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진해(鎭海)는 마산합포구 삼진(三鎭) 지역 진해군에서 유래.
웅천군이 1912년 진해면으로 개편되면서 진해로 불리기 시작.
일제가 해군 군항을 만들고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진해'
이후 본래 진해군 지역(진동면·진북면·진전면)은
해군항 진해와 구분하여, '삼진 지역'으로 불렀다.
진해시 웅산(熊山).,시루봉.
조선시대 삼포(三浦) 가운데 하나.,제포(薺浦)였던.,진해 웅천.
삼포는 일본인 왕래와 거주를 허가한 남해안과 동해안 세 포구.
조선 태종 7년(1407) 일본과 선린 정책의 일환으로 개항된.,삼포.
제포 부산포, 염포(울산 현대자동차공장 자리)
삼포(三浦)는 조선, 일본의 교류 선봉에 섰던 곳.
제포에는 왜관과 함께 일본인 거류지까지 생겼다.
세종 초, 60호에 불과하던 항거 왜인 가옥이
성종 대에는 400호, 인구만 2000명이 넘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주기적으로 송환했으나
일본인 인구가 계속 늘어나자 성종은 '왜리'라는
거주 지역을 설정하여 일본인들을 살게 허락하였다.
그런데, 중종 5년(1510) 4월 제포를 비롯한
삼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성종 대 이래로
엄격한 교역 통제와 연산군 대 운영 상의 모순.
이에 불만을 품고 '삼포왜란'을 일으켜
조선인 272명 학살, 민가 796호를 태우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삼포왜란 (三浦倭亂).
..............................삼포왜란.........................
조선은 건국 후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했으며, 일시적 체류가 아닌
개항장에 거주하는 항거왜인(恒居倭人)의 수를 총60호로 한정.
그러나 그 수는 점차 늘어 1474년(성종 5)
이미 400여 호에 2,000명을 넘게 되었다.
처음 약정된 60호 외에는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쇄환정책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조선정부가 확실한 단언을 내리지 않아
그 수는 계속 늘어나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이었다.
이들 항거왜인들은 고기잡이가 주업 또는
거주지역 내의 토지를 경작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점차 왜리(倭里)라는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이탈
불법적으로 거주지역과 경작토지를 확대시켜 나갔다.
한편 조선정부에서는 1429년(세종 11)부터
그들의 토지경작에 대한 수세론(收稅論)이 대두.
그러나 세종은 "대마도정벌 후
상선이나 왜인들이 오지 않다가
최근 교역하니 세 받을 필요 없다."
그리하여, 수세책은 채택되지 않았다.
1494년(성종 25)에 이르러
거류왜인의 경전(耕田)에 대해서
수세하기로 했으나 회유책의 일환으로
또다시 면세의 혜택을 베풀었던 것이었다.
삼포 거류 왜인들은 조선정부로부터는 특혜를 받아 면세.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세종 때부터 거류인의 인구수에 따라
많은 면포를 받아갔다(내역은 대호 : 大戶 2필, 소호 : 小戶 1필).
그리고 대마도주는 공물을 수취하면서
삼포의 거류왜인을 총괄하는 조직체도 구성
이 조직체는 삼포왜란을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
조선은 입국 왜인에 대한 법규가
각 분야에 걸쳐 제정되어 있었으나
왜구 재발에 대한 의구심, 대의명분이라는
정치도의와 상국(上國)으로서의 자세 그리고
교린정책 기본정신으로 왜인 유화정책으로 일관.
이에 왜인들의 법규위반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음에도
오히려 관용, 묵인함이 상례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즉위후 정치개혁 일환으로
왜인에 대하여 법규에 따라 엄한 통제를 가하자
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1510년(중종 5) 4월 삼포의 왜인들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대마도주와 연합해
4,000~5,000명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포와 제포에서 약탈·학살 등 만행을 자행.
웅천성·동래성까지도 침공하였기에
조선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징벌.
조선 군대는 3방면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섬멸.
그 결과 삼포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
이 난으로 조선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 소실.
왜적 측은 선박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조선은 참수된 왜인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
뒷날 입국하는 왜인들이 두려움을 갖게 했다.
이 왜란으로 인하여 삼포의 왜관은 폐쇄되었으나,
15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여 국교가 회복.
동시에 제포만 다시 개항하였으나
이후에도 왜인의 침범이 잦아지자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여
약 30년간 정식 교역이 두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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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일본은 조선과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 후
식민화 작업 중 하나로 진해만 일대에 군항을 세웠다.
이때 일본은 웅천과 웅동 일대 군항 예정지에 살던
조선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 온갖 핍박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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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는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
조선시대 웅천읍성이 있었던 곳.
웅천 바닷가.,‘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1553~1993)기념’
그곳 조각상은 '포르투갈 톨레도'에서 우정의 정표로 기증.
1593년 12월27일 웅천포 도착 후 1년을 왜성에 묵은.,서양인.
그로부터 34년 뒤인 인조 6년(1628)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부산 근처에 표착
그로부터 59년 뒤인 1653년에는 하멜이 표류.
'세스페데스'는 400년 전에 표류가 아닌,
자의로 이 땅에 온 처음 온 서양인인 셈.
그가 머물던 웅천 남산왜성 돌들은 웅장.
틀림없는 왜성인데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축성하였고
정유재란때 재침해 수축한 것이 웅천 남산왜성이다.
경상도에는 유난히도 왜성이 많다.
웅천 안골포 양산 영등포 마산 고성 사천
남해왜성 등 장기주둔을 위하여 진을 쳤던 흔적들.
진해에는 웅천왜성 바로 건너편 안골포에도 왜성이 있다.
안골포 왜성은 사면이 두루 보여 그만한 요새가 없다.
세스페데스가 웅천까지 온 이유는 사전 설명이 필요하다.
임진왜란때 평양성 공격 선봉장.,고니시(소서행장).
그는 포르투갈 예수회에 의탁한 독실한 천주교도였다.
고니시 딸 마리아는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 아내.
소오는 임란 직전까지 대마도 병마사.
조선의 녹봉을 받았으며.,천주교 신자.
소오는 조선말에 능통하고 지리도 밝았다..
그래서. 소오는 왜군의 앞잡이로 선봉에 섰다.
세스페데스는 이때 일종의 종군 신부로 온 것.
그의 수기에 의하면 조선의 훌륭한 문화재는
모두 고니시와 소오가 소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
그들은 문화재 약탈뿐 아니라 각분야 장인들도 잡아갔다.
고니시도 평양성 전투에서 6살 난 전쟁고아 소녀를 데려가
‘오타’란 이름을 지어주고 길러 ‘줄리아’ 세례명을 얻게 하였다.
도요토미가 죽은 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 패하여 처형되고 줄리아도 외딴 섬으로 귀양.
줄리아는 신앙을 지키며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교.
한편 '고니시 사위' 대마도주 소오는
마리아와 이혼후 도쿠가와 가신이 된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하였고.
두달 후에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역사적인 서양인 첫 방문자.
왜성이 위치한 안골포는
임진왜란 전승지로 유명.
1952년 7월 왜 수군의 주력부대가 한산도에서 참패한다.
이때 그를 따르던 가토 기요마사의 42척 제2 주력부대가
당황한 나머지 안골포에 옮겨 정박하자 충무공이 추격, 격파.
한산도해전과 더불어 안골포해전은
왜 수군 주력부대를 격멸한 큰 전공지.
이듬해 1593년 2월부터 한달간 이순신 함대는
웅포에 무려 7차례나 출격해 해전을 치루었는데,
이때 웅포 남산왜성 왜 육군이 엄호하여 많은 고초.
세스페데스는 그해 겨울 웅천으로 들어왔다.
안골포에는 굴강(掘江)이 남아 있다.
방파제와 선착장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남 여천에 선소(船所)와 굴강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사라진 지금 이곳 해양문화사적 의미는 크다.
이순신의 대격전지에 이같은 해양 유적이 전해지고 있어
감회가 새로운데 머잖아 간척될 계획이라 운명이 풍전등화.
매립하여 공원조성, 바닷물을 끌어들여도 굴강만은 살릴 계획.
그러나, 이 희귀한 문화유산이 전해지는
임진왜란 대첩지를 매립하여 개발하겠다는
문화적 반달리즘을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진해는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마산에서 후쿠오카 쪽으로 들어가는.,최단거리 항로.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때 이용한 항로.
조선 초기에 왜관이 처음 자리잡은 곳.,웅천.
왜관은 모두 세 군데에 있었으나 삼포왜란 이후
웅천왜성은 폐지되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통합된다.
이같이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진해
이곳에 다시 왜인들이 300여년 만에 나타난다.
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로 변신해 나타났던 것.
그들은 지형 정서적으로 가장 잘 아는 곳부터 점령.
일본은 진해만을 동양 제일의 대군항으로 키우기 위해
한반도 최초로 조직적・계획적 도시계획을 입안하였던 것.
진해라는 말부터가 일인에 의해 처음 쓰여졌고,
옛 웅천읍성과 무관하게 신도시로 재탄생하였으니
식민지 항구도시 건설의 전형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당시 비동 현동 좌천 등 여러 마을을 합하여 진해
진해만 군항지를 편의상 진해만이라 칭한 것이다.
군항지 경영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800만원을 투자.
10개년 사업으로 바닷가 염습지와 황무지를 매립하여
일제강점기 매립지를 얻고 농민들의 땅을 모두 강제수용.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12일에는
해군 함정을 거제도 송진포 연안에 대놓고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러시아와 전쟁준비.
송진포에 ‘일본제국 해군 가근거지 방비대’를 설치하였고
1905년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웅천지역 토지를 강탈.
그당시 진해 시가지는 12만평이었고
계획도시답게 도로는 방사형으로 설계.
진해 중원로터리 등은 사방팔통 도로 교체.
여타 도시에서 보기 힘들게 도시 미관을 고려.
토지를 1〜3등으로 3분하여 건축을 제한하였다.
2〜3층 건축을 권장, 4층 이상은 인허가 규제사항.
이곳 토지를 불하받은 일인은
히로시마 후쿠오카 도쿄 사세보
사가 조슈 나가사키 출신이 주류.
한국에 이미 나와있던 용산, 마산, 부산
등지의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몰려 왔다.
이로써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신도시’가 진해에 탄생하였던 것.
여기에는 그 어떤 조선인도 참여할 수 없었다.
목포나 군산처럼 조선인촌과 병존하지 않은 식민도시.
일제 해군본부가 들어서고, 한국뿐 아니라 극동의 군항.
그리하여, 진해는 오늘날 한국 해군의 본거지로 자리매김.
진해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풍경이 눈길을 끈다.
방사선 로터리 모퉁이에 고색창연한 진해우체국.
도로들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영락 없는.,일장기.
그런데 그런 곳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전국 최초인 1951년에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마산 등에서
갹출해 진해의 북원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조성한 것.
일장기 형태의 방사선도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건립.
벚꽃 만발하는 4월 초순에 열리는 군항제.
어쩐지 좀 거북한 느낌이 드는.,진해.
제황산정에는 웅장하게 솟은 탑이 있다.
일인들이 세운 러일전쟁 기념탑을 광복 후 철거.
1967년 해군의 기함사령탑을 상징하는 탑으로 교체.
시내 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진해를 방문했을 때
남긴 기념휘호를 새긴 비석이 있는데 가장자리가 깨졌다.
누구인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을 땜질하여 붙여 놓은 흔적.
로터리 중심의 나무에 가려져 있어
외부인은 그런 비석이 있는 줄 모른다.
반면에 진해 바닷가 도지정 무형문화재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과 전용 낚시터,
장제스를 만났다는 육각정 등이 잘 보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인데
원래는 일본군 통신대가 쓰던 건물이다.
진해 사람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해군기지와 해군사관학교가 있다 보니
주요 토지는 군용으로 묶여 발전이 없다.
군사도시인 탓에 규제가 심한 편이다.
게다가 부산시와의 갈등도 내연 상태다.
신항만 건설부지의 80%를 내놓았지만
명칭이 부산 신항만으로 결정되는 분위기.
'부산신항' 또는 부산・진해신항'.,대격돌 중.
이래저래 군사도시의 고충이 깊은.,진해.
일제시대, 벚꽃 펄펄 날리는 조건에서도
소작쟁의는 물론 동양제사 노동자들의 대투쟁.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같이 종교인을 배출.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이자
인도 해상세력인 아유타국 허왕옥 공주.
그녀가 처음 당도한 망산도가 오늘날 진해.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국제 항구도시.
어떤 지명으로 정착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부산・진해신항'이 될까? '부산신항'이 될까?
.....................주 .......................
.1407년 조선 최초로 개항한 '제포'나
조선 최초 외국인 거류지 '왜리(괴정)',
조선 최초 수군 조선소가 있었던 안골포.
부산 가덕도, 거제 송진포, 진해 군항, 웅천.
한·중·일 투쟁사가 남아있는 곳들.
통신사를 보내고 수신사를 맞아들이고
그렇게 하여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기도 했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공동의 번영을 찾았던 곳.
신항 가까이 붙어 있는 제포(제덕동)와 왜리(괴정동).
부산항을 대신하여 우리 지역에 '신항'이 만들어졌던 곳.
.......................................................................
장차, 이곳 신항의 물류가
유라시아 대륙 횡단철도를 타고
유럽까지 보내질 날도 멀지 않았다.
................
귀화 성씨.
.................
조선은 500년 넘게 단일 왕조로 생명력 강한 나라.
세계에서 500년 이상 지속된 나라는 몇나라 안된다.
조선을 비롯하여 신라, 로마, 베네치아, 오스만투르크.
그것도 문인이 무인 세력을 통제하고
왕조를 지배한 나라는 조선과 중국 뿐.
........광해군 1년(1609) 사간원 보고.......
“귀화한 오랑캐들이 해서로부터 경기, 호남,
호서의 해변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었다.
이들은 고기잡이로 생업
나무로 배를 만드는 자들이
날로 늘어나 200 척에 이른다.
또한 해로(海路)에 익숙해
배 부리기를 말 부리듯 하여서
조선인이 미치지 못할 지경이다.”
.............................................
.
그무렵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살았을까?
세종 25년(1443) 대마도와 계해(癸亥)조약 체결로 왜구와 무역.
이때 제포(창원)‧부산포‧염포(울산) 등 세 포구에 왜관이 설치.
숙종 24년(1698) 한때 3400명이 거주, 임진왜란 후 500명 이상 거주.
숙종 1년(1675) 변방의 금령이 해이해져
왜인들이 여염으로 다니며 부녀자를 간음한다.
그 결과 동래와 부산 여성 중 왜인의 출산이 많았다.
태조 2년(1393) 섬라곡국(暹羅斛國, 태국)에서 장사도 외
20명 사신이 소목, 한약재 속향 1000근, 원주민 2명을 바친다.
이때 장사도는 예빈경(외국사절 접대 담당)에 임명되어 조선 정착.
태국, 수마트라, 팔렘방 등
동남아 민족 다수가 귀화한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8년(1595)
귀화 왜병 15명에게 이씨 성을 내려준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왜병은 정착하고,
이들을 조선군에 편입시켜 서북 변경지역에 배치.
이괄의 난 때 이괄의 선봉부대는 대부분 왜병의 후손.
.
태종 4년(1406) 조와국(자바)에서
사신이 토산물을 싣고 오다가
왜구에 습격을 당한다.
.
이때 40명만 살아남아 해안에 오른다.
진언상은 1394년 사신으로 왔다가
조선 조봉대부(문관 종4품)
벼슬을 제수한 사람이다.
.
조선의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선 밖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좋은 새끼 말을 바치고, 흉년에는 조선의 곡식을 빌어 간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조선에 귀화 정착한다.
세종 15년(1433) 임금이 말하길 “파저강에서 온 김자환은
귀화 2년차인데 생활이 어렵고 무재(武才)로 공을 세웠으니
상을 넉넉히 주는 것이 어떠냐”고 하여 옷과 말, 노비를 준다.
태종 7년(1407) 일본 단주(丹州) 사신이 대궐에 나와서 하직.
회회 사문(이슬람교 승려) 도로가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
조선에서 살기를 원하기에 집을 주고 정착시킨다.
세종 즉위식에 이슬람교 지도자가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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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벨테브레(박연) 일행 3인이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도중에
제주도에 표류후 한양으로 압송후 귀화.
.
박연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무기를 제조.
병자호란 때 참전한 박연(벨테브레)만 생존.
귀화 후, 조선 여성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는다.
효종 4년(1653) 네덜란드 상선이 제주도 근해에서 파선
하멜 일행 38명이 한양으로 압송돼 훈련도감 군사로 소속.
청 사신이 행차할 때 하멜 일행이 난동을 부려 지방으로 귀양.
8명이 일본으로 탈출, 나머지는 훗날 돌아가고, 1명만 조선에 귀화.
세조 4년(1422) 유구국(오키나와) 국왕의 사자로
바다를 건너왔던 우중승이 병사해 제사를 지내준다.
성종 2년(1471) 유구국 사신에게 종2품 벼슬을 제수한다.
중국인은 통역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맡는다.
태종 13년(1413) 외교문서를 작성하던 당성이 사망한 기록.
.
태종 12년(1412) 이슬람인 회회 사문 도로에게
금강산 순흥, 김해 등지에서 수정을 캐도록 한다.
도로가 수정 제품을 만들어 왕에게 바쳐 좋아한다.
조선은 동북 국경지역에서 무력충돌이 잦았던
여진족을 달래기 위해 추장 가족들 중 신체 건강하고
무예가 뛰어난 인물을 볼모로 한양에 보내어 살게 하였다.
여진족 추장의 자제는 왕실 수비를 담당하는 시위대에 배치.
조선에서 선진문물을 습득하는 유학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세조 8년(1462) 귀화한 왜인
평순(平順), 피상의(皮尙宜)에게
본향을 내려주었던 기록이 보인다.
평순은 부친의 뒤를 이어 의사로 활동하다가
귀화 위구르인 설장수의 친척인 설순을 치료 중
의료사고로 사망하였기에 곤장 100대를 맞는다.
실록에는 일본인의 이름이 전부 평씨로 기록되어 있다.
풍신수길은 평수길, 가등청정은 평청정, 소서행장은 평행장.
세종 26년(1444) 귀화 왜인 등구랑은
조선 해안에 노략질하는 왜적을 잡는데
공을 세워 임금이 은대와 사모를 내려준다.
그는 유능한 조선기술자로
신형 전투함도 제작하였다.
조선의 외국인 정책은 바람직한 선진국형.
주로 상류층, 선진기술이나 문명 수준,
외국어 구사 능력, 품성 등을 심사.
능력 테스트를 거쳐 자신의 특성에 맞는 직종에 배치하여
1년간 근무시킨 후 인사고과를 통해 적격자만 귀화를 허가.
무자격자‧무능력자 등은 가차없이 추방,
능력 있는 자는 과거시험 문호도 개방
중요한 요직에 오를 기회도 준다.
특히 조선왕조가 외국인을 수용한 이유는
신기술‧신문명 입수의 방편, 인구증대 차원,
인재 확보, 외국어 통역과 외교문서 작성, 군사력 확보.
조선 초기 인구는 500만명이었지만
순조 17년(1817)에 800만명을 돌파한다.
돌림병과 역질에도 괜찮은 성과인 셈이다.
.
한편 귀화 외국인에 대한 특전도 남다르다.
혼인 통한 혼혈 정책, 생필품 지급, 세금 면제,
과거 통한 국가 요직 등용 등이 바로 그런 특혜.
.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에서 출세한 외국인은
수천명에 달할 만큼 방대하다.
함경도 회령 출신의 동청례 장군은
조선에 시위를 살던 여진족 동소로가무 아들로
성종 때 무과급제로 연산군 시절 왕실 경호대장에 발탁된다.
김해(우록) 김씨의 시조.,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인.,사야가.
가등청정의 선봉장으로 3천여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부산 상륙 7일만에 투항, 조선장수로 왜군을 물리친다.
병자호란 때 조총부대를 이끌고 누루하치군과 대적해 승리.
박정희 정권 때 법무‧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 씨가 그 후손.
아라비아인 삼가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제국공주의 시종.
장순룡은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귀화한 덕수 장씨의 시조이다.
후손으로 장명순 한국일보 사장, 장 경우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
청해 이씨 시조 이지란은 여진족.,쿠룬투란 티무르.
공민왕 20년 고려에 귀화하여 이성계 휘하에서 무공.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상들은 여진족이다.
.
조선에 귀화한 외국인 중에서
골치 아픈 범죄인 사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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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5년(1443) 귀화 여진족 김고을도개가
취중에 성균관 학생을 폭행, 곤장 80대형을 맞고,
그후 의금부에 하옥되었고, 그후 벼슬이 파직된다.
세종 26년(1444) 강도짓을 한 상호군 동나송개를 파면
관청 노비를 살해한 이두치와 함금음동 등 귀화인을 국문.
.
중종 15년(1520) 중종 쿠데타의 3대장 중 하나인
영의정 박원종의 첩을 향화인이 간통하려다 미수.
광해군 1년 용인 거주 향화인들이
조직폭력배 범죄를 벌이다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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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씨의., 총 갯수.
18세기 동국여지승람 277개 성씨.
이 가운데서
귀화인 성씨.
신라시대 40,
고려시대 60,
조선시대 24.
이는 국내 성씨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이고
우리나라에서 왕이 귀화인에게 내린 성씨는
지식인에게 내리는 포상의 성격이 강하였다.
1985년 현재 우리나라 성씨 274 성씨 중에서
130 성씨가 중국에서 온 귀화 성씨(歸化姓氏).
귀화 성씨 중 장(張)씨, 조(趙)씨 등 1백만명,
독고(獨孤)씨, 섭(葉)씨, 마(麻)씨 등 1,000명.
500명도 안되는 풍(馮)씨, 초(楚)씨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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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당시와
일본 귀화 성씨까지
합치면 130 성씨가 넘는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송(宋)나라 사람을 비롯하여,
여진(女眞), 거란(契丹), 안남(安南:베트남), 몽골,
위구르, 아랍. 조선시대에는 명(明)나라, 일본 등.
몽골계., 연안인씨(延安印氏)
여진계., 청해이씨(淸海李氏)
위구르계., 경주설씨(慶州卨氏)
아랍계., 덕수장씨(德水張氏)
베트남계.,화산이씨(花山李氏)
일본계., 우록김씨(友鹿金氏 /賜姓 金海金氏)
덧 말.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442' 귀화 성씨들이 있다.
한반도 고조선 민족의 뿌리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2014년 10월 3일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귀화인의 성씨는 442개로,
중국계 83, 일본계 139, 필리핀계 145.
그외, 75 성씨 중에 일본계가 가장 많다.
귀화 외국인은 혼인으로 인한 성씨.,96.2%
그중에 여자 성씨가 87.3%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이 귀화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 초.
한국문명교류연구소 분석 자료에 따르면
신라시대 40, 고려시대 60, 조선시대 30 성씨.
중국계로는 소주 가씨, 남양 갈씨, 청주 갈시, 용궁 곡씨.
일본계로는 우록 김씨, 함박 김씨, 괴산 점씨, 대마도 윤씨
위구르에서는 경주 설씨, 임천 이씨, 덕수 장씨가 파생되었다.
베트남에서는 화산 이씨, 정선 이씨 등.
특히 베트남의 화산 이씨의 조상인 이용상은
베트남 리왕조 개국황제 이태조 이공은 7대손.
6대 황제 영종 이천조의 일곱번째 아들.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 지도급 인사들이 극진히 모셨던.,왕손.
네덜란드계 대표적인 성씨는 원산 박씨.
조선 인조4년에 제주도에 표류해온 박연,
네덜란드 이름 '얀 야너스 벨테브레'의 후손.
조선 여성과 결혼해 1남 1녀를 둔 박연
훈련도감에 배치, 조선의 관직에 올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가야국 김수로왕의 비,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후(허황옥)가 있다.
48년 가야국에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
아들 10명을 낳고 두 아들에게는 허씨 성을 물려줬다.
그 자손이 김해 허씨, 하양 허씨, 양천 허씨, 태인 허씨.
미국계로는 최근 방송인이자 변호사 하일(로버트 할리).
1987년 한국 명현숙 씨와 결혼해 1997년 귀화한.,영도 하씨.
하일 본인을 포함해 그의 아들 하재선, 하재욱, 하재익.,총 4명.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 이참은 독일 이씨.,시조.
1986년 이한우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하였고
2001년 이름.,이참(독일 이름은 베른하르트 크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