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창작 강의노트 (3)>
허구란 무엇인가 (2)
이제 필자의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허구의 의미를 확인해 보자. 1978년 월간 <소설문예>의 신인상에 당선되었던 단편 <영결식>이다.
글을 읽기 전에 우선 이 블로그의 포스트 '작품창고(소설)'에 있는 '(단편소설) 영결식(永決式)'을 읽기 바란다
※ 단편소설 <영결식> 읽으러 가기 → http://lby56.blog.me/150029496209
1977년 12월 초. 정확한 날자는 기억할 수 없지만, 보병 9 연대의 RCT(연대 전투단 훈련)가 있었다. 연대 군수과 1 · 3종(주부식과 유류) 보급선임하사로 근무하던 필자는 이 훈련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 훈련 중 연대 지원중대 소속 병사 하나(구체적인 계급과 성명은 기억나지 않는다)가 106mm 무반동총을 탑재한 지프차가 넘어지면서 총신에 깔려 즉사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런 사고가 있었음에도 훈련은 계속되었고, 계획된 날자에 훈련이 끝났다.
훈련이 끝나고 다음날이었는지 며칠 후였는지는 모르지만, 평상시대로 필자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사단 병참부로 가서 부식을 수령하여 예하 부대에 보급하고 연대 본부로 귀대하였다. 막 정문을 통과하려는데 위병이 막았다. 까닭인 즉, 지금 사단장까지 참석하여, 연병장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있으니 후문으로 통과하라는 것이었다.
영결식이라. 그때까지도 누가, 왜, 어떻게 죽어서 영결식을 하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군에서의 영결식이라면 그야말로 무공훈장을 수여할 만한 고결한 죽음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고루한(?) 생각과 함께 우리 연대에 그런 죽음이 언제 있었는가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하는 수 없이 후문을 통해 수송부로 가서 부식차량을 인계하고 보급병과 함께 군수과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가면서 바라본 연병장의 영결식은 그야말로 ‘엄숙’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례 있는 국기강하식이라든가, 연대장 이취임식이라든가 하는 의식을 자주 봐왔기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사무실로 들어섰다. 마침 담배를 피워물고 방풍창 앞에 서서 구경을 하던 2 · 4종 보급병이 담배를 감추며 경례를 붙이고는, 필자가 돌아서자마자 혼자 소리로 중얼거렸다.
“시팔눔, 죽을라면 다음 달에 죽든가, 특명 받아 놓고 이게 뭐야?”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시 그 보급병은 이미 전역 명령을 받았지만 아직 후임도 받아놓지 않은 상태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녀석의 책상 귀퉁이에는 지원중대 보급병이 앉아 서류를 작성하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영결식이 끝나면 곧바로 화장장이 있는 군사령부로 보낼 것에서부터 사단 병참부로 보내야 되는 서류들이었다.
“김일성이 쳐내려오면 씨팔, 서류부터 보자고 할 거야, 분명히.”
녀석은 또 투덜거렸다. 전투 능력보다는 각종 검열을 위한 서류 작성에 많은 신경을 써야하는 행정병들의 일관된 불만이었다. 순간 필자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비닐로 방풍망을 쳐놓아 연병장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그러나 대략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한 병사의 죽음, 연대장(聯隊葬)이라는 의식, 가족의 슬픔, 보급병의 불만, 위병들의 의례적인 행동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혼합이 되어 필자의 머리에서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 필자 자신도 영결식이라는 것에 무심했었으니까.
영결식은 끝났고, 모든 병사들은 언제 영결식이 있었느냐는 듯이 크리스마스와 신정 연휴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득, <서부 전선 이상없다>가 뇌리를 스쳤다.
며칠 후, 장교 식당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인사 장교 이 중위를 만났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훈련 중에 죽으면 그냥 연대장(聯隊葬)으로 하고 국군묘지에 가는 거요?”
인사 장교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
“왠 트집이야, 다 그런 거지 뭐.”
다 그런 거라. 영결식이 있던 날 필자의 머리속에서 혼란을 일으켰던 것들이 분명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가슴을 저며왔다. 흔히 영감이라는 것이다. 이거 이야기가 되겠군,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왠만한 간부들은 다 빠져나가는 신정 연휴에 필자는 혼자 숙소에 엎드려 글을 쓰고 있었다. 인사 장교에게 부탁하여 육군규정을 베껴다놓았다. 그 규정에 있는 대로 필자는 또 하나의 영결식을 대학 노트 위에 진행시켰다. 내무반장을 하며 직접 경험했던 버선보내기 에피소드(물론 당시 ‘우리 어머니는 버선 같은 거 안신어요’하며 버선값을 내지 않고 버티던 병사 하나는 단체 행동에 관한 훈계와 함께 내무반장이던 필자에게 무진장 얻어터졌다)도 삽입했다. 식이 진행되면서 필자는 영결식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되어 보았다. 그냥 그들 각자의 입장에서 영결식을 진행시켰다.
영감이 강해서였을까. 영결식은 노트 위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필자는 영결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영결식장에 함께했다. 때로는 이 중위가 되었고, 장 대령이 되었으며, 고모가 되고 위병이 되기도 했다. 기수가 되고, 보급병이 되었으며, 조총수가 되고 분대장도 되어보았다.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난 후에 시작한 영결식은 정확하게 새벽 여섯 시 경에 끝이 났다. 1978년 1월 1일 새해 아침을 필자는 그렇게 맞았다.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 그리곤 열두 시간을 내리 잤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우연히 접한 월간 <소설문예>의 신인 작품 모집 공고를 보고 원고지 위에 다시 영결식을 진행시켜 응모하였고, 이 작품이 그 해 7월 그 문예지에 실리며 필자에게 소설가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영결식>은 조직사회의 허구성과 감정의 교통이 단절된 권태로운 인간들의 모습을 선명하고도 개성있게 다룬 작품이다. 신문기사를 연상케하는 건조한 문장과 예민한 시각이 소재와 아주 잘 어울렸다. 이 작품은 다른 투고작품들보다 참신성에서 돋보였다.’
당시 심사위원의 평이다. 필자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100%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노트 위에 볼펜으로 영결식을 진행시키면서 과연 ‘조직사회의 허구성과 감정의 교통이 단절된 권태로운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겠다는 구체적인 작의가 필자에게 있었을까? ‘건조한 문장’과 영결식을 향한 ‘예민한 시각’을 영결식이라는 ‘소재와 어울리’게 하려고 했을까? 노트 위에 ‘영결식’이란 제목의 소설을 쓰면서 필자가 과연 그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지금 생각하여도 분명 아니다. 천번 만번 물어보아도 분명 아니다. 그냥 ‘뭔가 이야기가 되겠군’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필자는 다 쓰고 나서도 꼭집어서 정확한 어휘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니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몇 개의 단어로 왜, 무슨 의도로 그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표현하기가 힘들다. 다만 무엇인가 머리속을 스쳤던 생각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들, 그 생각들이 필자가 과거에 경험했던, 그리고 그 경험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모든 행동들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노트 위에 나타났을 뿐이다.
물론 <영결식>에는 대화 표시를 하지 않았다. 구태어 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게다가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 아니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필자의 분신들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을 했을까?’ 그 상황에서 했을 행동들을 눈 앞에 그려보고, 아니 눈 앞에 영결식을 진행시키면서 그대로 그렸을 뿐이다.
흔히 작가의 의도를 말한다. 그러나 쓰는 입장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설명하려고 하지 말았으면 한다. ‘뭔가 이야기가 되겠군’하는 영감만을 잘 살려 쓰면 된다. 그 영감 속에 이미 작가의 의도는, 적확한 어휘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숨어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의도로 작품을 써야지하고 설명할 수 있는 영감이면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무언가가 자꾸 머리속에서, 가슴속에서 응어리질 때, 그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보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것은 소설이 되는 것이다.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소설은 단순한 것같은 이야기 속에 작가의 ‘말로 표현하지 못할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출처] <소설창작 강의노트 (3)> 허구란 무엇인가 (2)|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