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 '홍어장사 문순득 표류기' 표해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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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시말((漂海始末)..............
1816년 조선 순조 때 정약전이 대필(代筆)한
문순득(文淳得) 표해기행록(漂海紀行錄)이 있다.
당시 우이도(소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
'1805(순조 5)~1816' 사이에 정약전이 대필(代筆)한 기록.
이본으로 1818년 그 섬으로 유배된 유암(柳菴)이
문순득의 글을 참조하여 쓴 「표해시말(漂海始末)」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전하는데 「표해시말」은
정약전 작 「표해록」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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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1801년 12월 우이도에서 문순득과
그의 작은아버지 문호겸(文好謙)과
마을사람들인 이백근·박무청· 이중원,
나무꾼 아이 김옥문(金玉紋) 등 6명이
흑산도 남쪽 수백리 태사도(太砂島)로
홍어를 사러 갔다가 1802년 1월 18일에
돌아오는 뱃길 우이도 서남 수백리에서
표풍(飄風)을 만나 표류하다가 2월 2일에야
유구국(琉球國) 큰섬 양관촌(羊寬村)에 닿았다.
10월 7일 3척의 배로 중국을 향하여 출발
10월 7일 또 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하였다.
11월 1일 여송( 필리핀)에 닿아 머무르다가
1803년 3월 16일 다른 사람들은 먼저 출발하고,
문순득과 김옥문은 남은 복건인(福建人) 25명과
같이 광둥(廣東)·아오먼[澳門]·북경(北京)·의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1805년 1월 8일 귀가하였다.
의의 평가
이 작품에는 중국·안남·유구·여송 등의
언어·풍속 등을 소개한 해양문학 자료로서
표류인 한 사람의 경험을 듣고 자기 체험처럼
사실화(寫實化)한 실기(實記)란 점이 가치가 높다.
부록에 112개 유구어와 여송어는
귀한 언어학 연구자료로 평가된다.






우이도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 특별전을 열며](https://t1.daumcdn.net/cfile/blog/190FEF45507A85AD01)



















흑산도 예리(曳里)항.
목포에서 흑산도까지는 여객선으로 2시간 뱃길.
쾌속선이 나오기 이전에는 7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뱃길은 비금도를 벗어나면서부터 파도가 더 드세진다.
그곳부터 흑산도 해역에 가까워질수록
바다 한가운데 악마의 입처럼 넘실대는 너울.
무려, 68개 섬으로 구성된 흑산도 해역., 바다어장.
풍랑이 일거나
일기가 나쁠 때
대피처가 예리항.
조선시대 유배지로 악명 높았던.,흑산도.
이곳 유배는 사형 다음으로 중죄에 해당하였다.
세상과 단절된 절해고도에서 살아야 하는 유배생활.
하루 하루 살기 위해 먹을 것 마련부터가 급선무.
김정희는 자신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부평초에 비유.
김춘택은 자기 자신을 땅속에 사는 지렁이의 삶에 비유.
"아따!~징하게 멀다잉~.오메 나 죽네."
'멀미 때문에 죽을 뻔한 사람은 있어도
멀미로 죽은 사람은 여태까지 없다는데.,'
'뱃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플까?'
해마다 3월이 오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예리항.
'고깃배 몰려오면 60여 선술집 불빛이 환해진다.'는.,선창가.
뱃사람들은 술과 노래로 바다에서의 외로움을 떨쳐내는걸까?
풍랑을 만나게 되면
언제 물고기 밥이 될지
모르는 곳이.,흑산도 어장.
........흑산도 용바우 청년 & 복술 처녀'의 전설......
복술 처녀와 용바우 청년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
겨울에 홍어잡이 나간 용바우는 그후 돌아오지 않는다.
한편, 복술은 일반 어선과는 다른 데구리배를 타는
곱슬머리 청년의 구애를 받아 뭍으로 떠나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한편,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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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만나 파선된 경우에도
천우신조 살아오기도 하였던 어부들.
복술이 은연 중에도 기다려지는 기대감.
- (중략)_.
...............
쾌속선 선착장에서 왼쪽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유람선 선착장이 나오고 흑산파출소 곁 사이길.
그곳 골목길 안으로 늘어선 선술집, 여관, 당구장.
1960년대 파시가 설때마다
흥청거렸다던.,좁은 골목길.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살아온 아가씨든,
빚을 안고 흑산도까지 팔려온 아가씨이든
뭍을 갈망하며 불렀던 노래가 동백아가씨.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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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가 불빛마다 긴 항로의 사연을 간직한채 깜빡거린다.
예리항에는 많을 때 2천여척 정박 어선이 장관을 이루는 곳
그 배들이 밤에 일제히 불을 밝히면 거대한 해상도시.,예리항.
안강망 어선, 연승망 어선, 저인망 어선, 잠수선,
닻배, 드러매기배, 주낙배, 행망어 업, 통발, 게통발,
데구리배, 투망배, 유자망, 고대구리, 쌍대구리, 치미,
유신가다, 쌈판, 무동력선, 말쪽배, 오구리배, 복어배 등.
예나 지금이나
예리항은 흑산도와
나주 영산포를 오가던
뱃사람 애환이 가득한 곳.
늦가을부터 겨울철까지가.,홍어 철.
홍어장사들이 들락거리는.,추자군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는 군도
'본섬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홍도, 영산도, 장도, 가거도.만재도.
태도, 우이도 등' 68개 섬이 곧.,흑산도.
흑산도 홍어가 곧, 영산포., 삭힌 홍어회.
'흑산도~영산포' 먼 뱃길에서 삭혀진 홍어회.
흑산도 홍어 맛보다 영산포 삭힌 홍어회가 유명.

옛부터 전라도 지방에서는
날씨가 추울때면., 홍어 생각
날씨가 따듯해지면., 굴비 생각.

'나주인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먹는데
탁주 안주로 겻들여 먹는다.' - 자산어보 -
조선 후기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한귀절.
흑산도는 홍어의 산지로 유명하지만
예리항 제외한 대부분 홍어잡이와 무관.
"배가 30톤 이상 되어야
홍어잡이를 할 수 있어요.
그럴러면 돈이 몇 억 들어요."
옛날 흑산도 앞바다에서 "목선으로 잡을 때는
홍어가 지금보다 몇 곱절은 컸다."고들 말한다.
"홍어는 잡으면 배에서 바로 숙성을 시켰어요.
육지로 나가면 구더기가 날 정도로 썩었었지."
뭍에서는 톡 쏘는 삭힌 홍어회 맛을 떠올리지만
실상 흑산도 주민들은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는다.
홍차처럼 삭힌 홍어는 먼 바다 뱃길이 만들어낸 문화.
흑산도 홍어배들의 종착점.,나주 영산포.
삭힌 홍어의 본고장인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삭혀서는 잘 안 먹어요.
싱싱한 놈을 먹어야 더 맛 있고."

흑산도 사리(모래미)마을.,돌담.

1801년 조선 후기 흑산도 우이도로 귀양온 정약전
이곳에서 인연이 된 처와 자식들의 생계가 어려워
1807년 흑산도 모래미(사리 : ·沙里) 마을로 옮겼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1000 여명
약 300 년이 지난 현재 4600 여명.

정약전은 그후, 우이도가 뭍에서 가까워
1815년에는 다시 우이도로 거주를 이전한다.
1816년 6월 6일에 병으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
'정약전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17년간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유배가 풀리길 학수고대한 것일까?'
조선시대 흑산도 유배지는
남자든 여자든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나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가족]우이도 '선창'-정약전을 찾아가는 여행(2)](https://t1.daumcdn.net/cfile/blog/2005F7124C5F8F48DF)
우이도
전남 목포 남서쪽 90㎞ 해상에 있는 흑산군도(黑山群島).
대흑산도 중심으로 68개 섬으로 형성되었으며 면적 50 ㎢.
가거도에 639m, 대흑산도 378m, 홍도 368m 산이 솟아있다.
평야는 거의 없고, 농산물 생산량은 2개월 분의 자급량.
포경의 중심지이고 전갱이 고등어 조기 상어 갈치 홍어 등
어민은 총가구의 80% 가까이 차지하고 있어 진도와는 대조적.
흑산도 중심 예리항은 천연적 양항으로서 어업기지.
동시에 인근 항해선박의 보급과 휴식처이고 대피항.
또 통신 연락의 중심지이며, 3~10월까지.,파시(波市).
부근 홍도(매가도)는 제2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암과 괴석, 그리고 노송이 우거져 경승을 이루고 있다.
제주 추자군도와 서쪽으로 이웃한.,전남 신안군 흑산군도.
대흑산도, 소흑산도, 하태도 우이도 등지는 패총 유적지.
패총은 과거 주민들이 까먹고 버린 패각이 쌓인 조개더미.
주로 해안 도서(島嶼)지방에 분포한 신석기 시대 이래 유적지.
1990년대에는 지도읍 어의리패총에서 즐문토기 편이 발견.
이곳 패총들은 그 규모가 작고 출토유물의 양도 적은 편이나
토기 중에서 이중구연편, 갑인문토기 단청마연토기 등이 있어
신석기 중기 이전으로 올라가고 있어 그 시기적인 중요성이 크다.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이 주 생업이라 패총에 남긴 예가 드물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패총이 형성되기 시작한.,흔적들.
임자면 학산리, 압해면 대천리, 흑산면 하태도 b지구 등지에서 패총.
철기시대에 이르러 그 분포 범위가 휠씬 넓어졌다.
임자도 대기리, 삼두리, 하의면 어은리, 승도면 갈마도.
신석기시대 것이 5개소, 철기시대 6개소, 기타 1개소이다.
이들 패총은 대부분 훼손이 심하여
보존대책의 수립이 시급한 현실이다.
선사시대 황해평야 선진 문명의 흔적들.
'지금은 서남해 속으로 가라앉은.,황해평야.'
'황하문명의 발상지가 흑산군도 일대 아닐까?'
대흑산도 패총은 진리만 만호부에 퇴적된 사구에 있다.
이곳 건물과 시멘트 포장도로 때문에 흔적이 파괴되었다.
이곳 유적은 1954년 국립박물관 고고학조사반이 조사 보고.
그뒤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가 1966년부터 벌여온
남해도서지방 고고학적 조사사업 일환으로 1967년 9월 발굴.
1987년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가 예리 조개무지를 재조사.
대흑산도 진리만 만호부 패총 유물로는 석기류, 골기류, 토기류.
골각기는 2점(사슴뼈, 짐승뼈)이고 대부분 토기와 석기류 등이다.
토기는 남해안 신석기 만기의 겹입술 토기이나
그밖에 굵은 심선문(心線文), 붉은 간토기(紅陶),
기타 만기 신석기 보다 이른 시기를 나타내는 무늬.
특히, 주목되는 것은 "...
평행선을 갈지(之)자로 눌러
무늬를 넣은 신석기시대 토기이다.
중국 동북지방의 신석기시대에 유행한 "之"자 무늬 토기
남해안 상노대노 조개무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기 때문에
흑산도의 것도 이들과 동일한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1967년 발굴에서도 신석기 만기 겹입술 토기가 대량으로 출토.
위로부터 1층(갈색 사질)-2층(모래 섞인 자갈)-3층(갈색 모래).
신석기시대 유물은 2,3층에서 출토되고 있다.(겹입술 토기가 주종)
이들은 남해안 지방에서 자주 보이는
구주(九州)지방 죠몽토기로서 교역품.
다량 출토된 석기 중 타제 도끼류가 가장 많고
반마반타(半磨半打)또는 완전히 간 것도 나온다.
찌르개, 숫돌, 찍개, 유백색의 흑요석 격지고 있다.
그물추와 원형의 긁개도 출토되었다.
자연유물로는 대합, 우렁, 고동, 소라, 전복,
바지락 등 조개류와 물개과 바다짐승뼈가 나온다.
............패총의 의미와 중요성............
대흑산도 유적의 중요성을 남해도서지방
신석기 발굴 및 연구성과에 비추어 보자면
신석기시대 전 기간에 걸친 유물 출토가 많다.
특히 이웃한 소흑산도에서도 융기문토기가 나오고 있어
대흑산도는 신석기시대 전시기에 걸쳐 사람이 활동한 곳.
남해도서지방에서 발굴된 흑요석편도 이곳에서 자주 출토.
또한 많은 조개류와 바다짐승에 대한 포획도 보여준다.
그리고 '之'자 무늬 토기 등은 도서와 육지와의 교류 증거.
그 관계에 대해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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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흑산도 무심사지 일대를 시굴 조사한 목포대박물관.
허황옥(33~189)이 인도에서 들어올 때 경유하였다는.,무심사지.
가락국 초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는 인도에서 들어온 해상세력.
흑산도는 한반도에 남방불교를 처음 들여온
허황후가 이끈 해상세력 영역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전하여 오는 전설에 불과한걸까?
무심사지에서 발굴된 기와편.
막새류, 명문와, 전돌, 도.자기류 등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유물들.
무심사지는 한.중교역의 중요 기착지
흑산도에 세워진 선종 계통의 사찰인듯.
"흑산면 읍동 일대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13세기 유물이 빈번히 발굴된 곳" -신안군 관계자-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흑산도
연차적으로 발굴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반월성' 상라산성과 삼층석탑, 관사터 등
'신라~고려'시대 유적들과 조선시대 흑산진,
유배 관련 유적지 등이 산재한 해양문화의 산실.
조선시대 정조때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흥미롭다.
흑산도에 살던 김이수라는 백성이 한양에 올라와서
임금이 지나는 길목에서 꽹과리를 쳐 행차를 멈춘 사건.
정조가 사연을 묻자 그는 “세금이 어찌나 많은지
고등어 잡으면 고등어세, 콩을 거두면 콩세를 내는데,
관리들은 자라지도 않는 닥나무세까지 내라하니 죽을 지경.”
정조는 부당한 닥나무세를 없애라 명하고
그에게 벼슬까지 내렸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흑산도에서는 조선시대 김이수 일화를
소년장군 강바우로 등장시켜 실화를 복원.
강바우가 ‘흑산도 소년 장군’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불의에 맞선 용기 때문.
이는 정조 재위 당시 흑산도에 만호부 제도가 존속한 증거.
만호부 가문이 대대로
만호부 벼슬을 이어 받는
관행이.,'소년 장군' 강바우.
소년장군 강바우가
만호(萬戶)를 다스리는
흑산도 주민 통치자.,만호부.
만호부는 고려 후기,
원나라 제도를 본떠서
설치한 '민간인' 군사조직.
임진왜란 7년 전쟁 당시에
나라를 구한 전라좌수영 수군.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흑산군도.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조정 관아의 통치권이
이곳까지 미치지 못한 것.
조선 후기 부터는
만호 & 별장.,겸임.

1681년(숙종7년)~1889년(고종21년) 까지
흑산도에 파견되었던.,흑산도진 만호 & 별장.
당시 흑산도 백성들을 착취한 '흑산도진 별장'과
그의 아들 '함수동'이 별장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횡포를 부린 사실을 민요 '둥당애타령'으로 전한다.
친구 목숨 내어주면
바닷물이 원수 되어
오는 고기 아니 오고
보낸 친구 아니 오네.
둥당애당 둥당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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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유배의 섬.,흑산(군)도.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서 세 번째로
유배 중죄인을 많이 보냈던 곳.,흑산도.
흑산도 부근은 수심 80m 바다에 뻘이 많아
홍어 산란장으로 안성맞춤인 곳으로 알려졌다.
홍어잡이 어선 6척이 매년 100톤(40억원) 어획고.
"홍어는 곧바로 잡아 만든 쫀득쫀득한 회맛,
삭혀 코 끝을 톡쏘게 하는 요리 등 모두 일품."
관절염이나 기관지 천식을 완화시켜주는 음식.

'2015년 5월 8~9일'., 흑산도 홍어축제 기간.
어선들이 오색기, 만선기를 달고 해상퍼레이드.
홍어회 비빔밥 만들기, 풍어제, 흑산 홍어 가요제,
수산물 깜짝 경매, 객석 참여 한마당 등 체험 행사.
흑산홍어 전시회, 홍어 시식회, 길거리 사진전시회.

.................홍어(洪魚)...............
몸은 마름모꼴이고 너비가 넓다.
머리는 작고 주둥이는 돌출, 몸길이 150㎝.
눈은 작고, 등의 중앙선에는 작은 가시가 있다.
몸빛은 등쪽은 갈색이고 배쪽은 백색이거나 회색.
가슴지느러미 기저에는 검은 테를 두른 큰 얼룩무늬.
우리나라 남서해안 및 일본 연해, 동중국해에 분포한다.
부산·목포·영광·인천 등지 수심 20∼80m연해에 많다.
봄에 산란하며 ,'경상도지리지'에는 울산군의 토산공물.
'세종실록.' 지리지 토산조에는 ‘洪魚’ 또는 ‘紅魚’로 기재.
이것은 우리 민족이 홍어를 어획한 역사가 깊음을 증명.
흑산도 홍어회 맛이 일품인데, 특히 전라도에서 잘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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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 처음 발을 딛는 사람은
예리 항에 닿으면 두 번 놀란단다.
먼저 흑산도 섬의 크기에 한번 놀라게 되고
예리 항구의 어선들과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섬 답지 않게 번화한 규모에 또 한번 놀란단다.

1960년대 조기잡이 배들이 가득찼던.,흑산도 예리항.
이곳 어부들은 세찬 파도를 헤치며 고래, 조기, 홍어잡이.
성어기 파시에는 제철 생선, 수산물 경매, 홍어 및 고래 해체쇼.
섬과 섬 사이를 배를 밟으면서
건너갈 만큼 어선이 많았던 곳.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전라좌수영 수군들의 후손이 아닐까?
바다 위에서 성어기에 각처에서 모여드는 어민들
이때 형성되는 '계절적인 어시장'이 파시평(波市坪).
흑산도 조기 파시, 부안군 위도.인천 옹진군 연평도.
계절 따라 북상하며
이동하는.,조기 파시.
전남 여수시 거문도· & 완도군 청산도의 고등어 파시,
제주 추자도 멸치 파시 & 경북 울릉도의 오징어 파시,
신안 비금도 깡다리 파시 & 신안 임자도 민어 파시 등.
전남 영광의 칠산바다, 충남 보령 녹도,
전북 군산의 고군산제도, 황해 용호도 등
파시에서 유래되어 유명해진., 파시평(波市坪).

1960년대 '고래 & 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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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는 물치(바다사자류), 고래.
해체 작업도 성행한.,흑산도 예리 구룡포.
1967년 '흑산도 아가씨'
이미자 노래., 배경무대.
1965년 흑산도 고교생이 서울을 가려고 했지만
풍랑 때문에 가지 못했던 사연을 전해들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이들을 청와대로 초대해 만들어진 노래.
작사 정두수, 작곡 박춘석.
이 노래는 흑산도 여성들을
정신적으로 버티게 한 힘이었다.
"풍랑이 심해 일평생 육지 나들이가 어려운 섬.
흑산도에 시집 와 자식을 키우며, 힘들 때마다
고향을 떠나온 한과 삶의 애환을 떨쳐준 노래.”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해 2000곡 이상을 발표
70세 고령에도 목소리는 청아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그녀의 목소리는 50년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1967년에 발표된 ‘흑산도 아가씨’를 부른.,가수 이미자.
45년만에 처음 흑산도를 찾아 주민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2012년 9월 15일 오후 7시 흑산도 항구 옆 특별무대에서 공연.
정작, 그녀의
흑산도 방문은
처음이었던 것.
‘흑산도 아가씨'를 시작으로
2시간 동안에 총 22곡을 불러
2천여 관객 주민들은 감동의 물결.

1.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2.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향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촛대바위.
석주대문, 촛대바위, 학바위 등 기암이 늘어선 예리항 해안가.
흑산도 바위들은 하나같이 남성적이고 우람한 것이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촛대바위는 밑둥만 남은 촛불 형태라 눈길을 끈다.
푸른 바다 위로 우뚝솟은 높이 50m 촛대바위.
흑산도 칠성동굴.

입구(높이 20m)는 하나지만, 약 100m쯤 안으로는 7개 동굴.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에서 흑산도를 거쳐 당나라와 교역할 때
뱃길의 무사함을 빌며 칠성탑을 쌓고 용왕제를 지냈다는 곳이다.
멀리 봉우리에 두손을 합장하고
부처님께 빌고 있는 듯한.,스님바위.
유인도 11, 무인도 89,
총 100개의 섬.,흑산도.
바다낚시의 천국.,흑산도.
5월 아카시아 꽃이 피기 시작하면
수온이 14-15도 이때부터 농어 시즌.
짜릿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우럭 낚시 등.

선착장 근처 지리 마을 당산에 있는 성황당.,처녀당.
'흑산도에 옹기 팔러 온 청년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처녀귀신이
배가 출항하려 할 때마다 풍랑을 일으켜 총각을 섬에 붙들어 두었단다.

'이곳에 남은 총각은 당산나무에 올라
고향을 그리며 피리를 불다가 죽었단다.'
1978년 7월 26일 KBS '전설의 고향'.,방영.
...........피리 부는 소년의.,전설...................
옛날 어느 해에 옹기장수 배가 흑산도에 입항
배에는 네 선원과 얼굴 고운 소년이 타고 있었다.
옹기 배는 진리 처녀당 아래 부둣가에 정박하였다.
선원들이 옹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가자
소년은 당 앞 소나무에 올라 피리를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피리소리에 홀린듯 넋을 잃었다.
진리 처녀당에 거처하는 처녀 당신도
소년의 피리 소리에 매혹 당하고 말았다.
여러날이 지나 옹기를 다 판 선원들이 출항하기 위하여
돛을 올리자 바다에 파도가 거세져 배가 떠날 수 없었다.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자 역풍이 멈추고 바다는 잠잠해졌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하자 선원들은 마을의 무녀를 찾았다.
처녀당 당신이 소년에게 반해 배를 못 뜨게 한다고 알려주었다.
선원들은 거짓 심부름으로 소년을 배에서 내리게 한 후에 떠났다.
그곳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처녀당 앞 소나무에 올라가 피리만 불었다.
그러다가 결국 소년은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후 한동안 주민들은 두렵고 무서워
처녀당 인근을 얼씬거리지조차 못했다.
그곳에 가면 처녀귀신이 나타나기 때문.
'진리 처녀당에 나타난다.'는 처녀귀신은
그곳 주민들이 20번째 제물로 바쳤던 처녀.
그래서, 주민들은 소년을 그 자리에 묻히고
진리 처녀당 곁에 피리부는 소년의 화상이 봉안.
그후, 섣달 그믐날 밤에 돼지를 잡고 떡을 하여 당굿.
......................................................................
처녀당에 20번째 인신공희 제물인 처녀 화상을 봉안.
그곳 처녀당 앞에는 '피리 부는 소년'의 무덤이 있다.
20번째 인신공희 제물 처녀당 당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
이곳 진리의 '예리항~상라봉' 12 구비도로'는
'피리 부는 소년의 전설'이 있어.,흑산도의 명물.

이곳은 진리 처녀당(일명 진리당)이며
흑산면 22 개 성황당 중에서 본당으로서
상당과 용신당(龍神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제는 음력 정초부터 3일간 상당에서 제관에 의해 주관.
하당 갯제에서는 무당을 물러 용왕굿을 성대하게 지내면서
뱃길의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풍습이 전해지곤 하였다.
섬마을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삶의 터전이.,망망대해.
바다는 사람의 힘이나 과학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곳.
각 가정이나 주민들이 모시는 신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는 곳.
그래서, 자신을 비롯한 가정의 안녕과 건강,
그리고 축복을 위해 모시는 신들이 많은 섬마을.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소저아기씨 (당각시),상궁부인,
제석님, 산중처사님, 도령(총각화상)의 종이 위패가 있었고
상궁부인과 제석님 중간에는 위패가 없었으나 “당할머니”가 좌정.
신안군청에서 “관광휴양지 흑산도로 더욱 개발하고자
역사학자, 민속학자등에 의해 연구하고 조사하여 조명한 결과
이곳은 여러 신들이 좌정되어 있다는 학설과 논문이 밝혀지면서
신성한 지역으로 섬마을 주민들과 여행객들에게 행복과 건강, 사랑,
그리고 어부들에게는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장소로 자리하고 있다.
.
근래에는 옛 풍습 대신에 사월초파일에
마을 어르신들과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곳에서 매년 '진리마을 축제마당'이 열린다.

성황당 아래 50m쯤 천연기념물 제361호.,초령목.
수령 320년쯤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초령목(招靈木)은
'가지를 꺽어 불전에 놓으면, 신령을 부른다.'는.,신령나무.
1994년 고사한 천연기념물의 후계나무.
흑산도 초령목은 모두 43 그루 남아있다.
초령목은 중국 남부, 아시아 아열대지역에서 분포,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흑산도에 드물게 자생한다.
흑산도 초령목은 고사하여 2001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

해신을 모시는 진리 당산(堂山) 숲은.,<신들의 정원>.
'신안 흑산 초령목 자생지'이자.,<흑산도 자연 관찰로>.
활엽 상록수 중에서 초령목은 가장 먼저 봄꽃을 피워낸다.

흑산도는 활엽상록수가 95%이다.
그래서, 산이 검게 보이기에.,흑산도.
하여, 봄꽃이 귀하고 꿀벌도 보기 어렵다.
그런데,
꽃샘추위 속에서
천연기념물 초령목이
3cm크기 꽃을 피운 것.
흑산도의 특산물은 홍어가 손꼽힌다.
다른 지역보다 맛이 좋고 찰지기로 유명.
성어기는 추위가 심한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적은 양만 잡히기 때문에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이 흠.
상라봉(227m) 정상에 오르면
'흑산도 아가씨'노래비와 전망대
1967년 이미자 노래가 흘러 나온다.

흑산도.,칠락산 & 상라산성(반월성).
장보고가 쌓았다는 상라산성은 지정 문화재.
'고대~고려시대' 한중일을 연결하는 중요 거점.
...................흑산도 상라산성...................
읍동마을 뒤편의 계곡에는 옛 흑산현 치소 및
고려시대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관사터가 위치.
관사터 맞은편 골짜기에는 무심사지(无心寺址).
그 위쪽 상라산 6부 능선 상에 상라산성
정상부에는 제사터 및 봉화대가 자리한다.
상라봉 제사터와 무심사지는 안전항해 기원소.
관사터는 상선 선원들이 머물던 곳.
산성은 전체 길이 280m의 소형산성,
'반월성'이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형태.
성 내부에는 동문지와 건물지 1개소
유적 모두 상라산성 중심 500m 내 분포.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유물 등이 출토된 곳.
해적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읍동마을에 쌓았다는 상라산성.
..........................................
흑산도가 과거 국제 해양교역에서
중요한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입증.
국제적인 해양 거점의 면모를 갖추었던 요지.

흑산도 동쪽 영산리.,석주대문.
석주대문이라는 코끼리 모양의 바위는
바다 위에 돌로 세운 대문과 같은 형상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특산물로는 홍어.
이미자 노래 -〈흑산도 아가씨〉
대흑산도 정상에 세워진.,노래비.
옛부터 조기, 홍어 산지로 유명한 흑산도.
흑산도는 목포에서 출발하는 관광지 홍도와
우이도(牛耳島)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섬이다.
흑산도를 빙 둘러 싼.,영산도, 대둔도, 다물도, 장도.
더 멀리는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만재도, 홍도, 가거도.
또한 이들 11개 섬의 해상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는.,흑산도.
근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이 이곳에 와서 배와 그물을 수리
기름, 얼음, 생필품, 물을 실으며, 선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
흑산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곳이다.
'1966~1967년' 서울대학교 연구소 지표조사 결과,
흑산도와 우이도, 태도, 가거도 등에서 돌도끼와 토기
파묻혀 있는 조개무지,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물을 발굴.

선사시대 흑산도, 우이도, 태도, 가거도 만재도 등.
신안군 1004 섬 대부분 뭍과 이어진 저지대였다는 증거.
제4빙하기 말, 지구온난화 및 대홍수때 바다에 잠긴 것일까?
산맥의 산봉우리들 처럼 바다 위에 점점이 솟은 섬들.
흑산도는 목포와 홍도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해상교통 중심지로, 근해 조업 선박들의 대피소.
처녀당, 초령목, 정약전 유적지, 반월성,석주대문 등.
흑산도는 조선후기 최익현, 정약전.,유배지.
'흑산도(黑山島)는 중국서 수로로 900리이고 둘레가 35리.
송사(宋史)에는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째에 대양에 들어서고, 5일째에 흑산도에 이른다.'고 적혀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나주목 산천. 흑산도는
한반도와 중국 절강(浙江)지역을 잇는 해로의 기착지점.
중국에서 한 점으로 보이는 흑산도는 대흑산도와 소흑산도.

대흑산도 칠락산(七落山 : 272m).
.........................대흑산도............................
대흑산도를 주도로 하여 홍도(紅島)·대둔도(大芚島)·
영산도(永山島)·다물도(多物島) 등이 흑산군도를 이룬다.
동경 125°26′, 북위 34°41′, 면적 17.75㎢, 해안선 길이 41.8㎞.
흑산면 인구는 4,714명(2008. 12. 31 현재).
18세기 조선시대에도 주민들은 상선을 타고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생계 유지.
흑산도는 828년(흥덕왕 2)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당나라와 교역할 때부터 사람이 정착하였던.,월산군(月山郡).
1678년(숙종 4)흑산진(黑山鎭) 설치되고, 나주목(羅州牧)에 소속.
1888년 흑산진 승격후, 만호(萬戶)를 두고 서해진(西海鎭)을 감시.
또한, 1895년지도군(智島郡)에 속하였다가 1914년지도군이 없어지자
무안군(務安郡)에 속하여 오다 1969년 신안군(新安郡)에 속하게 되었다.
2004년 1월 30일에 흑산도 일부 지역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
목포·흑산도·홍도와의 사이에 페리호가 다니고 관광객이 많이 오고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은 1981년 12월 23일 14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문바위, 칠성동굴, 촛대바위, 학바위 등
온갖 특이한 형태의 기암괴석이 많은 절경지.
그 면적이 2,321.512㎢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국립공원
공원은 신안군, 진도군, 완도군, 여수시에 걸쳐 1,596개 섬들.
그 중 신안군 내의 140개의 유·무인도서 및 여(與)가 포함된다.
..................................................................................
멀리서 보면, 산과 바다가 검푸르게 보인다 하여.,흑산도.
인근에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
제주도와 거의 유사한 난대성 식생 자연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지 않은 미래에
무한 잠재가치가 빛을 발할
해상 관광자원의 보고.,흑산(군)도.
흑산군도 인구는 2001년 현재 3,133명.
우이도는 서남해 상에서 먼 바다에 위치.
중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바닷길의 요충지.
흑산도 진리 2구에 있는 반월성(半月城).
길이 2,300m, 높이 0.5∼2m, 반월의 형태.
신라시대 장보고가 왜구 방어 목적으로 축성.
고려시대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온다.
성의 뒤쪽은 바다에 면하여 방어벽으로 안성맞춤.
성문의 받침은 남아 있어 성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
조선 숙종 때 흑산진을 설치한 서남해안 국방기지.
.
옛부터 망망대해에 있는 섬이라 유배지로 사용.
천주교 신자인 정약전이 신유박해로 이 곳에 유배되어
오랫동안 머물며 자산어보를 쓴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조선 말, 유학자 최익현도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른 재정 파탄 등
흥선대원군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 전개를 촉구하고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으나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에 유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은 면암집 48권.

여(與)는 밀물때 물에 잠기고
썰물때 뭍으로 드러나는.,암초.
![[포토] 홍도 남문바위](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h061.com%2Fimgdata%2Fch061_com%2F201505%2F2015052432242729.jpg)
홍도- 남문바위.

이곳 남문 바위를 지나가면 일년 내내 더위를 먹지 않으며
재앙을 없애며 바라는 소원이 성취되고 행운을 얻는다는 곳.
고깃배가 이곳을 지나게 되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전설.
하여, '행운의 문' 또는 만복을 내리고 깨달음을 얻는 '해탈의 문.'

홍도는 약 250만년전에 생성된.,화산도(火山島)이고
제주도는 약 200만년전 신생대 3~4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차례 화산 활동에 의해 생성된 화산도(火山島이다.
홍도는 서남 다도해 다른 섬들과 생성역사가 다르다.
다른 섬들은 대부분 중생대 백악기 화산활동의 소산물.
그와 달리 홍도는 붉은색 규암과 규질사암으로 되어있다.
규암은 95% 이상 석영성분 사암이
변성되어 만들어진 암석.
다른 암석에 비하여 풍화작용 및 해식작용에 잘 견디는 암석.
홍도를 구성하는
사암류는 얕은 바다에서 형성된 후 융기.
수억 년 동안 지표에 노출된 채 풍화와 침식을 받아 오다가
약 1만 3천년 전, 황해로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섬이 되었다.
이후 또한 파도와 싸워서 풍화에 강한
규암만이 남아 기암절경을 이루게 된 것.
![[사진 인화 액자] 전남 신안군 홍도 남문바위 비경](https://t1.daumcdn.net/cfile/blog/261BC049546ED44202)
.........
홍도
..........
'해질녘에 석양 노을에 바닷가가 붉게 보이면서
반사되어 섬 전체가 붉게 물든다.'고 하여.,'홍도'.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107km 지점에 있다.
주위에는 단옷섬·방구여·아랫제비여·진섬·앞여·
높은섬· 띠섬· 탑섬 등 20여 개의 부속섬이 있다.
최고봉은 깃대봉(368m)이며, 남서쪽으로 양산봉(陽山峰:231m)
해안선은 드나듦이 비교적 심한 편으로 남쪽과 북쪽이 깊게 만입.
암석해안, 해식애, 해식동(海蝕洞) 등의 해안지형 경관이 뛰어나다.
흰동백·풍란 등의 자생지로 274종 식물이 분포하며,
새 54종 대부분 텃새, 남방계이고 북방계는 11종에 불과.
그밖에 무척추동물 117종과 어류 233종, 흑비둘기·염주비둘기 등.
연근해에서는 우럭·장어·농어 등이 잡히며, 전복·김 등
취락은 남쪽 죽항마을과 북쪽 석촌마을에 밀집하여 있고
두 마을간 능선 소로에 당산림(堂山林)은 주민의 신앙 중심.
매년 음력 섣달 그믐이면 풍어제를 지내기도 한다.
섬 전체가 아름다워 남해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명승지
홍도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70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특히 홍도남문·시루떡바위·
물개굴·석화굴·기둥바위·탑바위·원숭이바위·주전자바위·독립문바위·
홍어굴·병풍바위 등으로 이름 붙여진 기이한 암석들이 주요 관광 코스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한다.
면적 6.42㎢, 해안선 36.8km, 인구 466(2003).


옛날 중국과 교역할 때 중간 기항지
이 섬에 정박하여., 북서풍을 피하고
동남풍을 기다렸다하여 대풍도(待風島).

홍도(대풍도).,슬픈여바위.
...................홍도 제6경 - 슬픈여바위...............,
옛날 마음씨고운 부부가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갔다가
돌풍이 불어 많은 짐을 싣고 풍랑에 파선 되고 말았다.
이를 본 일곱 남매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 바위로 변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서는
홍의도(紅衣島)로, 숙종실록에는 홍어도(紅魚島)로 표기.
일제 시대 바다에 뜬 매화꽃처럼 아름다워.,매가도(梅嘉島).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착된 명칭., 홍도.
............................
소흑산도(가거도).
............................
소흑산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45㎞.
북동쪽 약 70㎞ 지점에 대흑산도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가 있다.
1800년 경 나주 임씨가 최초 거주했으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가거도.
등대 아래 선창에 배를 정박하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계단과 잡목 사이 절개지에 하얗게 반짝거리는.,조개무지.
신석기시대 토기와 뼈로 만든 도구들이 함께 발견되었던 곳.
장보고 선단이 한·중·일 중계무역 중간 거점.
오늘날, 쾌속 여객선으로 달려도 머나먼 뱃길.
이곳이 장보고 해상무역 기점인 사실이 놀랍다.
.................................................................

대한민국 최서남단(最西南斷).,가거도.
세월호 사고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맹골수도는 물살이 빨라 난파사고 다발지역.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 격전지였던.,맹골수도.
진도 울둘목과 맹골수도 급류를 이용하여.,대승.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달리면 흑산도항
흑산항이 중간기점으로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거쳐
쾌속선으로 4시간 이상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가거도.
.
중국에서 "가거도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가거도(소흑산도) 독실산(639m) 시인(視認)거리.,107.5km.
비바람 부는 날씨 속에서의 시인거리는 최대 100 여 km 이내.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가거도.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45㎞ 지점에 있다.
목포~흑산도~가거도 ~ 만재도.,여객선 운항.
![[만재도 소개/만재도 가는 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3.phinf.naver.net%2F20140703_153%2Fyujinwoo2000_14043710699491OlwK_JPEG%2F%25B8%25B8%25C0%25E7%25B5%25B5_%25C1%25F6%25B5%25B5.JPG%3Ftype%3Dw2)
...........
만재도.
...........
동경 125°28′, 북위 34°12′에 위치한.,만재도
흑산도 남서쪽 45㎞,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104㎞,
진도에서 북쪽으로 59.7㎞ 지점에 있다. 면적은 0.59㎢.
'구름처럼 자유롭고 싶다면 만재도로 떠나라.
번잡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떠나라.
아름다운 서해의 보석과 같은 섬을 찾아 떠나라. '
지금 당장 그곳으로 떠나라.
만재도 해안선 길이는 5.5㎞.
![[전남여행/만재도여행]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만재도](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4.phinf.naver.net%2F20140703_250%2Fyujinwoo2000_1404373797571NBRxS_JPEG%2Fmanjaedo_com_20110223_150532_manjaedo1004.jpg%3Ftype%3Dw2)
동쪽 국도(菊島), 남쪽 녹도(鹿島),
북동쪽 흑도, 제서, 간서(間嶼)·백서(白嶼)
등과 함께 소중간군도(小中間群島)를 형성한다.
![[신안 만재도] 은둔의 섬… 신비의 섬](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hoto.hankooki.com%2Fnewsphoto%2F2006%2F03%2F16%2Fjiwon79382006031617341700000000.jpg)
요즘 '삼시세끼'촬영지로 각광받는., 만재도.
육지에서 가거도 보다 가깝지만 뱃길은 멀다.
<목포 ~ 4시간 ~ 가거도 ~1시간 반~ 만재도>

만재도.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먼데섬’ 또는 ‘만대도
재물 가득 실은 섬 또는 해가 지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
하여 ‘만재도’라 하였다고도 한다.(신안군 흑산면 소속).
만재도는 주소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그러나, 거리 상 제주도 추자군도에 가깝다.
흑산군도와 추자군도 사이 징검다리.,만재도.

만재도.

......................
조선시대 흑산도.
.......................
흑산도는 조선 숙종 때 유배지로 활용되기 시작
'영조~ 정조' 때 집중적으로 유배지로 사용된 곳.
흑산도로 유배된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물.,정약전.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신지도 유배.
그후, 조카사위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류되어
혐의는 벗어났지만 더 외딴.,흑산도 우이도 유배.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9년 동안 유배생활.
대흑산도 이배 후 1816년 생을 마감하였다.
'표해시말, 자산어보' 저서를 남기고
귀양지에서 운명한 정약전(1758~1816).
흑산(군)도 서식 어류를 기록한.,자산어보.
정약전이 문순득의 구술을 바탕으로 쓴
흑산도 홍어장사 문순득 표류기'.,표해시말.
조선시대 3대 표해록 중 하나이며,
가장 오랜 시간과 긴 거리(15,00㎞)를
표류한, '신안 우이도 사람' 문순덕 표류기.

1801년 12월 홍어장사 문순득은 풍랑을 만나
유구국을 거쳐 여송국(필립핀)에 다시 표류 기착.
마카오, 베이징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조선으로 귀국.
이 무렵에 전남 신안군 우이도(소흑산도)에는
'천주교와 관련되어 실학자' 정약전(丁若銓)이 유배.
홍어장사 문순득씨 집안에 귀양살이 거처를 두고 있었다.
아울러, '정약전의 동생'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전남 강진에 유배되어 다산초당에 머물고 있었다.

우이도.
우이도.,북쪽에 흑산도 등대.
면적 7.98㎢, 해안선 길이 22㎞,
인구 423, 가구 200세대 (2003 기준).
섬의 북쪽에 독실산(639m)이 최고봉.
흑산도와 같은 생활권역으로 인식되어
흑산도 유배인들은 이곳 '우이도(牛耳島)와
흑산도를 오고 가며 유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우이도(牛耳島)..............
동경 125°50′, 북위 34°36′에 위치하며,
목포에서 서남쪽 약 63㎞ 지점에 있다.
면적은 10.7㎢이고, 해안선 길이는 21㎞.
북동쪽에 도초도(都草島), 서쪽에 흑산도(黑山島),
동쪽에 하의도(荷衣島)가 우이도를 둘러싸고 있다.
2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이군도의 주도이다.
부속 도서로는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화도 등
오늘날,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약 450년전 파평윤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
원래는 진도군 흑산면에 딸린 섬이었으나
1896년 지도군 흑산면에 편입되었다고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안군 흑산면
1962년 도초면, 1969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우이도.
주위에 서소우이도·동소우이도·화도 등
우이군도., 북동쪽으로 도초도·비금도·
대야도·신도 등 비교적 큰 섬들이 있다.
2009년 기준 인구 162명, 세대수는 89세대
취락은 해안에 위치한 평지에 고립되어 발달.
파평윤씨 후손은 대초리 마을에 맥을 지키고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없고
밭 0.81㎢, 임야 7.0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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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 풍성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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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장사 문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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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득은 조선후기 사람으로 우이도에 살며
흑산군도 일대 어부들이 잡은 홍어를 사다가
목포에 내다 팔던 홍어잡이 문씨 가문의 상인.
당시 우이도 유배인은 문씨들의 도움을 받으며,
흑산도에서 고된 유배생활을 견뎌 나가고 있었다.
1801년 12월 문순득은 홍어를 사러가기 위하여
작은 배에 짐을 싣고 흑산도 남쪽 태사도에 입도.
태사도는 오늘날 태도(상태도,중태도,하태도)이다.
.....................태도....................
상·하태도(전남 신안군 흑산면) 태도는
목포에서 여객선으로 3시간 거리 원도(遠島).
목포에서 짝수날 격일제로 배가 운행되는 외딴 섬.
1600년 경 흑산도에 살던 김해 김씨가 처음 입도.
1800년 경 박씨가 들어와 정착했던 목포 남서쪽 120㎞.
오늘날, 상태도는 목포에서 가거도 행 쾌속선 3시간 거리.
상태도는 중간 기착지인 흑산도에 잠깐 멈췄다가
다시 1시간쯤 가면 태도군도 중 가장 먼저 닿는다.
배에서 바라다 보이는 상태도는 가파른 절벽이 황량.
섬에는 여객선 접안시설이 없어 종선을 이용해야 한다.
마을은 남쪽해안 일대에 모여 있으며 주로 어업에 종사.
근해 일대는 제주난류 북상으로 어족이 풍부하고
전복, 톳, 돌김이나 우뭇가사리 자연산이 채취된다.
파도가 거세 양식하기 어렵다보니 대부분 자연산이다.
바다낚시로 유명한 태도
돔, 농어 등이 잘 잡히는 곳
바다낚시 매니아들이 찾는 어장.
상태도 하태도에 비하여
소수 인구가 살고 있는 중태도
아직도 여객선이 경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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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에서 배를 탄 사람은 문순득의 작은 아버지 문호겸.
이백근, 박무청, 이중원, 어린동자 김옥문 등.,일행이 6 사람.
태도에서 홍어를 싣고 오다가 대흑산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
문순득은 3년 2개월간 표류 생활 후
구사일생으로 우이도로 다시 돌아온다.
문순득(文淳得, 1777-1847).,표류 체험기.
이때 우이도 문순득 가문에 유배 거처를 둔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전이 쓰게 된.,표해시말.
표해시말(漂海始末)은 정약전 作.,문순득 표류기.

그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마카오에도
청 관리가 쓴 문순득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그무렵, 조선에서 세상천지는 중국, 일본만 존재.
문순득은 류구국에 기착하여 필담(筆談)과 몸짓 등으로 대화하였고
필립핀에서는 현지어를 익혀 현지인은 물론 청나라 표류인과도 대화.
그는 귀국한 후에는 제주도에 표류해온 여송국 난민들의 통역을 맡아
무려 9년만에 필립핀인을 밝혀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를 후손이 대대로 보존하고
있다.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서남쪽으로 수백리 밀려나가면서부터 표류.
사방을 둘러보니 주위에 한점 섬도 볼 수 없는 망망대해.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갔으나, 여전히 바람은 줄지 않았다.
키가 꺽이고 돛은 펼 수도 없어 바람이 가는데로 표류하였다.
날이 밝아 동남쪽에 큰 산이 보였는데, 그곳이 제주도.
풍랑 때문에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눈앞에 섬을 두고도 접근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바라는 마음으로 돛을 올려 빠른 속도로 항해한다.
며칠 후, 날이 밝아오자 동남쪽에 있는 큰 섬이 보였다.
배를 멈추고 해안가에 닻을 내리니 6~7인이 배를 타고 접근.
그들은 문순덕 일행에게 물을 대접하고 먹을 수 있는 죽을 주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하여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섬사람에게 물으니 문순득이 도착한 곳은 유구국 대도.
지금은 일본 가고시마현에 속하여 있는 '류쿠 열도'의 섬.
표류 중
기진맥진 기항했던.,유구국 대도(大島).
조선인 표류객에게 유구인들은 친절했다.
그당시 유구국은 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다.
문순득 일행은 대도를 거쳐 유구국 수도인 '나하'로 이동.
백촌에서 6개월간
머물때 현지인들은 그들을 초대 및 환대.
문순득은 현지 토속어를 익히고 풍습을 배워 친화력을
보였다.
최초로 상륙한 양광촌.
류큐 열도.,아마미오 섬.
한자리에서 차 마시며 담배를 권했다.
가래침을 뱉는 타구도 갖고 다녔다.
상의에 짚신을 신고 모자를 썼다.
집은 네모반듯 하였고 판자로 엮은.,벽과 바닥.
토산품 마사 식물 껍질을 벗겨 실을 만들고 베를 짰다.
순풍이 오면 송환하겠다는 답변도 들었다.
그러나, 석달이 지나서야 출항이 결정되었다.
노랑머리 서양인들의 모습이 특이했다.
그가 조선인 표류객임을 말해주었다.
광둥성을 거쳐 베이징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선하였던 것.
'유구국~ 청나라' 진공선 출발 때 문순득 일행도 동승.
표류민 32명과 유구인 60명이 중국을 향해 출항.
호위선도 대동하여 중국 복건성으로 향발했다.
중국 사람들도 함께 탑승하였다.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갈 희망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늘은 문순득을 돕지 않았다.
또 다시 풍랑을 만나 14일간 서풍에 밀려다녔다.
여송국(呂宋國)의 서남마 지방이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에 의탁생활을 하였다.
여송국에서 문순득 일행은 '비간' 마을에 정착.
이곳은 스페인 사람들이 진출하여 만든 상업도시.
무역을 위해 필리핀에 이주한 청나라 상인들도 많았다.
비간 마을 중심에는 큰 성당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성당으로 모여 들어 예배를 드렸다.
문순득의 눈에 비간 마을의 성당은 너무나 새로운 풍경이었다.
성당사람들 도움으로 낯선 땅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문순득은 끈을 꼬아 팔기도 하고,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
청나라로 가는 배값을 마련해야 했다.
문순득은 토속어를 익혀 현지인들과 소통.
여송국 사람들은 붓이 아닌 펜으로 글을 썼다.
인종이 다양하고 혼혈도 많아 보였다.
술 담배 즐기고 물레,
북, 베틀 사용은 조선과 유사.
식수가 귀하여 빗물을 받아
마셨다.
손으로 먹는 식생활 여송국(필리핀)풍습이 특이.
닭싸움 풍습도 관람하고 물소들도 많이 보았다.
문순득의 작은 아버지 등
4명도 유구인 배편으로 뒤따라 갔다.
문순득은 유럽형 범선을 타고 항해하는 경험을 처음 하게 되었다.
이때 문순덕은 배 모양과 구조를 유심히 관찰.
문순덕 구술을 바탕으로 '운곡선설'이라는 배를 제작.
그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이 개항장으로 개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선박들이 모여들었던 국제항.
집을 올려 지어 살고 있는 모습이 매우 특이.
복건성 사람 25명뿐.
우선 중국의 수도인 북경으로 가야 했다.
때로는 걷고, 관에서 호송하는 가마를 이용.
남웅부, 남안부, 강서부를 거쳐 남경에 도착.
또다시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이동하며.
산동계를 거쳐 드디어 북경 황성에 도착.
문순덕 일행은 고려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수레를 타고 책문 지나, 의주 거쳐 한양에 도착.
문순덕은 무안 다경포 나루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고향 우이도로 가기위해 이곳에서 배를 기다려야 했다.
고향 우이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1805년 1월 8일에 고향에 돌아왔다.
햇수로는 5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표류.
중국 대륙을 통하는 색다른 체험.
중국에서 10개월을 체류하였던 표류 생활.
우이도 주민들은 무사귀환을 환영.
1804년 3월 먼저 귀국하였다.
나갔다가 3년 2개월만에 돌아온
표류였다.
정약전 선생이 묻는 말에 답변하여 ‘표해시말’을 기록.
그의 형님 정약전에게서 들은 문순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본국으로 송환할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왔다.
여송국 표류객이
목장에 거주.
전혀 소통이 되지않아 울고 있었다.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연.
그들은 3명만 제주도에 살아 있었다.
표류 9년만에 말문이 열린 감격에 엉엉 울어댔다.
문순득이
‘조선을 깨웠다’라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 것.
문순득(文淳得, 1777-1847).
직계 후손인 문채옥씨가 소장하고 있다.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시제를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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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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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편지 보낼 때마다 자산이라고 일컬었다.
죽음의 그림자 같아 늘 두려웠다.'던.,정약전.
유배지에서 하루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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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주민들을 널리 심방하였다.
이를 좇을 수가 없었다.
서적이 많지 않아 식견이 넓지 못하나 그의 말은 믿을 만하다.
서차(序次)를 강구하여 완성한.,자산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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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무인류(無鱗類) 및 개류(介類), 제3권 잡류(雜類).
이어(耳魚)·전어(箭魚)·편어(扁魚)·추어(錘魚)·대두어(大頭魚).
경어(鯨魚)·해하(海蝦)·해삼(海參)·굴명충(屈明蟲)·음충(淫蟲).
호(蠔)·나(螺)·율구합(栗毬蛤)·구배충(龜背蟲)·풍엽어(楓葉魚).
④ 잡류:해충(海蟲)·해금(海禽)·해수(海獸)·해초(海草).
실제로 본 것을 토대로 내용의 충실을 기하려고 노력한 흔적.
홍어 숫놈.
'홍어 큰놈은 6~7자 안팍으로 암놈은 숫놈보다 크다.
암놈이 낚시 바늘을 물고 엎드릴 때 숫놈이 붙어서 교합.
이때 암놈은 먹이 때문에 죽고, 숫놈은 간음 때문에 죽는다.
동지 후에 잡히나 입춘 후에 살이 찌고 맛이 난다.
학계에서도.,유일무이.
서울대학교 상백문고(相佰文庫) 소장.
............정약전(丁若銓 1758 ~ 1816)...................
조선 시대 학자, 카톨릭 교 전도가. 정약용의 형으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흑산도로 귀양.
우이도 9년, 대흑산도 이배 후 181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1779년 주어사(走魚寺) 강학회 천주교 연구 회원.
본관 나주, 자 천전(天全), 호 자산(玆山), 손암(巽庵), 연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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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무엇이든 꼼꼼히 따져 옳고 그름을 밝혔다.
1801년 형제는 나란히 남도 귀양길에 올랐다.
다산 서른아홉, 약전 마흔셋.
그날밤, 정약전은 심정 토로.
‘문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
그것이 생전에
마지막이었다.
그 날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약용은 나주 영산강∼영암∼누릿재∼성전 삼거리~ 강진.
약전은 무안
다경진을 거쳐 목포에서 서남쪽 51.3km.,우이도.
약전과 인간적으로 정든 압송 장교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당시흑산(도초도와 4km 거리).
약전은 술을 많이 마시고 즐겼다.
사귐에 양반 천민이 따로 없었다.
어부, 천민들과도
술잔을 나눴다.
양반이라고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글쓸게 있으면 주저않고 대신 써줬다.
섬사람들에게 단연 최고 인기스타였다.
너도나도 자기 집에 모시려고 할 정도.
1801년 약전은 우이도에서 문순득을 처음 만났다.
외로운 약전의 말벗이 되어주었고 깎듯히 대하였다.
1805년 1월 문순득이 3년만에 다시 나타났다.
문순득은 세상 밖의 온갖 체험담을 가득 안고 왔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약전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약전은 부러웠다.
날아가 다니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를 ‘표해시말(漂海始末)’로 엮었다.
1807년 약전은 거처를 흑산도 모래미 마을로 옮겼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1000명(현 4600여 명)이 채 안 됐다.
모래미는 읍동(진리) 다음 큰 곳으로, 부자 어부 동네였다.
약전은 마을 위쪽
모래언덕에 복성재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