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은 님은 국방부장관 도 지낸분
이 해가 가기 전에 잠시 이야기 순서를 벗어나야 하겠다. 올해 해병대의 두 태두를 잃은 슬픔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난 10월 15일 한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 장군을 먼 나라로 떠나보냈고, 5월 15일에는 신장군을 도와 해병대를 창설한 김성은 장군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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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모두 해병대와 나라의 장래를 위해 마지막까지 멸사봉공한 군인정신의 표본이었다. 특히 사재를 털어 뜻있는 일에 쓰게 한 일은 우리를 자랑스럽게도, 부끄럽게도 했다. “미국에서 애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이젠 노후 걱정 없어. 이건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해병대 발전을 위해 써 줬으면 좋겠어.”
해병대·나라 장래 위해 한평생
2004년 4월이었다. 자녀들을 따라 미국에 가서 노후를 보내던 신장군이 귀국해 후배들에게 작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1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국내에 있던 전 재산을 정리한 것이라 했다. 아무리 노후 걱정이 없다지만 왜 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는 영면하는 순간까지 동포사회에서 활동했다. 그런데도 돈이 들 텐데, 탈탈 털어 다 주고 갔다.
손자·손녀들에게 생일선물 하나를 사 주는 데도 돈이 필요한 법인데,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 놀랍기만 하다. 돈이 아쉬운 자식들도 있을 것이다. 그 기금은 나 자신을 포함한 해병대 예비역들에게 큰 감명을 줬다. 해병대를 자식처럼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다.
김성은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문제가 터지자 그는 내 일처럼 발벗고 나섰다.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1,000만명 서명운동을 주장한 사람이 그였다.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그는 앞장서서 뛰었다.
올해 6월까지 500만 명, 올해 말까지 1,000만명 서명 목표를 채우겠다고
만날 사람들과 접촉할 단체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차례차례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그의 죽음을 과로로 쓰러져 와병한 것으로 진단했다. 쓰러질 정도로 열심히 일한 데 소용되는 비용을 그는 사재를 털어 충당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인 줄 알아?” 두 분은 공사석에서 후배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자주했다.
맨주먹으로 창설한 해병대와 함께 평생을 무인으로 살다 간두 분에게서 받은 사랑을 어떻게 수량으로 계량할 수 있겠는가.
5월 18일 약수동 신일교회에서 있었던 김장군의 영결식에서 나는 애도사를 낭독했다. 6·25 당시 화천지구 전투 때 고지 하나를 빼앗고 지키기 위해 밤새도록 피투성이가 돼 백병전을 벌이던 일을 회고하면서 나는 울었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부하들을 보살피고 격려하는 연대장의 솔선수범은 사기의 원천이 됐다.
해병용사들 7 ㎞ 연도 애도 행렬
엄한 명령으로 이끌기만 하는 지휘관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밀어주었던 두 분이 있었기에 해병대 신화는 탄생할 수 있었다. 친동생이나 조카처럼 부하를 아껴주는 가족애가 단결의 힘이었다 . 그래서 두 분 장례식에서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10월 20일 서울에서 신장군의 장례식을 마치고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으로 운구하는 도중에 맞닥뜨린 애도 행렬은 감동이었다.
유성에서부터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이르는 7㎞ 연도에 수많은 해병용사가 옛 군복 차림으로 도열해 거수경례로 장군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누가 나오라고 했던가. 아니 나오라 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올 수 있겠는가.
김장군 장례식 때도 그런 행렬이 있었다. 모든 해병 용사와 함께 두 선배님의 명복을 빈다.
<공정식 前해병대사령관 정리=문창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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