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심플리입니다..
모처럼 날씨 좋은 일요일 아침이네요~ ^^
어제 인사는 드렸죠.. ^^ 정말 많은 분들(5명?)이 새로 팀에 들어오시면서 갑자기 게시판이 5월 한창철에 꽃가게마냥 북적거리고 있네요.. ^^
약속드린바대로 열심히 글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냥 잡글 간단히 적고 가도 되지만, 그래도 마음 먹고 쓰는 글인데, 나름 여러 분들의 읽을거리를 마련해보고자, 10년도 더 지난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구단의 아홉번 우승의 이야기를 제 주관적인 기억으로 써내려가보려고 합니다.
저는 뭐 스포츠 기자도 아니고, 그냥 심심한김에 쓰는 취미활동이라 전문적인 자료 찾고 분석하고 할 능력은 없네요.. 그래서 그냥 제 기억속에서 생각나는것들만 가지고 썰을 한번 풀겠습니다. 물론 간단한 인터넷 검색 정도는 활용하겠구요.. ^^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전 해태의 골수팬입니다. 85년 무렵 선동렬이 입단한다는 소식에 당시 초딩으로는 상상할수없었던 거금 3천원을 들여서 주간 야구잡지를 정기구독 신청했었던 열성 팬이였죠.. 하지만 2000년이후론 KBO보다는 MLB를 즐겨보게 됐습니다. 당시 새로 시작한 천리안 메이저리그 동호회의 영향도 컸지만, 왠지 돈에 팔려간 해태 구단이 서글프더라구요.. 일본에서 별다른 활약을 못하던 이종범선수가 구단이 부자그룹에 인수되자마자 냉큼 복귀하는 모양세도 왠지 마음에 안들었고.. 결정적으로 기아 타이거즈라는팀은 와이넥의 멀끔한 유니폼이 희마리가 없어보이는겁니다. 사실 가을잔치만 나가면 펄펄 날던 근성의 해태 정신은 사라지고 한국시리즈 최장 무진출 팀의 불명예만을 가지게 된, 최근엔 그나마 포스트시즌 진출조차 힘겨워하는 부진한 팀 성적 탓도 들라면 들겠지만.. 전 해태 암흑기로 통하는 1998~2000 시즌 에도 최상덕과 홍현우를 보러 잠실 수원경기는 가능한한 챙겨서 구경갔었으니까.. 성적보다 팀의 분위기, 해태정신.. 뭐 이런 영향이 더 큰것 같습니다..
암튼 예전보다는 관심이 떨어진 프로야구지만, 그래도 이종범과 장성호가 뛰는 팀이고.. 더군다나 7년만에 복귀한 "에이스오브에이스" 이대진의 활약이 반가워서라도 저는 계속 타이거즈 팬으로 남을것 같습니다..
하여.. 제가 들려드리고 싶은건 80~90년대 잘 나갔던 시절의 해태 타이거즈의 이야기예요.. 부산 출신의 감독과 낙하산 인사의 프런트를 두고도 다른 어느 팀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끈끈한 팀웍과 탄탄한 위계질서를 갖췄던 팀.. 전라도 특유의 살가움과 깡따구로 항상 전력 이상의 위력을 과시했던.. 그래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받은 씻을수 없던 상처에 소금 대신 승리라는 마약으로 대리만족을 시켜줬던.. 단지 한낱 퍼모먼스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해태라는 팀의 의미는.. 그렇게 특별했던 기억이였습니다..
제가 해태 팬이 된 사연을 말씀드리자면.. 사실 전 82년 무렵엔 학교들어가기 전이라 야구는 잘 몰랐었거든요.. 그해에 박철순의 OB가 우승했다는건 알았는지 어쨌든지, 암튼 병맥주 한박스를 싼 값에 사왔던 기억만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야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된건 프로야구 두번째 시즌인 1983년 무렵이였죠.. 당시 6살이였던 저는 집안 형편은 변변찮았지만, 자식교육에는 꽤나 열성적이셨던 어머니와 열심히 한글 받아쓰기를 하던 시절이였구요.. 그때 자주다니던 충장로 화니백화점(지금은 망한지 10년도 넘었다던데;; ㅋ)에 있던 뉴욕제과?에서 빵 사먹는걸 인생의 큰 낙으로 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이 바로 김봉연 선수였죠..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과 여섯살배기 꼬마와의 운명적인? (저한테만;-_-ㅋ) 조우는 저를 프로야구의 세계로 빠져들게했던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글의 감질맛을 위해서.. 우선 여기서 끊고 뒤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없더라도 그냥 타이거즈 팬의 옛날 이야기로 생각하시고 읽어주세요..
글엄....
첫댓글 선데이님이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네요^^ 화니백화점 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들어봐요 ㅋ
ㅎㅎ 해태라 저도 골수팬이지만 그래도 기아도 좋아합니다 ㅎㅎㅎ 진우 부산서 야구하면 가라 기아응원하다가 맞지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