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참변 이후 북간도 독립운동의 두 갈래
1.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2.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제 1 단계 : 1918년부터 1930년
1) 1918년에서 1925년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전파
2) 1926년에서 1930년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만주총국 활동
3)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해체와 중공공산당이 주도한 “5.30 투쟁”과 “길돈`폭동”
제 2 단계 : 1931년부터 1940년
1) 각종 유격대 설립과 활동(1930년 후반기~ 1933년)
①중국 동만특위 확산과 활동
②추수투쟁과 춘황투쟁
③항일 유격대 설립과 활동
④항일유격근거지
1932년 여름과 가을부터 동만의 조선인들은 각지의 당의 지시 아래 항일유격근거지를 창건하는 투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침략군이 연변을 점령하였지만 초기에는 통치가 농촌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중국과 소련, 중국과 조선 변경지대의 험산준령들은 동만의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노농민들에게 항일유격지 창설의 유리한 환경이었다. 중공동만특위는 동만지구의 항일운동과 토지혁명운동이 대중들 속에 파급되어 퍼지고 있으며 지리적인 환경이 방위에 적합한 지세를 가지고 있어 항일유격근거지를 창건하는 유리한 조건임을 파악하고 유격구 건립을 권장하였다.
9.18사변 이후 동만에는 부르하통하 이북에 위치한 연길유격구, 가야하 양안 산지에 위치한 왕청유격구, 봉밀산간지역에 위치한 화룡유격구, 황구령 이북의 산간지대로부터 훈춘하강 이남의 주소변경에 이르는 훈춘유격구 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유격구 안에 1932년 하반기부터 10여 곳에 항일유격근거지가 연이어 나타났다.
연길현의 왕우구, 팔도구, 삼도구, 왕청현의 소왕청, 가야하, 요영구, 훈춘현의 대황구, 연통라자, 화룡현의 어랑촌, 우보동 등 유격근거지다. 이런 유격구를 통 털어 동만항일유격근거지라 불렀다. 유격근거지의 범위는 거개가 6.7십리 내지 100여리 사이고 인구는 적은 곳이 6.7백명, 많은 곳이 2천명 좌우였다. 동만 경내 항일유격지 내의 인구는 약 2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 95%가 조선인이었다.
유격근거지 내에 소비에트17)정부와 혁명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각 지역 소비에트는 노동자, 고농, 수공업들을 조직하여 공회를 건립하고 빈농단을 설립하였다. 전쟁을 대비하여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병기공장, 피복공장과 병원 등을 세웠다.18)
문화교육을 중시하여 1932년 겨울 각 항일유격근거지에서 “소학교의무교육법”을 반포하여 의무교육을 실행하도록 권하였으며 여러 유형의 학교를 세워 항일전쟁이 요구하는 다양한 인재 양성하였다. 당시 동만의 각 근거지에 세운 학교는 모두 30여개에 달하였으며 조선인 학교는 조선어와 조선어 교재로 교육하였다. 수시로 일본군의 토벌의 위험을 받았지만 학교를 끝까지 견지하였다.
전투를 위하여 근거지에는 유격대 외에 항일자위대, 청년의용군, 소선대 등 반군사적 무장조직을 세워 평시에는 보초로서 근거지를 지키고 비상시에는 유격대에 참여하여 출전하게 하였다.
근거지의 병기공장, 재봉대, 취사반, 후방병원이 협력하여 유격대의 전투를 제고(提高)시켜 1932년 봄부터 1933년 말까지 계속된 일제와 만주국 군인들의 동만항일유격근거지를 향한 대대적인 토벌을 좌절시켰다. 통계에 의하면 1932년 11월부터 1933년 말까지 동만의 유격대는 일본군들과 15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지속적인 토벌로 인하여 유격근거지의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유격근거지에 식량문제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삼광정책으로 유격근거지 곳곳이 폐허가 되었다.
또한 당시 동만항일유격대는 민생단사건19)으로 중국공산당의 프레임에 갇혀 500여 명 이상의 지도자를 잃었으며, 노선의 문제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과 적대적 관계가 되어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혔으며 급진적인 토지혁명을 위해 지주들과 토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다양한 항일저항세력을 배제하여 스스로 유격대의 활동구역을 축소시켜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또한 일제는 계속 항일유격구에 대대적인 군사토벌을 감행하여 집단부락, 보갑제, 연좌제. 귀순공작반 등 군민분리정책을 병행하여 항일유격구를 고립시켰다. 그리하여 항일유격대의 항일유격근거지에도 변화가 잇달았다.
2) 동북인민혁명군 설립과 활동(1933년 ~ 1935년)
일본의 만주국 통치가 전 만주지역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동만지구 중공당 조직들은 그 때까지 의 자신들의 배타적인 좌경노선의 한계성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중공당의 지도를 받는 조선 인 항일유격대를 발전시키며 여러 민족, 여러 계층과 여러 유형의 항일무장역량을 단결하여 일제와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3년 1월 26일, 그런 찰나에 중공중앙으로부터 “만주 각급 당부 및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서한 – 만주의 상황과 우리 당의 과업을 론함”(이하 1.26 지시서한으로 약칭함)을 내려 받았다.
1.26 지시서한은 9.18사변 이래 동북 여러 민족의 반일투쟁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항일유격전쟁단계에 있어서의 정치, 군사면의 중공만주당조직의 주요과업을 전 민족항일통일전선을 결성으로 규정해주었다. 규합과 연합의 가능성이 있는 모든 역량 심지어는 믿음직하지 못한 역량이라 할지라도 일제와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으면 손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중공중앙은 중국공산당은 다른 항일단체와 연합함에 있어서 정치상, 조직상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들은 동북당조직의 중심과업을 가장 훌륭한 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편성하고 민주정권을 세우며 항일단체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라고 지시하였다.
1933년 4월, 중공만주성위는 1.26 지시서한을 접수한 후 5월 중순에 하얼빈에서 성위확대위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지시서한의 정신대로 민족혁명통일전선을 집행하며, 대중들 속에서 정치, 경제 투쟁을 전개하여 무산계급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만주의 인민혁명군 건립과 민주정부 건립을 중심과업으로 삼기로 결의하였다.
1933년 6월 초, 중공중앙의 1.26 지시서한이 동만에 전달되었다. 중공동만특위와 중공길동국 대표가 성위대표단과 함께 왕청, 훈춘, 연길 등 현들에 가서 현위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지시서한의 내용을 전달하였다.
1933년 6월 10일, 중공동만특위는 민중에게 알리는 글에서 전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며 중한민중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유격근거지 내의 소비에트정부를 없애고 인민혁명정부 또는 농민위원회가 다시 건립되었다. “모든 지주와 자산계급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구호를 “일본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한다”로 바꾸었으며 항일유격근거지와 만주국 통치구역인들의 상호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또한 항일유격대와 각 항일군과의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와의 전투에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1933년 여름, 연길현항일유격대는 구국군20), 산림대들과 연합하여 일본경찰서와 만주국 자위단 등을 습격하였으며 유격지에 쳐들어오는 일군들을 함께 물리쳤다. 11월에는 구국군과 연합하여 의란구에서 일본 토벌대의 습격을 물리쳤다.
1933년 9월, 왕청유격대는 구국군과 한국독립군와 연합하여 동녕성 전투에 참여하여 일군을 격파하였다. 1934년에는 만순, 만군 등의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만주군을 섬멸하였다.
동만의 유격대는 일제와 만주군의 제1기와 2기의 토벌을 각 항일부대와 협동작전으로 물리치면서 하였지만 대부분의 유격근거지가 파괴되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4년 봄, 동만의 4개 유격대는 900여명으로 증가하였으며 무기와 장비도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항일무장부대와 연합작전을 벌이면서 서로간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그러나 1933년 한국독립군이 관내로 이동하고 1934년 조선혁명군의 사령관 양세봉의 죽음으로 항일유격대는 동만의 유일한 항일부대로 남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설립과 활동
1934년 3월 하순, 중공동만특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건립”을 위해 연길현 삼도만 장지영에서 중공동만특위 및 항일유격대 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연길현과 화룡현의 유격대를 토대로 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 제1사를 설립하였다. 사장은 주진, 정위는 왕덕태가 임명되었다. 그들은 다 중국인으로서 조선인으로 편성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보스가 되었다. 회의는 연길유격대를 제1퇀, 제2퇀으로 재편성하고 화룡유격대를 제3탄으로 재편성하였다.
당시 회의에서 왕청현과 훈춘현 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 제2사를 설립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제1퇀은 연길유격대, 제2퇀은 화룡유격대, 제3퇀은 왕청유격대, 제4퇀은 훈춘유격대로 재편성되었다.
1933년 여름, 제1퇀과 제3퇀에서 대원을 선발하여 독립된 퇀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1퇀장에 박동근, 정위에 최학철, 제2퇀장에 맹조상, 정위에 김락천, 제3퇀장에 조학춘, 정위에 남창익,제4퇀장에 유장구, 정위에 주운광을 임명하였다.
전 사의 병력은 900여 명으로 그 중 제1퇀의 병력이 45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밖에 동만에는 200여 명의 청년 의용군, 1,000여 명의 항일부대가 있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창립된 후 일본군과 만주군의 토벌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제2군 독립사의 각 퇀은 근거지에서 활동하기가 더욱 힘들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유격전술로 계획적인 진공을 실시하는 전략으로 일본통치구역으로 들어가 작전을 펼치기로 하였으며, 중공만주성위는 유격대로 하여금 서쪽과 북쪽으로 진출할 것을 명하였다.
동만특위는 당의 지시를 따라 군사를 나누어 안도, 액목과 왕청 라자구, 영안일대로 근거지를 옮겨 새로운 항일유격구를 개척하였다.
1934년 4월 제2군 독립사 제2퇀의 주력부대가 안도로 진군하여 처창즈를 점령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만들었으며 7월에 제2퇀의 일부와 독립퇀은 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800여 명의 병력으로 안도현 북부의 요충지인 대전자를 포위 공격하였다. 연속 11주야나 일본군과 만주군을 포위하였고 치열한 접전 끝에 적을 대파하였다.21)
8월 상순 독립퇀이 구국군의 일부와 함께 따푸차이허를 공략하였다. 제2퇀도 같은 기간에 산림대22)와 연합하여 대사하진을 점령하였다.
1934년 4월부터 10월까지 항일부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을 103회 습격하여 3,537명을 살상하였다. 그 중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서 적들을 습격한 전투는 53회로 1,350명을 살상하였고 항일의용군은 50회 전투를 통하여 2,187명을 살상하였다.23) 이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영향력이 높아졌고 안도, 돈화, 왕청, 영안, 동녕 등 접경지대의 유격구의 개척하여 제2군의 근거지를 확보하였으나 일제는 동북에서의 식민통치를 확고히 하면서 1935년 6월에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들기 위하여 화북사변24)을 일으켰다.
3) 동북항일연군 설립과 활동 및 소련으로 퇴각(1936년 ~ 1940년 12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설립과 활동 그리고 소련으로 퇴각화북사변으로 전 중국이 물 끓듯이 끓었다.
1935년 6월 3일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은 “동북의 책임자 동지들에게 보내는 비밀서한”(약칭“6.3지시서한”)을 통하여 동북 항일전쟁에서 유격운동을 확대하고 모든 항일무장역량을 연합하여 공동으로 항일할 것을 호소하였다. “동북의 당 조직은 전인민적인 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 보편적으로 여러 반일무장대오와 하층 민 상층간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모든
2023년 9월 12일 , 화요일. 유시
우담초라하니 올림
6부로 계속됨
미 주
17) 소비에트 : 노동자, 농민, 병사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평의회
18)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선족사 상⌟, 276쪽, 연변인민출판사, 2010년
19) 민생단사건 : 동만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이 친일단체인 민생단과 관련된 혐의로 조선인공산당원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체포,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를 당하였으며 2,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1932년 11월에 시작하여 1936년 2월까지 계속된 중국공산당의 조선인사냥이었다. 반민생단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20) 구국군 : 중국 군벌 출신의 군인들로 편성된 군대로서 만주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웠다.
21) 대전자전투 :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동북혁명군이 치른 대전자전투는 1934년 7월에 있었다. 지청천과 신숙의 한국독립군이 중국의 구국군, 호로군과 연합하여 싸운 대전자전투는 1933년 6월에 있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이 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싸웠다고 하는데 한국독립군은 그때 이미 관내로 이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34년 7월 10일 전향수부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특무대와 함께 흥경현 경찰서를 습격하였고 그 뒤 조선혁명군사령부 호위대가 제2사와 함께 통화현 쾌다무자에서 일본군, 만주군과 함께 접전을 하였을 뿐이다.
* 참고문헌 : 조문기, 정무 저,⌜항일명장 량세봉⌟,261쪽, 민족출판사, 2009년
22) 산림대 : 처음에는 산적이나 마적 집단이었으나 9.18사변으로 만주국이 세워지자 일본에 저항하는 항일부대로 전환하였다.
23)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선족사 상⌟, 298쪽, 연변인민출판사, 2010년
24) 화북사변: 1935년 6월 9일, 국민당북평군분회 위원장 대리 하웅흠은 중국주둔 일본군 사령과 우메쯔 우쯔끼오사로와 “하매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중국정부는 화북을 일본에게 양보하고 일본이 하북성과 북경, 천진 두 개 시의 대부분의 권리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화북 5개성을 중국에서 빼앗고자 “자치”를 실시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를 화북사변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