를 믿고 잇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기도서>의 개정 작업을 하는 분들과 저는 마로 이 부분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선험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저는 그 노동자의 어법이 우리와 같을 거라고 가정했습니다. 개정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서>의 치우침 없이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면 그 본의를 모두가 더 잘 파악할 거라고 가정했습니다. 저보다 세심하게 내린 판단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역시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16] 질의 응답
제게 가장 도움을 준 현대의 책은 체스터턴의<영원한 인간>입니다. 다른 책으로는 에드윈 비번의<상장과 믿음>,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 그리고 도로시 세이어즈의 희곡들이 있습니다.
독자적인 표현법을 개발하는 방법은 (a)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b) 정확히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는 저자가 뜻하는 바를 이미 아는 상태에서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자의 단어가 애매모호하면 독자는 그 의미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가끔 저는 글쓰기가 도로를 따라 양떼를 몰고 가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중에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열린 문이 있다면 독자들은 틀림없이 그리로 들어갈 것입니다.
3부
[1] 불버주의 -20세기 사상의 토대 ※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되어 거의 전문 발췌
에머슨이 어디선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일은 재난입니다. 장비를 단순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특정 유형의 사고방식과 견해 때문에 장비를 바라보는 자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재난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대담히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장미의 색깔은 우리 시신경의 산물로, 그 향기는 우리 코의 산물로 여기고, 결국 장미는 없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포괄적인 시각 상실 현상으로 200년이 넘도록 골머리를 앓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최근 우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은 우리가 콤플렉스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가 모종의 경제적 계급의 일원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옛날에는 백 명의 사람들이 어떤 것이 옳다고 여기면, 그것이 실제로 옳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프로이트주의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백 명의 정신을 분석해 보라. 그렇게 해보면 그들 모두 모성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여왕 엘리자베스(1세)를 위대한 여왕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근원으로부터 심리적으로 오염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백 명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따져 보라. 그렇게 해보면 그들 모두 자유방임정책 덕에 더욱 번성하게 되는 자본가 계급의 일원이라서 자유를 옹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근원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되어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첫째, 모든 사상이 그렇게 근본부터 오염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일부만 그렇습니까? 둘째, 그렇게 오염된 사상은 무효가 됩니까, 즉 그릇된 것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그들이 모든 사상이 이처럼 오염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도 기독교 신학이나 철학적 관념론 못지않은 사상체계임을 상기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프로이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는 나머지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 있으니 바깥에서 우리를 비판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걸터앉아 있던 나뭇가지를 잘라 버렸습니다. 반면, 그런 오염으로 자신들의 생각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도 무효가 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앉은 나뭇가지를 구해 냈고, 동시에 우리가 앉은 나뭇가지도 구해 준 셈입니다.
제가 돈 계산을 해본 후 은행에 잔고가 많다고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그리고 이런 저의 믿음이 소망적 사고가 아닌지 여러분이 알아내려 한다고 합시다. 저의 심리 상태를 점검하여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제 믿음이 사실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자리에 앉아 직접 셈을 해보는 거지요. 숫자를 확인해 본 다음에야 비로소 제게 그 정도 잔고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모든 사고 체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는 당사자의 소망이 무엇인지 추측하여 그의 생각이 오염되었는지 알아내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바보짓입니다. 우선은 그 생각들 중 어떤 것이 논증으로 성립되지 않는지 순전히 논리적인 근거로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원한다면 그 오류의 심리적 원인들을 찾아내십시오.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생각이 틀린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가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논의도 없이 그가 틀렸다고 가정 한 후 그가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게 되었는지 부지런히 설명하는 것이 현대의 방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주의를 분산시켜 무작정 그가 틀렸다고 가정한 사실(유일한 진짜 문제)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비결입니다. 지난 15년간 저는 이런 악습을 하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따로 이름까지 지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불버주의Bulverism라고 부릅니다. 언젠가 저는 그 발명자인 가상의 인물 이지키얼 불버의 전기를 쓸 생각입니다. 그의 운명이 정해진 시기는 다섯 살 때, 삼각형의 두 변의 합이 다른 한 변보다 크다고 주장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대꾸하는 말을 듣던 순간이었습니다. “아, 그거야 당신이 남자니까 하는 소리지요.” E. 불버는 분명히 말합니다. “바로 그 순간, 내 열린 마음에 위대한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논증에서 반박은 불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상대편이 틀렸다고 가정하고 그의 오류를 설명하라. 그러면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틀렸음을 입증하겠다고 나서거나(설상가상으로) 상대방이 옳은지 그른지 알아내려 하다가는 온 국민을 사로잡은 시대정신에 밀려 꼼짝없이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불버는 20세기를 만든 사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발견이 거둔 열매들을 도처에서 봅니다. “편안한 목사들은 19세기의 노동자에게 이 세상에서의 가난을 저 세상에서 보상받게 될 거라고 말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근거로 기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그에겐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류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동기를 가지고 기독교를 가르칠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눈에 잘 들어와 이 수법을 정반대로 써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도덕률을 거부하는 현대인은 그것에 영원한 구속력이 없다고 믿고 싶어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불버주의는 누구나 하루 종일 써먹을 수 있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소수의 기분 나쁜 집단에게 부당한 특권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민주적인 수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기독교가 옳은지 그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전혀 다른 근거에서 토의해야 할 사항입니다. 철학적 역사적 논증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식으로 답이 결정되든 상관없이,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을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엉뚱한 것일지라도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정치적 주장에서 불버주의가 활개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원하는 이유가 분명하다는 이유로 엉터리 경제학자 취급을 받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원하는 이유가 분명하다는 이유로 엉터리 경제학자 취급을 받습니다. 불버주의로 양쪽 모두를 내치는 겁니다. ~~~적대 세력의 심리에 대한 무례한 추측은 결코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닙니다.
불버주의가 타파되기 전까지는, 이성이 인간사에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양편이 처음부터 그것을 꺼내들고 상대편에게 무기로 휘두릅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서 이성 자체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성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계의 현제 상태를 보라고 하는 것이 쉬운 대답이 되겠지만, 진짜 답은 훨씬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성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 자체가 추론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불버 식으로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해서도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증명이 무효임을 증명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시도가 실패하면 물론 실패하는 겁니다. 만약 성공하면, 그것은 더욱 커다란 실패가 되고 맙니다. 모든 증명이 무효라는 증명이라면 그것 역시 무효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저히 자기당착적인 이 바보짓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불버주의자들이 이성을 사용하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오염을 지적하며 내놓는 온갖 증거에도 흔들림 없이 추론의 힘을 굳게 믿을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 끈덕진 믿음이 초월적이고 신비적이라고요? 저는 그런 요소가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미치광이가 되느니 신비가가 낫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고수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신론 없이 이성에 대한 믿음을 고수할 수 있습니까? ‘나는 안다‘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를 함축합니까? 제가 아는 모든 것은 감각으로부터(현재 순간의 감각을 제외하고) 추론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우주에 대한 모든 지식의 기반은 경험에서 이끌어 낸 추론입니다. 만약 추론이 실재에 대한 참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론이 우리의 사고를 진정한 통찰로 보게 해주는 틀과 우리 지식의 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출 경우에만 진정한 통찰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든 믿음에는 원인이 있는데 다음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합니다. (1)통상적인 원인 (2)‘이유’라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원인. 원인은 믿음 외의 다른 결과들을 낳을 수 있는 맹목적인 사건입니다. 이유는 공리와 추론들에서 생겨나고 믿음에만 영향을 끼칩니다. 불버주의는 상대방에겐 원인들만 있고, 자신에겐 이유들만 있음을 보여주려는 시도입니다. 원인들로만 설명될 수 있는 믿음은 무가치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토대가 되는 믿음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원리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지식의 근거는 공리와 추론의 확실성입니다. 만약 이것들이 원인들의 결과라면, 지식의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거나, 아니면 우리 생각에는 이유들만 있고 원인들은 없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은 소크라테스 클럽에서 처음 발표되었다가, 클럽 서기가 내용을 받아 적은 노트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가지 기준이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기치 기준이 사회적 요인들을 원인으로 해서 생겨난 결과물이라면 그것이 과연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도덕률을 환각으로 여기고 거부할 수도 잇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하는 윤리적 동기, 즉 도덕률을 미신에서 해방시킬 의무와 계몽을 퍼뜨려야 할 의무만은 환각이 아니라 실체로 여기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의지나 이성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존하는 존재이거나, 아니면 자존하는 어떤 사고나 의지의 식민지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내가 자존한다는 믿음은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이성과 선은 우리 바깥에서 자존하는 위대한 이성과 선, 즉 초자연적인 존재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루이스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또, 초자연적인 존재는 너무나 중요한 주제이기에 추상적인 논증으로만, 즉, 여유 있는 소수에 의해서만 분별될 수 있는 것일 리가 없다는 반론은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시대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신비가들과 철학자들의 발견 내용을 받아들여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의 기반으로 삼았다. 오늘날의 보통 사람은 그 짐을 스스로 지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인류가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실수일 수도 잇다. 아니면 인류의 운명을 다스리는 세력들이 엄청난 실험을 진행 중이어서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현인이 될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는 결국 절망에 빠지고 만다. 살아남을 길은 둘 중 하나뿐이다. 선각자의 말을 믿고 따르거나, 스스로 그 높이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자연 너머에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경계에 있다. 물질적 사건들은 영적 활동을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우리의 행동들은 상당 부분 영적 활동에서 나올 수 있다. 위대한 의지와 이성에 의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다.
자연과 초자연의 관계는 시공간 상의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초자연이 자연을 만들었다면 둘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초자연이 자연을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능력이 없고 감각 데이터를 통해 주어지는 재료를 재배열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상상력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정신들에다 의지와 이성을 부여할 힘이 잇는 위대한 상상력이 우주를 창조하는 것 또한 능히 상상할 수 있다.
※ 편집자:
불버리즘 (Bulverism) 은 순환 추론 과 유전적 오류를 추정 또는 겸손과 결합한 일종의 인신공격 수사 오류 입니다 . 불버리스트는 화자의 주장이 유효하지 않거나 거짓이라고 가정한 다음 화자의 동기 나 화자의 동기를 공격하여 왜 화자가 그런 실수를 하게 되었거나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하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상대방의 주장이 실제로 옳더라도) .
불베리즘(Bulverism) 이라는 용어는 CS Lewis 가 다양한 종교적, 정치적, 철학적 논쟁에서 자주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심각한 오류를 조롱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
Lewis는 1941년 에세이에서 이에 대해 썼으며 나중에 확장되어 1944년 The Socratic Digest 에서 "Bulverism"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2] 우선적인 것들과 부차적인 것들
[3] 설교와 점심 식사
[4] 인본주의 형벌론
[5] X마스와 크리스마스-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사라진 한 장章
[6] 크리스마스는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7] 눈 속의 비행 청소년들
[8] 진보는 가능한가?
[9]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
4부
[편지 모음]
[편집자의 글]
24년에 걸쳐 쓴 에세이와 편지들을 모은 이 책을 내가 ‘새’ 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 실린 대부분의 글이 책 형태로는 처음 출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의 유행들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생각하면, 이 글들은 이미 낡아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루이스가 쓴 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싶었다. 그래서 단명한 간행물들에 기고했던 그의 글들을 발굴하는, 길지만 행복한 임무에 착수했다. 수년에 걸쳐 여러 도서관을 뒤지며 빛바랜 신문들을 읽던 수고가 마침내 끝났다. 무엇보다도 책으로 든든하게 제본된 것을 보며 내가 느꼈던 만족감 이상을 그의 글 대다수를 처음 접한 독자들이 맛보기를 바란다.
이 새로운 루이스의 세계는 매우 다양한 출처에서 모은 것이기 때문에, 예상대로 내용이 상당히 뒤죽박죽이다. ~~~그 다양한 관심사들이 오히려 기독교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그 글들을 기고하면서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중에는 그가 해당 주제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고 건전한 입장을 변호할 절실한 필요를 느껴서 쓴 에세이들도 있고, 신문이나 잡지의 요청을 받고 슨 글들도 있다. <소크라테스클럽 회보>에서 발췌한 글들의 경우처럼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슨 글들도 있다.
루이스는 불가지론자로 보낸 세월 동안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왜 다른 모든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만을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는지, 기적은 정말 있는지, 있다면 어떤 목적이 있는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을 먼저 자문해 보게 되었다. 루이스는 1931년에 회심한 후 신앙에 대한 강연이나 글 요청을 거절한 적이 거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매우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되었다. 그는 동료 교수들, 산업 노동자들, 영국 공군 장병들, 대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논쟁을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다양한 경험에 힘입어, 전문 신학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이해하기 쉽게 전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사람들이 사용하고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임무를 자임했다. 그는 다른 업계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그 견해를 철저히, 끝까지, 완전히 끝장을 볼 때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유능한 불신자도 소크라테스클럽에서 루이스의 강력한 논리와 엄청난 지식과 맞서기는 어려웠다. 반면, 그는<코번트리이브닝텔레그라프>와 대중 잡지들에 실린 그의 글에서 볼 수 있다시피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언어와 논리를 조절했다. ‘종교와 과학’과 ‘그 사람의 문제’ 같은 글들은 명료한 논리와 적절한 비유를 활용해 소위 종교와 과학의 갈등‘에 대한 많은 대중적 오류들을 드러냈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내용을 이해하게 했다.
교육수준과 상관없이, 기독교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누구도 기독교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루이스가 글을 쓰기 시작할 당시 기독교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진짜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최근 여러 주교와 목사가 자신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글들을 쏟아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더 깊은 무지로 이끌었고, 신앙이란 아무리 애를 써봤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망적인 믿음을 심어 주었다.
교회에 대한 나름의 편견을 말하는 대신 정확한 정보를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와 <고통의 문제> 같은 명호가한 변증서들로부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천국과 지옥의 이혼> 같은 신학적 풍자, 우주여행 소설들과<나니아 연대기> 같은 (더 나은 표현이 없어서) ‘감추어진’ 기독교 서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했다.
루이스는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버린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라 불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기적적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저 두루뭉술하게 넘기거나 아예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기적에 대한 그의 에세이들을 이렇게 펴내는 일이 매우 시의적절한 듯하다.
그의 책 <기적Miracles>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실린 짧은 에세이들이 주는 이점이 한 가지 있다면, 이 글들은 긴 분량의 글을 읽을 여유가 없거나 읽다가 포기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루이스는 이렇게 적었다.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또는 신들에게) 나아갔습니다. 현대인의 경우엔 그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십니다.” 인간을 피고석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루이스는 ‘기독교 변증론“을 다룬 에세이에서 나름의 방법을 소개한다(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어떤 형태로건 이전에 출간된 적이 없는 유일한 에세이다). ”제 경험에 따르면, 지난주 나의 주된 문제였던 죄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그 한 줄기 빛이 상대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은 독자들은 솎어 내지 않고 그냥 자라도록 내버려 두면 결국 인간을 지배하고 마는 그 (겉보기에는) 작은 죄들에 대해 말하며 그가 제시한 여러 사례들이 떠오를 것이다. 다른 에세이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사람’의 문제‘를 읽은 독자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 오히려 그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1부는 명확하게 신학적인 내용의 에세이들을 담고 있다, 2부는 반 신학적인 글들을, 3부는 윤리 문제를 다룬 글들을 담았으며, 4부에는 루이스의 편지들을 출간된 순서에 따라 실었다. -1970년 5월. 옥스퍼드 지저스칼리지에서 . 월터 후퍼-
[Review]
논쟁은 정당한 토론의 방법은 아니다. 논쟁은 그냥 말싸움이다. 답을 먼저 정해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다. 정당한 토론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진 다음에 답을 찾는 것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논쟁이 연일 SNS를 달구고 있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이런 논쟁이 재미있다. 이유는 모든 사람이 이미 논쟁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버리즘 (Bulverism)은 C. S. Lewis 가 다양한 종교적, 정치적, 철학적 논쟁에서 자주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심각한 오류를 조롱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따서 만든 용어다 . 그는 “소크라테스 클럼 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의 생각이 틀린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가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논의도 없이 그가 틀렸다고 가정 한 후 그가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게 되었는지 부지런히 설명하는 것이 현대의 방법 입니다.”
20세기에 지성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C. S. 루이스는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무신론자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33세에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로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오랜 기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 학과장으로 일했다.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 사상들이 고지식한 ‘불버주의’에 치우쳐서는 대중들의 이해를 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 그는 그가 지닌 탁월한 지식과 언어의 선택, 논리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동료 교수들, 산업 노동자들, 영국 공군 장병들, 대학생들)에게 기독교가 옳은 것임을 입증하는 일에 헌신했다.
이 책은 루이스 사후에 그동안의 여러 원고를 바탕으로 하여 엮은 책으로 한때, 루이스의 개인비서로 있었던 ‘월터 후퍼’에 의해 출판되었다(1970년). 따라서 루이스가 생각하는 신학적 명제들에 대해 많은 내용이 단편적인 에세이, 질의응답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1부는 신학적인 내용으로 ‘악과 하나님’, ‘기적’, ‘교리와 우주‘ 등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모았으며, 2부는’국가적 회개와 위험‘, ’자아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종교의 쇠퇴‘ 등 반 신학적인 주제, 3부는 ’불버주의‘, ’인본주의 형벌론‘, ’눈 속의 비행 청소년들‘ 과 같은 윤리적 주제를, 그리고 4부에서는 루이스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들을 담았다.
편집자 ‘후퍼’는 이 책의 말미에 ‘편집자의 글’을 통해서 생전에 ‘루이스’가 한 말,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또는 신들에게) 나아갔습니다. 현대인의 경우엔 그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십니다.”에서 이 책의 제목 <피고석의 하나님>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은 기독교인으로 답변하기에 곤란한 여러 신학적 주제들을 저자의 독특한 논리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자신만의 고지식한 신앙 교리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뿐만 아니라 왜곡된 종교관으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비 신앙인들도 이 책에서 새로운 변화를 얻을 수 있다.
<본문>
“모든 생각과 모든 사고 체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는 당사자의 소망이 무엇인지 추측하여 그의 생각이 오염되었는지 알아내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바보짓입니다. 우선은 그 생각들 중 어떤 것이 논증으로 성립되지 않는지 순전히 논리적인 근거로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원한다면 그 오류의 심리적 원인들을 찾아내십시오.”(본문. ‘불버주의-20세기 사상의 토대’)
“우주의 상황이 나아진다고 하려면 우주의 흐름 너머, 그 바깥에 자리 잡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준에 가까워지는 것을 나아진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더 나은 상태가 그저 우리가 변해 가는 모습을 뜻한다면 더 나아짐은 무의미한 말이 됩니다. 그건 마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자축하면서 자신이 도착한 장소가 목적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래숭배는 혼미한 종교입니다.”(본문. ‘악과 하나님’)
“어떤 면에서 볼 때 최근의 현대 과학은 기독교 교리와 한편이 되었고 고전적 형태의 유물론과 결별했습니다. 현대 물리학을 통해 자연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우주에는 시작이 있었고 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거창한 유물론 체계들은 모두 물질의 영원성과 그에 따른 물질의 지존성을 믿었습니다.”(본문. ‘교리와 우주’)
“실제 사건들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어떻게 보면 해답은 간단합니다. 각 사건은 그 이전 사건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사물들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어떻게 해서 사건과 공간과 물질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묻는 것과 정확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문제의 내용은 사물들이 아니라 사건들입니다. 물질의 입자들이 아니라, 이 입자와 저 입자의 충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본문. ‘자연 법칙’)
“기독교의 메시지를 자신의 생각과 구별하려는 양심적인 노력은 변증가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노력은 기독교에서 모호하게 느껴졌던 대목, 거부감이 드는 요소들을 직시하게 해줍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건너뛰거나 대충 보거나 무시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납니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은 기독교 지식을 쌓는 일에 결코 진보할 수 없습니다.”(본문. ‘기독교 변증론’)
“우리가 비참함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아니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우리 각 사람 위에는 짐이 하나씩 얹혀 있고 그것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 짐이 우리를 실제로 부서뜨릴 것이고,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온전한 영혼이 아닌 부서진 영혼으로 내세에 벌어질 일을 맞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본문. ‘비참한 범죄자’)
“우리는 사건들을 일으키는 방법 두 가지, 즉 노동과 기도를 허락받았습니다. 노동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알아서 제공하심을 합당하게 여기지 않으신(적어도 아직까지는) 시대들을 일으키려 노력합니다. 이 점에서 둘은 동일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노동은 기도다 Laborare est Orare"라는 오래된 속담은 새로운 의미를 띰니다. 밭의 잡초를 뽑을 때와 풍작을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본문. ‘노동과 기도‘)
“자아는 두 가지 방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사랑하고 기뻐해야 할 대상입니다. 현재 혐오스러운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가엾게 여기고 치료해야 할 존재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나’, ‘나’를 내세우고, 그것을 근거로 불합리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주체입니다. 이런 주장은 미워해야 할 뿐 아니라 그냥 죽여야 합니다.“(본문. 자아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옛날 설교자들이 했던 방식으로 음주와 음행 같은 죄를 길게 늘어놓아 현대인의 이런 태도와 싸우려 해봐야 대체로 소용없습니다.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주정뱅이가 아닙니다. 간음의 경우, 피임의 도입으로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이 죄로 인해 여성이 미혼모가 되어 사회적으로 파멸하게 될 경우, 남자들은 순결을 깨뜨리는 죄를 지었음을 알고 그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결과가 따르지 않게 되었으므로, 저는 남자들이 그것을 전혀 죄로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우리는 듣는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자만, 원한, 질투, 비겁함, 비열함 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했다고 자부할 만한 처지가 전혀 아닙니다.”(본문. ‘피고석의 하나님‘)
“그렇다면 자연 너머에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경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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