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치렌의 수난의 생애
동아시아 불교에서 니치렌(日蓮, 1222-1282)만큼 독특하고 개성적인 종교인은 없을 것이다. 일본 중세 신불교를 개창한 조사 중의 한 명인 그는 불석신명의 삶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완전히 자기화한 불법의 에너지를 변토인 일본에 뿌리며, 생생약동하는 법신의 세계를 거침없이 드러내 주었다. 불법을 위해 완전 연소한 그의 행적은 세월이 흘러도 일본인들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아 있다.
지금의 치바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니치렌은 12세 때 청징사(淸澄寺)에 들어가 수학하고, 1239년에 천태종의 본산인 비예산 연력사(延曆寺)로 유학을 떠나 『열반경』의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의거, 『법화경』을 자신의 평생 의지처로 삼았다. 1252년에는 청징사로 돌아와 본격적인 포교를 전개한다. 수행 체계는 ‘나무묘법연화경’을 외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묘법연화경은 단순히 경전의 제목만이 아니라 『법화경』 후반부의 본문(本門)에 의거 구원석가불이 사바세계에 상주하며 중생을 교화하시는 석존의 인행과덕(因行果德)이 집약되어 있으며, 이 주송에 의해 그 공덕을 받을 수 있다. 이를 묘법5자라고 하며, 말법시대에 구제의 일대법문(一大法門)이라고 한다.
니치렌은 현실긍정 논리에 입각, 당시 교세가 확장되던 호넨(法然)의 정토종은 물론 다른 종파들도 비판한다. 진언이 나라를 망치고, 염불은 무간지옥이며, 선은 천마(天魔)이고, 율승은 국적(國賊)이라는 ‘사개격언(四箇格言)’으로 타종파와 끊임없는 논쟁이 일었다. 그는 1260년 핵심사상을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에 집약했다. 이를 통해 무사권력들의 내란과 몽고의 침략을 예언한 것이 훗날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니치렌의 삶을 불법으로 더욱 굳건하게 한 것은 4차에 걸친 법난이다. 먼저 1260년 전수염불(專修念佛)에 대한 비판으로 염불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다음 해에 시즈오카의 이즈반도에 유배되었다. 이때 『교기시국초(敎機時國抄)』를 지어 5강(綱)의 교판(教·機·時·国·序)을 확립했다. 두 번째는 1264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귀향하고 나서 지역의 마름과 그 일당으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니치렌은 중상을 입었고, 제자들은 살해되었다. 세 번째는 1271년 반사회적 행동의 집단으로 낙인찍혀 막부에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했으나 기적이 일어 살아났다. 네 번째는 이로 인해 니이가타의 사도섬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제자들이 왜 『법화경』의 수행자에게 제천의 가호가 있어야 됨에도 박해를 받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개목초(開目抄)』를 지었다. 여기서 내외상대, 대소상대, 권실(權實)상대, 본적(本迹)상대, 종탈(種脱)상대의 5중(重)상대를 논해 교학의 체계를 수립했다.
유배에서 해제되어 말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야마시나의 신연산(身延山)으로 들어갔다. 『선시초(選時抄)』, 『보은초(報恩抄)』등을 집필하면서 신자들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신앙생활을 위해 그린 만다라 본존을 보냈다. 1282년에 직제자 6인(日昭·日朗·日興·日向·日頂·日持)을 지정하고 61세로 열반에 들었다.
2. 니치렌의 사상 정립과 교단의 분화
니치렌 교법의 핵심은 3대비법으로 집약된다. 니치렌이 말법시대에 수행의 목표로 한 것으로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단, 본문의 제목이다. 본문의 본존은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인 석존을 말한다. 석존은 모든 부처를 통솔하는 부처다. 본문의 계단은 ‘나무묘법연화경’을 외는 자는 수행자로서 계를 받는 것이며, 묘법5자를 수지하는 도량을 말한다. 본문의 제목은 이러한 5자 또는 7자를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5강(또는 5義)은 다음과 같다. 교는 법화경 전반의 적문(迹門)과 후반의 본문 가운데 본문에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최고 교법으로서 묘법5자의 제목을 뽑는 것, 기는 교법을 이해하는 인간의 소질과 능력으로, 말법기의 인간은 방법(謗法)의 역기(逆機)라고 보는 것, 시는 현재가 말법기이므로 법화경 유포의 시기라는 것, 국은 일본이야말로 교법이 전파될 수 있는 유연(有緣)의 나라라는 것이다. 마지막 서는 교법 유포의 순서를 말하며, 소승불교로부터 방편의 가르침인 권대승(權大乘), 권대승으로부터 진정한 대승불법인 실대승(實大乘)으로 순서가 진행된다. 실대승은 『법화경』의 진실한 가르침이다. 서를 통해 유배 이후의 니치렌은 법화경 유포의 사명을 지녔으며, 지중으로부터 출현한 보살이자, 과거에 석존의 교화를 입은 덕에 최종적인 진실 구현의 임무를 가진 본화지용보살(本化地涌菩薩)이 바로 자신의 운명이라고 깨달았다.
니치렌계가 매우 적극적인 포교 양상을 보이는 것은 절복(折伏)과 섭수(攝受)의 교리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니치렌 자신의 포교와 시련의 역사에서 나타난다. 길장(吉藏)의 『승만보굴(勝鬘寶窟)』에서 보듯 "강강(剛强)한 자에 대해서는 항복하여 따르게 하고, 유연(柔軟)한 자에 대해서는 바르게 이끌어 받아들인다"는 내용은 일찍이 등장했다. 니치렌은 『개목초』에서 안락행품과 상불경품을 들어 “무치악인이 일본의 국토에 충만할 때는 섭수를”, “정법을 삿된 지혜로써 비난하는 자가 많을 때는 절복을” 내세운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당시의 왕이나 무사권력자들에게 불법을 믿을 것을 강하게 어필했던 것이다.
니치렌의 사후 니치로(日朗), 닛코(日興), 닛코(日向), 니치조(日頂)는 파조로서 발전하였다. 현재도 30여 개의 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연산 구원사(久遠寺)를 대본산으로 하는 일련종의 분파가 가장 많다. 여러 파의 성격 가운데 교리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법화경』의 적문과 본문의 일치를 도모하는 일치파(一致派)와 본문을 중시하는 승렬파(勝劣派)로 나눠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전자는 일련종, 후자는 일련정종, 일련본종, 본문불립종 등을 들 수 있다.
특기할 것은 근세에 들어오면서 에도막부(江戶幕府)에 의해 탄압받은 불수불시파(不受不施派)다. 이 파는 막부 정권과 강력한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불수는 니치렌계 외의 타종, 불신자, 불법을 비방하는 자로부터 보시나 공양을 받지 않는 것이다. 불시는 타 종파의 승려에게 공양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마침내 철저한 탄압을 받기까지 했다.
3. 근대 이후의 약진과 정치 참여
근대에 메이지유신(1868)이 단행되면서 신정부가 탄생했다.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니치렌계는 삶과 사상을 니치렌의 법화사상으로 일관되게 하는 니치렌주의를 내세워 자파의 개혁을 요구했다. 특히 그 특징은 종교와 국가의 일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국주회(國柱會)의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에 의해 1923년에 설립된 입헌양정회다. 니치렌의 법화사상에 의거한 국립계단의 설립을 주장했다. 지방의회는 물론 중의원 의원까지 배출했다. 패전 후, 이러한 정교일치는 1930년대에 창립된 창가학회의 공명당으로 이어졌다. 1대 회장인 마키구치 츠네사부로(牧口常三郞)의 뒤를 이은 2대 회장 토다 조세이(戸田城聖)에 의해 설립된 공명당은 1950-70년대 고도경제 성장기에 교단과 더불어 기반이 다져졌다. 3대 회장 이케다 타이사쿠(池田大作)에 의해 1964년 정식으로 창립되어 오늘날에는 일본의회에서 10% 내외의 의석수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56년 공명정치연맹을 발족할 당시의 정강(政綱)은 ①핵병기 반대, ②민주적 평화헌법의 옹호, ③공명선거 및 정계정화였다. 1966년 이케다는 천태교학에 바탕, 묘법중도주의, 불법민주주의를 당의 기본노선으로 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창가학회의 이러한 정치참여의 정신은 창가(創価)라는 가치 창조, 즉 교단이 주장하듯 생명의 존엄 확립에 기반한 만인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 실현이 근본 목표라는 것에서 읽을 수 있다. 그 기반은 상적광토의 현실정토에 기반, 종래의 왕법과 불법의 일치를 구현하자는 것에 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 늘 창가학회를 소환한다. 한국불교계로서는 아직 부딪쳐 보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창가학회의 회원은 현재 800여 만 가구에 이른다.
이 외에도 니치첸 사상을 계승한 교단은 재가교단인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가 있다. 니와노 닛쿄(庭野日敬)에 의해 신불교인 영우회(霊友会)로부터 독립하여 1930년 ‘재가에 의한 법화경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단체’로 출범, 1938년 본격적인 교단을 형성했다. 회원 강령은 ‘본불 석존에 귀의하고, 오직 개조에 의한 가르침에만 기반, 불교의 본질적인 구원방법을 인식하고, 재가불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인격완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신앙을 기반으로 삼학 수행의 연수(研修)에 정진’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연성(練成)에 노력하고, 가정·사회·국가·세계의 평화경(平和境, 常寂光土)의 건설을 위해 보살행에 정신(挺身)”하는 것으로 삼고 있다.
일상 속 수행의 목표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현대적으로 해석, 적용하고 있다. 현 2대 회장 니와노 니치코(庭野日鑛)는 “개개인의 심전(心田)을 경작하는 교성회”라는 종합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 교단은 특히 교조가 ‘세계 최초의 불교 집단상담’이라고 칭한 법좌(法座)라는 작은 소모임을 통해 생활의 고민이나 기쁨, 신앙적 체험을 서로 나누고 있다. 회원은 100여 만 세대로 보고 있다. 입정교성회 또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단 정당을 결성하지 않고 우호적인 정당에 후보자를 추천하는 형태로 정치인을 배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참여 또한 니치렌계의 전통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니체렌계 모두가 이처럼 정치 지향적인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승가의 모습을 고수하는 사찰들이 대다수다.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는 근대성의 수혈을 받은 파들로서 불교가 어디까지 사회진출이 가능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동시에 재가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대승불교의 변혁을 주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불교가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적응 또는 대응하고 있는지 일본 내에서 실험 과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과 자본의 발달로 인해 한 집안 한 가족으로 좁혀진 지구 내에서 불법의 어떠한 묘용을 드러낼 것인지 고민하는 한국불교계는 니체렌계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원문, https://buddhistcultur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