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여우
홍일표
몸 안에 박혀 있던 햇살들이 서릿발로 반짝이는 극지의 밤
북극여우는 혼자 얼음 위를 걸어간다 얼마나 더 어둡고 추워야 검은 피로 피어난 몸 밖의 푸른 오로라에 닿는가
총 맞은 짐승들이 흘리고 간 핏자국을 따라 백색의 병정들이 뒤를 따른다 유형의 벌판을 채찍으로 휘두르는 천둥 번개를 삼키며 얼음 속으로 들어간다 오래 죽음을 견딘 빙벽에서 화살촉 같은 맹독의 꽃이 말갛게 눈을 뜬다 누군가의 남자이고 누군가의 심장이었던
죄 없이 죽은 목숨들이 칼처럼 날아다니고 길게 우는 여우의 밤이 날카로워진다 몸 안에 몸을 밀어 넣고 얼어붙은 빛이 타올라 백야의 중심에 닿을 때까지 순백의 죽음으로 얼어터진 맨발이 될 때까지
살아서 꽃에 도달하지 못한 노래들
혹한의 입안에서 혀가 떨어져 나가고 이빨들이 고드름처럼 부서져 내린다
눈보라와 함께 달려가는 여우가 한 번씩 울 때마다 주검에서 깨어난 북극의 정수리에 꽃이 핀다 그림자도 목소리도 없는
다만 붉은 혈흔 같은
—《시인동네》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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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58년 충남 입장 출생. 1992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매혹의 지도』외. 현재 《현대시학》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