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6 / 생거은혜 사거천국 (눅16:19-31)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고속도로를 운전하여 달려가는데 체증이 심해 차들이 꼼짝하지를 않습니다. 옆을 봤더니 한 줄이 그대로 비어 있기에 살짝 빠져서 신나서 달리는데 순찰차가 달려와 세우더니 이 길은 다인승 전용차선인데 위반했으니 면허증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순간 이 한국 양반이 한 번만 봐 달라고 얘길 해야겠는데 영어가 안돼서 얼른 콩글리시로 ‘Only once Look at me.’
우리 식으로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했더니 경찰이 ‘Are you Korean?’ 그러더니 역시나 콩글리시로 ‘There`s No Soup.’이라고 하더랍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국물도 없답니다.
미국 경찰이 콩글리시로 대응할 정도면 이전에도 한국분 누군가가 한 번만 봐달라며 ‘Only once Look at me.’를 써먹었던 모양인데, 길이 좀 막히고 힘들어도 옳은 길로 갔으면 될 걸 잘못된 길을 가다 보니 결국은 국물도 없게 됐습니다.
사실 세상 이치가 뭐든 원인이 있어야 결과도 있는 법이기에 뭐든 시작이 잘못됐으면 결과는 국물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집니다. 뭐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게고 출발이 있으면 종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정에 요행이란 없습니다. 오직 뿌린 대로 거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입니다. 한세상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살든 누구나 지옥 가는 건 싫어합니다. 교인 한 분이 전도하며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죽으면 끝이지 천국이 어딨고 지옥이 어딨단 거요?’라며 빈정댔습니다. 그래서 교인 분이 ‘그럼 선생님은 믿지 말고 지옥에 가세요.’ 그랬더니 상대방이 무슨 그런 저주를 하느냐며 발끈하더랍니다.
지옥에 간 부자 역시 살았을 땐 몰랐는데 막상 죽어 보니 지옥에 와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도무지 모르겠는 겁니다. 자기가 왜 지옥에 왔는지를.
여러분 생각엔 부자가 왜 지옥에 간 것 같습니까?
사실 천국과 지옥은 성경이 가르치는 엄숙한 주제입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듣고도 믿지 않는다면 그건 죄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했고, 야고보 사도는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부자가 왜 지옥엘 갔느냐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을 보면 부자가 특별히 악했다거나 죄를 지며 살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죽어 지옥엘 왔으니 한 번쯤은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만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답변해 주십니다. “네가 살아있는 동안 천국과 지옥을 대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관심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설문조사를 보면 천국에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조차도 간간이 지옥이란 단어는 떠올린다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지옥이란 단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까요?
현대로 접어들면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보라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정보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촌 곳곳에 전달되다 보니 이젠 웬만해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몰라서 못 믿었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에 대한 정보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믿기는 싫습니다. 그렇다 보니 겉으론 아닌 척해도 의식 깊은 곳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말이 깊이 박혀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플라톤은 말하기를 ‘누가 감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건 거기에 가야 할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누가 지옥이 없기를 제일 바랄까요? 바로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지옥 얘기만 나와도 질색합니다. 그러면서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선 아무것도 하질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부자의 경우에도 몰랐으면 죄가 안 되었겠지만 알면서도 안 믿었기에 부자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본문 24절을 보세요. 그가 아브라함을 향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인정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금식도 기도도 했겠지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이 땅에서 누릴 복을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엔 그는 하나님을 믿진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기에 죽어 그가 갈 곳은 당연히 지옥일 수밖에요.
그렇다면 부자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건 뭐로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27절 이후를 보면 부자가 자기 친인척들이라도 지옥에 오지 않게 하려고 그들에게 나사로를 메신저로 보내어 경고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러면서 31절에서는 말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자 역시도 생전에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지옥에 왔다는 것은 말슴을 들었으되 들은 것을 믿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되기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새 예루살렘 성에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었고 믿음대로 살지 못한 부자였기에 그의 이름은 애초부터 생명책에서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부자와 거지가 같이 언급되고 있는데 성경엔 이 거지 이름이 나사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의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부자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요? 구원받지 못한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살 동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헌데를 핥는 개 한 마리 외에는 나사로에게 관심 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도착하고 보니 나사로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있더라는 겁니다.
그럼 본문에서 나사로가 생전에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는 뭘까요?
그의 이름이 그 증거입니다. 히브리어로 나사로는 ‘엘레아자르’인데 ‘하나님이 도우신다. 또는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것, 기댈 것, 가졌고 누릴 것 하나 없는 나사로였기에 그는 오직 예수님만이 소망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나사로를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도 매사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 설사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웬만큼 잘 먹고 잘사는 정도라면 하나님을 찾을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잘 살고 잘되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못 먹고 못산다고 한다면 누군가로부터 혹은 무엇인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도울 이가 없고 그 무엇도 내게 힘이 되어줄 형편이 못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믿고 기도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생에서는 고난이 하나님을 찾게 만들며 가난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내게 있는 고난이나 가난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오래 지속되어 좋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고난과 가난의 기회를 이용해 하나님을 찾는 것. 그래서 사는 동안 고난이 아닌 평안을, 가난이 아닌 부요함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해 원하시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있어야 할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 만큼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말씀도 설교도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셨다면 여호와이레든, 여호와 닛시든, 아니면 하나님에 관해 아시는 게 뭐든 그 아는 것만이라도 믿어야 합니다. 그간 말씀과 설교를 들으셨다면 그간 들은 것만이라도 믿고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면 본문에서의 부자와 나사로는 인생에서의 두 부류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와 ‘하나님을 믿는 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어느 편에 속할까요?
여러분이라면 당연히 하나님 편에 속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이 도우시는, 즉 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도와주실만한 나사로인지는 한번 따져봐야 합니다.
어떤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나사로의 삶을 살고 계시나요?
본문을 읽다 보면 인생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22절에 나오는 ‘부자도 죽어’라는 말입니다. 부자 뒤에 붙은 토씨를 보세요. 부자‘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렇다고 죽는 게 끝은 아닙니다. 이는 불신자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예를 들어 여름만 되면 티비에선 납량특집이다 해서 귀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귀신을 인정한다는 게 뭡니까?
사람이 죽는 게 죽는 걸로만 끝나지 않음을 다들 알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다만 사람들은 죽음 이후를 추측만 할 뿐이지만 성경은 죽음 이후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심판’이란 말은 사전에 보면 ‘어떤 일이나 상황, 문제 따위를 자세히 조사하여 잘잘못을 밝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든 죽음 이후에는 잘잘못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데 이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잘잘못’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20:12절에 기록되기를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가요?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나라에 기록되어져 있습니까?
의심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한분 한분의 이름은 분명히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었기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도 아는 것인데 성경을 읽는다는 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동의어 아닌가요?
불신자들이 성경을 읽으려 하진 않을 거고 우린 이미 믿기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굳이 성경에 기록될 필요가 없는 얘기는 아닐는지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문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죽어서 지옥 가지 않으려면 살아서 예수님 믿어야 한다는 교훈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말에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두 지역의 풍수지리나 지역 특성과는 상관없는 말로 설화에 의하면 진천과 용인에 ‘추천석’이라는 사람이 각각 살고 있었는데 이름뿐만 아니라 태어난 생년월일시가 같았답니다.
하루는 저승사자가 용인 사는 추천석을 데려온다는 걸 진천의 추천석을 불러들였답니다. 이에 염라대왕이 진천 사람은 돌려보내고 용인 추천석을 다시 불러들이라 해서 진천 사람이 환생해서 집에 와보니 몸은 이미 땅속에 묻혀있더랍니다. 궁여지책으로 용인으로 달려가 이제 막 죽은 용인 추천석의 몸을 빌어 환생한 후에 용인 사람의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믿질 않더랍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천으로 돌아와 진짜 아내에게 “여보, 나요.”라고 했더니 낯선 이의 행동에 놀란 진천 아내가 관아에 고발을 해버렸답니다.
이튿날 두 아내를 앞에 두고 그간의 사정을 얘기한 추천석을 향해 원님은 “이승에는 영혼이 아니고, 육체가 인정되니, 너는 용인 추천석이다.”라는 판결을 내렸고 결국 추천석은 살았을 적엔 진천 사람이더니 죽어서는 용인 사람으로 살게 됐다 해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왜 이런 예화를 말씀드렸는가 하면 성도 된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도 ‘생거은혜 사거천국’이란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 성도로서의 우리는 살아서 살아야 할 자리가 따로 있고 죽어서 거해야 할 자리가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얘기는 단순히 죽었더니 누군 천국 가고 누군 지옥 가더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직 나사로의 히브리어 원뜻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도우신다.’
바로 이겁니다. 무릇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 살았을 때나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나사로여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당연히 우린 천국 갈 것입니다. 또한 사는 동안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우린 당연히 부자의 삶을 살 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편의상 부자라고 했다고 꼭 ‘돈의 개념’으로만 생각하시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세요. 구약 이사야 41:13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바이런의 시 가운데 “폭풍이 지나간 들판에도 꽃이 있다. 지진이 난 땅에도 샘이 있다. 초토 속에서도 풀은 돋아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이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적으론 그럴지라도 그의 시에는 중요한 하나가 빠졌습니다. 폭풍이든 지진이든 초토 속에서도 ‘하나님은 계신다.’가 빠져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빠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빠져서는 폭풍이나 지진이나 초토 속에서 그런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나에겐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이 매 순간 여러분의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혹 일이 잘못되었을 때면 주변에서 하는 말들 중에 ‘있어도 못하냐?’ ‘줘도 못 먹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하나님이 계셔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 건가요?
이젠 사는 동안 매사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나사로가 되기에만 온 맘과 믿음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사는 동안 언제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으신지요?
이제부턴 그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준비가 그닥 어렵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 자가 받으리라.”고. 그러므로 이젠 늘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예수님께 구하며 사세요. 이 한마디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이 한마디가 우리를 생거은혜 사거천국이게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든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는 동안 복 받은 부자 나사로로 세상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하나님에 관해 뭘 아셨든 그 아는 것만이라도 믿으시고, 그간 뭘 들었든 그 들은 말씀대로 만이라도 순종하여 죽어서는 천국 간 나사로로, 세상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나사로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