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장례문화를
회고하며
성숙한 사회연구회 사무총장 신형환
‘성숙한 장례문화’에 대한 글을 크리스챤 신문에
투고하였다가 2013년 5월에 <성숙한 삶과 문화>라는 책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을 성숙한 사회문화 실천 운동의 일환으로 제시한
적이 있었다. 장례의 어려운 과정과 현실을 경험한 사람은 개선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성숙한 장례문화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으로 “첫째, 가족중심의 장례문화를 확신시켜야 한다. 둘째, 시신처리방법을 매장보다는 화장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셋째, 장례절차를 간소화
하여야 한다.”고 제시한 적이 있었다. 지난 10월 26일 새벽 미명에 어머니께서 별세하셔서 장례를 치루는 동안 겪었던 경험을 돌아보면서 과연
얼마나 실천하였는가를 돌아보려고 한다.
어머니는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2011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아 투약과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딸의 집에서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2012년
8월에 대상포진이 발병하여 온몸에 반점이 생기고 너무 고통이 심하여 대학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중에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치매가 빨리
진전되었다. 입원하고 계시는 동안 자녀들과 며느리들이 돌아가며 병실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대상포진 치료가 3주 만에 끝나고 어머니를 어디로
모셔야 할 것인가를 상의하다가 마음이 아프고 쓰리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부안요양병원에서 요양 치료를 받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자존심이
강하여 남에게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싫어하여 병원생활을 잘 적응하지 못하여 참으로 마음이 아파서 괴로웠다. 2013년 2월부터
건강이 많이 호전이 되어 스스로 식사를 하며 물리치료도 열심히 받으며 화장실까지 혼자서 갈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였다.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무조건 2주에 한 번씩 아내와 함께 부안요양병원에 가서 어머니와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아내는 교회 지휘자로서 봉사하고 있었으나 사임하고 나의 권유를 들어주어 살아생전 어머니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하기로
약속하였다. 병원에 갈 때마다 함께 나눈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겨서 <어머니여, 우리 어머니이여!>란 문집을 발간하여
지인들과 나누어 보려고 하였다. 또한 치매환자를 부모로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의 경험을 나누어 주려고 하여 지금까지 A4용지로 40면 정도를
글로 써놓았었다. 형으로부터 어머니께서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였지만 6남매가 화목하며 우애할 수 있는 장례절차로 뜻을
모아야 한다고 아내와 다짐하면서 자정이 조금 넘어서 부안으로 출발하였다. 아들인 성진이 운전하고 부안으로 가면서 아내와 함께 우리 부부는 가능한
절차와 형식에 대하여 이야기를 자제하기로 약속하고 갔었다. 성숙한 장례문화의 실천 사항 3가지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는가를 돌아보며 경험을
나누려고 한다.
첫째, 가족중심의 장례문화를 실천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러운 생각이 든다. 이 문제는 나 혼자 어떻게 할 수 없었으며 다른 형제자매의 생각과 사회 풍조에 따라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고인이 된 누나를 제외하고 5남매의 친인척과 직장 동료들이 문상을 많이 와서 가족중심이 되지 못하였다. 나 자신도 연락을 최소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례절차는 형의 제안으로 유교식으로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아내가 상조회에 가입하여 모든 절차와 과정 일체를
상조회 주관으로 하게 되었다. 나와 아내는 교회 장로와 권사로서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들었으나 다른 형제자매의 의견을 존중하여 순응하기로 하였다.
유교식의 장례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부부라서 조금은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하였으나 장례지도사가 절차를 주관하여 경건하고 질서 있게 절차를 이행하여
나갔다. 정복량 원로목사님께서 전주 승화원 화장장으로 오셔서 형식과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형제자매가 사랑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위로하여 주신 후에 간절히 고인과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여 주셔서 큰 위로와 격려가 되어 정말 감사하였다. 장로로서의
짐이 다 내려간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울먹이며 화장이 끝나길 기다리며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둘째, 시신처리방법으로 매장보다는 화장을 하여야
한다고 제안한 사항은 100% 실천하여 감사하였다. 1984년 8월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묘를 개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하고 어머니와 합장하는
평장 방식의 장묘를 조성한 것은 정말 좋은 선례가 될 것 같다. 어머니께서 평소에 화장을 원하여 화장하는데 형제자매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유골함을 납골당 안치실보다 선산에 아버님 유골함과 함께 합장하는 방식으로 반 평도 되지 않는 석관에 평장방식의 장묘를
만들었다. 공간을 최소화 하면서 작은 비석 앞면에는 부모님의 출생일과 사망일, 뒷면에는 6남매 자녀 이름을 새겨 놓아 후손들이 성묘하는데 정말
좋고, 앞으로 벌초하는 번거로움도 없어서 좋을 것 같았다. 선산에 많은 친인척이 평장 방식의 장묘로 조성하여 공원묘지와 같이 관리한다면
후손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평장 방식의 장묘가 가장 인상 깊고 의미 있는 일로 평가되었는데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으며 보기에 너무 좋았고
관리하기도 편리할 것 같았다.
셋째, ‘장례절차를 간소화 하여야 한다.’는
제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유감스러운 면이 있었다. 장례절차를 가능한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러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조문하는 문상객들이 많이
와서 유족을 위로하고 부의를 넉넉히 하여 주어서 풍족하게 비용을 쓸 수 있었다. 또한 수도권에 있는 친구와 지인들이 부안까지 오려면 많은 시간과
경비가 추가로 들게 되어 우리 형제자매는 문상 온 사람들이 돌아갈 때에 교통비를 드리기도 하여 넉넉함과 여유, 배려와 존중을 실천할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한편으로 직접 문상을 오지 못한 사람은 문자로 조문하며 부의를 하여 진심으로 감사하였다. 직접 찾아가 문상을 하는 것이 도리이지만
스마트폰 영상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조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조화가 70개 이상이 와서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재경
신흥75회 동창회와 홍우회가 미리 의향을 물어보아 조화를 정중하게 사양하기도 하였다. 10개 정도의 조화만 있으면 될 것 같으나 인간관계와
사업관계로 조화를 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꾸지 않은 것 같았다. 정치인이 돈으로 부조나 축하를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한 것은 잘 한
일인 것 같았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보조관, 군수, 의원 등이 조문을 왔지만 상주와 인사를 나누고 가서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았다.
넷째, 어머니 장례를 마치면서 형제자매가 우애하고
화목하며 배려할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모든 절차와 과정, 돈을 사용하는 일에 대하여 수시로 모여 의견을 모아 처리하면서 하나의 잡음도 없이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장례를 치루면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남은 조의금을 손자와 손녀 학비로 나누어 주었으며, 조문을 온 지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도록 가정별로 조금씩 나누어
고마움과 감사함을 전하게 하였다. 장례를 마친 후에 계좌로 부의를 이체한 지인에게 대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어머니가 강조하신 내용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였는데, 형제자매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며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이라고 확신하였다.
조문을 하여주신 분과 기도하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며 주님이 주신 은혜가 넘치길
소망한다.
첫댓글 참 감명깊이 읽었숩니다. 글을 오려 주신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어 좋았습니다. 우리네 풍습이 거의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가시는이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사람들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못네 아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시는이나 살아 남아있는이 모두다 기쁘고 즐겁게 하려면 나 자신을 들어 내려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노년에 고통받는이들의 옆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지켜 보며 도대체 삶이 무엇인고 ? 고뇌에 잠기곤 합니다.
세상에는 물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물질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입는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신형환님의 부인께서 지휘자를 사임하고 어머님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기시기로 결정하신것은 잘하신것이라 봅니다.
저의 외조부님은 장로님이셨는데 유교적 엄격한 옛날 전통사회에서 기독교 가치관과 충돌하기 쉬운때 외증부님에게 중대
선언(?)을 하셨다. " 아버님 ! 저는 아버님 돌아 가신후 제사를 지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대신 아버님 생전에 제 마음과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외증조부님 생전에 평소 생신이나 칠순 같은 때는 동네 잔치에다 건강을 챙기는데 심혈을
기울리셨습니다. 외조부님의 효심은 문중이나 동네에 소문이 나있어서 타계하신 후 제사를 모시지 않아도 어느 누구
하나 가십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합니다.
이런 일화는 성경에서 말하는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선친에게 최선을 다하신것
입니다. 신형환님 부부가 어머님 생전에 효도를 잘 하시는것에 내 외조부님의 아버님에게 효도하신 생각이
나서 몇줄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매장문화는 바뀌어한다고 주장합니다. 좁은 국토에 묘지가 차자하는 비율이 장난이 아닙니다.
언잰가는 전 국토의 묘지화가 될 날도 ...... 화장해서 납골당도 반대입니다. 오히려 매장보담 더 흉물인데다가 반 영구적 구조물이 종래는 자연울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화장까지는 좋지만 수목장이나 머 그런것이 좋을듯 ......유골도 빨리 자연으로 돌아 가야죠 자연에서 왔으니 말입니다. 독일은 한 구덩이에 여러 사람이 매장할수 있답니다 순서대로 그 위에다가 매장하죠. 사후 30년정도 지나면 파묘되고 그런가 봅니다. 시내 복판에 공동묘지가 있어 백년이 지나도 커지거나 머 그런것이 아니고 보면 일정한 룰이.. 국토이용의 효
미국은 교회옆에 또는 동네 가운데 묘지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면적을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은 오랜 묘지문화가 납골당으로 바뀐것도 조금 진전된 모습이라 봐야지요. 나역시 어머니 묘지에 관해
오랜 관습을 뛰어 넘지 못했습니다. 나는 넓은 땅, 미국땅에 묻혀야 할것 같습니다. 내가 시민권을 가졌으나
내가 영원한 한국인이듯 비록 미국 땅에서 잠들지라도 한국인으로 잠자고 있어야 할 사람 입니다.
율성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은것 같습니다. 죽고 나면 산자는 괜히 체면치레가 많은 민족이지요
있는자는 나 요렇케 부모님만테 죽어서도 잘한다 머 요런 과시용일수도 있고 ..대부분 그런 사람은 살아서 부모한테 잘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답니다. 죽어 호화 묘지보담 살아서 영감 이야기처럼 잘 효도하는 일이 중요하ㅏ고 강력히 주장하는 봐입니다 ... 허기야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괜스리 염치가 없네 ㅎ
장례문화나 혼례문화 모두 바뀌어야지만 달리는 열차에서 바뀌를 갈아끼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개혁입니다.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이 산업사회의 발달과 함께 지나치게 팽창되었지요.
일이 없을 때는 가족끼리 조용히 한다고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형환동문 어머니상을 당하여 아무런 조치도 못해서 미안합니다.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