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五章 고향 땅. 3
천혜(天惠)의 땅, 해남도가 인간에게 준 혜택 중 하나는 방
목(放牧)하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것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풀이 우거졌으며 악수(惡獸)가 없어 방목
하기에는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더욱이 해남도에는 토종마(土
種馬)인 과하마(果下馬)가 산출되고 있지 않은가.
과하마는 체고(體高)가 삼척(三尺)에 미치지 못해, 과수(果
樹) 아래로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만치 마가(馬價)가 비싼 군마(軍馬)로는 적합지 못했
고, 겨우 마차를 끄는 운송마(運送馬)로만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해남도에도 명마(名馬)는 있다.
송(宋)의 문인(文人) 주거비(周去非)가 '영외대답(嶺外代
答)'이란 책자에서.
- 말은 서북쪽으로 갈수록 좋다. 남쪽 말은 미친 듯이 날뛰
어 타기 어려우므로 군(軍)에서는 생명을 버리는 반명대(拌命
擡)라고 부른다. 조금만 타면 땀이 흐르고, 인내력도 북쪽 말
에 비해 훨씬 뒤진다. 그러나 좋은 말 한 필을 얻으면 북쪽
말이 아무리 좋아도 쫓아오지 못한다. 황담색마(黃淡色馬)가
그런 예이다.
체고는 사척(四尺), 귀는 사람 손가락보다 적고, 눈은 요령
( 鈴)만큼 크다. 안장과 고삐를 가져오면 몸을 일으키고, 근
력 한 번 움직이면 빠르기가 일갈(一喝)하는 사이에 담을 뛰어
넘는다.
라고 소개하여 해남도 말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주거비가 언급한 황담색마는 백 마리 중 한 마리 있을까 말
까한 진귀한 말이지만 중원인이 그런 사정을 알 까닭이 없었
다.
해남도는 중원인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담색마를 찾아 왔지만 과하마 또한 없어서 팔지
못할 만큼 많이 팔려나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방목(放牧)에 주력한 비가(蜚家)는 약삼
가(弱三家) 중 하나에 불과했다. 같은 한족인지라 해남파에
적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본문의 일방적인 지시만 따를 뿐,
의견을 개진할 힘은 없었다.
중원인이 몰려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가의 벌목, 범가의 범선, 유가의 염장, 석가의 진주, 전
가(田家)의 농장(農場)이 주축이던 해남도에 목장(牧場) 또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비가는 단숨에 누거만(累巨萬)의 재산을 얻었을 뿐 아니라
약삼가에서 중오가(中五家)로 승격하게 되었다. 금력(金力)이
끼치는 영향으로 볼 때는 강성육가라고 해야 옳으나 무공이
취약했다.
비가에는 단 하나의 검공인 일장검법(日長劍法)이 있을 뿐
이고 그나마 절정으로 익힌 고수가 없었다.
중원인이 해남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단 좋았다.
말뿐만이 아니라 벌목한 나무, 농장에서 재배한 과일, 소
금, 진주 등도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호황을 누렸고,
범가의 범선도 정박할 틈이 없을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결국 원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돈은 없는 중원인이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력(武力)을
사용했으며, 애꿎은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이 바로 좋은 실례였
다.
바다 깊숙이 잠들어 있던 용은 분노에 치를 떨며 일어섰다.
- 해남은 해남인이 지킨다.
해적들을 상대로 탄생된 철(鐵)의 율법(律法)이 중원인을
상대로 재 발동됐다.
해남도에서 살인을 범한 자는 목숨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
다.
대상이 촌민이던 무인이던 결과는 똑같았다. 그리고 그 율
법은 깨어지지 않았다.
일을 척결하는 곳은 해남파(海南派).
외딴 도서(島嶼)로만 알려져 있던 해남도가 일약 중원 무림
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였다.
이번에는 무인들이 해남도를 찾았다.
그들은 해남파라는 신진문파(新進門派)의 무공연원(武功淵
源)을 알고 싶어 했다. 더불어서 문파가 지닌 성격도 알고 싶
어했다.
조금이라도 악(惡)을 추종한다면 단호히 징계하겠다는 뜻
도 포함되었다.
그런 오해를 살만도 한 것이 해남도에서 검을 휘두른 자는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고, 그들 중에는
명문정파의 제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해남파는 상대의 직위여하를 불문하고 살업을 행한 자는 용
서하지 않은 것이다.
소림사(少林寺),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개방
( ).
그들은 목적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제자들의 죽음을 추궁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했다.
무공연원도 알아내지 못했다.
해남파는 절대로 먼저 검을 뽑지 않았다. 그러나 검을 뽑으
면 반드시 생과 사를 갈랐다.
비무(比武)도 하지 않았다.
검이란 목숨이 위태로울 때, 악인을 징계할 때 이외에는 뽑
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무를 통해 검도의 발전을 기할 수 있다는 설득도, 검이란
심신 수양이 목적이라는 무리(武理)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한 마디로 검에 대한 아집(我執)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그러한 그들의 검에 대한 아집은 '해남파 무인들은 괴팍하
다.''검식(劍式)이 정도에서 어긋났다.''기세가 번개같이 빠
르며 날카롭다.''검식을 펼치면 반드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
다.'는 말을 낳게 했다.
검을 익히게 된 동기가 생존 때문이었고, 해적들이 여전히
출몰한다는 점과 여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
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중원 무인들이 생각하기에
괴팍한 문파인 것만은 분명했다.
또 하나 분명한 점은 해남파가 설혹 악을 추종하더라도 징
계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이다.
해남파는 하늘로부터 보호받는 문파였다.
천연의 장애(障碍).
바다가 가로막아 섰고, 중원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후와 지
형이 모두 적이었다.
해남도민 전부가 문도(門徒)라 할 만큼 문도의 폭(幅)도 넓
었다.
무공도 녹녹치 않았다.
오지(奧地)에서 자생(自生)한 무공들은 으레 거칠고 산만하
기 마련인데 해남파 무공은 그렇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연
구 발전해온 정종무공(正宗武功)에 못지 않은 깊이가 있었다.
뜻밖이었다.
탄탄대로(坦坦大路)에서 매복(埋伏)을 만난 심정이랄까?
중원을 주도하는 팔파일방과 버금가는 무공, 문도…… 그들
이 여태껏 소문도 없이 지내왔다니.
- 대륙이라면 모를까 해남도에서는 해남파가 무적(無敵
)……
그것으로 해남파는 일약 구파일방 가운데 일익(一翼)을 차
지하게 되었다.
사실 중원무림은 해남파를 그렇게 중히 여기지 않았다. 중
원과는 거리가 멀었고,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아이 응석 받아주듯 인정해 줬을
뿐이다.
구파일방이라는 것도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할 뿐, 중원 무림
은 여전히 해남파를 경시했다.
철의 율법.
상대가 그 누구든 해남인을 살상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죽
음의 율법은 중원 무인들에게 공인 받았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르고…… 해남파는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원(元)과 명(明)의 전란(戰亂)에 휘말려 정신을 분산하지
못했고, 해남파가 구파일방 중 한 문파로 인증 받았으면서도
해남도에 웅거한 채 움직이지 않은 것이 망각 속으로 묻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남파도 중원무림을 잊었다.
생활근거지가 해남도이니 만치 중원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건드려 오지 않는 한.
비가 목장(牧場)은 해남파를 중원무림에 소개한 격이 되었
다. 약삼가 중 하나였던 비가가……
적엽명은 넓은 초원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
었다.
천여 필에 이르던 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황담색마의 활
기찬 말발굽 소리는 왜 들리지 않는지.
푸른 초원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던 황갈색 말들이 한 마
리도 보이지 않았다.
웃자란 잡풀들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그 위
로 쉴 새 없이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가고, 간밤의 폭우에 머
리를 떨군 풀꽃들은 진흙탕 위를 뒹굴고 있다.
초원은 적막했다. 초원은 축축한 습기로 가득했고, 황폐했
다.
큰 풀이 거의 없어야 정상이다. 말들은 식욕이 대단해서 드
넓은 초원일지라도 곧 황무지로 만들고 만다. 생명력이 끈질
기고,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는 잡초도 남아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목초지(牧草地)에 풀이 무성하다. 잡초
가 허리어림까지 자랐다.
이럴 리 없다. 이럴 리가……
초원은 완만한 구릉이 연속으로 이어져 있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해남도에서 가장 큰 산인 오지산
이며, 그 앞으로 여모봉이 있고, 더 앞쪽으로 초원 한가운데
불쑥 솟은 듯 검은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언덕이 백사구(白沙
邱)다.
비가보는 백사구를 등지고 서있었다.
백색 회칠을 해놓은 곳이 비가보이며, 그 옆으로 목책(木
柵)이 둘러쳐진 곳은 천여 필의 말이 밤이슬을 피하는 축사
(畜舍)다. 목부(牧夫)들이 기거하는 곳은 비가보 뒤에 가려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적엽명은 사두마차(四頭馬車) 두 대가 능히 비켜갈 수 있는
큰길을 따라 걸었다.
고조부(高祖父) 때만해도 짐마차가 다니는 길에 불과했던
것을 증조부(曾祖父) 대(代)에 이르러 네 배로 넓혔다. 그것
은 바로 비가보의 성세를 뜻하는 것이었다.
대로를 손질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장마가 들었다.
길이 움푹움푹 파이고 물이 가득 고였다.
당연히 목부들이 보여야 한다. 도롱이를 뒤집어쓰고 삽질에
여념이 없는 목부, 가마니에 흙을 퍼담아 나르는 목부, 길을
편편하게 다지는 목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로는 마차가 편히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데 손
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적엽명은 비가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에 납덩이라도
달아놓은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삼 년 전이었어. 갑자기 괴질이 도는 바람에 해남도 전체
가 쑥대밭이 되어버렸어. 많이 죽었지. 길거리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봐도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더라니까. 가장 타격을 많
이 받은 곳이 비가보야. 사람도 어쩔 수 없는 판에 말까지 신
경 쓸 수 있었겠나?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
늑대 염왕이 옆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평화롭고 고요하게만 보이는 초원 곳곳에는 그 때 죽어간
말들이 아직도 하얀 뼈를 드러내고 있을 터였다.
상상이 된다.
평상시에는 마의(馬醫)가 세심한 관리를 하고 있지만 괴질
이 돌면 속수무책이었다. 한두 마리 같으면 어떻게 해보련만
하룻밤을 자고 나면 수십 마리씩 푹푹 죽어 나자빠지는 통에
시체 치우기도 급급했다.
말이란 동물은 참으로 희한했다.
사람에게 사육 당하고 있으니 야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일텐
데 놈들은 여전히 초원을 누비는 야생마 시늉을 냈다.
질병에 걸려도 아프다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람 같으면
바락바락 악을 쓸만한 병인데도 놈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
동한다. 마치 아픈 티를 내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도태라도
당한다는 듯이.
그러다 무릎을 푹 꺾고 드러누우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참으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괴질이 휩쓸고 간 폐허에는 참혹한 잔재만이 남았
다.
시체 태우는 연기가 밤낮으로 이어지고, 역한 냄새는 천리
밖에서도 맡을 지경이니.
절반 정도만 살아남아도 다행이라고나 할까?
"모르고 왔나?"
중년인은 광의(狂醫)에게 치료를 받은 덕분인지 상태가 한
결 나아 보였다.
오른 팔은 어깻죽지 어림에서 절단되었다.
다행히 잘린 부위가 매끄러웠고, 초기 치료가 잘되었으며,
비록 유배된 몸이라고는 하나 광의의 의술이 워낙 탁월하여
회복이 빨랐다.
"이번 괴질은 워낙 지독해서 피해를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적엽명이 대답을 않자, 중년인은 초원을 돌아보며 혼잣말처
럼 중얼거렸다.
비가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하얀 뼈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처음에는 죽은 말들을 한곳에 모아놓았다가 나중에는 되는
대로 갖다 버렸는지 작은 언덕처럼 쌓인 뼈 무더기 하나와 산
지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뼛조각들이 보였다.
청천수석근(淸泉漱石根) 비해(蜚海).
넘쳐나는 패기로 몸을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던 형.
이제는 알 것 같다. 형이 왜 해남오지에 들지 못했는지.
네 살 위인 형은 당시 해남도 제일이란 칭송을 받았다. 지
금 해남오지가 된 한광이나 범위 등도 형에 비하면 한 수 뒤
진다는 평이었다. 그로부터 팔 년이 흘렀으니 딱 서른 살. 흐
른 세월만큼 무공도 원숙해졌을 사람이 검을 섞어 진다는 것
은 생각할 수 없다.
양보도 있을 수 없다.
다른 가문이야 이십 년 후를 기약하면 되지만 한 번도 해남
오지가 탄생되지 않은 가문은 그야말로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형이라면 당연히 해남오지의 한 자리를 맡고 있어야 한다.
또 그렇게 생각했다.
가문이 몰락했다.
정확한 피해정도는 모르지만 한 낮에도 사람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는 지경이니 말해 무엇하랴.
비무대회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으리라.
형은 뛰어난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
운한 무인이다.
담벼락도 심하게 훼손되었다.
하얗게 회칠 해놓은 외벽이 군데군데 일어나고 떨어져서 황
토색 흙을 드러냈다.
토끼나 고양이가 드나들었는지 개구멍이 뚫린 곳도 많았다.
문을 두들길 필요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덜컹거리던 대문은 손으로 슬쩍
밀자 '끼이익'하는 파열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외장(外莊)을 가로질러 내장(內莊)으로 들어설 때까지 황량
함은 계속 됐다.
중오가로 급부상한 가문치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몰
락이었다. 아무리 괴질이 돌았다고 하더라도 그 동안 모아두
었던 재력이 있고, 종자(種子)가 있는데……
내장도 풍경은 똑같았다.
비가보는 버리고 떠난 폐허처럼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
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처마에는 거미줄이 치렁하고, 회랑(回
廊)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혹시…… 비가보 식솔들 소식은 들었소?"
참으로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해남파가 언제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 봤나? 한족에 관한
일은 늘 비밀이지."
"……"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세상에 비
밀은 없는 법이지. 목부들은 모두 떠나고, 보주와 식솔들이
직접 말을 돌본다고 들었네만."
해남파는 비가보 재건을 돕지 않았다. 확실하다. 만약 도왔
다면 비가보가 이토록 처참하게 몰락할 이유가 없다. 목부들
이 떠나? 어디로? 목부들에게는 목부들의 삶이 있는 것, 그들
은 말을 떠나 살 수 없다.
늑대 염왕은 얌전히 곁을 따라왔다.
중년인은 두어 걸음 뒤에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무너진 집터
를 바라보았고, 중년부인은 어린 소녀를 들춰 업고 그 뒤를
따랐다.
"……"
"……!"
제일 먼저 만난 가족은 어머니, 화화부인(花花婦人)이었다.
적엽명은 화화부인을 어머니라 부르지 못했다. 어색하게나
마 어머니라고 떠듬떠듬 부른 후, '미천한 것이 어디서 어머
니라는 말을 입에 담아!'라는 질책과 함께 무진 매를 맞은 다
음부터 화화부인을 '어머니' 대신 '대부인(大婦人)'이라 불렀
다.
적엽명의 눈에 아픔이 스쳐갔다.
대부인이 말똥을 언제 만져봤겠는가. 까칠까칠한 무명옷을
언제 입어봤겠는가. 첩의 자식한테는 차마 못할 짓을 많이 했
지만 그래도 식솔들에게는 단아(端雅)하고 정숙한 부인으로
인망(人望)이 높던 부인이다.
"왔…… 구나."
화화부인은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이 몸을 일으켰다.
대광주리에는 말린 말똥이 그득했다. 화화부인은 말린 말똥
을 곱게 부수는 중이었다. 아마도 마분지(馬糞紙)를 만들려는
듯.
모습도 말이 아니었다.
초로에 불과한데도 머리에는 흰머리가 가득했다. 더군다나
나무로 만든 비녀를 꼽아 모습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게 그을렸으며, 깊게 패인
주름에는 세월의 인고(忍苦)를 얹었다.
도도하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동네 어느 곳에서나
불 수 있는 평범한 여족 아낙의 모습이었다.
화장(化粧)을 하여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여인의 본분이라
며 두 딸에게도 옅게 지분(脂粉)을 발라주던 고즈넉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식전이지? 들어가자."
화화부인은 손에 묻은 말똥가루를 치마로 훔쳤다.
적엽명은 화화부인의 말투에서 미움을 읽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따뜻한 정을 읽고 뭉클한 감정이 솟구쳤다. 팔 년 전
에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정(情)이다.
말은 고작 이십 필만 남았다. 그것도 삼 년 동안 부지런히
사육해 온 것이 그렇다.
목부도, 마부도, 마의도…… 필요 없었다.
"보궤(寶櫃)가 감쪽같이 사라졌어."
취영(翠影)은 겨우 두 살 많은 스물여덟이었다. 그러나 한
꺼번에 몰아닥친 불운이 힘겨웠던지 누이는 삼십이 훨씬 넘어
보였다.
"보궤가요?"
"그게 이상해. 은이 가득 들었기 때문에 장정 십여 명이 달
려들어도 들기 힘든데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흔적도 없이."
"……"
이해하기 곤란한 상황이다.
보궤는 아버지의 침상 밑에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보궤
를 만질 사람은 아버지 밖에 없다. 만약 외인이 만졌다면 아
버지를 죽인 후라야 가능하다.
"아버님은……?"
적엽명은 좀 더 일찍 물었어야 될 말을 이제야 물었다.
화화부인이 말똥을 비비고 있을 때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
문이 몰락하면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궂은일을 하
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위 누이가 과하마 이십 필을
이끌고 왔을 때도, 축사에 몰아넣을 때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도 아버지와 배다른 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로 출타(出他)했나?
화화부인과 손위 누이가 따뜻하게 맞아주지만 어려서부터
억눌렸던 감정은 이들 앞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
게 했다.
"아버님은 울화가 치받쳤는지 운공(運功) 도중에 주화입마
(走火入魔)에 들으셨지. 반신이 마비되고, 음식을 드시지 못
하더니 두 달을 버티지 못하셨지."
취영의 음성은 담담했다.
아버지를 여윈 슬픔을 담담히 말할 만한 세월이 흘렀다. 아
니다. 그것은 여유로운 대답이다. 눈앞에 닥친 생활고(生活
苦)가 너무 험난해 기쁨이나 슬픔 같은 고상한 감상을 간직할
수 없었다는 대답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적엽명은 누이처럼 담담할 수 없었다.
누이가 한 가족으로 인정하며 따듯하게 대하는 말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엇인가 묻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주화입마로 세상을 등지셨다는 사실
만이 큰 충격으로 다가와 전신을 후려쳤다.
"아버님이…… 아버님이……"
유등(油燈)에 기름이 다했는지 불꽃이 힘없이 깜박거린다.
화화부인은 한쪽 구석에서 옷을 꿰매고 있었다. 침모(針母)
가 할 일…… 평생 바늘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손이 바느질을
하고 있다. 능숙했다. 옷을 많이 기워본 솜씨였다.
염왕은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으로 포식했는지 축 늘어져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고, 중년인과 어린 소녀는 질식할 듯한
분위기에 짓눌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중년 부인만이 움직였다.
'배 안에서 말씀하였잖아요. 해안소에서 샀다고. 시비가 이
정도는 해야죠.'
중년 부인은 극구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저녁 설거지를
맡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목숨을 구함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자
는 의도였다.
적엽명은 모든 움직임이 고정된 듯이 낯설게 느껴졌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한 듯 했다.
'건초(乾草)가 얼마나 남았니?'
'예, 보주님. 지금 현재……'
'과하마 일강(一綱:말 오십 필)을 수송해야 한다. 착오가
없도록 준비해 놓도록.'
'예, 보주님.'
'종모마(種牡馬:씨를 받는 수말)는 확인해 봤니?'
'예, 보주님.'
보주님, 보주님, 보주님…… 말, 말, 말……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란 호칭을 불러보지 못했다. 어쩌다 대
화를 나눌 기회가 생겨도 말에 대한 내용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
결국 임종(臨終)조차 지켜보지 못했고, 살아생전에 아버지
라고 따스하게 불러보지도 못했다.
회한(悔恨)이 몰아쳤다.
"형님은……?"
적엽명은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불길하다.
형! 자신과 함께 청천수석근이라고 불렸던 형!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형도 보이지 않았다.
취영은 한참동안 아랫입술을 깨물고 울분을 삭히더니 옷소
매를 들어 눈가를 찍었다.
"상산암(上山庵)에 계셔."
"상산암에는 무슨 일로……?"
취영은 또 말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져왔다.
"뭍에는 언제 나갈 거야?"
"……"
이번에는 적엽명이 대답하지 못했다.
해남도에 눌러앉을 요량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고향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가족들의 안위가 궁금해서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가족들이 발목을 붙잡
고 있다.
그것보다 적엽명은 누나의 말에서 뭔가 알지 못할 불길함을
읽었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군요?"
"휴우! 그래. 어차피 알게 될 거…… 하반신 불구야."
"하, 하반신 불구!"
"한광에게 당했어. 정당한 비무였다고 하는데…… 오빠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알수가 있어야지."
"음……! 어떻게 당했습니까?"
적엽명은 한광과의 끈질긴 악연(惡緣)을 느꼈다. 둘 중 한
사람은 꼭 죽어야 할 것 같은 운명적인 예감을.
"어깨를 뚫은 검법은 일지검법(一枝劍法) 같아. 송곳으로
뚫은 것 같았거든. 허벅지 살을 베어낸 것은 환우검법(環雨劍
法). 톱으로 썬 것 같은 상처가 있었어. 결정적으로…… 척추
를 으스러트린 것은 진천각이야."
"으음……!"
"한광! 그 놈은 꼭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거야!"
취영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씹어뱉었다.
"연수합격(聯手合擊)이군요."
"……?"
취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누이 취영과 취소(翠簫)는 무공을 익히
지 않았다. 아버지 비사는 가문의 전통검법이 밖으로 유출되
는 것을 우려하여 여인에게는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
니 적엽명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일지검법, 환우검법.
한가의 비전무공인 것만은 틀림없다. 또한 한가에서 검으로
형과 맞상대할 고수도 많다. 허나 모두 한 가지 검공에만 매
달리지 검공이 많다고 해서 여러 가지를 동시에 익히지는 않
는다.
"한광은 적노검법을 사용합니다. 일지검법이나 환우검법이
라면…… 연수합격입니다. 아무리 많은 무공을 익혔다 할지라
도 한 상대에게 펼칠 수 있는 무공에는 한계가 있죠. 일지검
법을 사용했다가 환우검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랬다. 형은 가업 때문에 비무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마음이라도 한결 나을 텐데. 하반신 불구
……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입을 다물고 있다? 당연하다. 비가보 최고수인 자신이 당했
는데 누구에게 하소연한단 말인가. 복수랍시고 검을 들었다가
는 모조리 도륙 당할 것이 자명한데.
"치사한 놈들!"
취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님을…… 만나보죠."
화화부인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육삭둥이. 씨도 근본도 모르는 자식.
비사를 제외한 온 식구가 어린아이를 구박했다. 말이 비가
의 둘째 자식이지 머슴이나 다름없이 대하면서.
이제 집안에 기둥이 되어줄 사내는 모순되게도 육삭둥이였
다.
무덤은 초라했다.
해남십이가 가주의 무덤답지 않게 봉분이 나지막했다.
장례식 때 가주들이 모두 참석했다고 하지만 강 건너 불 구
경하듯이 뒷짐 지고 어슬렁거렸을 것이 분명했다.
가주는 죽고 큰아들은 하반신 불구가 되었으며 배다른 작은
아들은 해남파에서 파문 당한 후 해남도를 떠났다. 큰 딸 취
소는 뇌주반도로 시집갔고, 남은 사람은 오직 대부인과 취영
뿐이다.
그들에게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하마 이십 마리.
그것으로는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어도 예전 같은 성세는 누
리지 못한다. 누릴 가망성도 전혀 없다.
더군다나 비해가 하반신 불구가 되었으니 일장검법도 땅 속
에 묻힌 셈이다.
대력검에 이어 일장검도 사라졌다.
그런 가문에 도움을 줄 정도로 각 가문의 가주들은 인자하
지 않았다.
더군다나 각 가문의 영재들이 비건에게 당한 과거가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자리했으니 더더욱 도움의 손길을 내밀 리 없었
다.
그들이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형식적인 예의에 지나지 않았
으리라.
적엽명은 지전(紙錢)을 태웠다.
비가 또 오려는지 하늘이 우중충했다. 검은 구름이 낮게 깔
리고 음산한 습기가 살갗을 촉촉이 적셔왔다.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이 한 마디만
믿어라. 아들아.'
'능력이 똑같으면 너는 진다. 그것이 서자(庶子)의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남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만하지 마라. 그
제야 동등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생긴 것에 불과하니까.'
'이재(理財)를 배워라. 서자가 검을 배우면 나쁜 길로 들어
서기 십상이다. 호신(護身)할 정도의 무공이면 충분하다.'
……
'가거라.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에비니까.'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아버지는 냉정한 분이셨다. 따뜻한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
지 않으셨다. 키보다 더 큰 나뭇짐을 지고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마유주(馬乳酒) 두 독을 짊어지고 힘에 겨워 할 때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셨다.
어쩌다…… 간혹 한두 마디씩 던져주신 말씀인데…… 아직
도 살아 숨 쉰다.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어머님
과 형님, 누님…… 이대로 내버려두지는 않겠습니다."
'고맙다. 아들아.'
지하에서 따뜻한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세상은 자기 뜻대로만 살 수 없다.
어떤 때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울며 겨자 먹기
로 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 그런 경우는 빌어먹게도 다반사
다.
해남도에 돌아왔지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잠시 잠깐…… 하늘에 떠도는 구름처럼…… 억겁(億劫)의
인연을 거쳐 부모형제라고 맺어진 사이이기에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들렸다.
그런데 이것은……
몰락해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반갑지 않다는 얼굴
로 맞아야 옳지 않은가.
가문, 가문……
이대로 모른 척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옛 기반을 찾아주고
떠나야 하는가.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지 않은가.
적엽명의 눈길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