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랑자
제 1 권
지은이 / 고 룡
옮긴이 / 왕문정
역자 서문
이 작품은 대만의 유명작가 고룡(古龍)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변성랑자(邊城浪子)>를 완역한 것이다. 고룡은 무협소설을 일반
문학작품 수준으로 끌어올린 탁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유려한 문체, 추리소설적 기법, 참신한 주제, 새로운 주
제,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개성, 한번쯤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
는 철학적인 내용 등으로 중국의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
고 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변성랑자>는 웅장한 스케일, 개성을 달리
하는 수많은 등장인물, 신비에 가려진 비밀들, 독자들의 예측이
모조리 빗나가는 추리소설적 구성, 뜨거운 사랑과 질투, 원한과
철저한 복수, 기상천외한 음모, 우정과 애정 사이의 갈등, 남자에
게 배신당한 여인의 심리 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고룡은 이 작품 외에도 <초류향전기> <절대쌍교> <다정검객부정
검> <유성호접검> <구월웅비> <대인물> <노검광화> <천애명월도>
<검객행> <편복전기> <도화전기> <신월전기> <난화전기> <백옥노
호> <신검일소> <원월만토> <장생검> <백옥도> <공작병> <다정환>
<패왕창> <칠살수> <검화언우강남> <풍령도성> <번성도성> <실혼
인> <창궁신검> <안령도> <칠중무기> <완화세검록> <살기엄상>
<풍운제일도> <채환곡> <환락영웅> 등 50여 종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다. 그는 최후의 작품 <백옥노호>를 쓰는 도중에 알코올 중독
으로 1985년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작품마다 특색이 있지만 학자들은 <변성랑자>를 가
장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등장인물 하나하나
가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살아 움직이는 까닭이다. 거기에 말할
수 없이 신비한 이야기 전개가 첨가되어 읽는 이를 사로잡기 때문
일 것이다.
역자는 1967년부터 지금까지 무협소설을 번역해 왔으며, <무유
지> <비룡> <야적> <무림천하> 등을 번역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변성랑자>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었으며,
국내 최초로 번역하는 것임을 밝혀 둔다.
1994. 3.
왕 문 정
붉은 눈(紅雪)
집안에는 다른 빛깔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직 검은색뿐이었
다.
석양의 햇살마저도 비쳐들지 않아 일종의 상서롭지 못한 죽음의
잿빛을 띠고 있었다.
석양이 아직 비쳐들기 전에 그녀는 이미 검은 신감(神龕) 앞에
있는 흑색의 방석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흑색의 장막은 나직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 누구도 그 안에 모셔
진 것이 어떤 신인지 볼 수가 없었다. 또한 그 누구도 그녀의 얼
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흑사(黑紗)로 가려져 있었고 검은빛의 장포는 검
은 구름처럼 땅바닥까지 흩어진 채 늘어져 있었는데, 다만 소매
끝으로 비쩍 마르고 주름이 가득하며 귀조(鬼爪)와 같은 손만이
삐죽 보였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그녀는 나직이 뭐라고 중얼중얼하고 있
었는데 하늘에게 많은 복을 내려주십사 하고 비는 것이 아니라 저
주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저주하는가 하면 이 세상을 저주하고 있었으며,
이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일과 모든 물건을 저주하고 있었다.
한 흑의의 젊은이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등 뒤에 꿇어
앉아 있었는데 마치 오랜 옛날부터 그녀를 벗하여 그곳에 꿇어앉
아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줄곧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모조리 궤
멸을 할 때까지 꿇어앉아 있을 것 같았다.
석양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는데 그의 얼굴의 윤곽은 영기발랄
하면서도 준수하고 독특했지만 먼 산 위의 얼음과 눈으로 조각을
한 것처럼 차갑고 싸늘했다.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햇빛은 암담했고 바람은 소리를 내지르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신감 앞에 드리워진 검은 장막
을 들추고 하나의 칠흑 같은 철갑(鐵匣)을 안에서 꺼냈다.
그 철갑이 바로 그녀가 신봉하는 신이었던가!
그녀는 힘주어 그 철갑을 거머쥐었는데 손등에 푸른 힘줄이 불
룩하니 돋아났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벌벌 떨고 있었다.
신안(神案) 위에는 한 자루의 칼이 있었는데 칼집은 칠흑과 같
이 검었으며 칼 또한 칠흑같이 검었다.
그녀는 갑자기 칼을 뽑아 들고 한 칼로 그 철갑을 쪼갰다.
철갑 안에는 다른 것은 없었고 오직 한 무더기의 새빨간 가루만
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 새빨간 가루를 한움큼 거머쥐었다.
"너는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녀 이외에는 그 누구도 아는 사
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눈이다. 붉은 눈......즉 홍설(紅雪)!"
그녀의 음성은 처절하고 날카로워 마치 추운 밤중에 들려오는
귀곡(鬼哭) 같았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을 때 바로 눈은 붉은빛이었다.
선혈로 새빨갛게 물들여 있었단 말이다!"
흑의의 젊은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다가가더니 그 새빨간 눈을 그의 머리 위와 어깨 위에
뿌리며 말했다.
"너는 명심하도록 하라! 이제부터 너는 신이다. 바로 복수의
신! 네가 무엇을 하든 후회할 필요가 없느니라! 그리고 네가 어떻
게 그들을 상대하든 그것은 마땅한 것이다!"
그 소리는 일종의 신비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마치 하늘
위와 땅바닥의 모든 신마악귀(神魔惡鬼)의 저주가 그 한움큼의 새
빨간 가루 속에 갈무리되어 있고 또한 그 소년의 몸에 붙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중얼거렸다.
"이날을 위해서 나는 이미 십팔 년을 준비했다. 꼬박 십팔 년
을......이제 어찌되었든 간에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래도
너는 가지 않고 뭐 하느냐?"
흑의 젊은이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녀는 갑자기 다시 칼을 휘둘러 그 칼을 젊은이의 앞에 있는
바닥에다 꽂고는 매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빨리 가거라! 그리고 이 칼로써 그들의 머리를 모조리 베고 다
시 돌아와 나를 찾도록 해라! 그렇지 않을 때는 하늘이 너를 저주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또한 너를 저주하게 될 것이다."
바람은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휘몰아치고 있었
다.
그녀는 그가 천천히 걸어 나가서 어둠에 휩싸인 밤빛 속에 휩싸
이게 되고 그의 몸뚱어리는 이미 점차적으로 어둠과 하나로 녹아
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그 칼도 마치 점차적우로 어둠과 한 덩어리로
녹아나는 것 같았다.
이때 어둠은 이미 온누리를 뒤덮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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