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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한가위(추석) 명절(2015-09-27) |
하늘은 모든 이를 위하여 비를 내려 주고, 땅은 모든 이를 위하여 열매를 맺어 줍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은혜로이 베풀어 주신 선물임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뜻깊은 오늘, 받은 것을 다시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잊지 맙시다. |
[금주의 말씀(요약)] : [제1독서 : 요엘 2,22–24. 26ㄱㄴㄷ / 제2독서 : 묵시 14,13–16 / 복음 : 루카 12,15–21]
[제1독서 : 독서 : 요엘 2,22-24.26ㄱㄴㄷ] :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리라.> 주님의 응답은 축복이다. 그분께서 함께하시기에 땅은 열매를 맺는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낸다. 그러니 기뻐해야 한다.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주님을 찬미해야 한다. 그분께서는 타작마당을 곡식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묵시 14,13-16]: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리라.> 세상 종말도 수확과 같다. 곡식을 거두어들이듯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실 것이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문을 열고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 루카 12,15-21] :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이다. 파멸로 이끄는 욕망이다. 제어하지 않으면 평생 ‘재물 모으기’에 급급한 인생이 되고 만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신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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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한가위(추석) 명절(2015-09-27) | 기도문 |
시작기도 :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이시여, 저는 사제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향에 따라 당신의 영광과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전히 바쳐지기를 바라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영원하신 엄위를 흠숭하고 당신의 무한히 선하심에 감사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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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한가위(추석) 명절(2015-09-27) | 복음 묵상 |
설날이 한 해를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날이라면, 한가위는 그 동안 땀 흘린 보람을 마음껏 맛보는 날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추수가 끝나면 햇곡식과 햇과일로 음식을 마련하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조상께 차례를 올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에 그 전통의 정신을 살리고 더욱 넓혀, 조상들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
↑ [축일묵상-1] : 하느님의 은총 |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흔히 가을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참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계절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네 계절은 우리에게 단조로움을 떠나 풍요함을 선사합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감성과 생각을 갖도록 해 줍니다.
한가위에 맞게 오늘 독서 말씀은 모두 풍성함과 수확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엘서는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비는 하느님의 은총과도 같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는 땅으로부터 소출을 내는데 절대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과학의 발전으로 예전보다 쉽게 물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쓸 수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비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총으로 땅은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것이 요엘서의 예언입니다.
한편, 요한 묵시록은 조금 다른 의미의 수확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연적인 수확이 아닌,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라는 천사의 외침은 이제 세상에 종말의 때가 왔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자주 종말과 심판을 나타내기 위해 곡식의 수확이라는 표상을 사용합니다. 마치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이것들을 모아 들여, 좋고 나쁜 것을 가리는 것처럼 종말의 때에 하느님의 심판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는 말씀은 한편으로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잊을 수 있지만, 그 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그리고 그들을 박해하는 이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심판의 말씀은 오히려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을 통해, 풍성한 소출을 보여지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고 종말 때에 이루어질 심판 역시 무서운 표상들과 함께 소개되지만 결국 하느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음은 부유한 어떤 사람에 대한 비유를 전합니다. 소출이 많아 그것을 모두 곳간에 모아둘 수 없는 어떤 부유한 사람. 그는 궁리 끝에 곳간을 새로 짓고자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목숨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는 곳간을 가진 부유한 사람은 자신 만을 위한 더 큰 곳간을 마련하는 해결책을 생각해 냅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부와 가난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나 가난 자체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나누지 못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역시 부유한 사람의 해결책에는 이웃이나 나눔은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탐욕’의 예로 이야기하십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한가위는 가장 풍성한 계절의 명절입니다.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억하고, 고향을 찾고 또 가족들과 함께 모여 정을 나누는 것은 명절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풍성함을 함께 나누고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눈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면, 우리 이웃들의 어려움 역시 함께 생각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말씀자료 : 허 규 신부(가톨릭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축일묵상-2] : 위로와 사랑의 축제를 |
지난 8월 14일 우리 본당에서는 광복 70주년 기념 음악회, 그리고 70세 생신을 맞는 ‘해방둥이’ 어르신들을 위한 칠순잔치를 열며 축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70여 명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에 500명이 넘는 손님이 모여들었습니다.
300여 명이 오실 것으로 예상했기에 손님맞이에 약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봉사를 해주신 덕분에 멋진 축제가 됐습니다. 손님들은 어르신들의 정성 어린 손님맞이에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축제는 준비된 음식과 잘 차려진 내용물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성과 감사’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이 바로 축제의 본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가위라는 명절이 아마도 이런 환희와 감동의 시간이 아닐까요. 페루에서 생활할 때 가장 그리웠던 한국의 문화가 바로 ‘한가위의 마음’이었습니다. 빈부 차이와 세대를 초월해 ‘대화와 만남’이라는 소중한 매개체를 통해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한가위의 마음입니다. 지금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감사함’을 잊지 않도록 하고 공동체 구성원임을 기억하게 하는 한가위의 마음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소중한 축제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한가위 연휴를 맞아 공항으로 몰리는 인파,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서 타인들 앞에 나서길 꺼리는 젊은이들, 만날 가족도 고향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가위 때 한자리에 모여도 대화하기보다는 TV와 먹거리에만 집중하기도 합니다.
지난달 본당 어르신들과 함께 영화 「암살」과 「베테랑」을 관람했습니다. 다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라 그런지 시대 배경이 일제강점기인 「암살」을 보며 자신들의 부모님들이 걸어온 힘겨운 삶의 여정을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분도 계셨습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님이나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투사, 독립군 양성학교를 알게 됐고 비록 영화에서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이지만 독립군 최고 저격수 ‘안옥윤’과 같이 독립을 위해 애쓴 모든 분들께 감사드렸습니다.
영화 속 ‘염석진’이라는 첩자는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알았으면 변절했겠느냐?”라고 외칩니다. 그의 외침을 들으며 진정 어리석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변절자의 마지막 외침은 오늘 복음에서 어리석은 자가 외치는 모습(루카 12,18-19)으로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인간의 생명을 결정하는지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하는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자’라고 선포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만 집착하고 판단해 이뤄지는 행동과 결과물들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삶이라 말씀하십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동굴에서 탈출해 허상인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실이자 실상인 영원한 가치를 향하는 삶이 바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진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살아가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또 다른 영화 「베테랑」을 보면서 어르신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록 영화 속 내용이지만 재벌과 공권력의 결탁,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과 평범한 우리와의 차이, 이중국적 등을 이용해 국민으로서 의무를 저버린 이들, 마약과 약물로 인간다움을 포기하게 하는 사회 모습을 보면서 한 어르신은 “신부님, 이러니 젊은이들이 자살하는군요!”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며 분노와 아쉬움이 교차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연민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국 증시 폭락, 가계ㆍ정부의 부채 증가, 수출 감소 등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리 밝지 못합니다. 어리석음에서 탈출해 하느님 안에서 위로와 사랑이 함께하는 추석 축제를 즐겼으면 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시편 32,11)...........◆
[말씀자료 : 박재식 신부(평화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축일묵상-3] : 천국통장, 잔고를 확인합시다 |
한가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라며 하느님께 감사드렸던 선조의 지혜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가을의 풍요를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 아니라 하늘의 선물인 줄을 깨달았던 우리 선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기다리시는 일이 오직 그분을 향한 흠숭이며 감사의 찬미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더더욱 경탄하게 됩니다. 이 땅의 조상들께서는 후손들이 세상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슬픔과 아픔 중에서도 그분을 향한 감사를 잃지 않도록 한가위 명절을 물려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제사장입니다. 매일 매일 하느님 사랑을 찬미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세상의 주역입니다. 당신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부활의 길을 열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인류의 대표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감사 드리는 걸 어려워합니다. 항상 찬미 드리는 일을 거북해합니다. 내가 좋을 때에만 그분을 찬미할 수 있고, 내가 신나는 일이 생겨야 ‘감사’ 드리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전하지 못하고 세상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꼬질꼬질한 삶을 살아갑니다. 항상 기뻐하고 언제나 희망하며 늘 행복해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세상에 복을 베풀려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이 좋은 날, 주님께서 굳이굳이 ‘돈’과 ‘재물’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신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틀림없이 온통 돈에 의해서 좌지우지하며 지내는 우리들을 위한 배려일 것입니다. 경제만을 최우선에 둔 미련한 세상에서 어서 ‘깨어’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라 짚어집니다. 재물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뒤를 좇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재물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처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부자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돈 한 번 실컷 써보기’를 소원하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일깨움이라 느낍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위해 재화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기를 강권하시고 세상의 재물을 “이렇게 해야지”라고 계획을 세우는 일마저도 부질없다는 사실을 소상히 설명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살피게 됩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진 것, 있는 것, 그 모든 것들을 땅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미리미리 저축해 놓으라고 가르치는 심정이 아리게 다가옵니다.
문득 우리에게는 모두 그분께로부터 통장을 하나씩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한계가 있는 세상에서 마침내 사라지고 말 것들을 영원히 저장해 둘 창고를 소개하신 것이라 짚어집니다. 그 통장에는 우리의 매일이 입금되고 출금될 것입니다. 천국 전산실에는 우리네 선행과 희생과 봉사의 그래프가 뚜렷이 기록되고 있을 터입니다. 우리 삶의 매일이 사랑과 기쁨과 감사의 그래프에 정점을 찍으면 정말 좋겠다 싶습니다. 그렇게 매일 성실히 살아감으로써 그분께 웃음을 선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전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오만입니다. 인간의 오만은 믿음의 길에 놓인 가장 끔찍한 덫입니다. 삶의 수단에 불과한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을 때, 타락할 것이 뻔합니다. 인간의 지위를 스스로 강등시키는 파멸의 행위인 까닭입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9-10)라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6,17) 둘 것을 권합니다.
천국통장의 세부항목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매일 꼼꼼하게 계산하여 잔고가 마이너스 되지 않도록 삶을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창고를 키우고 기도의 우물이 마르지 않을 때, ‘천국 부자’로 기록될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 그리스도인 모두가 그분 나라 상속자의 품위와 품격을 지니고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삶으로 도약하기를 축복해 드립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기만” 원하는, 참 행복한 추석이기를 기도 드립니다.
행복한 한가위 되십시오...........◆
[말씀자료 : 장재봉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축일묵상-4] : 하느님이 보이고, 돌아가신 집안의 어른들이 보이며, 형제자매들이 소중히 생각되는 날 |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이 계절에 우리 조상들은 수확한 곡식과 과일로 차례 상을 차려 놓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베푸심이 있었기에 후손인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수확한 풍요로움을 은혜로운 것으로 자리매김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문화 전통 안에 태어났습니다.
그런 우리의 문화권이기에 오늘의 명절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많습니다. 도시의 인구가 그 어려운 귀성길에 오르는 것도, 돌아가신 어른들을 가족과 함께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로 말미암아 맺어진 가족과 친척의 인연들입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과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가위에는 형제자매 친인척들이 함께 모여, 우리 곁을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고, 계절의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신앙인은 집안의 어른들을 주신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그분들과 우리를 맺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떠나가신 어른들은 이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우리 생명의 뿌리이며 또 우리가 그분 안으로 귀의(歸依)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도 장차 그분 안으로 돌아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는 큰 창고를 지어서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날 밤 그를 불러 가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이러하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곡식과 재산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보람일 수는 없습니다. 이 복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기 한 사람만을 보며 삽니다. 자기 한 사람의 안락한 생존이 자기 생명의 최대 보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는 베풀어진 은혜로운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베푸신 수확이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이웃과의 모든 인연들도 그에게는 소중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주인공에게는 은혜로운 것이 없습니다. 자기 한 사람과 자기가 가진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위 무원고립(無援孤立)의 경지를 택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보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유아독존(唯我獨尊)을 구가(謳歌)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니 많은 순간에 우리는 그렇게 살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자신을 눈멀게 한 순간들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단편적입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행동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던 이 계절에 우리도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우리 주변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주어진 우리의 생명이고 또한 우리 주변의 생명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서 보던 시선을 잠시 멈추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연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고 가신 분들도 하느님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옛날 모세는 이 사실을 이렇게 포현하였습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탈출 3,15). 돌아가신 어른들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이제 기도로 표현됩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은혜로우신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먹고 마셔서 기쁘기만 한 한가위는 아닙니다. 하느님이 보이고, 돌아가신 집안의 어른들이 보이며,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소중히 생각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한 명절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 안에 살아계신 어른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베푸신 인연들이 있습니다. 이 계절이 주는 풍요를 은혜롭게 보는 그만큼,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시야는 넓어질 것입니다.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신 집안의 어른들과 더불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은 오늘도 축복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깁시다 ..........◆
[말씀자료 : 서공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축일묵상-5]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날마다 경계해야 할 탐욕이 무엇인지 제 마음에 가르쳐 주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은 바로 앞 문장인 루카 12,13-14와 연결됩니다. 형이 유산을 나누어 주도록 중재해 달라는 어떤 사람의 부탁은 15-21절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15-21절의 핵심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라는 말이 담긴 15절입니다.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16-21절)를 예로 드십니다.
‘탐욕’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좋은 것을 거머쥐는 것입니다. ‘탐욕’ 앞에 ‘모든’이라는 말이 붙은 것을 보면(15절)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탐욕의 깊이와 종류도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서 탐욕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나쁜 생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마르 7,22) 하느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알아모시려 하지 않는 사람도 분별력을 잃어서 쉽게 탐욕에 빠집니다.(로마 1,29) 하느님 대신 자신을 섬기는 무지와 완고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방탕한 생활은 온갖 더러운 일도 탐욕스럽게 하게 합니다.(에페 4,19) 그러나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탐욕을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에페 5,3)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현세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인 탐욕을 죽여야 합니다. 탐욕에 대한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해보면 그리스도인한테 ‘탐욕’은 일종의 우상숭배(콜로 3,5)며 하느님 대신 자신을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의 전형적인 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비유에서 ‘탐욕’을 지닌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어느 부자를 통해서 보여줍니다.(집회 11,18-19; 루카 12,16-21 참조) 이 부유한 사람의 특징은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 아니라, ‘나’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 나! 나! 나를 우상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가 생각하는 것, 일을 처리하는 방식, 말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가운데 두고 움직입니다. 먼저 이 부유한 사람은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자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기보다는 “내가 수확한 것”(루카 12,17)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낮에 빛을 비추시고, 적절한 때에 비를 흠뻑 내리시고, 곡식이 무르익었을 때 수확할 일꾼을 보내주시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내가) 이렇게 해야지.”(18절) 옹기장이가 온갖 그릇을 빚어도 그것이 어디에 사용될지는 도공이 결정하는데(지혜 15,7) 그는 하느님께 어디에 사용해야 할 지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내 것’이 남에게 흘러들어가 남이 성공하고 잘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어서 자기 울타리를 높이 쌓고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나에 대한 우상숭배’는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루카 12,19)라는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대화를 단절하고 자기 영혼하고만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수확된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좋고 유익한 것에 사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쾌락과 방탕한 생활을 위해 낭비하려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이사 29,13)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계획하고 혼자 말하는 이 부자를 가만히 지켜본 하느님은 마지막에 가서야 한 말씀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소유하는 것의 ‘헛됨’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진정으로 유일한 현실은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잠언 27,1; 야고 4,13-14 참조) 하느님은 이 부자를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라고 부릅니다.
재산을 토대로 두 개의 대조되는 삶의 양식과 미래의 운명이 소개됩니다. 없어지는 재산을 우상숭배하는 사람은 ‘헛되고 헛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며 요새, 바위, 피신처, 힘, 단단한 성채이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한테는 언제나 미래가 존재합니다.
묵상 (Meditatio)
주님, 부자만이 탐욕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욕은 하느님 대신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나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말과 생각과 행위를 무의식중에 ‘나’가 지배하고 있다면 저도 당신 앞에 있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탐욕은 하느님이 부재한 삶입니다.
기도 (Oratio)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시편 25,4)...........◆
[말씀자료 : 임숙희(영성신학 박사)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특집자료] : 사랑·나눔 넘치는 한가위를 / 한가위 차례 지내는 빙법 |
설과 함께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가 됐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우리 선조들의 말씀은 한해의 추수로 풍성한 수확과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넉넉하게 지니는 우리 민족의 지혜와 마음가짐을 일러준다.
1. 감사와 사랑의 나눔으로 - 가족 친지 그리고 이웃과 함께
한가위, 곧 추석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감사와 사랑 나눔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한 해의 수확을 거둘 수 있음은 단지 자기의 노력에 따른 것일 뿐만 아니라,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햇빛과 비를 내려준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 그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게 땀 흘려 얻은 풍성한 수확을 이웃과 함께 기뻐하며,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수확한 결실을 나누는 것이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결실의 계절이니만큼 이웃과 나누는 정, 또한 풍성했다.
그래서 한가위는 개인적인 노력, 그리고 개인적인 수확으로 자기 잇속을 차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에 고마워하며, 그 수확을 공동체가 함께 즐기고 누리는 기쁨과 감사의 때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명절이요 축제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함께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한가위가 될 수 있도록 이웃을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없는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명절은 오히려 더 큰 소외감과 좌절감을 주는 때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고 복지시설에서 명절을 지내는 아이들, 살기가 힘들고 사랑을 잃어버려 양로원에서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는 어르신들,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명절 지내기가 녹록하지 않은 실업자 가장들에게 명절은 삶의 무게를 더해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눈을 돌리고 우리가 받은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마음을 쓴다면,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것은 우리 노력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은총과 기쁨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며, 우리는 이에 감사하고,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마음은 그 수확을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을 잃었을 때 참된 감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번쯤이라도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한가위를 맞는 우리 민족에게 하는 하느님의 당부이다.
2. 한가위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 온 가족이 위령미사 참례를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 온 가족이 모여 한해의 수확을 감사하고 조상들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집안 식구 모두 가톨릭 신자이면 한가위에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조상 고유의 풍습인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가톨릭신문 창간 70주년 신앙생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가톨릭신자들 가운데 전통적인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54.8%로 절반을 넘는다. 가톨릭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조상에 대한 효성과 존경을 표현
하는 민족적 풍습으로 제사의식을 올바르게 지내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제시하는 가톨릭 제사 예식 시안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중 토착화 차원에서 연구 발표한 가톨릭 상제례 예식 시안은 유교적 상제례 풍속을 수용하면서도 미사 형식과 접목을 시도했다. 상제례 토착화 연구 특별위원회가 마련한 이 시안은 아직 주교회의 인준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신자들의 경우 이를 따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가정이 이 예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며 특별히 죽은 이의 영을 부르며 죽은 이의 옷을 지붕에 매다는 행위, 제상을 차린 후 문을 닫고 밖에 나가 있는 행위 등은 미신으로서 금지된다. 무엇보다 명절을 뜻깊게 보내는 것은 가족 모두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다. 교회는 설과 추석을 이동 축일로 제정, 명절 미사로 거행할 수 있도록 했으며 명절이 아니더라도 조상들을 기억하며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3. 한가위의 신앙적 의미와 미사전례 - 풍성함을 나누는 사랑과 감사의 축제
한가위, 오늘만 같아라!!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금년에도 오곡백과 풍성하게 주시니 감사드리오며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조상님들이시여, 이 후손의 정성을 가상히 보시어 저희를 언제나 축복해 주소서"
올해도 어김없이 한가위 고향가는 길이 만원이다. 보통때 같으면 짜증나는 길이 분명하건만 이때만큼은 엄청 막히는 길도 즐겁다. 왜 우리는 이러한 귀성전쟁을 치르는 것일까. 그리고 한가위가 신앙인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가위는 우선 풍성함을 나누는 사랑의 축제이다. 풍요로운 결실의 시기가 다가오면 우리 조상들은 반드시 조상과 자연의 은혜를 생각했다. 추석보다 한달전인 백중날이 백가지 햇과일을 조상께 올린 날이어서 백종이라고 불렀다는 것에서 알수 있듯 우리의 풍습은 새것과 햇것은 반드시 조상에게 먼저 올렸고 이를 천신(薦新)이라고 했다.
추석 한가위 때에도 햇곡식으로 송편과 술, 차례음식을 만들어 결코 먼저 먹지않고 사당에 먼저 천신한 다음 이웃과 돌려 먹었다. 따라서 우리가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것은 감사와 보은의 마음을 갖기 위한 것이다.
즉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은 모두가 부모와 조상의 은덕이고 올 농사를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자연의 은혜이기에 이에 감사하고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추석에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자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라는 선조들의 오랜 가르침일 것이다.
이러한 추석은 신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한가위 추석명절을 거룩하게 지내면서 조상들 뿐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해왔다.
그래서 한가위 명절미사 전례는 죽은 조상을 위한 청원을 중심으로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조상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간구하고(감사송), 풍요로운 결실을 주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희생에 대한 감사(입당송), 민족의 축제를 맞아 평화와 번영을 비는 내용(본기도)으로 되어있다.
독서 말씀 또한 오늘의 결실을 베풀어 주신 축복에 대한 감사가 주 내용을 이룬다. 1독서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풍요로움을, 2독서는 이러한 풍요로움을 주신 하느님께 순종하며 섬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복음말씀은 그러므로 풍요로움에 현혹되지말고 이 풍요로움를 이루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라는 내용이다.
결국 한가위 명절 미사 전례의 핵심은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를 통해 더욱 하느님께 충실할 것을 일깨우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풍요로움을 사랑으로 함께 나눌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추석 명절이 돌아오면 경건한 마음으로 차례와 성묘로 하늘과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린 다음에는 신명나는 놀이판으로 풍년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 놀이 또한 부의 분배와 베품의 미덕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부자는 재물을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접을 받는 대신 마음에서 나오는 축원을 해주는 대동세상을 구현했다.
이렇게 신앙적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전통 명절이 이제는 더이상 막힌 고속도로나 붐비는 기차역으로 상징되지말고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고향가는 길의 소재가 되길 기대해본다.
가톨릭 상제례 예식시안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는 시기적으로 1년중 가장 좋은 때를 삼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유 세시 풍속 중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적으로 감사제 성격을 가장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추석차례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 집안 식구 모두 신자이면 한가위에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조상 고유의 풍습인 제사를 지내는 가정도 많다.
가톨릭 상제례 예식시안에 따르면 조상 제사 예식에 앞서 고해성사로 영신적 준비를 하라고 권하고 있다. 금욕과 절제, 이웃에 대한 자선, 집 정돈 등으로 명절을 준비하고 제사상은 각 가정의 관습에 따르되 형식보다는 정성을 우선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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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가위 차례 지내기] :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하는 조상제사 예식시안
한가위(추석)은 설날과 함께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이날 온 가족이 모여 한해의 수확을 감사드리고 세상을 떠난 조상들께 차례를 지내며 선조들의 공을 기억한다. 가톨릭 교회는 조상제사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을 공경하는 아름다운 전통」으로 보고, 그 나라의 미풍양속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조상제사를 허용하고 있다.
가톨릭 식으로 차례를 지내는 이들을 돕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고유한 우리의 전통도 살릴 수 있는 주교회의의 「조상제사(차례)」 예식 시안을 소개한다.
■ 몸과 마음의 준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며칠 전부터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가능하면 온 가족이 어려운 이웃을 찾아 자선을 행한다. 이 때에는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도록 하고, 고기를 먹더라도 탐하지 않는다. 불목(不睦)하고 있는 이웃이 있는지 살펴 기꺼이 화해하기로 다짐하며 고해성사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한다.
제사 하루 전에는 집 안팎을 정돈하고 제삿상과 제기(祭器), 향로, 촛대 등을 깨끗이 닦아 놓는다. 제사 참석자들은 목욕을 하고 당일에는 단정한 복장을 한다.
■ 예식 순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지난 2002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결정한 한국 고유의 상장례 예식서 「상장예식」을 통해 전통적 조상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신자들이 기제사(忌祭祀)와 설, 한가위, 한식 등 모든 제사와 차례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조상제사 시안들을 내놓았다. 이 시안들은 유교적 제례 풍속과 가톨릭 전례의 접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이외에도 한국교회에는 김수창 신부의 「차례예식」, 최기복 신부의 「가톨릭 조상제사의식」, 대구대교구의 「위령제와 위령기도」 등이 나와 있는 상태다.
모든 신자 가정이 이러한 예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과 가문의 전통에 따라 나름대로의 예식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가톨릭의 전례에서는 축과 합문(제상을 차린 후 문을 닫고 밖에 나가 있는 행위), 고복(죽은 이의 혼을 부르며 지붕에 죽은 이의 옷을 매달아 두는 행위), 사자밥(죽은 이의 혼을 고이 모시고 저승으로 가라는 뜻으로 밥과 신발을 상에 차려 놓는 행위) 등은 미신으로서 금지된다. 또 위패는 「신위(神位)」라는 글자 없이 다만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경우 허용이 된다.
여기서는 「상장예식」 시안으로 마련된 「조상제사(차례)」 예식을 소개한다.
1. 제사 준비가 되어 영정(위패)을 모시면 제주(祭主)는 제사의 시작을 알리고 십자 성호를 긋는다. 2. 참석한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두 번 절한다. 3. 제주는 영정(위패) 앞에 나아가 무릎 꿇어 분향하고, 잔을 받아 미리 준비한 그릇(모사기: 茅沙器) 위에 삼제(三祭:술을 세 번 조금씩 따르는 것)한 다음 돕는 이에게 주면 돕는 이는 잔을 올리고 밥그릇 뚜껑을 열어놓는다. 이어 제주는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참석한 모든 이가 차례로 나아가서 잔을 올린다. 그러나 제주 이외에 다른 사람은 삼제를 하지 않는다. 4. 이 같은 절차가 끝나면 제주가 조상께 고한다. 『주님의 보살핌으로 오늘 다시 ( )께 제사 올리게 되었나이다. 이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드리는 저희의 정성과 사모하는 마음을 받아주소서. 저희는 언제나 ( )를 기억하여 이 제사를 드리오니 ( )께서는 저희가 주님의 뜻을 따라 화목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5. 제주는 성서 가운데 고린토1서 2장 9절 또는 로마서 14장 7절부터 9절까지를 봉독하거나, 다른 알맞은 말로 참석자들이 조상을 기억할 것을 권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전해줍니다.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Ⅰ고린 2, 9).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로마서 14, 7~9). 이 말씀으로 우리 ( )께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며 주님 안에서 우리와 하나 되시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 한 가족입니다. 6. 이어서 돕는 이가 나아가 숟가락을 메(밥그릇)에 세운다. 7. 제주와 모든 참석자는 두 번 절(再拜)한다. 절한 다음 조상을 생각하며 잠시 묵상한다. 8. 이어서 제주는 국그릇을 거두고 냉수나 숭늉을 올린다. 9. 제주는 모든 참석자와 함께 작별 배례로 두 번 절한다. 10. 제사를 마치면서 조상과 가족, 친척들과의 통교를 더욱 깊게 할 것을 결심하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성가를 부른다. 11. 영정(위패)을 따로 모신 다음, 참석자들은 술과 음식을 나눈다. 이 식사는 사랑과 일치의 식사이며 조상과 가족간 통교를 더욱 깊게 하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축제의 기쁨은 이웃, 특히 소외된 형제들에게도 확장되어야 한다.
■ 차례상 차림
풍습·관습에 따라 간소하게 향상 중앙에 십자가 모셔야
제상은 주자가례에 의한 예법 등 여러 가지 전통적인 상차림이 있으나, 가문의 풍습이나 관습에 따라 차리면 된다. 그러나 향상(香床)에는 향로와 향합, 촛대 외에 중앙에 십자가를 모신다. 차례 음식은 간소하면서도 정성껏 차리되, 평소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돌아가신 이가 즐기던 음식을 차려도 무방하다(그림 참조).
1. 화려하지 않은 병풍을 치고 상을 편 후, 영정(위패)을 놓는다. 제상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은 동(東), 왼쪽은 서(西)로 친다. 2. 영정 사진 앞 1열은 숟가락을 담아 놓는 대접과 잔, 받침대를 놓는다. 3. 2열에는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하여 어적(생선 구운 것)은 동쪽(오른쪽), 육적(고기 구운 것)은 서쪽(왼쪽), 소적(두부 구운 것)은 중앙에 둔다. 4. 3열에는 육탕, 소탕, 어탕 3가지 류의 탕을 놓는다. 마찬가지로 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에 둔다. 5. 4열에는 「좌포우혜(左脯右醯)」라 하여 포(명태 문어 오징어)는 왼쪽에, 식혜(김치 동치미)는 오른쪽에 놓는다. 6. 5열에는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여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색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7. 이밖에 「조율시이(棗栗枾梨)」라 하며 서쪽에서부터 대추(조) 밤(율) 감(시) 배(이)의 순으로 두며, 「생동숙서(生東熟西)」라 하여 김치 등 날 것은 동쪽, 나물처럼 익힌 것은 서쪽에 놓는다. 또 「두동미서(頭東尾西)」라 하여 생선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건좌습우(乾左濕右)」라 하여 마른 것은 왼쪽, 젖은 것은 오른쪽에 둔다. 「접동잔서(摺東盞西)」를 따라 접시는 동쪽, 잔은 서쪽에 배치한다.................◆
[말씀자료 : 가톨릭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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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성모 승천 대축일___교의 기원과 형성 과정 |
4~5세기경부터 성모 승천에 관해 꾸준히 언급/ 1950년 교황 비오 12세 ‘성모 승천’ 교의 선포/ 축일 날짜는 마리아 성지 봉헌 기념일에서 유래
8월 15일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하늘로 들어 올려진 것'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한국교회에서 의무 축일로 규정하고 있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기념하는 여러 축일 중 가장 으뜸이라 할 만큼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그에 대한 교의의 기원과 형성 과정들을 정리해 본다.
'성모 승천' 교의 어떻게 탄생했나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도 불렀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 승천(Ascension)과 달리 하느님에 의해 '올림을 받음'(Assumption)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부름을 받았다'는 성모 승천 교의가 선포된 것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발표하면서 였다. 비교적 근자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성모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서와 초대교회 문헌에도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지 않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모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무덤의 소재나 유해에 대한 기록도 뚜렷하지 않다. 사망 시기도 '예수 승천이후 3일 후' 혹은 '50일' 등 추측이 다양했다. 그런 만큼 비오 12세의 회칙이 선포되기 전까지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모 승천에 관한 언급은 4~5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성모 승천에 대해 밝힌 인물은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오(315~403)로 알려진다. 그는 성모 승천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하느님 흠숭과 성모 공경을 구별하면서 지나친 성모 신심을 경고했다고 한다. 당시는 성모 공경과 신심이 매우 활발했던 상황으로 '성모의 죽음' '성모의 장례식' 등 제목의 문헌들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다. 이 기록들에는 마리아의 예루살렘에서의 사망, 승천 내지 죽은지 3일 후 부활했다는 이야기들이 수록됐다. 이외 4~5세기경 쓰여진 예루살렘의 디모테오 설교 사본에서도 성모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이 승천했다는 신앙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서방교회에 성모 승천 교의가 공식화 된 것은 투르의 그레고리오(538~594)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멜리토의 저작 사본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다. 동방교회에서는 크레타의 안드레아(660~740) 등이 쓴 논술 '하느님의 명칭들'에서 성모 승천을 증언하는 몇몇 구절들이 발견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제르마노(634~~733)의 작품들과 7세기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도 당시 신자들이 성모 승천 교리를 받아들였음이 증언되고 있다.
요한 다마세노(655~750)의 강론 역시 성모 승천 교리에 대한 교회 초기의 전승을 엿볼 수 있다. 즉 마르치아누스 황제(396~457)와 풀케리아 황후가 예루살렘의 세례자 유베날리스에게 성모의 시신을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성모가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콘스탄티노플 근처 발케르네에 경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관련하여 신학적 근거가 세워진 것은 8~9세기경 아우구스티노의 서한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대 알베르토(1296~1280),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보나벤투라(1217~1274), 교황 베네딕토 14세(1740~1758)에 의해 성모 승천 교의가 재확인 됐고 이러한 작업들을 바탕으로 1870년경부터 성모 승천 교의가 공식화 돼야 한다는 요청들이 제기됐다.
1854년 12월 8일 발표된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부터 확정된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는 성모 승천 교의를 선포하는데 보다 큰 밑 배경이 됐다.
비오 9세의 교서 후 로마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육체적인 승천도 교의로 규정돼야 하고 공포돼야 한다는 요청들이 쇄도했고 제1차 바티칸공의회로부터 1941년까지 수많은 이들이 그같은 교의 선포를 건의했다.
113명의 추기경, 300명 이상의 대주교와 주교들, 3만2천 명 이상의 사제와 남자 수도자들, 5만 명 이상의 여성 수도자와 800만 명 이상의 평신도들이 건의자에 포함됐다.
마침내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가톨릭 세계 모든 주교들에게 설문지를 보냈다. "존경하올 형제 여러분, 귀하께서는 성모님의 육적 승천을 우리의 신앙 교의로 규정하고 선포해도 좋은지 지혜와 슬기를 다하여 잘 판단하시기 바라고, 여러분이 거느린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를 원하는지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설문지의 답변 결과는 '거의 만장일치'로 발표됐고 마침내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 승천 교의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 성모 승천에 관한 교의가 교황이 주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자들 건의와 청원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눈여겨 볼만 하다.
그러나 한편 교회사학자 이냐시오 될링거와 교부학자 요한 에른스트 등은 교황의 무류지권과 관련, 성모 승천 교리의 선포를 반대했던 인물들로 알려진다.
이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모 승천과 관련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으셨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셨다"(교회 59항)고 천명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왜 8월 15일인가
이 대축일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4세기경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축일이 기념된 곳은 5세기 초 예루살렘에서 였다. 조베날레 주교(422~458) 시대에 예루살렘 근처 카티스마에 세운 마리아 성지의 봉헌 기념일, '하느님의 어머니' 축일이 8월 15일이었던 데서 유래됐다는 것이 설득력 있다. 이날은 후에 성모 무덤 성당에서 기념되다가 6세기경 명칭이 '성모 안식축일'로 바뀌었다. 황제 마우리치우스(582~602)는 제국 전체가 이 축일을 지내도록 선포하기도 했다.
로마에 축일이 받아들여 진 것은 페르시아 침력으로 피란 왔던 동로마 제국내 수도원들 영향으로 추측된다. 교황 세르지오(683~701)는 여타 성모 축일에서처럼 행렬을 하도록 권함으로써 축일이 더욱 성대해지는데 기여했고 교황 레오 4세(847~855) 때는 팔부 축일로 지정됐다.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는 부활 대축일, 성탄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등과 같이 대축일로 기념하도록 했다. 중세 때 특히 남부 유럽 지역에서는 이 축일을 기해 첫 수확물들에 대한 축복이 이뤄졌다고 한다.
서방교회에서는 16세기의 '로마 성무일도'에 성모 승천 팔부 축일을 삽입했다. 1970년 미사 경본 개정에서 성모 승천 축일은 전야 미사가 인정된 유일한 마리아 축일이 됐다.
전문가들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미래를 보여준 것"으로 표현한다. 교회의 모상인 성모가 하늘에 올림 받음을 보면서 "마리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의 업적을 보고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는 "원죄없는 잉태가 구원의 첫 열매인 성모 마리아 신비의 출발점이라면 하늘에 올림을 받은 '승천'은 성모 마리아 신비의 종착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료 : 이주연 기자(가톨릭뉴스)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
첫댓글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이시여,
저는 사제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향에 따라
당신의 영광과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전히 바쳐지기를 바라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영원하신 엄위를 흠숭하고
당신의 무한히 선하심에 감사드리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