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능원- 서삼릉을 찾아서 (1)
- 서삼릉 답사기-
[소현세자가 쓸쓸히 잠들어 있는 서삼릉내 소경원]
강의 모양이 특이하게 음푹 페어 있다.
동구릉(東九陵)이나 서오릉 (西五陵)못지 않게 큰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의 왕릉군 이건만, 농협의 유우개량소와 마사회의 종마목장으로 소와 말이 뛰노는 곳으로 전락하더니 최근에 골프장 영역이 확대되면서 커다란 몸살을 앓고 있는 왕릉군이 바로 서삼릉이기도 하다. 그 서삼릉을 찾고 또 찾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곱씹어야 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듯 싶다.
늦가을이 한창 무르익던 11월 중순의 휴일. 서오릉 답사를 마치고 서삼릉을 답사하기 위해 찾았을 때에도 보기에 흉악한 유우개량소와 종마목장은 어김없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서삼릉 관람이라는 염불보다 종마목장 관람이라는 잿밥(?)에 눈이 먼 사람들이 몰고 온 차량으로 입구는 혼잡스러웠다. 짜증섞인 푸념과 한탄이 절로 나왔다. 언제쯤 이런 목불인견의 모습이 자취를 감출 수 있을런지.. 그저 한숨만이 앞을 가릴 따름이다.
서삼릉(西三陵) 역시 서울, 즉 도성(都城) 서쪽에 세 개의 왕릉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구릉이 그러했고, 서오릉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자리에 최초로 능이 조성된 것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中宗) 계비이자 12대 인종(仁宗)의 모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희릉(禧陵)이 들어서면서 부터다. 본래 장경왕후의 능은 태종(太宗) 헌릉(獻陵) 오른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능 자리에 큰 바위가 있어 능을 잘못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옥사(獄事)가 벌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이 자리로 옮겨 쓰게 되었다.
이후 중종이 승하(昇遐)하자 장경왕후 능 오른쪽 언덕에 중종릉을 조성하면서 동원이강의 왕릉이 형성되었고 (희릉), 12대 인종이 겨우 8개월의 재위 끝에 승하하자 유언에 의해 희릉 옆에 능을 쓰면서(효릉(孝陵)) 중종-인종 2대의 능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후 중종의 능이 옮겨가게 되고 (명종때 문정왕후의 명으로) 한창이 지난 철종(哲宗) 14년(1863)에 임금 철종이 승하하여 능을 조성(예릉,睿陵)하면서 삼릉(三陵)이 생기게 되었고, 이후부터 이쪽의 삼릉을 가리켜 서삼릉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 각지에 자리하고 있던 역대 임금들의 태실과 왕자, 공주, 후궁들의 묘들을 전부 이곳으로 집장함으로서 서삼릉을 왕실의 공동묘지로 만들어 왕실을 폄하하는 만행이 자행되면서 이곳 서삼릉에는 왕실의 많은 주요 인물들이 잠들게 되었던 것이다.
[농협에 속해버린 서삼릉 영역 - 소경원으로 가던 도중에 촬영]
이 지역도 서삼릉의 경내에 속하는 지역이건만, 농협의 영역에 넘어가 버렸다.
소중한 문화 유적이 이렇게 까지 훼손되어야 하는지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른다 .
왕실의 수 많은 주요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는 그 서삼릉 내에서도 특히 아쉬운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바로 12대 인종(仁宗) 임금과 16대 인조(仁祖)의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그들인데, 효릉과 소경원이라는 외진 비공개 지역에 각각 잠들어 있는 것인데, 이 글의 제목을 비운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능원을 찾아서라 붙여본 것도 이들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歷史)는 변하고 또 변한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를 되돌이키거나 반복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역사에 가정(假定)을 붙이는 일을 가리켜 어리석은 일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록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한다지만 인종의 재위가 오래 되었거나 혹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 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소경원의 모습 (사진 위) 과 앙상하게 터만 남아 버린 소경원의 정자각
우리 일행이 처음으로 찾은 것은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소경원.
비공개 지역인 소경원은 서삼릉내에서도 외진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비운의 인물이 잠들어 있는 원소(園所)라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함과 적막함만이 베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소경원을 찾았을 때의 쓸쓸함과 적막한 분위기는 이내 자취를 감추고 고요하고 풍요로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아마도 쓸쓸하게 잠들어 있던 소현세자가 우리를 향해 무언의 반가움을 표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이 자리하고 있는 언덕, 즉 강(岡)은 가운데가 음푹 페어 있었다. 처음 접했을 때에는 단순히 자연재해에 의해 그런 것 인줄로만 알았다. 물어보니 본래 강이 그런 형세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비운의 일생을 살다 간 세자의 비극을 보여주는 형상이어서 그런지 왠지 모르는 서글픔마저 느껴진다.
소현세자는 16대 인조(仁祖)의 세자(世子)였다. 인조는 인렬왕후(仁烈王后) 한씨 사이에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孝宗)으로 즉위하는 봉림대군(鳳林大君), 그리고 인평대군(麟坪大君), 그리고 용성대군(龍城大君)까지 4형제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첫째가 소현세자요, 둘째가 봉림대군이었으며, 인평대군은 셋째, 용성대군은 넷째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인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며 세자에 책봉되어 인조의 다음 대를 계승할 차기 국왕으로 낙점된 그였지만 1636년에 있었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은 그의 일생을 180도 바꾸어 놓게 되었다.
중립외교를 지향하며 왜란 이후 전후복구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광해군(光海君)을 인조와 서인세력은 명나라의 은혜를 배반하여 오랑캐와 손잡았으며, 어머니(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형제를 죽였다는 구실을 내세워 정변을 일으켜 축출하였다. 그렇게 해서 집권했던 이들이었지만 정책의 계승을 통한 안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몰락해 가는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친선과 의리를 강조하다 후금(청)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어 결국 정묘년의 호란에 형제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강화하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 치욕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반감을 계속 내세운 끝에 병자년이던 1636년에 또 한 차례 침입으로 국왕인 인조가 송파 삼전도에서 적국 의 군주 청 태종 앞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의 예 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일을 연출해야 했던 것이다. 이때 강화를 맺으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인질이 되어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세자였지만 그는 여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청나라에 전래되어 왔던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신문물을 접한 이후부터는 조선의 유교적 사고관이 매우 폐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후 귀국하여 즉위하게 되면 조선에 일대 변화를 꾀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 당시 명나라의 몰락하는 과정과 날이 갈수록 국력이 왕성해 져 가는 청나라의 현실을 이해하여 청나라와의 친선을 물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소현세자의 태도 변화에 누구보다 불만스러워 했던 것은 부왕(父王) 인조였다. 볼모로 끌려가던 아들에게 중화(中華)의 이념(理念)을 계승한 문화 선진국(文化 先進國), 조선의 왕세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잃지 않으리라 믿었던 인조였기에 소현세자의 태도 변화에 실망을 넘어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외교 정책 실패로 자초한 전란으로 인하여 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던 자신의 뜻을 거스린 채 현실을 이해하고 청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려 했던 소현세자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10여년이나 되는 볼모생활을 마치고 영구 환국 했을 때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불신과 의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볼모 생활도중 일시 귀국을 했을 때 진정 반가운 마음이 우러나와 맞아들이고 잔치를 베풀면서 자축했으나 볼모생활을 완전히 끝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태도가 180도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조의 불신과 증오속에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불과 얼마되지 않아 34세의 한창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급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인조 재위 27년을 기록한 인조실록의 내용에 학질이 심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으나 같은 기록에 몸 빛이 까맣게 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독살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 정황으로 미루어 볼때 소현세자에 대한 불신과 의심, 증오를 보인 인조에 의해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실제 공식적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사실상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소현세자에 대한 장례를 박하게 하고 부인이던 강씨에게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사사시켰으며 소현세자의 소생인 세 아들마저 제주도에 유배 보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이와 같은 인조의 증오와 저주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난 한 아들의 후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엄연한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조정에 증오와 저주를 퍼부으며 농민 항쟁의 지도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어쩌면 할아버지 인조가 뿌려놓은 비극의 씨앗이 후손에게까지 미쳤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 싶다.
인조의 증오와 저주속에 희생된 소현세자는 죽어서도 편하게 눈을 감지 못했다.
바로 자신을 증오하던 부왕 인조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여타 왕세자의 죽음이었으면 크게 슬퍼하면서 후히 치룰 것을 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인조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장례에 박한 태도를 보였는지는 보통 왕세자, 왕세손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일컬어 재실(梓室)이라고 하는데 비해 그 재실 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반사람의 관(棺)이라는 뜻의 구(柩) 자로 명정을 쓰도록 명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왕세자의 상도 엄연히 국상(國喪)이었지만 그 국상도 짧게 끝내어 일반인이나 하던 장례에 준하여 장사를 치루도록 했다. 장지도 마찬가지. 조정 대신들이 여러차례 의논한 끝에 여주 홍제동 자리에 원을 쓰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을 뒤집고 효릉 뒤편 지금의 자리에 장사를 치르게 하여 이름도 왕세자, 왕세손의 무덤인 원(園) 이라는 호칭 대신에 묘(墓)라 부르도록 했던 것이다 (소현묘). 이러한 인조의 박대 속에 소현세자는 지금의 자리에 묻히게 되었고, 먼 훗날 고종(高宗)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소경원이라 승격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본래의 왕세자, 왕세손의 무덤 명칭이 원이었음을 감안해 본다면 얼마나 그가 쓸쓸하게 잠들어 있었는 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였지만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안식처마저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고 떨어진 채 있어 (부인 세자빈 강씨의 묘는 영회원이라 하여 광명에 자리하고 있음) 둘러보는 우리들의 안타까움을 더해주었다. 그나마도 근처 군부대에 자리하고 있는 두 아들 (경안군, 경선군) 묘가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쓸히 잠들어 있는 소현세자의 소경원에서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서 조선의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진한 아쉬움을 던져 준다. 설사 가정을 붙이는 행위가 역사에 있어 어리 석은 일이라 할지라도 조선왕조 518년의 역사에 있어 아쉬운 장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현세자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
-> 다음 회에서 계속
첫댓글 예전에 서삼릉에 대해 청와대 홈페이지에 건의 했던 때가 기억이 나네요.. 결국, 그 글은 다음날 가보니 삭제 되어 있었습니다만.. 저도 서삼릉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듭니다.
다음회를손꼽아 기다렸거늘 ...다음회는어디로 보내시고...^^ㅎㅎ.....
곧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