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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57교우회>>
오늘은 삼전도비의 교훈에 대해 애기해드리겠습니다.
송파구 석촌동289-3번지 어린이근린 공원에 있던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홀로 비만 서 있던 것을 옮기면서 현대식 보호각을 짓고 인위적인 훼손을 막기위하여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해 대접을 한 셈이지요.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인 1369년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쟁하다
결국 청나라 군대의 본영이 있던 삼전도로나와 항복한뒤 세운 청 태종 공덕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한번 찾아가봤습니다.
이 비가 최초로 세워졌던 곳은 지금의 송파구 삼전도 나루 근처였겠지만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는 동안 여우곡절을 격어왔다.
청일전쟁 때인 1895년에는 고종이 땅에 묻게했고 일제강점기때 일제가 다시 세웠다,
광복후에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활근거지에치욕의 비가 서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해
다시 묻었는데,1963년 한강의 홍수로 또다시 발견되어 석촌동289-3번지에
세워졌다.
그 후 지난 2007년 3월 붉은 페인트로 비 앞 뒷면에 "철거370 병자"라는
글자를 비의 절반에 차게 써서 훼손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후 범인도 잡히고 보존처리를 통해 원상복구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삼전도 비가 지난 4월 25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371년 만에 제자리에 가까운 곳으로 온셈이다.
참조 아래는 훼손된비의 모습.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비는 높이가 5.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비로
비록 조선을 침략한
청 태종의 공덕비이지만 만주어와 몽골어 그리고 중국어
즉 3개국 문자가 새겨져 있는 유례가 없는 비이다.
정부에서는 제작년대가 확실하고 당시의 비받침과비 머리의 모습등
학술적인 중요성을 인정해1963년 사적 101호로지정해 보호해 왔다.
강압에 의해 비를 만들 때 당시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어 결국
이조판서 李景奭(이경석)이 글을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알려진 吳竣(오준)이
, 그리고 비 이름은 呂爾徵(여이징)이썼다.
이 세사람 가운데 글씨를 쓴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 손을 돌로
짓이겨 못쓰게 만들고
벼슬도 버린 채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경석은 자신이 글을 배운게 한이되어
자기 후손에게는 글을 배우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비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각종 건축규제 등으로
주민들의 재산상의 피해가 생기다 보니
지역사회의 애물단지가 되어 80년대부터 민원의 대상이 되어 왔고
결국 이리로 옮겼다.
본인도 근린공원에 작년에 찾았을때 너무나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어
강력하게 이전을 건의 해왔었습니다,
그러나 삼전도비가 세워졌던 1963년 당시는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처음부터 문화재를 먼저 생각하고 개발했다면
수난의 옮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치욕의 역사든 영광의 역사든 우리는 역사문화유산을 통해
지난날의 잘 못을 교훈을 삼아야 할 이유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나 다음 세대에도 필요한 것이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미흡한 수준임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합니다,,
2010.6.24
김우곤올림
아래사진은 삼전도비가 세워져 있는 석촌호주 전경...
370년전 이 곳 삼전도 나루가 오늘과 같이
이렇게 변할 것을
청태종이나 인조가 꿈이나 꾸었겠습니까?
<<
호수 주위를 한 1시간 산책했습니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데이트 코스로는 최상입니다...
시간 나시면 한번 가보세요...
아래글은 제가 2009년 7월23일에 올린 글인데.. 참조해서 한번 보세요..
<<보성57교우회>>
교우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테마기행 13번째 [남한산성과 인조]에 이어 오늘은 조선의왕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을
눈물로 버티다 못해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세번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역사의 현장을 다녀 왔습니다.
석촌역뒤 어린이 놀이터 옆 삼전도비 안내표지판을 보는 순간,
내가 그당시 인조의 신하인양 내가슴이 답답하고 맥박이 뛰는 걸 느꼈네요.ㅎㅎㅎ
보시다싶이 저 담장 넘어 주택가 속에 갖쳐 있어요,
안쪽에 보이는 것이 삼전도비.
4각으로 된 것이 문화재청에서 만든 조선의 왕 인조가 땅에 머리를 박고 항복하는 모습의 동상
앞면에는 구불구불한 지렁이같은 만주어 ( ) 와 몽골어로 쓰여지고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사적 제101호. 높이 395㎝, 너비 140㎝.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이다.
비문에 새겨져 있는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지금도 비문에는 남아 있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담아 세우고 이것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했다.
注)이수: 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
비석의 머리, 궁전의 섬돌, 돌기둥에 많이 새긴다.
大淸皇帝功德碑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
寬溫仁聖皇帝以壞和自我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우리가 먼저 화약(和約)을 깬 까닭에
始赫然怒以武臨之
처음으로 진노(震怒)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直擣而東莫敢有抗者
곧바로 동쪽으로 공격하여 오니 아무도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時我寡君棲于南漢
이때에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凜凜若履春氷而待白日者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
殆五旬東南諸道兵相繼崩
거의 50일이 지나자 동남쪽 여러 지방의 군사들은 서로 연달아 무너지고,
潰西北帥逗撓峽內不能進一步
서북쪽의 장수들은 골짜기에 머무른 채 한걸음도 나오지 못하니,
城中食且盡當此之
성 안의 양식도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時以大兵薄城
이때를 당하여 많은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기를
如霜風之卷秋籜
마치 서리 바람이 가을 풀을 말듯하고
爐火之燎鴻毛而
화롯불에 깃털을 태우듯이 하였으나,
皇帝以不殺爲武惟
황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무예(武藝)로 삼고
布德是先乃
또 덕을 펼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서 항복하라는 칙령으로 달래어 말하기를
降勅諭之曰來朕全爾否屠之
“항복하여 내게 오면 너희가 모두 온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도륙(屠戮)할 것이다.” (하였다.)
有若英馬諸大將承
영마(英馬)-英俄兒代(윙얼다), 馬夫大(머푸타이)-와 같은 여러 대장들이
皇命相屬於道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길을 오가니
於是我寡君集文武諸臣謂曰
이에 우리 임금이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予托和好于大邦十年于兹矣由予惛惑自速
“내가 큰 나라에 의탁하여 화친을 맺은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나의 어리석고 미혹(迷惑)됨으로 말미암아
天討萬姓魚肉罪在予一人
윗나라 군대의 토벌을 자초(自招)하여 만백성이 도륙을 당하게 되었으니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皇帝猶不忍屠戮之
황제께서는 오히려 차마 이들을 도륙하지 못하시고
諭之如此予曷敢不欽承以上全我宗社
이와 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그 말을 받들어 위로는 우리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下保我生靈乎大臣協贊之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대신들도 모두 찬성하였다.
遂從數十騎詣軍前請罪
드디어 수십 기(騎)를 이끌고 군영 앞으로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황제가 예로서 대접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一見而推心腹
한번 보고는 심복(心腹)으로 인정하여
錫賚之恩遍及從臣禮罷
재물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온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卽還我寡君于都城立召兵之南下者振旅而西
곧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려보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군대를 불러들여 서쪽으로 물러났다.
撫民勸農
백성들을 위로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遠近之雉鳥散者咸復厥居
원근(遠近)에 도망친 백성들을 모두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詎非大幸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歟小邦之獲罪上國久矣
우리 작은 나라가 상국(上國)에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다.
己未之役都元帥姜弘立助兵明朝兵敗被擒
기미(己未)년의 군역(軍役)에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이 군대를 이끌고 명을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을 때에,
太祖武皇帝只留弘立等數人餘悉放囘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을 비롯한 몇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주었으니
恩莫大焉
그 은혜가 막대(莫大)한 것이었다.
而小邦迷不知悟
그런데도 작은 나라가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니,
丁卯歲今皇帝命將東征本國
정묘년(인조 5, 1627년)에 지금의 황제가 장군들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君臣避入海島遣使請成皇帝允之
임금과 신하가 섬으로 피난하고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視爲兄弟國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고 형제의 나라로 간주하니,
疆土復完
강토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고
弘立亦還矣自兹以往
강홍립(姜弘立)장군도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禮遇不替冠盖交
그 이후로 예우가 한결같고 관리들이 서로 오갔는데,
跡不幸浮議扇動搆成亂梯小邦
불행하게도 뜬소문이 생겨나 퍼져 나가면서 작은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申飭邊臣言涉不遜
거듭 변방의 신하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언어가 불손하고
而其文爲▨臣所得
또 그 글이 ▨신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皇帝猶寬貸之
그래도 황제께서는 오히려 너그럽게 대하시어
不卽加兵乃先
곧바로 군대를 내보내지 않고,
降明旨諭以師期丁寧反覆不翅
먼저 조서(詔書)를 보내어 군대를 보낼 시기로써 거듭 깨우치기를
若提耳面命
마치 귀를 잡고 끌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듯 하였다.
而終未免焉
그러나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았으니
則小邦羣臣之罪益無所逃矣
작은 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죄가 더욱 무거워졌던 것이다.
皇帝旣以大兵圍南漢而
황제께서 이미 대병(大兵)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고는,
又命偏師先陷江都
또 한 무리의 군대에게 명하여 강화도(江華島)를 함락시켜
宮嬪王子曁卿士家小俱被俘獲
궁빈(宮嬪)과 왕자(王子) 및 여러 신하들의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붙잡았는데,
皇帝戒諸將不得擾害
황제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해를 입히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命從官及內侍看護旣而
시종하는 관리와 내시들로 하여금 간호(看護)하게 하셨다.
大霈恩典
이윽고 크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復歸於舊
작은 나라의 임금과 신하 및 그 사로잡혔던 권속(眷屬)들이 모두 옛 장소로 돌아가게 되니,
霜雪變爲陽春枯旱轉爲時雨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 볕이 되고 가뭄이 단비가 된 듯,
區宇旣亡而復存宗社己絶而還續
구역(=나라)이 거의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고 종사(宗社)가 거의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環東土數千里咸囿於 生成之澤
모든 동쪽의 땅 수천리가 모두 살려주는 은택(恩澤)을 입었으니
此實古昔簡策所稀觀也
이는 실로 예로부터 드물게 보는 일이라 하겠다.
於戱盛哉
아아, 훌륭하도다.
漢水上流三田渡之南卽皇帝駐蹕之所也壇場在焉
한강의 상류 삼전도(三田渡)의 남쪽은 황제께서 머무시던 곳으로 제단이 있다.
我寡君爰命水部就壇所增而高大之又伐石以碑之
우리 임금이 수부(水部=工曹)에 명하여 단을 더 쌓아 높고 크게 만들고 또 돌을 잘라서 비를 세우게 하였다.
埀諸永久以彰夫皇帝之功之德直與造化而同流也
변방에서도 황제의 공덕이 천지의 조화와 같이 흘러갈 것임을 후세에 길이 현창(顯彰)함이니,
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抑
어찌 우리 작은 나라만이 대대로 힘을 입을 뿐이겠는가?
亦大朝之仁聲 武誼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兹也
또한 큰 나라의 인자한 성문(聲門)과 올바른 무위(武威)에 멀리서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음이 모두 여기에 근본하는 것이다.
顧 摹天地之大 畵日月之明
커다란 천지(天地)를 베껴내고 밝은 일월(日月)을 그리자니
不足以彷彿其萬一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기에 부족하나,
謹載其大略
삼가 그 대략을 기록하는 바이다.
銘曰
명(銘)에 이르기를
天降霜露載肅載育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데,
惟帝則之竝布威德
오직 황제께서 이를 본받아 위엄과 덕을 함께 펴시네.
皇帝東征十萬其師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그 군사는 10만이요,
殷殷轟轟如虎如豼
은은한 수레소리 호랑이 같고 표범과 같네.
西蕃窮髮曁夫北落
서쪽 변방의 터럭하나 없는 벌판과 북쪽 부락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執殳前驅厥靈赫赫
창 들고 앞서 진격하니 그 위세 혁혁(赫赫)하도다.
皇帝孔仁誕降恩言
황제께서 크게 인자하심으로 은혜로운 말씀 내리시니,
十行昭囘旣嚴且溫
10 줄의 밝은 회답 엄하고도 따뜻하였네.
始迷不知自貽伊感帝有明命如寐之覺
처음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 비로소 깨달았네.
我后祇服相率而歸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歸復)하니,
匪惟怛威惟德之依
단지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일세.
皇帝嘉之澤洽禮優
황제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시어 은택(恩澤)과 예우(禮遇)가 넉넉하니,
載色載笑爰束戈矛
얼굴빛을 고치고 웃으며 병장기를 거두었네.
何以錫之駿馬輕裘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駿馬)와 가벼운 갓옷,
都人士女乃歌乃謳
도회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하네.
我后言旋皇帝之賜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皇帝班師活我赤子
황제께서 군대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네.
哀我蕩析勸我穡事
유랑하고 헤어진 이들 불쌍히 여겨 농사에 힘쓰게 하시고,
金甌依舊翠壇維新
금구(金甌)-金甌覆名-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제단은 더욱 새로우니
枯骨再肉塞荄復春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언 풀뿌리에 봄이 돌아온 듯하네.
有石巍然大江之頭
커다란 강가에 솟은 비 우뚝하니,
萬載三韓皇帝之休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리.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臣呂爾徴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 同知義禁府事) 신(臣) 여이징(呂爾徴)
奉 敎篆
이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資憲大夫漢城府判尹臣吳竣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臣) 오준(吳竣)이
奉 敎書
왕명을 받들어 씀.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 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臣李景奭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신(臣) 이경석(李景奭)이
奉 敎撰
왕명을 받들어 지음
崇德四年十二月初八日立
숭덕(崇德) 4년(인조 17, 1639년) 12월 초 8일에 세움
비문은 많이 달코 비바람에 마모 됐지만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아직도 남아 있네요.
아니 영원히 남아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세겨줘야지요
이경석은 문장과 글씨에도 매우 뛰어 났다.
장유와 조희일이 이비문을 썼으나
처음 쓴 것이 성의가 없다하여 임금을 협박하는지라
인조가 면대해서,"내가 변변치 못하여 이지경에 이르렸음에
장차 스스로 강국이 될 것을 도모하겠으니
오늘의 처지가 저들의 뜻을 맞추지 않으면
더욱 격할 것인즉 비문을 찬하시오" 하고 명함에
하는 수 없이 비문을 쓰고,
이경석은
" 공부한 것이 천추에 한이된다" 라고 한탄 했다고 합니다.
아래시는 이경석이 심양에 잡혀가면서 쓴시입니다.
청에 1년 이상 잡혀 있다 귀국해서 좌우의정을 거쳐 그후 영의정에 오르나
김자점의 밀고로 효종의 북벌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져 추궁당하자,스스로 책임을 자청
청나라 백마성에 감금되어 효종 2년에 석방되었으나, 청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하다가
현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이 올라감.
晴川灘夜渡(청천탄야도) - 이경석
長河月黑絲絲
장하월흑사사
人語灘聲共鬧時
인어탄성공료시
半夜直將忠信涉
반야직장충신섭
此心惟直鬼神知
차심유직귀신지
청천강의 밤은 칠흑 같고 비는 쉴 새 없이 내리는데
민심은 흉흉하고 물소리는 요란하다
구국일념으로 야반에 이 강을 건너가네.
이 마음은 오직천지신명만이 아실 것이니 굽어 살펴주소서
어린이 놀이터옆 연립주택으로 둘러쌓인 한가운데 세워져있고,
그 앞옆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릅 꿇고 항복하는 조각상이 하나 문화재청에서 만들어놨네요.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리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김훈의 <<남한산성>>중에서--
--적병의 숫자는 멀마쯤인가?
병조판서 이성구가 대답했다.
--적의 대열이 들판을 뒤덮고 있닿아 있어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렵사오나,
기騎보步를 합쳐서 십오만 이상은 될 것이라 하옵니다.
.........
다시 청천강을 바라보는 임금의 눈에
어느 고을 땅인지 알 수 없는 산수화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
청병은 북서풍처럼 밀려왔다.
헐떡이는 말들의 허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눈보라도 보였다.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조선왕이 말에서 내렸다.
조선 왕이 구층 단위를 향하여 절했다.세자가 왕을 따랐다.
조선 기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었다.
기녀들의 소맷자락과 치마폭이 바람에 나부꼈다.
풍악 소리가 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홍이포가 터지고, 청의 군장들이 여진말로 함성을 질렀다.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먼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렸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김훈의 <<남한산성>>중에서--
* 조선 임금(인조)이 걸어간 삼전도(三田渡) 항복의 길,
그 치욕의 길을 놓고 신하들의 갑론을박이 치열합니다.
결코 옛날 일로만 흘려버릴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길 인생의 길은 참으로 여러 갈래입니다.
또한 역사의 길도 언제나 여러 갈래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우물 안에 갇혀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면
새 길을 낼 수 없고, 새 길을 내지 못하면
부끄러운 역사의 옛길을 다시 밟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의 길을 다시 가는 것은 아닌지요?
바로 병자호란 때 잡혀갔다 돌아 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했는데, 몸을 더럽힌 여자라 하여 반겨주는 가족이 없었다.
나중에는 ‘화냥년’으로 불리었다.
고려왕조는 원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면서 근 100년 동안 아홉 사람의 왕비를 원나라 여인으로 맞아들였고, 그런 임금들의 묘호에 충(忠肅王, 忠惠王, 忠穆王)자를 써야 할 만큼 치욕적인 시달림을 당했다.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될 참람한 일들이 당시의 관료들의 정보부재로 인한 탁상공론과 명분론,
그리고 인조의 과단성 부재와 무능력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도자나 공직자들이 주변국의 움직임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보수집이나, 상황에 따른 탄력적이지 못한 외교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지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인조 15년(1637) 1월 30일.
남한산성에 몽진하여 적군과 대치하고 있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휘하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선다.
적장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적장이란 후금을 창업한 누루하치의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치(皇太極)를 말하지만,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 조정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를 오랑캐(만주족)의 괴수로 멸시해 왔으므로 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수모를 감내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 올라 청태종 황타이티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246년, 조선의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몸소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항복한 조선왕조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수모를 강요하였다. 전쟁의 책임을 조선 조정에 전가하는 이른바 전후처리라는 착취의 감행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수항단이 마련되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청태종 홍타이치의 위명을 영원히 기리되 그 비문은 자신들이 검증한다는 것이었다.
삼전도(三田渡) 치욕의 길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 김훈의《남한산성》중에서 -
* 조선 임금(인조)이 걸어간 삼전도(三田渡) 항복의 길,
그 치욕의 길을 놓고 신하들의 갑론을박이 치열합니다.
결코 옛날 일로만 흘려버릴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우물 안에 갇혀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면
새 길을 낼 수 없고, 새 길을 내지 못하면
부끄러운 역사의 옛길을 다시 밟게 됩니다.
그런대 한가지 잘 못한 것 같아요.
외진 주택가에 초라하게 세울 것이 아니라,
석촌 개발당시 땅값도 싼데 석촌대로변 4거리에다
몇천평 툭 짤라 큼직하게 공원으로 조성하여 ,
하루에도 오가는 수천 수만명이 볼수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또 관광의 명소로 조성했어야해요.
매일
그 곳을 지나며 보는 모든이에게
산 역사의 현장이며 증거예요.
별다른 역사 공부를 안해도 되요.
쓰레기장 같은 곳에 방치하다시피...
문화재청과 송파구청 합심해서 고민해 볼 사항같아요.
감사합니다.
2009.7.23 목
김우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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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고 보니 우곤이의 1년 전 상기의 글과, 동일 내용의 청원서(문화재청과 송파구청에 제출했다 함)가 씨앗이 되어 삼전도비가 과거 그늘진 곳에서 이곳 석촌호수가로 이전된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현재의 석촌호수는 과거 한강의 물길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흔적이라는 것을 부기해 둠세. 그러니까 지금의 lotte hotel 너구리상이 있는 자리는 공유수면으로서 한강물 한가운데가 되겠고..그야말로 상전벽해가 아닌 벽해상전이라고나 할까..
그렇군, 벽해상전이구려...370년전의 삼전도와 지금의 석촌호수.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는 시간이지....앞으로의 한반도....예나 지금이나 상황의 변한건 아무것도 없는데...지금도 역시 왜란과 호란의 때와 무엇이 다르겠나....?
내가 읽기도 부담스러운대 이거 다 자료정리 해서 올리는 네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비문은 다음다시한번 읽어 보겠다. 요전에 케이블 티이브이 에서본 대청풍운에 도르곤이 이 청태종인지 아니면 그 아버지가 청태종인지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받고 그 그늘에서 살아온 역사가 여기에 생생히 담겨 있구나. 부끄러운 과거는 어느나라나 다 갖이고 있는것이고 이것을 거울로 삼아 상처를 치료하고 나라를 발전시키는것이 역사의 교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로곤은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이복 동생이고..... 한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살아 있을 때에 도로곤을 총애해서 후계로 삼을려했지만,, 누르하치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용맹을 날이던 홍타이지가 황제에 오르고 Khan(칸)이라 불렀지...13만 대군을 거너리고 남한산성으로 처들어 온 것도 홍타이지 칸이지....무식하긴 했으나 용감하고 지모가 뛰어났다네.../역사의 교훈...중요하지.. 그러나... 말로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자나..?ㅎㅎㅎ
우곤총무! 역사학자 다됐네......대단하다. 수고 많았다. 지금 개업집에 가야 되는데 갔다와서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
맛 있게 많이 먹어....그래, 또 와서 봐아...ㅎㅎㅎ
조만간 한번 봐야 하는데...
아님 서울로 올라와아....
정말한심스런 조선의실상을보면서 그래도史蹟101호로당시의모습을교훈삼고자 한점은다행이구만--
인조도그렇지-그망신을당하고도 말많은신하들에기대어소현세자를끌어앉지도못하고--오늘날도마찬가지지
나라를걱정하고미래를봐야하는데 목소리만크게떠들고 (실속은없이) 자기만생각하고 남의잘못을침소봉대하여
시끄럽게 바람잡아비굴하게 구는 舊態가없어지고--오직 隨喜功德하는마음으로 자기를드러내지않고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生을살고 특히--친구가중요함을알아 재택만하지말고 友택에힘을쓰자----우곤아수고많았다
강회장의 댓글이 본글의 부족함을 카바해주는구려,,,,
긍정적이고...우테크에 힘써며..발전하는 삶을 살자,,,
동감하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