讚陽村權近先生學德
양촌권근선생의 학덕을 칭송하며 20240623 진허권오철吟
東夷檀帝主開天. 동이의 주인 단군께서 하늘을 열으시고
朴赫居羅蘇伐先. 박혁거세는 신라의 시조가 되었나니라.
圖說陽村麗七隱. 양촌은 입학도설을 지은 고려조의 은둔 칠현이었고
應詩可遠鮮眞賢. 가원(권근)은 응제시 읊은 조선의 참선비니라
登樓謫士新城記. 유배된 선비는 영흥 신성의 누각에 올라 글을 짓고
焚邑倭奴破廢宣. 나쁜 왜구들은 읍내를 불태워 황폐함을 드러내었네
斯道愛民韓統兀. 유학의 애민정신은 일통삼한에 우뚝하였으니
世稀學德永垂傳. 세상에 드문 그 학덕은 영원히 전해지리라
聞說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會過千 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
「始古開闢東夷主」
전설을 듣자니 아득한 옛날 단군이 나무밑에 내리었다네 임금되어 동쪽땅을 다스렸는데 때는 요임금의 시대였다네 전한 세대 얼마인지 모르지만 지난 해는 천년을 넘었답니다. 후에 기자가 이어 받아서 함께 조선이라 이름하였네
伊昔赫居世 開邦五鳳年 相傳千世久 粗保一隅偏 却獻鷄林土 來朝鵠嶺天 綿綿三姓祀
永絕正堪憐 「新羅」 三姓의 祀典
저 옛날 혁거세란 임금이 있어 五鳳年에 나라를 열었다오 서로 전하길 천년이나 하였고. 외떨어진 한구석을 차지했다오 면면히 이어가던 갑자기 계림의 땅을 드리며 곡령으로 건너와 조회하였네 영영 끊겨 정히 가없습니다.
조령을 넘어 동남쪽으로 수백 리를 가면 바다 가까이에 흥해군이 있는데 땅이 궁벽하고, 서울 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생선과 소금이 풍족하게 생산되었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이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중간에 왜인(倭人)들의 침략을 자주 받아 점점 피폐하여졌다. 그러던 것이 경신년 (1380년, 고려 우왕6년 8월 왜인이 상주까지 침입) 여름에 그들의 피해가 더 욱 극심하여 고을이 함락당하고 불탔으며 많은 백성들이 학살당하였다.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니 고을은 폐허가 되고, 가시덩굴만이 길을 막았다.
□이 고을의 수령이 된 자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에 움츠리고 들어앉아서 감히 읍내 에 들어오지 못한 지가 거의 2년여가 되었다. 그러다가 정묘년 (1387년, 우왕13)에 국가에서 병 선(兵船)을 이 고을의 남쪽 바다에 띄우고 왜구(倭寇)를 방비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비로소조 금씩 모여들었다. 그러나 안심하고 믿을 만한, 견고한 성지(城池)가 없어서 백성들은 한곳에 모 여 살지 못하고 산이나 골짜기 등에 굴을 파놓고 살았다. 자신들의 소재를 노출하기를 꺼리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때때로 굴속에서 나와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를 하였다. 또 그들은 적군이 침입하면 서로 구하여 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직 도망칠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수령들도 먼 촌락에 머물면서 공무를 보고 읍내에는 들어 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무진년 (1388년) 겨울에 김제(金堤) 조우량(趙友良)이 군수가 되어 단신으로 그 고을에 부임 한 뒤에, 그는 온힘을 다하여 고을을 다스렸다. 그 다음해 가을이 되자 고을은 안정되고 백성들 은 화합하였다. 그는 고을 백성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다.
□ "이 고을에는 견고한 성(城)이 없어서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소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성을 쌓으려고 하는데 부로(父老) 들께서는 이일에 적극 협조하지 않겠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 "이는 우리들이 진실로 소원하던 바이오. 누가 감히 그 일에 협조하지 않겠습니까?“
흥해라는 고을이 있는데 땅이 가장 궁벽하고 험조하나 어업, 염업과 비옥한 토지의 생산이 있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많았는데 중간에 왜란을 만나 점차로 줄어들어 경신년 여름 이르러서는 더욱 맹렬한 화를 받아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들이 살해와 약탈을 당하여 거의 없어지고 그중에 겨우 벗어난 사람들은 흩어져 사방으로 가버려 마을과 거리가 빈터가 되어 가시덤불이 길을 덮으니 수령으로 온 사람들이 먼 마을로 가서 움츠리고 있고 감히 읍 안에 오지를 못한 것이 여러 해였다.
□□마침내 조우량은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이일을 도와줄 장정을 차출하여 가지고 지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이 고을 백성들만을 데리고 이일 을 시작하였다. 이 고을 백성들은 늙은이 젊은이를 모두 합쳐서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 는 이 사람들만을 데리고 그해 8월에 이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몸소 채찍을 손에 들고 열심 히 독려하였다. 부지런한 자는 격려하고 게으른 자는 타이르니, 그는 특별히 성내지도 않고 협 박하지도 않았으나,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집안일처럼 열심히 하여 주었다. 그리고 통양 만호 (通洋萬戶) 백인관(白仁琯)은 5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었는데 그해 10월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백성들은 안심하고 한 곳에 모여서 집을 짓고 안락하게 살 수 있 었다. 그동안 멀리 고향을 떠나 살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모여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에 조우량은 왕명을 받고 그 곳을 이임하게 되었는데 백성들은 그를 아쉬워하기를 어린 아이가 어미를 잃은 것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가 그동안 쌓은 업적들을 나열하여 이곳에 좀 더 있게 하여 달라고 조정에 청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청원은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생각 끝에 이 성을 쌓게 된 전말과 그를 사모하는 마음을 기록하여 성루(城樓)에 걸려고 하였는데, 그 글 역시 부탁할 곳이 마땅치 않았었다.
□다음해인 경오년 (1390년) 봄에 내가 유배를 당하여 이곳에 내려오니, 통양 만호 백인관이 이 곳 군수가 되어, 조우량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을 손질하고 또 성 밖에 못을 파서 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으며, 문에 자물쇠를 만들어 누구나 함부로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 하여 성은 더욱 견고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고을 부로(父老)들로서 전태주지사(前泰州知事) 안성언(安成彦)과 전낭장(前郎將) 장표 (張標)와 이회(李薈) 등 몇 사람이 나에게 말하였다.
□□ "우리들은 여기서 나서 여기서 자라고 그리고 여기서 늙고 있소. 그런데 우리 군의 수령들은 한 해에 한 번 아니면 이태에 한 번씩 교체되어, 그동안 우리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자 그마치 수십여 명이나 거치어 갔소. 그러나 청렴 공평 민첩하고 권위와 은혜를 동시에 베풀어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한 자는 조공에 비유할 만한 자가 없었소. 게다가 우리 군이 피폐한 것이 이때만큼 심한 때도 없었으며, 잡다한 일과 복잡한 안건들은 지난 해 토지를 측량할 때만큼 심한 때가 없었소. 그런데 조공께서는 한 사람의 종과 한 필의 말만을 끌고 와서 자신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재물을 주선하여 관청의 비용을 자급하였으나 종이 한 장도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토지를 측량하여 나누어 줄 때에 밭고랑 수의 많고 적음과 토질의 좋고 나쁨, 그리고 가을에 수확할 때의 결실을 한번만 보면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장부에 올릴 때에 처리하는 일이 빠르면서도 자세하여 그의 업적이 여러 고을 중에서도 최고가 되었습니다. 또적 군의 침입을 막는데도 용맹스러워 도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맨 앞에서 말을 달려 쫓아 가니 왜구가 두 번이나 몰려 왔으나 이곳을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백 명도 안 되는 노약자를 부역시키면서도 한 사람에게도 매질하지 않았고, 또 한 계절도 걸리지 않아 묵은 가시밭을 성지(城池)로 만들었으며 텅 빈 구릉을 사람이 사는 마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백 성으로 하여금 옛날과 같이 편안하게 담을 치고, 그리고 베개를 높이 베고 잠자게 하여 지금으로부터 먼 후세까지 안락한 가정을 이루고 끊임없이 생활을 영위하게 한 것은 모두 우리 조공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백성은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는 것처럼 그를 잊을 수가 없습니 다. 그러니 공께서는 이 사실을 글로 써서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전하게 하여 우리 조공의 덕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감동되어 그들이 들려준 그대로 기술하고 이어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 "맹자께서 말하지 않았소? '지형(地形)의 견고함이 인화(人和)만 못하다 '라고 말이오. 이 성을 쌓고 이 옷을 파는 데 있어서, 죽기보다 어려운 고통을 당하였으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던 것은 인화를 얻었기 때문이요. 성이 아무리 높고 못이 아무리 깊어도 그것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이것은 인화를 얻지 못한 것이오. 지금 성지는 견고히 설치되었고 조공이 베푼 은혜도 깊었소. 그러나 이 뒤에 이곳을 지키는 자가 과연 모두 이곳 백성으로 하여금 이곳을 버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할 것인가? 또는 혹시라도 이곳을 버리고 도망가도록 만들지나 않을 것인가? 하는 것 을 나는 염려하는 것이오. 이는 곧 수령된 자가 민심을 얻었는가의 여부에 달렸소이다. 곧 백성 의 불만을 보거든 은혜로 감싸주고 성이 견고하지 못한 데가 있거든 지체 없이 보수하여 앞서 이루어 놓은 것을 완성시킨 후에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옳소이다."
□□모두들 일어나 감사하기를,
이루어 놓은 것을 완성시킨 후에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옳소이다."
□□모두들 일어나 감사하기를,
□□ "공께서 하신 말씀은 곧 우리 고을의 수령들이 잇달아 더욱 근면하면 우리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윤택하고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그 말씀도 아울러 기 록하여 주시오." 하였다.
□□조공은 정간공(正簡公)의 후예로서 그 할아버지가 재상으로 있을 때에 훌륭한 덕을 베풀어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덕을 칭송하였다. 조공은 그러한 조상을 참으로 닮은 사람이었다. 언재인가 그도 재상이 되면 반드시 그 선조의 덕업을 떨어뜨리지 않고 이어받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000000홍무(洪武, 명태조 연호) 23년 (1390년, 공양2) 5월 일
1)작자 소개 : 권근(權近): 1352년(공민1)~1409년(태종9) 고려 말 조선 초기의 학자, 호는 양촌(陽村), 본관은 안동, 1367년 성균시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정도전 정봉주 등과 함께 친명 정책 주장 1389년(창왕1) 때 정사正使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르 명에 다녀올 때에 가
져온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에 유배되었다가 영해, 홍해, 김해 등지로 이배됨, 1401년(태종1) 때 작명공신 1등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하
여질,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 밝아 구결로써 <사서>, <오경>에 토를 달았음, 시호는 문충.
아래 그림은 머라감시인이 보내준 중국궁중 전례보물임
--募詩要綱--
1) 詩題:讚陽村權近先生學德
2)押韻;
3) 投稿磨勘:2024年7月31日(期日嚴守)
4)投稿處:(郵.37837) 포항시 남구 새천년대로 306, 112동 1102호 정규섭
5) 作詩問議:010-3532-4095 李煥植
6) 考選基準:違題.違簾.對不定.疊字.疊意.鶴膝.蜂腰.等先例에 準함
7) 考選委員:斯界大家3人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