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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의미와 가치, 그 치유시학적 해석
- 박 철론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본래 시는, 자동화로 습관화된 지각을 지연시켜, 세계를 자아화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시를 읽는 것은 세계 속에 있는 시인의 내밀한 경험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경험 중에서도 시인의 특별한 경험인 체험은 자기의식 속에 어떤 의미가 녹아 있다. 이 의미에 의해 체험은 지향성을 갖는다. 그의 세계 인식은 <무제, 진리가 평화롭다>에 잘 피력되어 있다. ‘세상은 가로도 세로도 아닌 둥글다/ 둥근 세상은 모서리가 없어서/ 상처도 없다/ 그래서 상처가 생기면/ 상처 받는 몸/ 누가 치유할까?’라는 이 시의 두 번째 연을 보면, 시에 표상되는 이미지는 ‘둥근’ 형상임을 알 수 있고, ‘세상은 둥글다’라는 명제는 그의 삶과 시가 지니고 있는 연관성에 의해 그때그때 실제로 감각되고 파악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하겠다. 특히 <작은 소망>이란 시의 결미에, ‘밥은 중요하지 않다/ 술도 이제 그만이다/ 시를 먹고/ 시를 마시며/ 시와 함께 친구가 되어 살아가자’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시인에게 시는 온전한 삶을 획득하고자 하는 투쟁과도 같았다고 하겠다.
박철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두 번째 시집을 출판한 지 7년 만에 다시 시집을 출판하니 초등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쓰는 일기장 같다.’라고 겸손해 하면서 오만과 자만을 경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약속을 잊어버린 아이에게 꾸지람을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다시 펜을 잡기 시작하고 ‘흐트러진 글들’을 모아 출판을 감행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비록 그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시를 ‘일기장 같다’거나 ‘흐트러진’ 글이라고 하나, 평자는 그런 모습에서 시인의 훌륭한 인품을 볼 수 있었다. 역사와 시대 앞에, 활자와 독자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갖추는 거 말고 시인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가 찾고자 했던 진리는 오직 하나다. ‘진리가 평화롭다’라는 시인의 화두는 ‘진리’와 ‘평화’를 등가적으로 나타내며, 이 시집 안에서 그것은 ‘상처’의 ‘치유’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감춤’과 ‘드러냄’의 변증법 위에 형상화된 그의 시에는 메타포의 원리에 의한 간접적인 정서 표현은 물론이고 직설적인 날것의 감정 표출이 공존하고 있어 멋도 향기도 난다.
II.
시집은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인이 친절하게도 서문에 설명을 잘 해놓았다. 제1부 제목은 <시, 끝없는 사랑>이다. 제2부는 <꽃, 나무를 사랑하며>, 제3부는 <짧은 글, 긴 여운>, 제4부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 제5부는 <신앙을 고백하며>로 되어 있다. 평자는 왜 시인이 <시, 끝없는 사랑>을 제1부에 먼저 놓았을까를 생각했다. ‘시, 끝없는 사랑’에는 시인의 시론이 압축되어 있다. 그는 실천은 잘 못하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좋은 일, 착한 일, 존경받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다. 1부에서 5부까지 비슷한 소재나 주제끼리 범주화해 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삶의 근원을 알고자 했고, 자신을 위협하는 많은 사회적 기제들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탐색하며, 오랜 시간 동안 시로 풀어나갔다. 그의 시는 삶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존재론적 사유의 흔적들이다.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었던 과정을 애정의 눈으로 살펴보았다.
시를 쓴다는 서글픔에 녹아든 오욕칠정
쇠사슬이 온몸을 칭칭 감아도
나는 시를 쓴다
그 속에서 내가 자라고 숨 쉬는 것
아름다운 무리들이 나를 유혹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가슴을 후빌지라도
나는 시를 쓴다.
달빛 아름다움에 취해 밤을 하얗게 보내고
태양의 눈부심에 반해 정처 없이 걸어가더라도
내일은 또 내일을 잉태하는 어리석음에
나는 시를 쓴다
내면의 무식이 표현되고
나락에 떨어져 손가락질 받더라도
칭찬 받은 아이처럼 도도하게
나는 시를 쓴다.
- <시>, 전문
무엇보다도 이 시는 ‘~라도‘ 나는 시를 쓴다’라는 후렴구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경우에도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현실태’로 표현함으로써 강한 실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면의 무의식이 표현되고/ 나락에 떨어져 손가락질 받더라도/ 칭찬 받은 아이처럼 도도하게 나는 쓰를 쓴다’ 는 마지막 연을 봐도 후렴구는 ‘가능태’가 아니라 ‘현실태’다. 이 시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형식도 알아야겠지만, 그 작품의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작품 외적인 것도 부분과 전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연의 ‘내면의 무의식이 표현되고’인데, 이 부분만 해석하면, 자신의 내면과 처절하게 대면한다고 볼 수 있지만, 다시 연결되는 ‘나락에 떨어져 손가락질 받더라도’와 이어서 볼 때, 진실만 쓰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무의식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무의식 밖으로 나올 때 언어기호의 껍질을 쓰고 나오는데, 시인은 껍질을 벗고 알몸으로 독자와 소통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기능 중에서도 카타르시스를 통한 치유를 중시하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의 첫 시 첫 연 첫 행에 있는 ‘오욕칠정’이란 단어도 이 시집의 치유시학을 이해하는 데 키워드로 작용한다. 오욕칠정 중에서도 마음의 고통인 괴로움은 시인이 삶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집착이 내재된 마음과 육체가 겪게 되는 경험의 모든 양상은 괴로움이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식의 변화에 따라 획득되는 것이 아닌가. 시인이 ‘쇠사슬이 온 몸을 칭칭 감아도’ 시를 쓰겠노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해왔음을 알 수 있다. 본질에 집중한다는 것은 언제나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시인의 말에서 피력한 바와 같이 그가 시를 쓰는 것은 일종의 ‘시에 대한 구애’다. 박철의 시작행위는 마음의 본질에 집중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확립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내가 자라고 숨 쉬는 것’이란 어구에서 ‘그 속’이 시 속을 의미한다고 할 때, 시인은 언어를 통한 자신의 존재 본질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사고와 감정의 질적 변화, 즉 치유를 경험하는 것은 확실하다.
모든 글쓰기의 알파와 오메가는 첫 문장 쓰기라고 알려져 있고, 대부분의 시인은 도입부에 사활을 거는데, 박철 시인은 도입부가 아니라 결말부에 승부를 거는 화룡점정의 기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다른 시인과 차별화되는 시적 기법이라 하겠다. 수필과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컨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을 정도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건다는 것이다.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문학의 멋과 묘미는 치환에 있다. 박철은 이런 ‘발단의 예술’이라 불려져 온 시를 ‘종결의 문학’으로 인식한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 알파와 오메가다’를 ‘모든 시는 마지막 문장이 알파와 오메가다’로 치환한다. ‘이것’을 ‘저것’으로 변환하여 생성시키는 데 문학의 본질이 있기에 김지하 시인마저도 ‘문학은 어불성설’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문학작법의 본질과 한국인의 사유구조가 귀납적 추론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마음이 쓸쓸한 날
일상의 일 접고
축축해진 마음 달래려고
생각 없이 길을 간다
들바람이
유월의 밭고랑을 넘고
콩밭의 잎들 파도를 타며
포말처럼 다가오는
하얀 물결의 노랫소리 듣는다
뭉치고 맺혀있던 마음의 응어리
고운 햇살 쏘이며
쉬운 길로 걸어가 본다
들풀의 향기로운 냄새 맡고
아이처럼 수줍은
들꽃의 함박웃음 보며
먹구름 밀려와도
툭툭 털고 일어서야 한다
먹먹해진 가슴
쓸어안고
생각 없이 길을 간다
- <해고, 생각 없이 가는 길>, 전문
위의 시를 보면, 박철 시인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를 알 수 있다. 시인은 시인의 역할을 ‘상처를 치료하는 데’ 두고 있다. 이 시는 해고 노동자들의 슬픈 사연을 접하고 쓴 작품이다. 시인은 이 반인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구름이 밀려와도’ ‘툭툭 털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시인은 이 부서진 세상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박철의 시는 현실인식에 대한 치열성을 드러내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축축해진 마음’ ‘뭉치고 맺혀있던 마음 응어리’ ‘먹구름’ ‘먹먹해진 가슴’ 등의 직설적인 어구로 인한 시의 느슨한 긴장미를 시인은 ‘들바람’ ‘파도’ ‘포말’ 등의 구체어로 병용해서, 끓고 앓는 격정의 해고당한 근로자의 심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저항의식을 드러내어 현실과 맞서기보다 불완전한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유지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러한 긍정은 ‘쓸어안고, 생각 없이 길을 간다’ 라는 함축적인 어구에서 엿볼 수 있다.
새롭다 새롭다
내일부터는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시작하라 시작하라
무엇이든 다시
또 다시 시작할 것이다
생의 첫날처럼
오늘이 생의 가장 젊은 날
맞이하는 모든 사물과 친구가 되고
가장 멋진 대화를 꿈꾸어 보라
경험하지 않는 모든 행동을 하라
남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리더라도
꿈꾸는 자의 행복을 맛보아라
나의 길에
스스로 박수를 쳐라
의기양양하게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
현실의 장막을 깨부수어라
이야기를 만들어라
무용담일지라도 멋진 돈키호테가 되고
테스형처럼 살아보라
- <작은 소망> 일부
그렇다면 박철 시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시 후반부, ‘나무를 붙잡고 씨름도 하고/ 돌들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하고/ 흐르는 물 위에 신발을 띄워 보내라/ 여행을 가자/ 약속 없이 이정표를 보지 말고/ 무작정 빗길을 걸으며/ 뜨거운 태양을 맞이하며/ 별빛을 따라/ 달빛 아래서 수영도 하고/ 휘파람 불면서 걷자’란 시구에 잘 나타나 있다. 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고 보는 게 우주 인식의 원리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맞이하는 모든 사물과 친구가 되고/ 가장 멋진 대화를 꿈꾸어 보라’는 권고의 메시지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서정 자아의 권고는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주관적인 정서가 언어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삶의 문제들을 ‘인식-도모-실천’이라는 과정을 거쳐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박철의 시는 삶의 문제에서 비롯된 마음의 괴로움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라 하겠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포에트리 테라피‘라는 게 있다. 시적 화자가 계속해서 한 시 안에 여러 번이나 ‘~할지라도’를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것의 함의를 포착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도전의식만으로도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빈 의자가 눈물 나는 시간
남아 있어도 빈 공간이다
불이 꺼진다
분주한 하루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갈 길 재촉하는 걸음걸이는 무겁다
혼자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고
외로운 사람
외로운 시간은 늘어나고
뼛속까지 시린 상실의 시간
공허함은 쌓이고
고독을 넘어
발버둥치는
혼자의 시간
그래도 괜찮다
언제 스스로 혼자였던가
사이는 벌어지고
마음은 가까운
일상의 변화에
스스로 만족하는 공간
희망이 보인다
지구가 숨을 쉬고 있다
- <코로나19>, 전문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감히 이 시집 한 권을 권한다. <1부>에 놓인 이 시 <코로나19>는 역설적인 관점이 주는 반전의 맛이 쾌미다. 어느 날 문득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해온 반갑지 않은 바이러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지 바이러스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팬데믹시대에 작가라면 코로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정착과 이탈의 가능성을 찾아 바이러스는 우리의 문을 열고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들어오려고 한다. 이런 생사의 경계에 살면서도 시인은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근거는 ‘지구가 숨을 쉬고 있다’는 진술에 놓여 있다. 역설의 묘미가 빛나는 시임에 틀림없다. 이 시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이 현실인식의 치열성을 보이면서도 방법론과 기교의 다양한 층위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인다는 것은 박철 시인의 시적 기량이 우수하다는 증거이리라.
‘빈 의자가 눈물 나는 시간’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첫 행은 팬데믹의 아픈 우리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시나 수필이나 첫 석 줄의 문장은 대단히 중요하다. 원래 글의 서두 기능은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데 있다. 어떤 시보다도 이 시는 서두 기능에 있어서 완벽성을 보인다고 하겠다. ‘남아 있어도 빈 공간이다/ 불이 꺼진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나의 바깥에 있는, 삶의 규칙이 완전히 다른 타자와 마주쳤을 때의 변화를 이들 세 문장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빈 공간’ ‘불이 꺼진다’ 등의 어구는 시적 화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공간에서 쫓겨나 비가시적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자신의 거처를 잃고 자신의 영토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세계의 어둠을 목격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데 그치고 고통과 한계를 고백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이 시는 인간 너머의 영역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가치는 물론 성취도 빛난다고 하겠다.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언어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선택하는 제재는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과 가장 유사한 사물이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2부>를 장식하고 있는 ‘무명초’ ‘파꽃’ ‘달꽃’ ‘들꽃’ ‘낙엽’ ‘꽃비’ ‘자작나무’ ‘들국화’ 등의 꽃과 나무들은 자연친화적인 그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특히 박철의 시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삶의 진리를 담고 있어좋다. 산이 높고, 강이 길고, 하늘이 푸르고, 꽃이 아름답고, 새가 노래하는 것만 가지고는 시가 될 수 없다. 문학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자연적 요소에 필수적으로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될 때 그 지점에서 비로소 시가 문학이 되는 것이다. 밀턴의 <실락원>도 아담과 이브가 영위하는 인간적 삶이 놓여 있었기에 대서사시가 되었던 것이다.
꽃이 핀다
아무도 찾는 이 없어도 홀로 핀다
태양과 물
바람과 달빛의 사랑이어라
하느님이 키운 꽃
님의 향기가 들꽃으로 피어나
우리네 설움 감싸주고
푸른 하늘 길 열어
산과 들이 좋아 그대로 산다
들꽃은 촌스럽게 이름 그대로 산다
혼자 쑥스러워 구름처럼 뭉실뭉실 무더기 이루며
바닥에 바짝 엎드려 방긋이 웃는 놈
오종종 모여서 종주먹 들이대는 놈
초롱모양 달랑달랑 요령소리 내는 놈
풀섶에 숨어 앙증맞게 눈웃음 짓는 놈
너의 모습이 하느님인 걸
너의 향기가 그리스도 향기인 걸
소리 없이 보면 예쁘고
가만히 보면 사랑스러운 들꽃
너는 자유스런 예수님이다
- <들꽃>, 전문
시적 화자는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존재다. 그러나 육안은 사물의 겉만 볼 수 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시각 중심주의’ 시대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두 번째 시집 《예수가 죽어가고 있다》를 내고 7년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그의 시는 예전과 다른 많은 변화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넉넉하고 따뜻해지고, 시적 형상화도 원숙해졌다. 이런 변화는 시인의 시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결과라 하겠다. 신앙고백이 박철 시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자연과의 밀착이라 하겠다. 이 지점은 <들꽃>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겠다. 그가 노래하는 꽃은 ‘그대로 사는’ 꽃이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어도 홀로 핀다. 물질주의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시인은 시각 중심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 특히 ‘후각’과 ‘청각’을 복원하고자 한다. 박철의 시에는 ‘향기’나 ‘노래’와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구절초>에도 여전히 ‘향기에 취해’ ‘향기 실어’ 등의 어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감각 지향은 그가 향기 시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III.
박철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무엇인가? 세 번째 시집 《홀로 부르는 노래》의 탐구를 마치면서, 그의 시는 삶의 존재 이유이며, 괴로움에 대한 치유였다고 말하고 싶다. 현실인식의 치열성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집의 <3부>는 ‘문단의장’의 가치를 지향하는 짧은 시로 묶여졌고, <4부>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족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정서를 피력했으며, <5부>는 ‘신앙고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적어도 시인이라면 작가정신으로써 시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아야 하고,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시집에는 현실의 왜곡상을 폭로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도가 드러나 있어 많은 공감을 준다. 시인은 시적 형상화로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문제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작가정신이 넘치는 까닭이지만, 이 지점은 시의 생명인 긴장감과 함축성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시 쓰기를 ‘신앙’으로 여기는 친구니까 앞으로도 계속 좋은 시를 써낼 것으로 본다. 세 권의 시집을 ‘완성’이라 생각하지 말고, 시간 날 때, 이들 시와 객관적인 거리를 가졌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냉정해지면, 더 나은 구조나 시어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시가 너무 길거나 또 너무 짧은 것은 바람직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작가의 의무이기도 한 ‘저항성’을 유지하면서도 불완전한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유지하려는 시인의 긍정적 세계관에 박수를 보내면서 시집해설을 마친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무엇보다도 이 시집에 드러나고 있는 박철 시인의 가족에 대한 사랑, 구도자의 길에서 갖는 반성적 성찰과 기도, 촌철살인으로 진리를 담아보겠다고 한 짧은 시에 대한 도전 등 다양한 노력들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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