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오늘은 "신앙의 계보를 통해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마태복음
1:1-17절 내용은 다 아시는바 대로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직계(直系),
그러니까 부모에게 자손이 여럿이 있어도 하나님의 목적, 뜻을 따라서 사는 사람,
한사람만 올라간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족보의 시작이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언약을 맺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족보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그 역사성,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역사적인 일이라는 것,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족보를 기록하는 것으로 말해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나신 것까지 족보를 기록해놓고,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7절 마지막절에 가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께서 까지 열네 대"라고
이와 같이 세등분으로 나누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대해서 열네 대, 열네 대, 열네 대, 이렇게 삼등분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함으로서 이제 시대를 구분해 주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때부터 약속으로
내려오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족장 시대(사사 시대)라고 합니다.
또 다윗부터 바벨론까지는 왕정 시대, 즉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바로 선지자의
시대입니다.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는 포로 시대(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있었던
그런 시대가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는 포로 시대,
'암흑 시대'라고 합니다. '암흑 시대'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못한 시대,
즉 말씀을 전해주는 선지자가 없는 영적 어둠의 시대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왕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해주는 선지자도 예언자도 없어서,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해있던 그런 시기, '암흑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처음 사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그 복음의 약속이 어디서부터
나타났는가? 어디서부터 나타났습니까? 아브라함때 부터, 바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때부터 이 복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아들 이삭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한 산에 데리고 올라가서 거기서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지체치 않고 즉시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번제로 바치려고 이삭을 결박해서 칼로 잡으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이
불러 멈추게 하심으로서 이삭이 죽을 위기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안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나를 가리켜서 맹세하는데, 내가 너에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으로 여겨서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확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에 그 어떤것도 하나님보다 더 높이고 더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진심을, 즉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확인했다'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진심이 하나님께 확인된바 되었다'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었던 그것은? 곧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거였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이삭(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경외하는 믿음이 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하시는 것이 되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 또한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주는
것으로 자기가 '자기의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구나!'하는 자기 믿음에
대해서 확증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기 자신에게도 확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을, 독자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으로 나타냈기 때문에, 이것이 근거가 되어서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아브라함에게 내어주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것이, 만세전에 이미
계획된 일이었지만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일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이 구주이신
우리주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서는 그 일을 인간 쪽에서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순종하겠다는 것을, 인간쪽에서도 하나님께 그 믿음을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었다'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구체적인 근거가 된 것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아끼지 않고
번제로 내어드렸기 때문에 그래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창) 22: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에게
네가 이렇게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만 일방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나도 내 독자를 너와 네 후손에게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겠다"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도 말씀하신 뜻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절대적 순종,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하나님 자기 목숨을 내어놓겠다는 것을
맹세하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독생자의 약속이 시작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말씀, 그 언약, 그 약속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자기 독자를 아끼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나도 너를 사랑하는데 내 목숨을 걸고 하는 맹세로 독생자 예수님을
주겠다고 하는 약속,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약속이 그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태어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주로 보내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씨로 주신 것입니다. 구주로 보내시겠다는 그 약속하시는 '씨'로 주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것에 대한 약속의 씨가 되는 것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가 구원받아 영생하는 생명을 얻게 하시는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지만, 그러나 이삭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에서, 바로 '예수님을 말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씨'라고 할 때, 이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요, 예수님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게 씨를 주겠다' 하는 것은? 곧 누구를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주겠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너희의
후손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을 때는 곧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할 때는
우리는 성경볼 때 누구로 봐야 됩니까? 바로 예수로 봐야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얻는 자들
까지를 말할 수가 있게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이 언약의 내용을 깨달은 믿음이 아니면? 갈라디아서의 말씀,
특히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이해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갈)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것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 언제 약속하셨느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때에 그때 약속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것이 뭐냐? '씨'라는 말입니다. '자손이다'는
말입니다. "그 자손이 바로 예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미친 그 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그 복이 미친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 이방인에게까지 미친 그 복이라고 하는
것은?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그 복음을 받은 것이 복이요, 복을 받은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복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돈많아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갖추고 사는 것, 명예 있는 것, 무병장수하는 것 등등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하신
것을 곧 인간이 생각하는 복에다 연결시켜서, 예수 믿으면 그 복주신다는 것으로
연결시켜 열심히 그 복 받기 위해 근거가 불확실한 믿음 생활들을 하고 있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의 크기를 깨닫고 그 복을 소유하는 믿음이 되어야 할텐데,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다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 생각하면 행색(行色)이 초라해 보이고,
예수님 생각하면, 삼년반 동안 제자들하고 거리 누비면서 행색이 초라해 가지고 거리를
누비면서 먹을것도 입을 것도 보면 보여질 수 있는것도 아무것도 없고, 먹을 것이
없어 제자들은 남의 밭에 밀이삭이나 잘라 먹음으로서 비난이나 받고,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하고 다니시니, 집도 절도 없다는 줄로 착각하면서, 예수님 생각하면 왠지
가난해져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예수님에 대해 별 흥미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하고 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구약의 말씀만 열심히 붙잡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셨으니, 입을 넓게 열어서 세상 것 열심히 구해라! 하나님께서 '네 지경을
넓혀주신다'하셨으니 꿈을 크게 가지고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은 세상 것을 채우겠다고, 세상 것으로 지경을 넓혀주겠다고 하신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이해를 못하고, 하나님께서 세상 것 구하라고 하신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들이 되어서 열심히 구약의 말씀을 붙잡아 잘 못 구하고 있는 것들이 되어있는
겁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라는 그런
말들을 많이 하잖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이런 말들을 아주 쉽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이 예수님하고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된 자로 살면서 예수 믿는 그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자기 생각은
전혀 관계없는 자기를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말할 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라는 말을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인간 사랑할 건덕지가 뭐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실만한 것이 도대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어떤점이 사랑스러우실까요? 예수님은 뒷전에 두고 돈에만 집착하는 것이
더 예뻐서요? 세상 따르는것이 예뻐서요? 예수님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사랑하는것이
더 기특해서요? 그저 '말씀 좀 사모해서 따르라'하심에도 외면하는 자기들이 예뻐서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아니면 소망도 가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정말 예수님 아니면
소망없어요. 가망없는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해 볼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착각에서 벗어나 겸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바쳤을 때에 "나도 너에게 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고 너의 모든 후손에게도 주리라"
하신대로, 구주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 그래서 그 예수님을 내가 영접하여
모셔들여서 예수 그리스도로 살기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기 위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사건은 아브라함의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요, 또한 예수 믿는 나와 연결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연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로 하나님께 믿음을 어떻게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의 그의 믿음, 그 믿음을 우리도 정말
가질 수 있어야 되는 믿음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후사(後嗣)라고 할수 있는
그러한 믿음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렇게 볼 눈이 없으면?
그 믿음은 불완전한 믿음이 될 수 밖에는 없는겁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노아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라는 인간이야기로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했습니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전체가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이루어져야
되리라' 한 말이 지금 이루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성경에서 인간 삶의 도리를 찾아내려고만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 삶의 도리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은 그러나 도리만 찾고 도리에서만
끝나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은 없어져버립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여자와 남자가 한 몸 이루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믿는 자는
신부가 되어서,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셔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곧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되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리가 되고, 인간의 교훈으로 전락해 버릴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하니까 그것이 또 인간이 생각하는 그 세상적인
복을 말하는 것인줄로 알고, 다시 말하면 잘먹고 잘사는 복이 자손대대 천대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남의 집 기도해줄 때도 그것을 열심히 주워섬기며
기도하고 빌고 있잖아요? "이 가정에 자손 천대까지 복이 이르게 해주세요! 그 복,
잘먹고 잘사는 복 이루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그렇게 열심히 주워섬기며
빌고 있고, 말씀전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전하고 있지않는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으니까, 인간은 이런것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잖아요? 인간의
심리는 그것을 너무나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으니까
사람은 그런대로 꼬여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모여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바라는 것, 자기가 지금 제일 소망하는 것에다가 맞추어 주는데, 듣지않으려고
피할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듣지않으려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그런 세상적인 것에다 맞추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사람들의 육신의 것들 주기위해 전하는 것이 되어있다면? 예수 믿는 것을
"입을 넓게 열어 세상것이나 구하고 지경을 넓히는 것"으로 구하고, 예수 찾고 부르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사람과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상관없게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날에 하나님의 싫어버린바 되어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는 없다는 그 말입니다.
(마) 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에 그것을 말씀하신것 아닙니까? "실족케 하는 일들을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있다! 왜 실족시킵니까?
예수 믿는
믿음을 세상 것에다 맞추어 주니까 그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입니다. 그의 정신만
개발시켜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 땅에 삶에다만 목적을 두도록 맞추어준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을 실족시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실족케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즉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은, 말해줄 수도 있지만은)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서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라고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혈통이, 신앙적 혈통이
천대까지 존속되어야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 천대까지 복을 주시겠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신앙적 혈통이 천대까지 이어져야 된다'하는 그것을 말씀해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대에 이르도록 신앙의 혈통이 계속 되는 것, 신앙의 혈통이 끝나는 것은 저주이기
때문에, 신앙의 혈통이 끝나면 저주요, 예수 오실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혈통이 끝나는 것은 저주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저주가 따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신앙혈통이
존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요, 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이제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 사는
우리들도 똑같이 예수님의 족보에 그대로 정말 올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전부다 모두가 다 정말 예수님의 후손으로서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족보에 그대로 올라가 기록되는
역사가 나타나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러니까 1:1절 첫마디부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고
나온 것 아닙니까? 이와 같이 누가 누굴 낳고 누굴 낳고가 계속 이어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실때 까지 신앙의 혈통이 이어져야했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천대까지 이르는 은혜의 뜻, 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오직 남자나 여자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해야 되는 그 사명을
안고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어본 이 족보 속에도 보면? 여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3절에서 '다말'이라는 여자가 족보에 올랐습니다. 다말(Tamar)이라는 여자는
시아버지를 통해서 자식을 얻은 여자입니다. 우리 다들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윤리와 도덕을 버린 천하고 무식한 여자, 수치도 모르는 인격이
없는 여자로 밖에 보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러나
다말은 남편과 남편의 형제에게서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어코 신앙의
혈통을 이어가야했기 때문에, 신앙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자신이 며느리인 것을 숨기고 위장하여 그 유다를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것입니다. "다말이 음란한 여자라서, 남자 좋아하는 여자라서 그런것이 아니라,
신앙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행한 다말의 간절한 신앙적 행위였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는가 하면? 인간 윤리 도덕, 인간의 도리가
구원을 주고 하늘의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바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신앙,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5절에 보면 라합(Rahab)이라는 여자가 올라있습니다. 라합은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이제 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그 여리고 성을 지나가야 되는데,
굉장히 여리고 성이 튼튼하게 지어진 성입니다. 그 성이 딱 가로막고 있어서 지나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거기에 들어가서
정탐해 볼 때, 여리고 성의 이방인, 그 기생 라합이 여호와의 품성(品性)을 듣고,
여호와의 백성과 함께 하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듣고,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인 여자입니다. 그래서 그 이방인의 기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함께하는 이스라엘을 영접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은 여자입니다.
그 다음
같은 5절에 룻(Ruth)이라는 여자가 올라있습니다. 룻도 이방 여자로서 시어머니
나오미(Naomi)가 섬기는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 섬김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큰 복을 받은 여자입니다. 이 룻에 대해서 정말 룻기서에 보면은 룻에
대해 자세히 나와있어요. 여러분 룻에 대해서 들어가서 한번 보십시오. 룻과 같이
친해지는 그런 경험을 해보시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6절에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고 해서 우리아의 아내는? 밧세바(Bathsheba)라
하는데 '솔로몬을 낳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다윗왕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이 두사람이 간통했습니다. 아무튼 다윗 왕의 첩이 되어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세하게 그 밧세바에 대해서 기록은
되어있지 않기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 서명은 제가 더 드릴수는 없지만,
그러나
신앙이 있는 자만 이 족보에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밧세바가 정말 "왕의
자손을 낳고싶다는, 왕의 자손을 낳아서 대를 이어서 정말 신앙을 잇고 싶다!"는
그러한 간절한 소망이 있어서 아마 이 다윗을 유혹하는 그러한 모습을 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제가 해보는 것입니다. 왕의 자손을 낳고 싶은 그 소원, 그것은 곧 신앙의
혈통을 잇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밧세바가 그와 같은 "그 신앙의 자손을 낳기 위한
그런 어떤 간절함으로 이 다윗왕과 함께 간통을 했다"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전후 시대를 '족장시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전후 시대가
족장시대) 그래서 '족장시대라'하는 것은? 가부장제(家父長制)가 엄격한 시대입니다.
가장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으로 권위가 대단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이)제사장
역할까지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장자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권위가
계승되어짐으로서, 장자 계승권을 절대적으로 쥐고 행하는 이스라엘의 전통이요,
관습이요, 그들의 역사였습니다.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그런데 오늘 2절에 보면은 아브라함의 장자는 누구입니까? 이스마엘이잖아요?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인데,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첫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을 낳고가 아니고, 누구를 낳고? '이삭을 낳고'한 겁니다.
또한
이삭(Isaac)도, 이삭의 아들 중에 누가 장자입니까? 에서(Esau)가 장자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낳고' 했습니까? '야곱(Jacob)을 낳고'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했는데, 야곱의 실제 장자는 르우벤(Reuben)이라는 아들입니다.
그 뒤에도 계속 살펴보면 실제 장자들이 아닌 자가 많이 올라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시고,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은 뭐냐?
하나님은 인간의 전통과 윤리도덕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전통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셨다는 말입니다. 비록 허물이 많을지라도, 이방인이 되었든, 기생이 되었든,
장자가 아니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통이나 윤리 도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로
흘러왔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장자라 할지라도, 에서가 장자라 할지라도, 라합이 이방인의 기생이었다
할지라도, 룻이 개 취급당하는 이방인의 여자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신앙으로
따라오는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이루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신겁니다.
하나님은 '신앙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이 되게하셨다'
그 말입니다.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부터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신앙의 혈통으로 이어진
이 족보를 통해서 성취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잘나고, 못나고, 돈있고, 돈없고, 또 학벌이
있고, 없고, 이런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기의 혈통 그 족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하여, 그것을 자랑하는 것들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느냐?'하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믿음만 보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르고 있느냐?' 그것만 보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혈통, 전통,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는 다 눈감아 버리고 듣지않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는 다 필요없습니다. 예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여 인격적 교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냐? 하는 것을
보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래서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누구께로
난 자들이예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사람은 이제 사람의 혈통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자다'라고 말씀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혈통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 바로 예수님의 혈통, 그 혈통에 들어간 자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혈통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정말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가
되어서 그 혈통에 들어가셨다는 자기 자신의 그 혈통에 대해서 분명히 믿음을 갖고
계시나요? 여러분 그 믿음 갖고 계세요?
이제는
사람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혈통에 대한
그 믿음에 대해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밖에
벗어나서 자기 뜻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 명예 때문에, 출세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시켜 놓는 사람, 말씀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아버지는
농부다" 예수님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포도 나무다' 그러니 농부가
자기가 심은 나무를 날마다 보살피고 흙 돋아주고 거름주고 잘 키우는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 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겠어요? 우리가 복을 받을 길은? 오직 그 나무의 가지가 되는 것임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님은 내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은 관심이 나에게 있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온갖 정성들였더니'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것
아닙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 한답시고 온갖 정성 들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심없이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온갖 수고를 다 했어도, 하루 스물 네시간
기도만 했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도 두지않고, 예수님을 생각도 하지않고,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는 것들은 다 헛소리 라는 것입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아버지께로서 나오는 진리의 성영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영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인데, 그래서 성영이 임하신 자는, 성영을 모셔들인
자는 무슨 온갖 정성드리러 그런것 부터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뭐부터 생기는가 하면?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부터 생긴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부터
하게 된다!" 정말 그것을 말씀해주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부터 깨달아 알고 확실한 믿음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지금
예수님과 함께 살고있느냐?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 되어서 그 예수님으로
살고있느냐?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너희 구주다'하신 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수천년동안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하시고, 또 사람을 보내서 사람들에게 외치면서 확인시켜주고
또 외치며 확인시켜주시고, 인간은 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않고 그대로
이루어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땅에 오신 분이시다"그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오늘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를
계속 그렇게 족보를 기록하시는 것으로, 예수가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를 또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면서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이 귀하신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알기원하여, 얼마나 듣고 배우시는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저는 정말 생각해보는 겁니다. 이 깊은 수준을 듣는
분들이, 관심을 두실까? 정말 관심을 두실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 다 모른다고 구원받는데 지장이 있겠느냐? 내 관심은
그저 돈 좀 많아서 세상에 근심걱정 없이 살면서 사람들이 하는 것, 사람들이 하고
사는 것, 나도 좀 하고 살고 싶은 것 뿐이다!"하고 그런 세상에다 관심을 기울이고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말씀들은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정말 제 자신이 누구를 가르치려고, 예수님 아는데, 예수님으로 사는데 능력을
가지려고 달려왔던 것 아닙니다. 누구를 가르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살리려고 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바로 알아서 내 영혼의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정말 간직할까? 하고 그 사모함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할까?" 하는 그 마음 그
사모함으로 지금까지 그 애씀으로 지금까지 제가 달려 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 앞에 세우셔서 이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여러분이 정말 세상따르던 것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는 그
신앙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죽음 앞에 서야 되요!
죽음 앞에 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영원의 것 뿐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 앞에 설 때, 우리가 정말 가야 될 곳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옥도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고, 천국도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고, '영원히 영생한다고
말씀해주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죽음 앞에 서야됩니다.
죽음앞에 선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영원의 것 뿐이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정말 참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뭐냐? 정말 사람이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마음에 채워져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속에서 그것 밖에 나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보고 배웠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 죽음앞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속에 그 마음에 세상 것으로만 가득차 있으면, 먹고, 입고, 쓰는 것 그것만
가득차 있다고 한다면? 죽음 앞에서도 그것만 말하고 죽습니다. "너희들 내가
걱정스러워서 눈도 못감겠다! 어떻게 먹고 살지!"하는 그것만 말하고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에 세상 온갖 잡동사니로 채운 사람은? 늙으니까 그 속에서 그냥
세상 온갖 잡동사니만 쏟아져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쓰레기만 들어있더라!
입에서 쓰레기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속에 예수만 계시다면? 늙어서 기운이 없어 정신이 몽롱해도 뭐가 나오겠어요?
자동적으로 예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마음 속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늙어서 정신이 흐려져 간다 할지라도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 밖에
안나오더라! 그것을 제가 보고 배운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 먹어 늙어서 하나님 앞에
갈 때가 가까울 때, 여러분 속에서 무엇을 내고 가실겁니까?
세상에
유치한 그런 것, '아이구! 맛있다! 맛없다! 배고파! 밥줘!'그러니까 사람이 정신이
흐려서 말입니다, '늙어서 망령났다'그러잖아요? 그래서 뭐만 찾습니까? 속에 그것만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밥)만 찾습니다. 금방 먹었어도 또 밥 찾는 겁니다. (그것밖에
들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앞에 갈 때가 가까울 때,
무엇을 내고 사시겠느냐? 말입니다. 무엇을 내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유치한 그런 음식이나 찾고 말입니다. 잘하니, 못하니, 너 때문이니, 좋으니, 나쁘니,
뭐 맨 이런 것 따지다가 이런 것이나 내고, 앉아있다 가실 것이겠는가? 말입니다.
우리 잘 생각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교회 성도님들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르고, 내가 좀 힘든다 할지라도, 예수님 사랑하는 그런 믿음이 되셔서
내가 죽음 앞에 갈 때까지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했고 너희들도 예수 잘 믿다
오너라!"하고, 그 말 내고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예수님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