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7일 부활절 둘째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65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입니다.
성경 요21:15-23절(신185)입니다.
성가대 찬양입니다.
제목: 주님과 연합(결혼) 인생
성도 여러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15:5)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과 연합(결혼)되어 현재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골2:6-7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 그 안에 뿌리가 박으며(박히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굳게 서서(세워져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하면서).” (‘그 안에서 행하라’(6)가 주동사 명령이며, 7절은 주동사 명령(6)을 설명하는 네 개의 분사 중에서 첫째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완료 수동형이며, 둘째와 셋째는 현재 수동형이며, 마지막은 우리가 행하는 현재 능동형이며, 마28:19-20절 같이 주동사를 수식하는 분사는 명령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주님과 연합(결혼) 생활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연합(결혼) 생활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로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15)로 시작하는 오늘 본문은 앞의 사건(1-14)과 연결하여 부활의 주님이 우리 경제생활의 책임자이심을 확인하면서 시작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디베라 호수에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했으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생선구이와 떡으로 이미 조반을 준비하셨고, 그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다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10)라고 하셔서 주님이 준비하신 조반에 더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그와 연합(결혼)한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가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경제생활에도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마6:31-33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우리의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하여 주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기에 교육이 포함된 의식주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인가 사회의 책임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 사회는 이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서구 유럽은 사회의 책임으로 생각합니다. 서로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의식주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우리와 연합(결혼)하신 부활의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말씀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13:8)는 말씀에 근거한 경제원칙을 세워 우리 인생의 책임자이신 부활의 주님을 절대 의지해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부활의 주님은 그를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통하여 그와의 연합에 기초한 우리의 사명(그의 나라와 그의 의)을 재확인하십니다(15-17).
조반의 시간이 끝났을 때 주님은 조용하게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반석)’가 아니라, 가볍고 견고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옛 이름 ‘시몬(조약돌)’이라고 호칭하십니다. 이는 그의 연약함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반석(베드로)’이지만, 자신을 의지할 때는 ‘연약한 시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에게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습니다(15).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질문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그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주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겠노라고 말했으나(13:37, 마26:33-35), 주님 앞에서와 많은 사람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18:25-27, 마26:71-75).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습니다(16, 17).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전에서와같이 자신 있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에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었고, 지금의 대답도 그의 진심이고, 그러기를 원하는 그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님의 지식을 의지해서 대답합니다(15, 16).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여기 ‘아시나이다(오이다스)’는 완료시제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알아 오셨다’라는 의미이며, 헬라어 동사에는 주어가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주님께서’로 번역된 인칭대명사 ‘당신(쉬)’를 사용하여 주님이 그 사실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알아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세 번째의 동일한 질문(17a)에 베드로는 괴로워하면서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완료시제인 ‘아시오매(오이다스)’와 현재시제인 ‘아시나이다(기노스케이스)’를 반복하여서 주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특히 주님이 그의 모든 것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알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심지어 그의 모든 것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알아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할까요? 그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자신의 고백을 이제는 신뢰할 수 없고 그의 모든 것을 알아 오신 주님만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그의 잘못을 아시면서도 그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언약적 사랑)’(13:1) 주님만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언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나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3:16)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며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의 모든 것을 알아 오시는 주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계속 베드로가 괴로워할 정도까지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과의 연합(결혼)의 근거가 연약한 우리에게 있지 않고 주님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하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 고백입니다. 15:3-4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여기서 ‘내가 일러준 말’은 구속 언약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하나님의 심판)으로 창조(율법) 언약을 다 이루셨다는 복음입니다. 그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의롭다 함), 우리는 주님과 영원한 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손(사랑)으로 부활의 주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의 손(언약적 사랑)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기에 주님과의 사랑의 연합은 영원합니다. 요일1:8-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처럼 우리 죄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우리의 사귐(요일1:3) 즉 그와의 연합(결혼)을 유지하시는 책임도 주님에게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 죄악보다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와 능력이 아주 크기 때문에 주님과 우리의 연합(결혼)은 결코 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실패를 통하여 그의 부족함을 철저하게 깨달은 베드로같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절대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15, 17), ‘내 양을 치라’(16)고 명령하십니다. 여기 ‘먹이라’와 ‘치라’는 단어는 달라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양들’은 베드로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주님의 양들에 속합니다. 이는 그가 그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그의 피로 그들을 구속(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엡1:7).
여기서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가 이미 받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라는 그의 위임 명령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사명 회복이 아니라 재확인입니다. 이것을 회복이라고 하면, 그의 사명은 주님이 아니라 불안정한 그에게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한(참) 목자(10:11, 15)이신 부활의 주님이 그의 양들을 돌보시는 그의 천상사역에 동역하라고 베드로에게 다시 확인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양들을 먹이며 치는 방법은 주님의 사역 원리와 방법(5:19, 30)과 일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벧전5:2-4절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여기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분이 되라’는 말씀에 근거하면, 목사는 성도들 앞에 나선 자이며, 선교사 또는 성도들은 세상 앞에 나선 자(세상의 빛)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인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선교 사명을 먼저 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 인생, 특히 우리 사역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부활의 주님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18-23).
먼저 부활의 주님은 ‘그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다니기 위해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옷을 입는 젊을 때와 그의 옷 입은 것을 다른 사람이 도와줄 때 그의 팔을 벌리는 늙을 때’를 베드로에 비유하여 현시점을 기준으로 그의 일생을 두 시기, 즉 ‘더 젊어서’와 ‘늙어서’로 구분하여 말씀하십니다(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제까지(젊어서는) 베드로는 스스로 옷을 입고(준비하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즉 모든 일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모든 일을 스스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늙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늙어서는 남이 그의 옷을 입히도록 그의 팔을 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이 그의 팔을 벌리게(준비) 하고 그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남’은 십자가의 형을 준비하고 그를 순교하게 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이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것은 스스로 옷을 입지 못하고 다른 이를 의지하는 늙은이같이 주님이 베드로를 순교의 현장으로 인도하실 것인데도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나를 따르라’ 명령은 주님을 따르면서 배우라, 즉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보통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면서 배우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자기 부인하는 사람을 ‘늙어서’의 특징으로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백발(늙음)은 영광의 면류관이라”(잠16:31)할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고후4:16). 그러므로 주님과의 연합의 세월이 가면 갈수록, 80세의 모세와 같이 더욱 겸손(온유)하여지며 더욱 지혜로워지는 것(성화)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복음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와 연합(결혼)하신 주님이 ‘나를 따르라’(19)라고 명령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자신과 연합(결혼)한 우리를 전적으로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전적으로 따르는 우리를 책임지지 않으실 땐 주님은 좋은 남편이 아니며, 아니 사기꾼일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를 따르라’라는 우리와 연합(결혼)하신 주님만을 믿고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은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인도를 상관(비교)하지 말고 주님이 인도하는 삶이 최고의 삶(the best life)이기에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0-23).
18절의 말씀이 그의 순교에 대한 말씀인 것을 요한이 안 것(19)과 같이 그것을 안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가 따르는 것을 (돌아) 보고’(20) 그의 장래가 염려하여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1)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대답하십니다(22).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것은 주님이 올 때까지 요한을 살아남도록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즉 그것이 너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주님은 모든 성도를 각자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너(쉬)’는 2인칭 명령의 강조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다른 성도의 삶이 너보다 쉽고 좋은 길이든지 상관(비교)하지 말고 너의 길, 심지어 순교까지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최고의 길이라는 것을 믿고 주님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성도들과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영원히 연합(결혼)하신 주님이 복음의 새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를 최고의 좋은 인생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즐겁게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민족의 전통 혼례식에서 하나의 조롱박을 둘로 나누어 신랑과 신부에게 주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치는 순서가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어 원래 주님과 연합되었던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주님과 분리되어 세상에 태어났다가 그의 복음으로 다시 주님과 영원히 연합(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와 연합(결혼)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연합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 주님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실수나 잘못도 그의 은혜(영원한) 언약에 기초한 주님과 우리의 연합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을 알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주님만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축복입니다. 천지가 흔들려도 새 언약대로 됩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주님과의 언약적인 연합(결혼)의 인생을 감사하며, 기쁨의 춤을 추시면서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찬송 172장을 부르시고, 성찬 후에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