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장! 점심 먹으러 가야지? 오늘은 서장님도 서울 출장 가셔서 안 계시니 나하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양경감이 책상 너머로 상철에게 넌지시 말을 건낸다.
“점심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그럼 오늘은 간만에 고기국수나 먹으러 갈까요? 오현단에 잘하는 곳이 있는데….”
“아니야,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먹지 뭐. 집사람에게 준비해놓으라 했으니.”
둘은 청사를 나와 무근성 쪽에 있는 양경감 집으로 향하고 있다.
경찰서 돌담을 돌아 뒤 편으로 10분 거리에 양경감 집이 있어 그는 점심시간에는 혼자 집에 가서 먹고 오곤 했었다.
“정경장! 자네 사귀는 처자 있나? 보니까 혼자 인 것 같은데. 하기야 이제 제주로 귀임한지 몇 달 안됐으니 그럴 시간도 없었겠지.”
양경감은 지난 1월 정경장이 경무과로 배속돼 근무하는 내내 그를 유심히 관찰했었다.
5년 전 경찰 특채로 임명돼 줄곧 외부근무만 해왔던 정경장이 혹시나 겉멋이 들지나 안했는지, 그의 성품, 가족관계 등등 관심을 보이며 퇴근 후 술좌석도 몇 번 했던 상관과 부하 사이다. 그에게는 어떤 목적이 있었다. 양경감은 하나뿐인 과년한 여동생이 아직 시집을 못 가 은근히 이 정경장에게 눈독을 들여 왔던 것이다.
“아닙니다. 이제 제주에 돌아 온지 몇 달 안 되는데 사귈 시간이나 있었겠습니까?
매일 서장님 모시고 외근 다니고 늦게 퇴근하시는 서장님 덕에 밤 늦게 관사에 들어가는데요.”
“하긴 그럴 만도 하겠네. 어때 본청에 돌아오니? 할만해?”
“네, 정신이 없죠 뭐. 새해벽두부터 관사에 사건이 안 터졌나. 또 한라산에 폭도 잔당들 수색 다니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럴 거야. 지난 겨울 한라산에 올라갔던 말테우리①가 폭도잔당 비슷하다 하여 신고가 들어왔지만 폭설로 수색을 중단했었으니 아마도 이 봄에는 소탕되겠지”
두 사람이 신작로를 벗어나 양 옆집을 경계하는 돌담들 사이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어느새 너른 마당에 초가를 두른 양경감의 집이 눈 앞에 나타났다. 양경감의 집 한쪽 편엔 돌담으로 지은 통시②에서 도야지도 밥 달라며 “꽤액 꽤액”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때는 한창 봄바람이 살랑이는 날인지라 노란 유채꽃이 텃밭에서 덩달아 살랑거리고 있었다.
“와수꽈?”(오셨어요?)
양경감의 부인이 정지③에서 밥상을 차리다 말고 하얀 광목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아내며 두 사람을 맞는다.
“정경장! 인사하게 우리 집 사람일세.”
“처음 뵙쿠다. 정상철 이우다. 경감님과 고치 근무 허멍 이수다.”
(처음 뵙습니다. 정상철입니다. 경감님하고 같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예, 얘기 많이 들어 수다. 혼저옵서. 이제 밥 다 되 난 안으로 들어강 이십써”
(예,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어서 오세요. 이제 밥이 다 됐으니 안으로 들어가 계세요)
“자, 정경장 들어가자고. 배고프겠다.”
“네”
“고모. 안방에다 상 좀 봐 줍서”
양경감의 부인은 부엌으로 들어가며 건넌방을 향해 소리 높여 고모를 불러낸다.
안방으로 들어가 좌정을 하여 방안을 둘러보니 방안구석에 나비 문양이 달려있는 괘가 놓여있으며 벽에는 양경감의 부모인듯한 노인네들이 검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탕건을 쓰고 하얀 저고리를 입은 모습을 하여 방안을 내려다 보며” 그래, 자네 왔는가?”라고 묻듯 정경장을 노려보는 듯하고 있고 그 옆에 양경감의 결혼식사진을 넣은 액자가 달려있었다. 활짝 열린 방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마당풍경은 날씨가 따스한지 아지랑이가 땅속에서 스멸 스멸 나오고 있어 몹시도 추웠던 지난 겨울은 저 만치 물러나 있었다.
그때에 양경감의 동생인듯한 아가씨가 붉그레한 홍조 띤 낯을 하며 쟁반에 들고 온 찬들을 무릎을 꿇고 앉아 다소곳하게 상위에 올려 놓는다.
“영실아! 인사허라, 나영고치 같이 근무하는 정 경장이여”
(영실아! 인사해라, 나하고 같이 근무하는 정경장이야)
“네, 어서옵서.” 영실은 쑥스러운지 눈길 한번 살짝 주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며 하던 일을 계속 한다.
“처음 뵙쿠다. 정상철이우다”
상철 역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름을 느낀다.
그날 이후 상철은 혜옥이 말고 다른 여자를 보게 되었다. 작년 혜옥과 그리 헤어져 제주로의 귀향을 서두르며 상철은 제주에 내려가 다시 재 정비를 갖춰 들고 영동을 찾을 거라 마음을 먹었었다.
“그래, 혜옥씨가 건강치 못하니 마음까지 흔들려 그런 결정을 내렸을런지 몰라. 나중 몸상태가 되돌아 오면 우리 처음처럼 지낼 수가 있겠지.” 하고 마음을 추스려 제주에 내려 왔건만 사람은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멀어진다 했던가!
혜옥의 편지를 받고 한동안 실의에 빠졌던 상철은 이제 겨우 혜옥과의 추억에서 헤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날 양경감의 집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난 후에 상철은 영실을 보러 갔는지, 점심을 얻어먹으러 갔는지 출입이 잦아 졌다. 또한, 집에서만의 만남이 아니라, 관덕정 마당뿐 만 아니라, 집에서 좀 떨어진 용두암 까지도 둘은 걸어갔었다.
그 해 겨울 그들은 주위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부부가 되기로 약속 하였다.
상철은 지난 날의 혜옥과의 추억을 밀려왔다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상철의 마음 속에서 혜옥을 밀어 내기로 한 것이다. 맺지 못할 인연이라 상철은 자위하면서 …
양경감의 마당이 떠들썩하다. 집 마당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이 좁아 경찰 트럭이 집 앞까지 들어오지 못해 경찰서에서 나온 순경들이 전기시설을 갖춰놓는다. 경찰서에서 끌어온 전기를 마당에 설치한다고 전선줄을 들고 낑낑거리며 마당 안으로 들어온다.
양경감의 집을 비롯하여 보통 가정집은 전기가 안 들어와 등유를 이용한 호야 등으로 밤을 밝혔었다. 그런데 서장의 특별지시로 결혼식 행사기간 동안에 경찰서 본청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라고 하였기에 양경감 동네는 한동안 대낮같이 환한 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마당한구석에는 결혼식 무대가 될 현수막을 합판과 각목을 뚝딱거려 세우고 그 현수막 위에 소나무 가지로 얽히설키 씌워놓고 ‘신랑 정상철군, 신부, 양영실양’이라 세로 글을 써 붙여 놓았으며 현수막 정 중앙에는 ‘축 결혼’을 큼지막하게 붙여놓았다.
상철은 모슬포에서 두 누이를 부르고, 고모할머니, 그 외 마을 에 친하게 지내던 분들을 전날 밤부터 모셔와 방 두 개를 경찰서 옆 여인숙에 모셔 놓았다.
내일이면 상철이는 장가를 간다. 상철은 이 자리가 혜옥 이였음 했었지만 이젠 그녀를 잊어야 한다. 그녀와의 지난 추억은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는 깡그리 지워내는 것이 지금 자신 앞에 와 있는 영실에게 미안해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가 있기에, 그리고 앞으로 영실과 알콩달콩 살아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야 하기에 상철은 일찍 가신 양친부모를 못 모시는 아쉬움을 가지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는데 동료들이 결혼식준비를 다 마치고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 펼쳐진 술판에서 상철을 부른다.
“어이, 정경장! 거기서 뭐 하는가? 여기 돗괴기④, 하고 수에⑤가 다 떨어졌네.”
“그래, 알았네.”라며 상철은 결심이나 하듯 잔칫날 고기를 적으면서도 풍성하게 요량 것 배분하도록 부른 도반⑥이 있는 곳으로 총총걸음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간다.(계속)
주)①말테우리: 한라산 중턱에 방목해둔 말들을 모으기 위해 채용한 목부
②통시: 제주도 똥 돼지를 놓아 키우던 재래식 화장실
③정지: 부엌의 제주사투리
④돗괴기: 돼지고기
⑤수에: 제주돼지 대창으로 만든 순대 육지의 일반 순대보다 크고 맛있다.
⑥도반: 잔칫집이나 초상집에서 채용한 그 마을의 주방장. 돼지수육을 얇게 썰어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그리고 빈약한 행사를 안 치러 요령 있게 고기를 공급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