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기 위한 3S(sports, screen, sex)의 정책의 대표주자 스포츠.. 한국의 프로야구 역시 신군부의 고도의 국민 달래기 전략(?)이라는 오명과 함께 화려한 출발을 했다. 그래, 설령 내가 프로야구에 눈이 멀어 비판적 정신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것이 주는 행복감은 정녕 부정할 수가 없다.
초등학교 시절 난 열렬한 어린이 삼성 팬이었다. 지역 연고제가 뿌리깊게 작용하는 프로야구 특징상 내가 대구 경북지역과 하등의 연결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어린이 삼성 팬이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ㅋㅋㅋ
엄마를 조르고 졸라 어린이 삼성에 매년 가입했다. 어린이 삼성 회원에게는 유니폼과 사자 그림이 그려진 필통이나 가방 등등의 기타 기념품이 제공되는데 어린이 삼성 잠바를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 등교하는 날은 두 어깨가 신이나서 들썩 들썩..발걸음은 자신감에 넘쳐 쿵쿵쿵쿵..오른 손에 든 실내화주머니를 앞뒤로 위아래로 흔들면서 뭇 남자아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곤 했다. (이쯤되면 엄마 주머니에서 나가는 꽤 비싼 가입비 내지 회원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류중일 아저씨과 이만수 아저씨를 제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류중일 아저씨는 내 열렬한 사모의 대상이었다. 사실 류중일 아저씨는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스타일이 아니다. (참고로 펄은 운동선수는 우람하고 울퉁불퉁하고 파워가 넘치는 스타일을 좋아한다. 농구에선 가드보다 포워드를, 투수는 기가 막힌 제구력의 기교파보단 다소 무식하게 볼넷을 많이 줘도 스피드가 빡박 나가는 투수를, 타자는 파워 히터를~ㅋㅋㅋ)몸집도 왜소한 편이고 글타고 홈런 타자도 아니고.. 하지만 어찌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을까. 그냥~ 좋으니 나도 어쩔 수 없다.
신경식-강기웅-류중일-김용국 선수가 지키는 내야는 철벽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물론 신경식 선수는 나중에 다른 곳으로 갔지만..) 그리고 후에 인간승리의 모습을 보여준 김성래 선수..100원인가 500원인가 동전을 뒷주머니에 넣고 경기에 임했던 제주도 출신 오봉옥 선수는 무패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93년 한국시리즈에서 15회 완투의 경이적인 기록을 남긴 박충식 선수..항상 포스트시즌에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던 김상엽 선수..그 때만해도 참 신기했던 타격폼의 양준혁 선수..(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신인이었음..ㅋㅋ아~ 세월 빠르다..)앗! 잘생겼다! 라고 한 눈에 생각했던 동봉철인가? 암튼..그 선수...그 밖에 등등등등.. 말 그대로 추억은 가물가물이다..^^;
기억나는 프로야구 경기.
하나. 이건 삼성 라이온즈의 3루수 김용국 선수에 대한 기억이다. 언젠가 티비에서 삼성의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타석에 등장한 김용국 선수~ 몇 구째인진 몰겠지만 투수이 공이 김용국 선수이 몸을 맞추었다. 그리고 동시에 김용국 선수는 몸을 피하는 동작에서 헬멧이 훅~ 벗겨지게 되었다. 보통 공을 맞은 타자는 공에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면서 고통스러워하기 마련인데..아니~ 우리의 김용국선수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이 두 머리를 가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손 뿐만 아니라 온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앗! 설마 공이 머리에 맞은건가? 분명히 그건 아닌데~ 김용국 선수는 잠시 그런 포즈(?)를 취하다 서둘러 헬멧을 찾아 머리에 쓰고 1루로 걸어나갔다. 난 봤다. 아니 그 경기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다 봤을 것이다. 김용국 선수는 머리 숱이 많이 없으셨다..ㅜ.ㅜ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헬멧이 벗겨지면서 가발이 함께 벗겨진 것이다. 놀란 김용국 선수는 반사적으로 공 맞은 부위보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게 된 것이고.. 중계를 하던 아나운서와 해설위원도 한창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둘. 어느 해 포스트 시즌이었다. (자세히 기억 나지 않음) 지금도 맹활약 중이신 한화의 송진우 투수.. 난 정말 이 선수를 존경해 마지 않는다. 30줄만 넘으면 쇠퇴기를 겪는 한국 프로야구 투수의 현실에서 이처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시는 분이 또 계실까..분명 김용수 선수의 기록을 깰 거라고 믿는다. 각설하고. 송진우 선수가 플레이오프의 경기에서 7회인가 8회까지(아..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ㅜ.ㅜ 기억력을 한탄해야 할듯..) 퍼펙트 게임을 하고 있었다. 퍼펙트..단 한명의 주자도 1루로 보내지 않는다는 그 놀라운 기록...모두들 과연 대 기록이 세워질 것인가 기대해 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회, 어느 타자의 평범한 파울 플라이를 1루수가 잡지 못하는 에러 아닌 에러가 나오게 된다. 그 때부터 약간 흔들린 송진우 투수. 결국 그 타자를 볼 넷으로 내보내게 되고..뒤이어 안타를 연이어 맞으면서 노히트 노런의 대 기록도 깨지게 되는데..난 이때 깨달았다. 야구는 정말로 멘탈 스포츠라는 것을..
셋. 93년 삼성과 해태의 한국 시리즈. 위에서도 잠시 언급됐듯 정말 놀랍고도 어찌 보면 챙피한 기록이 세워진다. 바로 박충식 선수의 15회 완투.. 15회 완투라..정말 이건 절대 다시 세워질 수 없는 기록이라 생각된다. 그 때 당시는 그저 그 박충식이란 투수가 대단하게 여겨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이 참으로 무식한 결정을 한게 아닌가 싶다. 그 이후로 박충식 선수의 어깨가 망가졌다는 후문이..사실 박충식 선수의 연고는 광주로 해태에 1차지명이 되야 하는데..당시엔 최고의 거물 신인 이종범이 있었기에 해태 입장에선 이종범을 지명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 한풀이를 한 것일까? 어찌 15회를 그리 꾸준하게 던질 수 있었을까..경기를 보는 내내 참 가슴 졸였는데..경기 끝난 후 박충식 선수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제가 원래 강심장이어서 별로 떨리고 그런 건 없었어요.." 아무튼..결국 무승부로 끝나 버린 경기..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사실이다.
아..이 밖에도 추억의 중심에 있는 여러 선수들..조계현, 김정수, 한대화, 김성한, 장채근, 이순철, 이강돈, 장종훈, 한용덕, 김경기, 김민호, 김응국, 공필성, 염종석, 김기태, 김동기, 성준, 정삼흠, 최창호, 윤학길, 박동희, 전준호, 정명원, 장효조, 이정훈..헉헉헉헉.. 생각나는 사람들만 적어도 무궁무진하다..
야구 덕분에 난 남자애들이랑 꽤 친했던 거 같다. 같이 야구도 몇 번했던 것 같고..(글치만 절대 잘하진 못했다..^^;) 언제였던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한테 야구부가 있는 옆 초등학교로 전학보내달라고 떼쓰다가 무지하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엄만 내가 한 두번 조르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계속 끈질기게 떼쓰니까 화가 나셨다고 한다..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탓에 정말 야구한다고 할까봐 걱정도 하셨다고 한다.. (후에 들은 말씀..ㅎㅎ) 또 담임선생님께서 생활기록부에 써야 한다고 장래희망 조사했을 때 한국 최초의 여자 프로야구 선수라고 적어내서 선생님이 엄청 웃으시기도 했다.
학년이 점점 올라가면서 그런 비현실적인(그래도 나에겐 꽤 소중한 꿈이었다.)꿈은 멀어져갔지만.. 중고등학교땐 정말 근사하고 똑똑한, 남자들보다 더 잘하는 프로야구 캐스터가 되고 싶기도 했다. (하고 싶은게 넘 많아서리 그 중 하나였음..ㅎㅎㅎ)다른 운동 종목은 여자가 해설하는 것도 많은데 유난히 프로야구의 벽은 여자에게 높아보여 그것을 깨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일주일에 야구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로에서 이쁘고 날씬한 여자애들이 vj형식으로 나와 야구 경기 이야기나 선수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정말 야구를 아는 애들을 뽑은건지 아님 그저 눈요기?혹은 탤런트 되기 위한 전초단계로 우선 얼굴을 알리는데 주력하는 그런 예비 여자 연예인이 나와 적어주는데로 말하는건지 종종 궁금할 때가 있다. 후자라면 괜히 섭섭한 일이다.
또 중학교 땐가? 처음으로 잠실 구장에 가서 야구를 본 적이 있는데..사실 친구들끼리 서울 나들이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학교 끝나고 야간 경기를 보러갔는데..경기가 꽤 길어져 중간에 나왔어야 하는데 너무 좋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경기 다 끝나고 간신히 지하철 타고 수원에 오자 12시라는 그때만에도 경이적인 귀가 시간을 기록하게 되었다. (지금이야..머..-.-;;; 요즘은 다들 학원 다녀서 그 시간 이후에 오더만..) 핸드폰이 있던 시절인가? 난 그저 엄마 ~ 나 좀 놀다 갈께.. 요 한 마디뿐이었는데.. 울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셨을지..지금은 알겠는데 왜 그 땐 몰랐을까..ㅋㅋㅋ그 한밤중에 엄마한테 엄청 혼나면서 무릎꿇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어던 생각도 난다..(그 기억 때문에 대학와서 젤 먼저 잠실로 야구 경기 보러 갔다..ㅋㅋㅋ)
중학교 이후 나의 한국 프로야구 사랑은 솔직히 꽤 많이 식었다. 여자애들이랑만 있다보니 야구 이야길할 사람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이고..그러다 보니 경기도 잘 안 보게 되고..96년에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거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94년에 진출했지만 곧 마이너로 내려갔고..96년이 풀타임 첫해죠~)메이저 경기를 더 보기 시작하게 된 것도 있고.. 정말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탈렌트나 가수에 열광할 때 난 박찬호에 열광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누구나 그 시절엔 연예인에 한 번씩 열광할텐데.. 만일 한국에 사는 연예인을 그만큼 좋아했다면 난 공부고 머고 줄줄 따라다니고만 있었을테니..그나마 박찬호는 외국에 있었으니 내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ㅋㅋㅋ 아직도 지하철이나 수원 거리에서 종종 중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아직도 박찬호 좋아해?" 라고 묻는 것이나, 오랜만에 친구들이 준 옛 편지에 받는 사람이 이름에 내 이름대신 '찬호부인' 머 일케 써있는거 보면 웃겨 죽겠다..ㅎㅎㅎ
지금은..사는게 바빠?서 프로야구도 잘 못보고..특별히 응원하는 팀도 없고..또 요즘은 찬호도 많이 못하고.. 무언가 소중했던 친구를 전학보낸 느낌이다. 지금도 야구가 좋긴 하지만..예전 초등학교 때처럼 그렇게 열정적이고 머랄까 순진무구하게 온 힘을 다 쏟으며 즐겼던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것 같은 생각에.. 이젠 삼성도, 류중일 아저씨도 다 오랜 옛 추억인데.. 특별히 응원하는 팀도 없는데.. 작년 삼성이 우승할때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걸 보며 역시 옛정은 무섭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후후훗..
첫댓글 박충식선수가 그해가 신인첫해 였죠 아마.. 삼성에 이동수라고 신인왕이었던 선수두 있었습니다.. 그해부터는 보이지 않더군여.. 강동우선수두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상이후론 나오징낳고..
청춘의 펄 기억들 잘 읽었습니다...다양한 소재로 (3) 기다립니다.
예. 신인이 글케 던지다니 무척 놀랐던 기억이.. 박충식, 이종범, 양준혁 선수가 93년에 모두 신인 첫해였어요. 결국 93년 신인왕은 양준혁 선수가 가져갔구요..
^^ 얼마전에 야구장 첨 갔었는디... 잼있더구만여..... 표 끊어 준 사람이 삼성팬이라.. 삼성 선수들 자알 봤엉.....ㅋㅋ 펄이 얘기 들으니 또 가구 싶넹...^^
94년에는 LG가 신인을 싹슬이 했져..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그리고 허문회까지.. 93년에 LG는 9억을 주고 이상훈을 데려왔었져..기록이새록새록
프로 야구의 열기가 예전같지가 않아 늘 안타까웠는데, 간만에 야구얘기를 해 주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해 주었군요.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