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여행5 - 쇼후쿠지를 보고는 후루사토를 거쳐 쿠시다신사에 가다!
8월 13일 후쿠오카 최대의 번화가라는 텐진 天神(천신) 거리를 둘러보고는 지하철을
타고 3정거장만에 지온 ( 祇園 기원) 역에 내려서는 쇼호쿠지 절 을 찾아 갑니다.
조선시대 에는 " 숭유억불 (崇儒抑佛) " 정책 탓으로 산속에 가야 절 이 있는 우리나라
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도시 주택가 한 복판에 절 이 있습니다?
교회는 도시 한 복판에 있는데 절은 산에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추방 했기 때문이라?
이정표를 찾다가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 저만치 보이는 절 을 찾아가니
이 절은 임제종 동복사파 의 "유봉선사" 라는 간판을 달고 있네요?
우리가 찾는 절이 아닌지라 대문 안으로 간단히 살펴보고는 다시 지도 를 보며 찾아간 곳은
이번에도 엔가쿠지 圓覺寺(원각사) 라는 이름의 다른 절 입니다? 일본에는 참
희한한게 데라마치 라고 해서 한 동네에 절들이 5~6개나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행인에게 물어서 어렵게 찾은 쇼후쿠지 절 은 한눈에 보아도 고색창연 한데......
대문에 적힌 글은 무슨 800년 전의 인물 에 대한 법회 를 연다는 뜻일러나?
쇼후쿠지 聖福寺(성복사) 절은 1195년 선종의 개조 에이사이 (榮西) 가 세운 사찰입니다.
쇼후쿠지 에는 고려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만든 종 도 있다고 들었는데, 몇년전 찾은 나라현
사쿠라이시 단잔신사 (談山神社 담산신사) 에서는 관음보살 이 물에 비친 달을 보며
금강보석 위에 앉아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고려 수월관음도 水月觀音圖 를 본게 떠오릅니다.
절에 들어서노라니 오래된 고목 이 우거지고 여러채 일본식 기와집 건물도
아름다운데.... 도심 한복판 평지 에 이렇게 넓은 터 를 차지해 한적 합니다!
게다가 절의 경내는 조용하여 한가로이 산책 하며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공간 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 이라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쇼후쿠지 절을 구경하고는 나와서 남쪽으로 되돌아오니 큰 대로변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보니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가의 묘소 가 있는 동장사 東長寺(도쵸지) 라고 적혀 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 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지라 52만석 후쿠오카 번주 가 되었습니다.
후일 후쿠오카 번주 가 되는 구로다 나가마사 는 아버지인 구로다 간베에 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명을 받아 규슈 분고 (오이타) 와 휴가(미야자키) 공격에 공을 세워 규슈
부젠국(오이타) 을 영지 로 받는데 아버지는 NHK 역사 대하드라마의 주인공 이기도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구로다 는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제2군 가토 기요마사에 이어 제3군 1만
2천명 을 이끌고 황해도 를 점령하고 부산 기장군에 일본식 성 을 축조했는데, 군감 이시다 미쓰나리
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귀국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 및 가토 기요마사 와 함께 이시다를 습격 하기도 합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죽자 영악한 구로다 나가마사 는 재빨리 본처와 이혼하고 도쿠가와 의
양녀 요시히메와 결혼 하여 살길 을 도모합니다. 전쟁이 터지는 난세 에는 상황을 파악하고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니 일본 속담에 "이기면 충신이고 지면 역적이다" 라는 말이 있다지요?
1600년 동서 20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도쿠가와의 동군 에 참전해 서군 진영
모리 가문의 깃카와씨 와 고바야카와 를 끌어들이고 전투에도 맹활약 을 한 댓가로 이곳
치쿠젠(후쿠오카) 을 영지 로 하사받아 1601년 부터 성을 축조했는데..... 그 묘지 인가 보네요?
이번에는 쇼후쿠지 방향과는 반대 로 도로를 건너 5분여 걸으니
하카타마치야 후루사토관 博多町家ふるさと館 이 보입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서양 문물 을 받아 들인 후의 후쿠오카 시내의 가정집과
거리 모습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곳 입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 하카타
(후쿠오카)의 역사와 문화 를 직물, 인형, 종이 및 그릇 을 제작하는 과정을 봅니다.
특히 천에 무늬 를 넣는 기계인 베틀 이 참으로 특이해 보입니다! 여기 후루사토관
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중국 에 처음 갔을 때에 우리가 기차(汽車)
라고 부르는 것을..... 중국인들은 화차(火車) 라고 부르는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중국 사람들이 기차(汽車) 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 라고 부르는 차량 입니다? 그래서 시외버스 터미널 을
짱투치처커운짠 長倒 汽車 客運站 ( 장도 기차 객운참 ) 이라고 불렀던 것이라!
그 이유는 백수십년전에 서양의 문물 이 동양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중국과 일본 은
수십년에 걸쳐 서로 각기 한자말 로 번역했습니다. 처음에는 마테오리치 나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가 시작한 번역은 곧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이어 받았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수천개 영어 단어 를 단 한 글자도 우리말로 번역하지 못하고 일본인 들이
숱한 시행착오 끝에 번역한 것을 그냥 “ 빌려 쓰고” 있으니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물리,
화학, 생물, 사회, 국회, 정부, 자유, 전기, 수도, 기차, 지하철, 사회주의, 공산주의, 시민,
국민, 개인, 낭만, 학교, 대학, 정당, 민주주의, 병원, 축구, 야구, 농구 등 수천단어 입니다!!!
Limited Company 와 President 를 일본인들은 주식회사 와 사장 으로 번역하고 중국인들은
유한공사와 총경리 로 번역 하는 등 서로 번역이 달랐던 것이지요? 일본에서 Person 을
번역하면서 우리 동양에는 그런 개념이 없어 십수년을 고민하다가 일개인 으로 번역했다가
개인 으로 정착했고 또 후쿠자와 유기치는 Freedom 을 불교에서 찾아 자유(自由) 로 번역합니다.
몇십년전 우리나라 모 교수가 일본인들이 Democracy 를 민주주의 로 번역한것은 “무식한
일본인” 들이 한 오역 으로..... “사상이 아니라 정치 체제” 를 뜻하는 말이니, 군주정
이나 과두정 에 대한 말로 "민주정" 이라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목청을 높이던 생각이
나는데, 그렇게 서양을 받아들여 소화한 일본인들의 문물 을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럼 이제라도 왜놈이 번역한 "민주주의" 라는 말은 쓰지 말고 우리 교수가 번역한 "민주정" 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아니면 저 수천단어를 번역내지 조어 하느라 고생한 일본인들의 노고에 감사해야 할까요?
하기사 우리 교과서 에 일본인들이 번역한 사실 자체가 나오지 않는지라 국민들이 대개는 사실을 모르니....
이어 건너편에 쿠시다 진자 節田 神社 로 발길을 돌리니 입구에 우스꽝스러운 큰 인형
을 세우고 머리를 숙여 신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신사
참배자의 겸손 을 뜻하는 것 같은데.... 몇년 전에 보름간 이스라엘 전국일주
배낭여행시에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도시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 에 들어갈 때....
낮은 문 이라 머리를 깊게 숙이고 들어갔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이슬람교도인
아랍인 지배자들이 말을 타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을 사용해서 “교회의 문의 절반(윗부분) 을 봉” 했다던 말이 생각이 나네요?
쿠시다 진자 는 매년 7월 1일 부터 보름간 기온 야마가사 마쓰리 가 행해지는 신사로......
오쿠시다상 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운다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립하여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 가 개축한 샤덴(社殿) 에는 뇌신과 풍신 등 훌륭한 조각이 많다고 하네요!
일본 신사는 지붕 가운데가 가라하후 (唐破風) 라고 나무를 입혀서 둥글게 된게 특이하고 새끼를
꼬아 만든 밧줄 을 당겨 방울 소리를 내어 신(神) 을 부르고는 함에 동전을 던져 넣고 손뼉을
두번 친 다음에 머리를 깊숙하게 숙여 소원을 비는 것인데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해 보입니다.
임진왜란 전에 기독교가 번성 하여 규슈 주민은 상당수가 기독교도 가 되었고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등 10여명의 다이묘들도 신자 가 되었던 일본이건만......
기독교도가 서양 침략자의 앞잡이 가 되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처럼 일본도 유럽의 침략을 받아 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혹한 탄압 을 받게됩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일본에서 기독교도는 1% 미만이고, 90% 가 넘는 사람들이
불교 및 신도(神道) 의 신자 인데, 그중에서 장례식 때는 불교,
결혼식 때는 신도 식으로 두종교를 다 믿는 사람이 80% 가 넘는다고 합니다.
일본 국민들이 같은 의식구조와 신념을 공유 하고 있으니........ 1월 1일 새벽 에는
‘하츠모우데(初詣)’ 라고 전 국민의 70% 가 함께 일어나 신사 로 간다니!!!
이런 일체감으로 단결이 잘 되는 것이고 또 신사에서는 그렇게도 진지한 것일까요?
그 외에도 KBS 역사스페셜 에 의하면 이 신사에는 도가츠 아키 란 자가 일본도 한
자루를 진상했다는데..... 칼집에 “一瞬電光刺老弧 일순전광자노호” 라고
적혀 있다네요! 그러니까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 라는 뜻이니...... 1895년
을미사변 때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그 낭인 인가 봅니다!
일본인이 담을 넘자 경복궁 경비병들은 겁에질려 총을 버리고 달아났고 새벽 5시에 낭인들이 건청궁
옥호루에 침입해 궁녀 속에 숨은 명성 황후를 찾는답시고 궁녀들을 잡아서 댓돌에 패대기
칠 때.... 옥호루 담 밖에는 우범선 등 3명의 조선인 대대장이 인솔한 1,500명 조선 신식군대인
훈련원 병사들은 새벽공기를 찢는 궁녀들의 비명소리 단말마 를 들으며 부동자세로 시립해 있었습니다.
을미사변에서 죽은 사람은 조선은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궁녀 5~6명과 태자비
민씨와 명성황후 이고 그외 조선군은 없으며 일본측은 죽거나 부상을 입은자가 전혀 없는데.....
궁궐 수비 총대장격은 미군 다이 대령이고 러시아인 사바틴이 있었는데, 저 다이 대령과 사바틴에
조선군 시위대 연대장 현흥택등은 비무장으로 일본군에게 심한 구타 를 당했지만 목숨만은 건집니다.
조선군 신식부대인 훈련원 이 일본측으로 기운걸 안 민왕비는 임오군란때 자신을 등에 업고 경복궁을 탈출한
홍계훈을 연대장 으로 임명하니 10월 8일 2대대장 우범선 을 비롯 1대대장 이두황과 3대대장 이진범은
일본인 교관의 안내로 부대를 이끌고 경복궁으로 가자 뒤늦게 신임 연대장 홍계훈이 본부중대 200명 병사
를 이끌고 달려와서 광화문에서 제지해도 저 1,500명 병사들은 궁궐로 진입했고 홍계훈은 일본군에 죽습니다.
조선군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윌리엄 다이 대령 과 러시아인 사바틴은 이학균 부령으로 부터 보고를
받자마자 별군관실 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 하고 있어야 함에도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이미 모두 도주한 것이라...... 다이 대령은 급한대로 2백명의
궁궐 시위대를 모아 사다리를 타고 궁으로 침입하는 일본군과 낭인 및 조선인 훈련대에 맞섭니다.
사바틴 이 러시아에 보고한 바는.... 일본군이 발밑에 총을 쏘자 궁궐 시위대는 겁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도주 하는지라.... 순식간에 무너지는 와중에 끝까지 저항하던 무예청 무사들을 비롯 경비병 200명은
흥선대원군이 입궐 하자 혼란스러워 하며 총을 내려놓고 전투를 포기 하는데, 경비병이 저항을 멈추자
조선군 훈련대 1천5백명은 흥선대원군이 가마를 타고 들어와 머물고 있는 강녕전 앞 뜰에서 대기합니다.
조선군 시위대가 도주 한 가운데 일본 낭인들은 조선인 길잡이의 안내로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궁녀복
으로 갈아입은 왕비 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하고 섬돌에 패대기 치니 궁녀들의 처절한 단발마 비명 이 새벽 공기를 가르는데
도... 담 밖에 부동자세로 시립한 신식 군대인 천오백명 조선 훈련대 군인들은 침묵 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