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16 세계식량의 날, 화학조미료 안먹는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2 - ‘무역의 날’이 11월30일에서 12월5일로 바뀌다 50년 만에 조용히 바뀐 무역의 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11월30일 → 12월5일 올해부터 ‘무역의 날’이 11월30일에서 12월5일로 바뀐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사진 왼쪽) 시절 국민의 염원을 담아 수출 1억달러를 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1964년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해 기념하기 시작한 지 근 50년 만이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101998331&sid=0106&nid=009<ype=1
2011 - 잡스 추도식 스탠퍼드대서 열려 철통보안 속 래리 페이지·루퍼트 머독·빌 클린턴·앨 고어 등 참석 지난 5일 암으로 숨진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추도식이 16일 늦은 오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학 내 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정보기술(IT)업계 명사들과 잡스의 지인들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열렸으며, 경찰과 애플 보안요원들이 대학 본관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의 차량을 통제하는 등 철통보안 속에 이뤄졌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현지 언론을 인용해 전했다. 참석자들도 많게는 다섯차례나 초청장과 신원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추도식 뒤 리셉션이 열린 박물관까지 가는 길에는 촛불들이 놓였다. 참석자 중에는 구글의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빌 클린턴과 앨 고어 전 미국 정·부통령 등이 포함됐다. 유명 에인절투자가인 론 콘웨이, 람 이매뉴얼 시카고시장도 모습을 보였다. 잡스가 인수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 성우로 출연했던 영화배우 팀 앨런과 라마교 승려 복장을 한 사람도 눈길을 끌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도 애플의 현 최고경영자 팀 쿡의 초청을 받아 수행원 없이 혼자서 추도식에 참석했다. 스탠퍼드대는 잡스가 2005년 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시간은 한정돼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며 낭비하지 말라”는 명연설을 남긴 곳이자, 당시 학생이던 부인 로린과 처음 만난 곳으로, 잡스와 인연이 깊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 20111017 21:3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economy/501218.html
美캘리포니아주 16일 ‘스티브 잡스 데이’ 지난 5일 타계한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를 향한 추모 열기가 계속되고 있다. 제리 브라운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16일(현지시간)을 '스티브 잡스 데이'로 선포했다. 브라운 주지사는 15일 성명을 통해 "스티브 잡스가 삶과 일에서 캘리포니아 드림을 구현했다"면서 "잡스의 혁신은 산업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가 상상하고 시장에 내놓은 제품들은 전 세계가 소통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며 잡스를 기렸다.
2010 - 오드리 헵번 우표, 6억 7천여 만원에 팔려 잘못 발행된 오드리 헵번 우표, 6억 7천여 만원에 팔려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들어간 희귀우표 10장짜리 한 세트가 16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열린 자선경매에서 43만 유로(60만6000달러, 약 6억7427만 원)에 팔렸다.헵번이 긴 검은색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이 우표들은 당초 폐기됐어야 했지만 실수로 폐기되지 않고 남아 있는 희귀 우표로 독일이 지난 2001년 발행한 1400만 장 가운데 폐기되지 않고 남은 것이다. 이 우표는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출연했을 때 모습을 담고 있는데 헵번의 아들 션 페러는 이 우표가 선글라스를 입에 물고 있는 원본 사진 대신 선글라스를 담배 파이프로 바꿔 이미지를 조작했다며 새로 우표를 제작할 것을 주장, 독일은 이를 폐기하기로 했다. 독일 우정당국은 자체 보관과 우표박물관 보존을 위해 10장 짜리 세트 두 매를 제외한 모든 우표를 폐기한다고 밝혔지만 지난 2004년부터 2009년까지 5차례에 걸쳐 폐기되지 않은 우표들이 발견됐다. 이전에 발견된 헵번의 우표들은 6만2500유로에서 17만3000유로에 판매됐었다. 판매대금 43만 유로 가운데 3분의 2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어린이 교육을 위해 지원된다. 나머지 3분의 1은 헵번이 사망하기 전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했던 인연으로 유니세프 독일 지부에 전달된다. 오드리 헵번 어린이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페러는 "어머니의 우표가 팔린 돈으로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어 기쁘다"고 밝혔다. 【베를린=AP/뉴시스】/한겨레 2010-10-17 오후 04:57:0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44160.html
2009 - 인천대교 개통식 ‘총 길이 21.4㎞’ 인천대교 오늘 개통 <앵커 멘트>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 인천대교가 오늘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인천의 랜드마크가 될 인천대교 일반통행은 다음주부터 가능합니다. 공아영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국내에서 가장길고, 세계에서 6번째로 긴 다리, 인천대교. 지난 2005년 7월 첫삽을 뜬 이후, 4년 4개월만에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녹취> 이 대통령 :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지역경제활성화에도 기여할 거다." 총 공사비 2조 4천억 원, 투입인원 145만 명. 교각수만 2백 75개. 총길이 21.38km로 왕복하면 바로 마라톤 코습니다. 다리 중심에 있는 주탑 2개의 높이는 63빌딩과 비슷한 238.5 미터. 2백 8개의 케이블이 지탱하고 있는 탑과 탑사이 길이는 8백미터로 다리 아래로 대형선박 2척이 동시에 통과할 수 있습니다. 10만톤급 선박이 부딪혀도 안전하도록, 교각 주위엔 38개의 충돌방지공을 국내 처음으로 설치했습니다. <인터뷰> 조성민(인천대교 기술지원팀장) : "크게는 2천5백톤, 100미터짜리 상판을 지상에서 만들어 바지선으로 옮겨 해상크레인으로 들어올려 맞추는 방식으로 서해대교보다 4배 기간을 앞당겼다." 수명 100년 이상으로 설계된 인천대교는 영국 건설전문지가 뽑은 경이로운 10대 건설에 들기도 했습니다. cg 통행료는 승용차 기준 5500원으로 비교적 비싼 편이지만 경기 남부에서 인천공항까지 통행시간이 인천공항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보다 40분 이상 짧아집니다. 장대한 규모에 건축미와 자연이 조화를 이룬 야간 경관조명 설치로 관광효과도 기대됩니다. 오늘 개통식에 이어 내일과 모레는 개통기념 걷기대회와 자전거대회가 열리고 본격적인 차량 통행은 오는 19일 0시부터 시작됩니다. KBS 뉴스 공아영입니다. [경제] 공아영 기자 /KBS뉴스 2009.10.16 (20:36) http://news.kbs.co.kr/article/economic/200910/20091016/1866712.html
- Deborah Kerr (The King and I)
- Audrey Hepburn, Marilyn Monroe, Gracy Kelly, Deborah Kerr (bottom left), Susan Hayward, Rhonda Fleming
2007 - 영국의 배우 데버러 커(kerr, Deborah) 사망 커 [kerr, Deborah Jane, 1921.9.30~2007.10.16] 2007 - 영국 영화배우 데보라 커 사망 배우 데보라 커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다 영화 〈왕과 나〉,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에 출연했던 영국 여배우 데보라 커(사진)가 숨졌다. 향년 86. 커는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아왔으며, 가족이 있는 잉글랜드 서퍽주에서 16일 세상을 떠났다고 대리인 앤 허튼이 18일 밝혔다. 1921년 스코틀랜드 출생인 커는 발레리나 훈련을 받은 후 지역 연극 극장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병사 위문 공연에 참여했다. 커는 1950년대 버트 랭카스터, 캐리 그란트, 로버트 미첨 같은 미남 배우와 함께 할리우드의 간판 여배우로 전성기를 누렸다. 53년 전쟁영화의 고전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커와 버트 랭카스터가 해변에서 나눈 키스는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키스 장면으로 영화팬들에게 각인돼 있다. 56년 〈왕과 나〉에서는 샴 왕 역을 맡은 대머리 배우 율 브리너와 사랑에 빠지는 영국인 가정교사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주었다. 1941년 〈위대한 바버라〉의 단역으로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커는 순결한 이미지의 수녀로부터 뇌쇄적인 매력의 007 본드걸까지 다양한 배역을 소화했다. 캐리 그란트와 함께 불운한 연인으로 출연한 〈러브 어페어〉(1957), 히말라야 오지의 한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순결한 이미지의 수녀로 나온 〈검은 수선화〉(1947) 등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커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6번 후보로 지명됐으나 아쉽게도 한 번도 수상하지못했다. 94년 영화산업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고, 97년에는 여왕으로부터 CBE 작위를 받았다. 런던/연합뉴스 /한겨레 2007-10-19 오후 06:49:0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244304.html
2003 - 중국 첫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 무사 귀환 중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가 16일 오전 6시7분(현지시간. 한국시간 오전 7시7분) 약 60만㎞의 우주 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다. 중국의 첫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38) 공군 중령은 이날 선저우 5호를 몰고 당초 착륙 예정지점인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중부 쓰쯔왕치(四字王旗)기지 부근 초원지대에 성공적으로 착륙했다. 5대의 헬기와 14대의 수색차량으로 구성된 지상 수색대는 선저우 5호 착륙을 기다리다 이날 오전 6시7분 선저우 5호가 착륙했다는 신호를 접수하고 착륙지점으로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수색대의 한 관계자는 “착륙선 문을 열었으며 양리웨이 중령이 건강한 모습으로 착륙선에서 나왔다”고 보고했다. (베이징=연합뉴스) /한겨레 2003.10.16(목) 07:31 http://www.hani.co.kr/section-007100003/2003/10/007100003200310160731001.html
1994 - 헬무트 콜, 독일 총리로 재 선임 1994년 10월 16일 실시된 독일 총선에서 콜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연립여당(기민당-기사당-자민당)이 승리했다. 64세인 콜(Kohl, Helmut, 1930~ )은 이번 재집권으로 서독의 마지막 총리 역임, 통일 독일의 첫 재상이라는 경력에 4선이라는 금세기 최장 재임기록을 덧붙였다. 지난 1982년 총리에 취임한 콜은 비스마르크(19년)에는 못미치지만 이번 재집권으로 아데나워 전 총리가 세운 14년 재임기록을 2년 갱신하게 됐다. 라인강변의 소도시 루트비히스하펜에서 세무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콜은 프랑크푸르트대와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16세 때 기민당에 가입을 시작으로 29세에 주의회 의원, 33세에 주당위원장, 39세에 주총리, 44세에 기민당 전국위원장으로 입신하면서 정치력을 발휘해왔다. 그는 독일통일 과정에서 진가를 발휘, 무모할 정도의 추진력으로 통일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1m94㎝ 키에 113㎏이라는 몸무게의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어눌하고 우유부단한 언행 때문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유머시리즈가 유행하기도 했다. 콜은 자신을 비꼬는 유머를 듣고는 매우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아량있고 포용력 있는 무골호인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 /조선
1992 - 과테말라 출신의 민권운동가 리고베르타 멘추, 노벨평화상 수상 멘추 [Menchu Tum, Rigoberta, 1959~ ]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과테말라의 여성 인권운동가이다. 1959년 과테말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농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지하 조직인 농민연합위원회 일원으로 인권운동을 펴다 피살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79년 캄페시노 단결위원회에 가입하여 인권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진료부 개원 기념 (1985.10.16 발행)
1985년 9월 30일 어린이 병원으로 이전하여 10월 2일 소아병원 진료가 시작되고, 10월 16일 소아병원 개원식을 거행, 초대 어린이 병원 부원장으로 고광욱 교수 취임 /plaza1.snu.ac.kr
1984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종교지도자 투투 주교, 노벨평화상 선정 그는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호소하는 내용의 설교를 주로 했으며 남아공의 소수백인지배자는 물론 남아공에 대해 아무런 제제조치도 취하진 않는 서방국가까지도 규탄해 왔다. 특히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건설적 개입`에 대해 강한 분노를 나타내며 "우리 흑인들은 워싱턴이 나치스이래 최악의 인종차별정책을 취하고 있는 남아공의 현 정권에 협력하고 지지하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노벨상 수상 후 투투주교는 흑인 최초로 요하네스버그 주교가 되었고 그 2년후에는 케이프타운 대주교에 임명돼 남아공 영국 국교회의 전체 지도자가 됐다. /조선
1982 -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방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수하르토 대통령 내외분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1982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 동남 아시아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독립하였고, 인구 1억 4700만에 면적이 191만㎢로 말레이지아와 함께 동남 아시아에서는 가장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한 나라로서, 원유, 목재, 천연고무 등을 주로 수출하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1973년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대외적으로 비동맹 중립 외교 정책을 표방 하여 남북한 관계에 있어 등거리 외교를 취하나, 실제로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를 더 중시해 왔다. 수하르토 대통령 이번 방한은 전두환 대통령이 아세안(ASEAN) 5개국 순방의 일환으로 지난해 6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데 대한 답방인데, 수하르토 대통령은 방한 기간 중 전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고 한반도의 정세를 포함한 아시아 및 국제 정세 전반과 상호 공동 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나누며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양국의 관계 증진 방안을 협의하게 된다. 체신부에서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이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 안내) /k-stamp
1981 - 제1회 세계 식량의 날 "1981년 10월 16일은 제1회 세계 식량의 날이다.
1981 - 이스라엘의 군인, 정치가 모셰 다얀(Dayan, Moshe) 사망 다얀 [Dayan, Moshe, 1915.5.20~1981.10.16] 이스라엘의 군인·정치가. 근처 아랍국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안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스라엘 최초의 '키부츠'에서 태어나 최초의 성공적인 협동농장(모샤브) 나할릴에서 성장했다. 1937년 야간특수부대에서 영국 장교 오데 윙게이트로부터 게릴라 전술을 습득함으로써 군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야간특수부대는 아랍 반란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조직되었고 이스라엘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스라엘 독립의 길은 오직 투쟁뿐이라고 확신한 모세 다얀은 불법자위대인 ' 하가나'에 가담했고 영국 당국에 의하여 체포·구금되었다(1939~41). 출옥한 뒤에는 시리아에서 비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군을 지휘했다. 다얀은 교전중 왼쪽 눈을 잃었는데, 그후 검은 안대가 그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얀은 1948년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지역 사령관이 되었고 이듬해 요르단-이스라엘 휴전협상에 참석했다. 이스라엘군 참모총장(1953~58)으로 있으면서 1956년의 시나이 반도 침공을 계획·지휘했으며 이 전투에서 군사령관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전쟁회고록인 〈시나이 전투일지 Diary of the Sinai Campaign〉가 1966년에 출간되었다. 1959년 노동당연합 내의 '마파이' 소속으로 크네세트(의회)에 진출했고 오랜 후견인이었던 데이비드 벤 구리온 총리에 의하여 농업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까지 장관직에 있었으나 벤 구리온 지지파와 신임 총리 레비 에슈콜 세력 사이에 알력이 계속되자 사임했다. 벤 구리온이 설립한 신당 라피(이스라엘 노동자동맹) 소속으로 1965년 하원의원에 재선된 다얀은 1967년 6월 1일 아랍 인접국들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참모총장 이츠하크 라빈과 함께 6일전쟁(1967. 6. 5~1967. 6. 10)을 지휘했으며 뒤에는 점령지의 행정을 담당했다. 다얀은 1970년대 초반 이스라엘 외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욤 키푸르)했을 때 미처 대비하지 못하여 문책을 받았다. 1974년 6월 라빈이 골다 메이어에 이어 총리에 취임하자 내각에 기용되지 못했으나, 4년 후 메나헴 베긴내각의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성사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베긴 총리가 법적으로 요르단 영토이던 웨스트 뱅크 지역에서 이스라엘 주권을 행사하려 하자 1979년 10월 관직을 떠났다. 1981년 신당 '텔렘'을 창당했고 '1967년 전쟁'으로 획득한 점령지에서 무조건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자서전인 〈나의 인생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가 1976년에 출간되었다(→ 중동전쟁). 사망 후 그가 소장하고 있던 다량의 골동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정부의 승인도 없이 비과학적으로 발굴하여 수집한 것들이었다. 2번째 부인은 이 골동품들을 이스라엘 박물관에 매각했다. /브리태니커
1979 - 부산지역 대학생ㆍ시민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부마민주항쟁 시작 [오늘<1239>(10월16일)] 釜馬民主抗爭 그 해 봄 김영삼이 야당 신민당의 새 지도자가 된 것은 박정희에게 불길한 징조였다. 박정희는 5월3일 전당대회에서 ‘중도통합론’이라는 태깔 좋은 구호로 3년 간 신민당을 이끌며 유신체제의 고분고분한 파트너 노릇을 했던 이철승의 당권 재창출을 음양으로 지원했으나, 가택연금 중이었던 김대중은 민주회복의 기치 아래 오랜 라이벌 김영삼을 지원함으로써 판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김영삼은 그 해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원해 박정희의 비위를 건드린 이래 국제언론을 통해 유신체제를 가차없이 비판하며 박정희를 압박했고, 분노한 박정희는 휘하의 유정회ㆍ공화당과 법원을 동원해 9월8일 김영삼의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에 이어 10월4일에는 의원직 박탈까지 이끌어냄으로써 부산ㆍ경남 지역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유신 선포 7주년(10월17일)에 맞춰 터진 부마항쟁은 박 정권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박정희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명령을 선포한 데 이어 20일 정오에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1,560여 명을 연행해 그 가운데 120여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박정희의 강경대응으로 시위는 진정됐지만, 이 사건은 현장을 둘러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 하여금 유신체제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회의해 10월26일 박정희를 암살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10/15 16:14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0/h2004101516122625340.htm&ver=v002
1979 - 서울 성수대교 개통 서울 성동구 성수동 뚝섬 수원지앞∼강남구 압구정동 간을 잇는 한강의 11번째 다리인 성수대교가 1979년 10월 16일 개통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의 강남북을 잇는 성수대교 준공식에 참석, 인근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통테이프를 끊고 시공업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총공사비 1백16억원을 들여 지난 1977년 4월에 착공, 2년6개월 만에 완공된 것으로 길이는 1천1백60m, 너비 19.4m의 4차선 규모이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시도된 트러스 공법에 의한 다리였으며 당시 한강다리로서는 가장 긴 것이었다. 성수대교의 남-북단 진입로에는 6∼8m 폭의 입체교차로를 각각 설치, 교통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1994년 10월 21일, 다리의 5번째와 6번째 교각이 내려앉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사가 있어 기존의 다리를 허물고 1997년 새로운 성수대교를 건설하여 통과하중이 1등급으로 향상됐다. /조선
1978 - 요한 바오로 2세,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 재위 34일 만에 심장병으로 돌연사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1세(Joannes Paulus I, 1912~1978)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바티칸 추기경회의에서 폴란드인인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추기경이 제265대 로마 교황으로 1978년 10월 16일 선출됐다.
1973 - 레득토, 노벨평화상 거부 [오늘의 경제소사/10월 16일] <1525> 노벨평화상 표면이 순금으로 도금된 18K 금메달, 상금 1,000만스웨덴크로네. 노벨평화상 수상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이다. 우리 돈으로 16억8,240만원인 상금도 상금이지만 노벨평화상은 선망의 대상이다. 외신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 조국의 전쟁상태가 끝나지 않았다. 평화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 결국 레둑토는 1975년 동양인 최초의 노벨평화상보다도 염원하던 통일의 꿈을 이뤘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0/15 17:54:58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0/e2009101517545797490.htm
1964 - 중국 첫 원폭실험 성공 1964년 10월 16일 중국이 처음으로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성명서에서는 실험이 북경시간 오후 3시에 실시됐다고 밝혔다. 실험 장소에 관한 언급은 없었으나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서쪽의 신강성으로 확인됐다. 성명서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계획 목적이 미국이 핵전쟁을 일으킬 경우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또한 현재 적재관계에 있는 소련과 중국이 마르크스-레닌주위와 무산계급 민족주의의 기초 위에서 하나로 뭉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핵무기의 완전파괴와 완전금지를 위해 세계 모든 나라의 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 이로써 중국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5번째 핵 보유국이 됐다. /조선
- Konrad Adenauer - Ludwig Erhard
1963 - 서독 아데나워 총리 사임, 후임에 부총리 에르하르트 취임 아데나워 서독 총리 사임(1963)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962 -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국교수립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1962년 10월 16일에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3년 7월에는 주(駐)사우디아라비아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고 1975년 4월에는 서울에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국은 정치·경제·문화의 각 분야에 걸쳐 선린외교정책이 강화되었다. 석유파동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기술인력 부족과 사회간접자본 미비가 경제개발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되어, 한국은 기획전문가·의료단·어업기술자 등을 파견하여 기술 협력을 제공하였다. 또한 사회간접자본 개발에 일익을 담당, 도로·항만 등의 건설계약 실적이 1978년까지 100억 달러를 상회하였으며, 한국 총건설 수출의 80% 이상이라는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다. 건설공사 수주(受注) 규모도 단일공사가 10억 달러를 상회하는 등 대형화하였으며, 시멘트공장, 담수화(淡水化)공장, 석유화학공장 등의 대형 플랜트를 건설하는 등 건설공사 유형이 기술 집약적으로 고도화하였다. /naver
1962 - 쿠바 미사일 위기 시작 1962년 10월 20일 미국 국무부를 취재하던 워싱턴포스트 머리 마더 기자는 국무부 방명록에 적힌 중앙정보국(CIA) 요원 두 명의 이름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구나 토요일 밤에….
1962 - 프랑스의 철학자, 문학이론가 바슐라르(Bachelard, Gaston) 사망 바슐라르 [Bachelard, Gaston, 1884.6.27~1962.10.16] 구조주의의 선구자이며 시론·이미지론으로 유명한 가스통 바슐라르가 1962년 10월 16일 사망했다.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는 가스통 바슐라르는 과학적 진리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부정하고, 과학적 진리가 인간 이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능동적 이상주의'를 내세워 과학인식론에 혁명을 가져온 과학철학자다. 바슐라르는 1938년 '불의 정신분석'을 출간, 과학적 인식론에서 출발해 문학에 관한 연구로 접어들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책을 경계로 바슐라르는 과학적 이성에서 시적 상상력으로 관심을 옮겨 상상력의 역동성과 창조성에 주목한다. 그는 이후 문학상상력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리는 연구서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현대문학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바슐라르의 후기 저술에 속하는 '공기와 꿈-운동에 관한 상상력'은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외에도 '공간의 시학' '물과 꿈' '몽상의 시학' '불의 정신분석' 등의 저서가 있다. /조선
1959 - 미국의 군인, 정치가 조지 마셜(Marshall, George) 출생 마셜 [Marshall, George Catlett, 1880.12.31~1959.10.16] 미국의 군인·정치가. 마셜플랜의 제창자이다. 펜실베이니아주(州) 유니온타운 출생. 1901년 버지니아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43년까지 군무(軍務)에 종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대통령 F.D.루스벨트의 조언자로 활약하였고, 카사블랑카·테헤란·얄타·포츠담의 여러 회담에 참석하였다. 대전 후 대통령 H.S.트루먼 밑에서 1947∼1949년 국무장관, 1950∼1951년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다. 국무장관 시절인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유명한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제창하였고, 유럽의 경제부흥에 대한 공적이 인정되어,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1956 - 프랑스 축구협회 및 FIFA 회장 쥘 리메(Rimet, Jules) 사망 리메 [Rimet, Jules, 1873.10.14(24)~1956.10.16] 쥘 리메(Jules Rimet, 1873년 10월 14일 ~ 1956년 10월 16일)는 프랑스 출신의 전 3대 국제 축구 연맹의 회장으로 FIFA 월드컵을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일생과 경력 1919년 프랑스 축구 연맹(FFF)를 창설하고 1949년까지 회장으로 있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장교로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1921년 국제 축구 연맹의 3대 회장이 되어, 1954년까지 국제 축구 연맹 역사상 가장 길게 재임하였다. 1930년 첫 FIFA 월드컵인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유럽의 국가들은 잉글랜드를 필두로 한 불참 여론이 휩쓸자 쥘 리메가 몸소 찾아가서 각국 정부들을 설득해 조국인 프랑스를 포함하여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를 FIFA 월드컵에 출전시켰고, 1934년 FIFA 월드컵을 이탈리아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선전장으로 활용하는 바람에 쥘 리메가 파시스트라는 억측이 돌기도 했다. 1938년 FIFA 월드컵에서도 나치식 경례로 논란을 빚었고, 195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도 지명되었으나 그 해에는 아무도 수상하지 못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직후 회장직에서 물러나, 1956년 파리 교외 쉬레네에서 사망하였다. 아벨 라플뢰르에 의해 그를 기리는 쥘 리메 컵이 제정되었으나 1983년 도난당했고, 사후 2004년 국제 축구 연맹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위키백과
1952 - 채플린 영화 '라임라이트(Limelight)' 개봉 라임라이트 [Limelight] 전성기가 지난 코미디언과 발레리나의 사랑을 통하여 삶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묘사한 흑백 미국영화. 1952년 셀러브레이티드 프로덕션(Celebrated Productions)이 제작하고 유나이티드아티스츠(United Artists Corporation)가 배급을 맡았다. 찰리 채플린이 감독과 제작·각본·주연·음악을 겸하였으며, 상영시간은 138분이다.
1945 - 이승만 박사 환국 일제하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기 시작했다. 미 국무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이승만 박사가 미군 군복을 입고 김포공항에 내린 것은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였다. 10월 4일 군용기편으로 워싱턴을 출발,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괌을 거쳐 12일 일본에 도착한 그는 일본 체류 중 하지와 회담했으며 맥아더와도 회동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미 군정청은 그를 극진하게 예우했다. 조선호텔의 스위트룸을 배정해주었으며 리무진을 전용 승용차로 내주었고 무장 헌병이 그를 호위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중국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도 해방 3개월여 만인 1945년 11월 23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조선
1945 -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발족 "1995년 10월 16일은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의 창설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33 - 독일 국제연맹 탈퇴
1916 - 마거릿 생어, 산아제한클리닉 개소 20세기 초에는 ‘산아제한’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이 금기를 처음 깬 사람이 마거릿 생어(Sanger, Margaret, 1883~1966)다. 11자녀 중 6번째로 태어난 생어가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언제나 배부른 모습 뿐이었다. 결국 48세에 숨진 어머니를 통해 잦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건강에 끼치는 폐해를 깨달은 생어는 간호사가 돼 피임법의 전도사가 된다. ‘산아제한(birth control)’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생어였다. 1914년 3월에 발간된 잡지 ‘여성 반란’은 산아제한운동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잡지에서 “여성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잡지는 우송 불가물로 판정받고 곧 폐간됐다. 음란출판물을 발행ㆍ배포했다는 혐의였다. 1916년 10월16일, 생어는 미국 최초의 ‘산아제한클리닉’을 뉴욕 브루클린에 개소했다. 464명이나 다녀갈 정도로 여성들이 큰 관심을 보이자 열흘째 되는날 경찰이 들이닥쳤다. 생어는 재판에서 30일간의 강제노동 판결을 받았지만 “여성에게 피임기구를 제공할 권한을 의사에게 준다”는 판결을 이끌어내 산아제한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36년에 “의사들이 피임약을 처방할 수 있다”는 연방법원의 판결을 받아낸 것도, 1937년에 미국의학협회가 “의과대에서 피임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결의를 끌어낸 것도 생어의 길고 긴 투쟁의 결과였다. /조선
[역사속의 오늘] 뉴욕에 첫 '산아제한 클리닉' 설치 '산아제한 클리닉'을 처음 설치한 것은 미국의 마거릿 생어다. 1916년 10월 16일 뉴욕 브루클린에서의 일이다. 지금은 너무나 흔한 얘기지만 당시엔 '피임'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클리닉 개설 열흘 만에 그녀는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지 어떤 사람에게 피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뉴욕주법 제1천142조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생어는 결국 30일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악법철폐'를 위한 투쟁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후원자들이 급증했다. 의사들은 물론 학자들까지도 동참했다. 생어의 투쟁은 1936년 63년 동안 지속됐던 컴스콕법이 폐지되면서 산아제한 합법화란 큰 결실을 맺었다. 생어가 이처럼 '산아제한'에 열정을 바치게 된 계기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낳은 자녀 수는 생어를 포함해 모두 11명이었다. 어머니가 48세에 숨을 거두자 생어는 잦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건강에 폐해를 끼친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간호사가 돼 피임법을 전도하게 됐던 것이다. 여성을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한 여성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5년 10월 1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602&yy=2005
1908 - 알바니아의 국가원수 엔베르 호자(Hoxha, Enver) 출생 호자 [Hoxha, Enver, 1908.10.16~1985.4.11] 엔베르 호자(알바니아어: Enver Hoxha, 1908년 10월 16일 ~ 1985년 4월 11일)는 알바니아의 정치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 맞서 알바니아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으며, 종전뒤 사망(1985년)때까지 공산주의 정당인 알바니아 노동당의 총서기로 알바니아를 다스렸다. 그는 엄격한 스탈린주의에 의거하여 공산주의 국가 가운데도 유례없는 폐쇄 정치를 실시하여, 서방은 물론 구 소련·유고슬라비아·중국 등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차례차례 관계가 끊겨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소련에 대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 · 헝가리 등지에 군을 투입하는 것을 보면서 국토 곳곳과 해안가에 전투벙커와 방공호를 설치하고 전 국민에게 무기를 지급하는 등, 적대시하였다. 1967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무신론 국가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대중 문화의 엔베르 호자 스파이크 리 감독의 2006년 작품인 인사이드 맨에서 인질범들이 방송한 엔베르 호자의 대국민 연설이 극중 소재로 등장한다. /위키백과
- World Energy Conf., Canne
1902 - 프랑스에서 지문(指紋)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택 프랑스에서 지문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용돼 사건해결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문이 개인 식별상 중요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은 1880년 영국인 의사 홀즈였다. 같은해 인도에서 근무하는 영국인 하셀도 그 연구를 과학잡지에 보고했다. 지문이 처음으로 범죄수사에 채용된 것은 런던 경찰 헨리로 그는 1901년 헨리식 지문분류법을 확립했다. 이 날 프랑스가 채용한 방식은 인류학자로 파리경찰서 감정국장 베르디욘이 완성한 베르디욘 방식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으로 이 방법은 과학적 수사를 한단계 더 발전시켰다. /조선
1890 - 아일랜드 독립투쟁의 영웅 마이클 콜린스(Collins, Michael) 출생 콜린스 [Collins, Michael John, 1890.10.16~1922.8.22] 아일랜드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1890년 10월 16일(묘비에는 1890년 10월 12일로 기록) 아일랜드 코크(Cork) 서부의 샘스크로스(Sam's Cross)에서 태어났다. 철저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서 1916년 영국 식민지배에 대항하는 부활절 농민폭동을 주도하였고, 1919년에는 비밀무장단체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Irish Republican Army)을 창설하였다.
- 'Steeple'
1890 - 미국의 사진작가 스트랜드(Strand, Paul) 출생 스트랜드 [Strand, Paul, 1890.10.16~1976.3.31] 미국의 사진작가. 189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고 이후 에티컬 컬처 스쿨(Ethical Culture School)에 입학하여 사진가인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에게 배웠다. 하인은 그후 스트랜드를 알프레드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에게 소개하였고, 1908년부터 1915년까지 8년 동안 스트랜드는 스티글리츠에게서 사진수업을 받았다. 스승인 스티글리츠의 도움으로 〈291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갖고 《카메라워크》지에 사진들이 실리게 되었다
1888 -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O'Neill, Eugene) 출생 오닐 [O'Nell, Eugene Gladstone, 1888.10.16~1953.11.27]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1888년 10월 16일 ~ 1953년 11월 27일)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희곡 작가이다. 오닐의 희곡은 미국 연극에서 처음으로 사실주의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그 점에서 러시아 희곡 작가인 안톤 체호프, 노르웨이 희곡 작가인 헨리크 입센, 스웨덴 희곡 작가인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연관된다. 그의 작품에는 최초로 영어를 미국 방언으로 발음한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 오닐의 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불량한 행동을 하며,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루려고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에는 환멸과 절망에 빠지고 만다. 오닐은 희극은 오직 한 편만 썼다.(Ah, Wilderness!) 그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작품은 어느 정도의 비극과 개인적인 비관론을 담고 있다. 스토니 브룩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그의 집은 그의 이름을 따라 집 이름이 지어졌다. 생애 유진 오닐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대중의 우상이 되었던 배우 제임스 오닐의 아들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한 호텔방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을 1년 다니다 중퇴하여 선원이 되었고, 그 후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그러나 폐결핵으로 반년 동안 요양을 하게 되자 독서에 열중하는 한편 극작을 시작했는데(1913) 그리스 비극과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았다. 요양원에서 나와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베이커 교수에게 극작을 배우고(1914-1915) 다음해인 1916년에 프로빈스타운에 있는 전위적인 극단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스'에 가담, 일막물(一幕物)을 발표하기 시작했다(1916-18). 이 작품들이 한데 묶여 출판된 것이 바로 유명한 《S. S. Glencairn》(또는 <긴 귀향 항로>)로서 바다와 선원의 비정한 운명을 취급한 것들이다. 1916년 최초의 작품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를 발표하였으며, 1920년 그의 출세작 <지평선 저 멀리>를 상연하였다. 그 후 사실극으로부터 표현주의적 상징적 희곡으로 옮겨지고 잠재 의식의 연극화를 기도하였다. 제3회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으며, 193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밤으로의 긴 여로><이상한 막간극><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황제 존스> <안나 크리스티> 등이 있다. 작품 /위키백과
- Israel, 50 Sheqalim (Banknote)
1886 - 이스라엘의 정치가,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Ben-Gurion, David) 출생 벤 구리온 [Ben-Gurion, David, 1886.10.16~1973.12.1] 이스라엘의 정치가, 시오니즘 지도자. 본명은 데이비드 그루엔(David Gruen). 폴란드 프원스크 출생. 근대 시오니즘 창시자 T.헤르츨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팔레스타인에 입국하여 팔레스타인노동당의 활동분자가 되었으며, 그 기관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유학하고 있었으나 연합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국외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시오니스트인 I.벤츠비와 함께 유대 군단을 결성하여 영국군과 함께 팔레스타인전쟁에 종군하였다. 전후에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노동총연합을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이 되었다. 1933년 국제 시오니즘의 최고 감독기관인 시오니즘 집행위원회(Zionist Executive)에 들어가 2년 후에는 위원장이 되었고, 1948년 5월 이스라엘공화국 성립과 함께 총리가 되어 1953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으며, 1955∼1963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저서로 《투쟁》(5권, 1949)이 있다. /naver
1875 - 하와이의 마지막 공주 카이울라니(Princess Kaʻiulani) 출생 카이울라니 공주 [Princess Kaʻiulani, 1875.10.16~1899.3.6] Victoria Kaʻiulani Kalaninuiahilapalapa Kawekiu i Lunalilo Cleghorn, Crown Princess of Hawaii ( 16 October 1875 – 6 March 1899) was heir to the throne of the Kingdom of Hawaiʻi and held the title of crown princess. Kaʻiulani became known throughout the world for her intelligence, beauty and determination. After the overthrow of the Hawaiian monarchy in 1893, she spearheaded a campaign to restore the Kingdom. In New York, she made many speeches and public appearances denouncing the overthrow of her government. In Washington, D.C she spoke before the United States Congress and pleaded with U.S. PresidentsBenjamin Harrison and later Grover Cleveland, but her negotiations could not prevent eventual annexation. Her life story grew to legendary proportions after her death. Early years http://en.wikipedia.org/wiki/Ka'iulani
- Oscar Wilde(1882) - Oscar Wilde by Toulouse-Lautrec
와일드 [Wilde,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1854.10.16~1900.11.30] 와일드는 19세기말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치로 내걸었던 유미주의를 대표하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심미적 열정의 인생살이를 부르짖은 월터 페이터, 존 러스킨 등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유일한 장편소설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과 희곡 <살로메 Salome>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시·소설·수필·동화에서 뛰어난 창작력을 발휘했다. 가장 성공을 거둔 장르는 풍속희곡으로,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와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등을 통해 작가로서 치밀한 구성력과 탁월한 재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의 풍속희곡에 대해 평론가 윌리엄 아처는 "현대 영국 희곡의 최고의 차원"이라고 단언했다. 죽기 몇 해 전 동성애 죄목으로 2년의 중노동형을 치르기도 했으며, 죽는 날까지 파산 상태의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브리태니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당시 자신의 능력을 좀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다."
- 오스카 와일드
[역사 속의 인물] '행복한 남자' 오스카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천재작가였다. 날카롭고 약삭빠른 말솜씨만 보면 감히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여성과 연애에 관한 어록은 영원한 히트작이다. '남자는 늘 여자의 첫 번째 애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어리석은 허영심이다. 여자는 보다 빈틈없는 본능을 갖고 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남자의 마지막 애인이 되는 것이다.' '연애감정이란 서로 상대방을 오해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을 해방하지만 여자 쪽은 여전히 주인을 찾고 있는 노예다.' 1854년 오늘, 아일랜드 더블린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게을렀지만 문학에서는 탁월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세속에 반항하면서 퇴폐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남녀 곁을 전전하다가 결국 동성애로 감옥살이를 한 최초의 유명인사가 됐다. 그 결과로 파산하고 죽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희곡이라 대중적이지 않지만, 유명해지기 전에 쓴 동화 '행복한 왕자'(1888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마을에 서있는 왕자 동상이 제비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떼주고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내용이다. 슬프고 아름다운 결말이다. 그도 '행복한 왕자'를 꿈꿨을까. 박병선(사회1부장 /매일신문 2010년 10월 1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1994&yy=2010
1846 - 모턴, 에테르 마취수술 성공
- 일본, 1000 옌 (지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출생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10.16~1909.10.26] 대한제국 초대 총독 이토 히로부미 출생 일본의 역사적인 정치인이자 한민족의 원수 안중근 의사에 저격된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한민족에게는 원수의 대명사로 각인돼 있지만 일본의 정치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한일 합방과 관련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진출과 조선의 식민지화를 주도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천인공노할 일이었지만 일본의 시각에서는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강경훈 기자 qwereer@vop.co.kr /민중의소리 2010-03-26 10:50:36 http://www.vop.co.kr/A00000287737.html
1793 -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처형 마리 앙투아네트 [Marie-Antoinette, 1755.11.2~1793.10.16]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1793년 10월 16일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었다. 그녀는 이른바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에 휘말리는 등 방탕하고 경박한 생활을 했으며, 백성들과 사회에는 무관심했다. 그 결과 그녀는 민중 선동가들의 대표적인 표적이 되었다. 바스티유 함락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 와중에 루이 16세와 함께 왕당파의 도움으로 파리를 탈출했으나 혁명군에게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되었다. 그녀는 오빠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에게 프랑스를 상대로 반혁명전쟁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으나 외면당했다. 1792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 뒤에도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계속 음모를 꾸며 프랑스 국민의 분노를 샀다. 왕비에 대한 증오심은 민중 소요사태로 이어졌고 마침내 1792년 8월 10일 왕정 타도로 귀결되었다.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나서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 /브리태니커
[어제의 오늘]1793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참수형 ㆍ혁명 칼날에 사치스러운 삶 마감 임소정 기자 /경향신문 2010-10-15 21:44: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152144285
1758 - 미국의 사전 편찬자 노어 웹스터(Webster, Noah) 출생 웹스터 [Webster, Noah, 1758.10.16~1843.5.28] [오늘의 경제소사/10월16일] 웹스터 갈수록 말이 갈렸다. 각국에서 모여든 이민들의 언어와 영어가 섞이고 서부에서는 매일같이 신조어가 생겨났다. 동부의 신사들은 영국식 표현과 발음을 고수했다. 분열 일보 직전의 미국 영어는 어느날부터 한 줄기로 뭉쳤다. 이 사람 덕분이다. 노아 웹스터(Noah Webster). 1758년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등록금(예일대 법대) 조달을 위해 교사로 일하다 진로를 바꿨다. 오래된 영국 교과서를 대체하겠다는 생각에서 1783년 출간한 ‘철자교본’은 1840년대 중반까지 3,000만부가 팔렸다. 미국 인구 1인당 1권꼴. 당시에는 성서 이래 가장 많이 팔린 책자였다. ‘미국어’라는 단어도 여기서 처음 쓰였다. 정치적으로 ‘주권(州權)보호 보다 강력한 연방’을 주장했던 그는 연방주의자들이 만든 잡지와 신문사 편집을 맡고 주마다 다른 저작권을 합치는 법률 제정도 이끌었다. 이름이 알려질 무렵인 1800년 미국 독자적인 사전편찬 기획을 밝히고 1806년 ‘간추린 영어사전’을, 1828년엔 ‘아메리칸 영어사전’을 내놓았다. 단어 7만개가 수록된 아메리칸 영어사전은 20달러라는 가격 때문에 첫해 주문이 미국 2,500부, 영국 3,000부에 그쳤지만 1870년대 초반까지는 14만부가 팔리며 영어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음악 같은 단어에서 ‘k’자(musick→music)를 뺀 웹스터의 간략화는 영국도 용법을 따랐다. 100년 뒤에 나온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41만개 단어를 담고 있으나 71년에 걸친 수천명 전문가들의 공동작업 결과물인 반면 웹스터는 모든 작업을 혼자서 마무리했다. 웹스터가 평생을 바친 언어는 미국사회 통합을 넘어서 세계의 중심어로 군림하고 있다. ‘미국어가 세계로 퍼질 것’이라는 웹스터의 예언 그대로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6/10/15 17:05
- 'Education', etching
1726 - 폴란드 태생 독일의 풍속화가, 판화가 호도비에츠키(Chodowiecki, Daniel) 출생 호도비에츠키 [Chodowiecki, Daniel (Nikolaus), 1726.10.16~1801.2.7] 폴란드 태생 독일의 풍속화가·판화가. 독일 중산층의 생활 및 풍습을 그린 작품들이 빼어나다. 주로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으며 그뢰즈의 영향을 보여주는 감상적인 그림인 〈장 칼라스와 가족의 이별 The Parting of Jean Calas From His Family〉(1767, 베를린 달렘 박물관)로 처음 인기를 얻었다. 1758년에는 판화를 시작하여 7년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새긴 연작 판화와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History of the Life of Jesus Christ〉를 제작했다. 프로이센에서는 그의 작품의 도판이나 비네트를 이용하여 많은 책을 출간했다. 2,000여 점에 이르는 그의 에칭은 쾌적한 실내의 18세기 생활상을 보여준다. 그 자신은 부인했지만 때때로 윌리엄 호가스의 작품과 비교되었는데, 호도비에츠키의 작품은 호가스의 신랄함 대신 온화한 유머가 특징이었다. 1797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708 - 스위스의 해부학자, 생리학자 알브레히트 폰 할러(Haller, Albrecht von) 출생 할러 [Haller, Albrecht von, 1708.10.16~1777.12.12] 스위스의 해부학자. 베른 출생. 튀빙겐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후에 레이든대학으로 전학하여 의학을 전공하고, 1727년에 졸업하였다. 1736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어 해부학 ·외과학 ·식물학을 강의하였다. 해부학 ·태생학 ·생리학 ·식물학의 각 영역에서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757∼1766년에 저술한 《인체생리학 Elementa Physiologiae Corporis Humani》(8권)은 근대 실험생리학을 확립한 저서로서 19세기 초까지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인 신경과 근육활동에 대한 이해이다. 약 600여 회의 실험으로 근육이 수축하는 것은 근육조직의 특별한 성질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문학적 재능도 풍부하여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시 《알프스 Die Alpen》(1732), 소설 《Usong》(1771) 등의 작품을 남겼다. /naver
1620 - 프랑스의 조각가 퓌제(Puget, Pierre) 출생 퓌제 [Puget, Pierre, 1620.10.16~1694.12.2] 프랑스의 조각가·화가·건축가. 바로크 양식의 매우 독창적인 작품들로 유명하다. 젊은시절(1640~43) 이탈리아로 건너가 벽화가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에게 고용되어 로마에 있는 바르베리니 궁전과 피렌체에 있는 피티 궁전의 천장 장식을 꾸미는 일을 도왔다. 1643~56년 마르세유·툴롱에서는 주로 화가로 활동했지만, 거대한 군함의 선수상(船首像)을 새기기도 했다. 1656년 툴롱 시청의 출입구에 조각을 새기는 중요한 일을 맡았는데 이 건물 입구의 여인상 기둥에 새겨진 조상들은 로마의 바로크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미켈란젤로의 마니에리스모 양식 작품과 비슷한 긴장감과 고통을 보여준다. 그러한 느낌은 〈크로토나의 밀로 Milo of Crotona〉(1671경~84) 같은 작품에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운동선수인 밀로가 나무의 그루터기에 손이 끼인 채 사자의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1659년 파리에 갔으며, 루이 14세의 재정총감인 푸케의 주목을 받았다. 1661년 헤라클레스 상(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갈리아의 헤라클레스 Hercule gaulois〉)을 의뢰받았는데, 그것을 조각할 대리석을 고르기 위해 이탈리아에 가 있는 동안 푸케는 권력에서 밀려났다. 여러 해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러 있으면서 제노바에서 조각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곳에서 만든 뛰어난 작품으로는 산타마리아데카리냐노 교회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있다. 1669년 이후로는 주로 툴롱과 마르세유에 살면서 조각뿐만 아니라 건축과 선박 장식에도 관여했다. 까다롭고 약간 오만하기까지 한 성격 때문에 루이 14세의 강력한 새 재정총감인 콜베르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고, 말년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왕궁으로부터 약간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1683년 〈크로토나의 밀로〉는 베르사유로 옮겨졌으며, 1684년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Perseus and Andromeda〉가 거기에서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곧 경쟁자들이 꾸민 음모에 희생되어 왕궁에서의 출세는 단명하고 말았다. 베르사유를 위해 설계한 작품들 가운데 뛰어난 평부조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 Alexander and Diogenes〉(1671~93경, 루브르 박물관)는 베르사유에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어떤 작품들은 거절되기도 하여 퓌제는 이 일들로 인해 크게 상심했다. /브리태니커
1597 - 이순신 장군 벽파진 해전 임진왜란 해전 목록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거제시 옥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마산시 산호동) - 이순신 1592년 6월 17일(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카메이 코레노리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와키사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구키 요시아키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1597년 10월 16일(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고니시 유키나가
- Lucas Cranach the elder - Lucas Cranach the elder
- 'Martin Luther' - 'Lucas Cranach' by Durer
- 'Young Man' - 'Young Mother and Child'
- 'Young Woman' - 'Adam and Eve'
- 'Madonna and Child with Apple Tree' - 'Portrait of a Woman'
1553 - 독일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Cranach the Elder, Lucas) 사망 크라나흐 [Cranach the Elder, Lucas, 1472~1553.10.16] 독일의 화가. 오버프랑켄의 크로나흐 출생. A.뒤러, H.홀바인과 어깨를 겨루는 거장으로 도나우화파(畵派), 특히 A.알트도르퍼와 M.그뤼네발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508년 네덜란드 각지를 여행하였으며, 후기 고딕양식에 르네상스적인 요소를 가미하였다. 루터의 친구이었으며, 종교개혁운동의 지지자로서 개혁자의 초상을 그렸다. 제작장소는 처음에는 빈이었는데(1503∼1504), 그 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궁정화가로 있다가 1505년부터 비텐베르크로 옮겼다. 1537∼1544년 그곳의 시장을 겸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제후를 따라 바이마르로 가서 제작활동을 하던 중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특징은 종교화에서는 유명한 《그리스도의 책형(磔刑)》(1530)의 인물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상실감, 초상화에서는 《작센 선제후》(1532)에 나타난 모델과 풍경과의 두드러진 대비, 신화화(神話畵)에서는 《청춘의 샘》이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유머러스한 내면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북유럽의 미의 여신으로 일컬어지는 독특한 비너스상이며, 오늘날 세계 각지의 미술관에 있는 이들 나체상에는 인도 세밀화(細密畵)의 에로티시즘이 보인다. 작품수가 많으며, 이 밖의 주요 작품에 《유디트》 《아담과 이브》 《샘가에 누워있는 강의 요정》 등이 알려졌다. 아들인 한스와 루카스도 화가였다. /네이버
1430 -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2세(James II) 출생 제임스 2세 [James II, 1430.10.16~1460.8.3] 스코틀랜드의 왕(1437~60 재위). 집권 기간 전반에는 내분으로 시달렸으나 결국은 스코틀랜드 전역에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진 유능한 통치자로 군림했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는 아버지가 암살되자(1437. 2)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너무 어려 국정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임스 1세가 이룩한 강력한 중앙집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뒤이은 혼란의 와중에서 세 경쟁가문인 크라이턴·리빙스턴·더글러스 가문이 어린 왕을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 싸웠다. 제임스는 1449년 헬데를란트의 메리와 결혼한 뒤 마침내 왕으로서의 소임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즉각 리빙스턴 가문의 영지를 압수했다. 그러나 1450년 더글러스 백작 8세 윌리엄과 싸우기 전까지는 막강한 더글러스 가문과 불편하나마 평화를 유지했다. 1452년 2월 그는 더글러스 백작을 칼로 찔러 죽였다. 3년 후에는 더글러스 가문의 성을 파괴하고 그들의 방대한 영지를 몰수했다. 이 땅에서 나온 소득으로 강력한 중앙정부를 세우고 사법행정을 개선할 수 있었다. 그후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한 잉글랜드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하여 1456년 스코틀랜드에 있던 잉글랜드 전초기지를 공격했으나 1460년 록스버러 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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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