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 중앙박물관 신석기실
신석기실에서는 빙하기가 끝나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면서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약 1만 년 전 무렵의 인류는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여 물이 육지로 유입되면서, 바다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적에서 출토된 낚싯바늘을 비롯한 다양한 어로 도구들로 당시의 어로 생활을 추정해 볼 수 있고 갈판, 갈돌, 괭이, 낫 등의 석기를 보면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계와 경제 활동 방법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 토기들을 비교해 볼 수 있으며, 꾸미개나 토우와 같은 예술품 등에서 신석기인의 정신세계도 엿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동식물 자원을 효과적으로 운반, 보관, 조리하기 위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도구 제작 기술도 나타났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물과 자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강변이나 바닷가, 육지로부터 가까운 섬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로써 당시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 사냥, 식물채집으로 먹을거리를 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시대에는 가축을 길렀으며 초보적인 농경도 시작했다. 또한 일본 열도, 중국 동북 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 주변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전시실 소장품
고산리식토기 :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는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무늬가 없는 갈색 토기입니다. 흔히 고산리식 토기라 부르는 이 토기는 바탕흙에 넣은 식물 줄기나 짐승 털 등이 굽는 과정에서 모두 타 버리고 자국만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석기 제작 기술인 눌러떼기 방식으로 앞뒷면을 손질한 화살촉과 함께 출토되는 고산리식 토기는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제주 고산리 유적이 약 1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작 연대도 앞당겨졌습니다.
이음낚시 : 이음낚시는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고기잡이 도구입니다. 축과 바늘을 각각 돌과 동물 뼈로 만든 뒤 둘을 끈으로 이은 이음낚시는 낚시를 하다가 바늘이 부러졌을 때 바늘만 바꾸면 다시 쓸 수 있습니다. 돌로 만든 축은 봉돌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축 위쪽에는 낚싯줄을 매기 편하도록 홈이 파여 있습니다. 이음낚시는 그 크기로 보아 대구나 다랑어 등 큰 물고기를 낚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흑요석으로 만든 도구 : 흑요석은 매우 단단한 돌이지만 쪼개면 날카로운 면을 얻을 수 있어서 구석기 시대부터 석기의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화산 지대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흑요석은 신석기 시대의 주요한 교역품 중 하나로, 원산지마다 구성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그 성분을 분석하면 지역 사이의 문화 교류 양상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동남 해안에서 확인되는 흑요석은 일본 규슈 지역에서 온 것으로 신석기 시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신석기 배 : 2003년 9월 12일,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매미’, 그 위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태풍이 휩쓸고 간 경남 창녕군 비봉리. 이듬해 봄이 되자 수리시설 공사가 시작되었는데요.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고고학 전공자가 흙 속에서 신석기시대 조개무지와 토기 조각들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유적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시대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될지 말이죠!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배가 발견되어 큰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비봉리 유적에서는 모두 두 척의 배가 발견됩니다. 지금은 내륙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해 있었던 거죠.
2010년 한차례 더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거의 완전한 형태의 노가 발견되기도 했답니다.
비봉리에서 발견된 배는 200년이나 된 소나무를 반으로 잘라 파낸 통나무 배였습니다.
기원전 6,000년 경의 배로 세계적으로도 오래된 배에 속해요. 이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먼바다로 나간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태풍의 피해 때문에 우연히 찾아내게 된 비봉리 유적. 이 비봉리 유적이 주목받은 이유는 배뿐만이 아니었어요. 똥 화석, 망태기, 멧돼지 그림을 새긴 토기 조각 등 새로운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태풍은 우리에게 큰 아픔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기적 같은 선물을 주고 간 셈이네요.
갈판·갈돌 : 갈돌은 갈판과 짝을 이루어 열매나 곡물 등의 껍질을 벗기거나 으깨는 데 사용된 도구입니다. 넓고 납작한 갈판에 열매나 알곡 등을 올려놓고 길쭉한 갈돌을 양손으로 잡고 밀고 당기는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갈돌과 갈판은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도토리 같은 견과류의 가공에 사용되다가 이후 농경이 점차 증가하면서 곡물 가공에도 쓰였습니다. 갈돌은 알곡을 빻는 공이로, 석기를 만드는 망치로, 조개껍데기를 깨는 도구로도 사용되는 등 다양한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뒤지개 : 뒤지개는 밭갈이나 움집을 지을 때 쓰였던 땅을 파는 도구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뒤지개는 크게 따비형과 괭이형으로 구분됩니다. 따비형 뒤지개는 신발 바닥 모양의 납작한 날을 지녔는데, 나무 자루와 평행하게 날을 묶어서 오늘날의 삽이나 가래처럼 사용했습니다. 무겁고 다소 둔탁한 날을 나무 자루와 수직 방향으로 묶을 수 있도록 어깨 부분이 두드러진 괭이형 뒤지개는 오늘날의 괭이나 호미처럼 사용했습니다. 뒤지개는 신석기 시대의 농경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입니다.
가락바퀴 : 가락바퀴는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드는 가장 원시적인 방적 도구입니다. 가락바퀴 한가운데 있는 구멍에 막대를 끼워 축을 만들고 섬유를 축에 이어 회전시키면서 실을 만들었습니다.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그물이 찍힌 토기 조각을 보면, 가락바퀴로 2~3가닥의 실을 꼬아 그물감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흙으로 만든 신석기 시대의 가락바퀴는 지름이 4~5cm 정도이고, 형태는 원판 모양, 구슬 모양, 원추 모양, 주판알 모양 등으로 다양합니다.
빗살무늬토기 : 빗살무늬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 무렵에 만들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V자 모양이고, 아가리・몸통・바닥 세 부분으로 구분해 다양한 무늬를 채워 넣었습니다. 신석기시대 토기에는 기하학무늬, 식물무늬, 동물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늬를 장식할 때는 토기 겉면에 그리거나 새겨 넣거나 점토 띠를 덧붙이는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중국 화중華中 이남, 인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동식물이나 기하학무늬가 주류를 이룹니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 지역, 시베리아, 북유럽 등지에서는 무늬를 새겨 넣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점토 띠를 붙이는 방식은 우리나라와 시베리아, 일본열도에서 확인됩니다. 좌우 대칭과 균형감을 고려한 무늬 구성은 신석기인의 뛰어난 공간 구성력과 미적 감각, 수준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 줍니다. 특히 빗살무늬 토기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기하학무늬는 신석기인의 자연관이 추상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석기인은 우연한 기회에 점토를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성질을 이용해 토기를 발명해 냈습니다. 토기를 사용하면서 음식을 저장하고 조리할 수 있게 되었고, 정착 생활을 하며 이전까지 이용하지 않던 새로운 식물 자원을 활용하는 등 인류의 생활 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덧무늬토기 : 토기 겉면에 진흙띠를 덧붙이거나 겉면을 손끝으로 집어 눌러 돋게 하여 여러 가지 무늬를 만든 덧무늬토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덧무늬토기는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기원전 3,500년 무렵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전시된 덧무늬토기는 세모꼴의 무늬가 몸통 중간까지 연속되며 안팎으로 덧띠가 채워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모꼴에 선이 여러 겹 채워진 집선무늬는 신석기 시대에 남해안 지역에서 만든 토기의 특징으로 바다 건너 일본의 조몬 토기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발찌 : 신석기 시대의 장신구로, 통영 연대도 유적 7호 무덤에서 확인된 유골의 오른쪽 발목 부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발찌는 돌고래, 수달, 너구리 등의 이빨 뿌리 부분을 다듬고 구멍을 뚫은 다음에 실로 꿰어 찼던 것으로 보입니다. 발찌와 같은 신석기 시대의 장신구는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소속 집단의 신앙이나 의례 등에 따른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즉, 변하지 않는 돌을 지님으로써 영혼 불멸을 염원하거나, 동물의 뼈나 이빨 등을 지님으로써 그 동물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 깃들기를 기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가비 팔찌 : 조개팔찌는 한반도에서 흔히 보이는 신석기 시대의 장신구로 주로 동북 지역과 남해안 지역에서 출토됩니다. 조개팔찌는 투박조개, 피조개, 큰배말조개, 새꼬막 등의 껍데기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투박조개의 껍데기로 만든 것이 가장 많습니다. 조개껍데기의 정상부를 깬 다음 갈아서 고리처럼 만들어 사용한 조개팔찌는 대부분 타원형이며 고리 안쪽 지름은 4~7cm 정도입니다. 조개팔찌는 부산 동삼동 유적을 비롯한 여러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특히 여수 안도 조개더미에서는 팔목에 4개의 조개팔찌를 낀 성인 여성의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한국의 신석기문화(新石器文化)
한국의 신석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신석기문화는 토기의 변화양상을 볼 때 대략 초기, 전기, 중기, 후기의 4단계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보고 있다.
신석기 초기문화 : 후빙기에 돌입한지 얼마 안 되는 B.C. 6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데 이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남해안지방과 양양 오산리, 선봉 서포항, 의주 미송리 등에서 찾아진다.
남해안지방의 유적은 대부분 조개무지(貝塚)로 남아있는데 부산 동삼동, 김해 범방과 북정, 울산 신암리, 통영의 욕지도·연대도·상노대도, 여천 돌산 송도 유적 등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로 여겨지는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및 공반유물이 찾아졌다.
덧무늬는 토기 표면에 덧띠를 따로 덧붙이는 것을 말하는데 순수하게 가는 덧띠 혹은 굵은 덧띠를 붙이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토기벽에 덧띠를 붙이고 아삭아삭 새겨나가거나, 하나의 토기에 덧무늬와 새김무늬(沈線文), 누른무늬(押引·押捺文)가 같이 베풀어진 것이 많다. 덧무늬에 다른 무늬가 첨가된 것이 더 나중 시기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함께 토기 몸체에 무늬가 전혀 베풀어지지 않은 민패토기도 많이 나오므로 무늬가 적다는 것이 남해안 토기의 한 특징이 되고 있다. 토기들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대개 납작밑을 가지고 있다. 석기로는 찌르개, 화살촉 등 사냥용 석기와 찍개, 긁개, 밀개 등 조리 및 일반용구도 갖추어져 나오며 작살, 그물추, 묶음낚시 등 물고기잡이 도구도 나오나 이른 시기에는 아직 어구(漁具)는 많지 않다. 일반 뼈연모로서 섬세한 뼈바늘, 뼈송곳, 삿바늘, 긁개, 밀개, 찌르개 등도 많이 만들어졌다.
남해안지방에서 출토되는 문화유물과 점유기간을 잘 지시해주는 자연유물들의 증거를 종합해보면 대체로 연중 거주했던 붙박이형 주거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강원 지역의 양양 오산리에서는 부속시설로 보이는 석기작업장을 갖춘 원형의 지상가옥이 10여 채 가량 나왔다. 토기들은 입술 가까이부터 3~4줄 가량 찍은무늬를 베푼 것이 가장 많으며 납작밑에 무늬 없는 토기들도 많은데 토기의 생김새는 남해안지방과 닮았다. 도끼, 돌칼, 화살촉, 석창, 묶음낚시, 돌톱, 추모양 석기, 그물추, 숫돌, 갈돌, 찍개, 긁개 등의 석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낚시의 허리부분(軸)과 바늘부분(針)을 따로 만들어 결합시키는 묶음낚시의 허리부분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매우 독특한 생김새의 추형석기(3.3~7㎝정도, 긴 것은 10㎝가 넘음)는 줄을 매는 홈이 파이고 전면이 갈려 있다. 뾰족한 끝으로 향하는 한 부분이 편평하게 다듬어져 있어 무엇에 붙들어매어 던지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포항 유적은 조개무지이면서 집자리들이 나타났는데 1기에 속하는 9호 집자리는 모가 죽은 장방형(抹角長方形)으로 넓이가 72㎡나 되는 큰 집이다. 이곳에서 나온 토기는 많지 않으며 곧은 입술에 납작밑을 한 바리모양(鉢形)이며 무늬는 입술 가까이에 4~5줄의 빗금을 눌러 찍은 것이 대표적이다. 서포항의 석기조합 및 뼈도구는 남해안 및 오산리 유적과 비슷하다.
의주 미송리 동굴유적은 1990년에 들어와 북한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 유적(B.C. 6000년경)으로 확정되었다. 그 근거는 미송리에서 나온 2점의 ‘之’자 무늬(북한의 “짧은이음 구불무늬”)가 요동지방의 新樂나 小珠山에서 나오는 것과 동시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몇 점의 무늬는 한국 전역에서 나오는 빗살무늬와 생김새가 같다. 미송리에서는 그물추 2점과 화살촉 반제품, 그리고 뼈송곳 3점이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초기 신석기문화 요소들은 대개 덧무늬, 민무늬, 찍은 무늬, 납작밑 토기, 다양한 뗀석기, 일부만 마연한 석기, 다양한 뼈도구 등으로 종합된다. 초기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자연, 인공유물조합으로 보면 사냥, 채집, 물고기잡이를 주로 하면서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냥의 주 대상은 사슴과와 멧돼지이며 고래, 바다사자, 돌고래 등의 큰 바다짐승도 포획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 물고기와 조가비가 다양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신석기 전기문화 : B.C. 4500년 무렵부터 B.C. 3500년 무렵까지 지속되는 문화로서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가 출현하는 시기이다. 이 무렵은 기후가 무척 따뜻했다고 추정되며 이러한 환경변화에 따라 전기의 살림살이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지방에서는 위의 초기 유적들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나타난다. 연대도에서는 집단무덤이 나와 매우 중요하다. 무덤은 대개 구덩을 파고 큼직한 냇돌(川石) 등을 깐 뒤, 시신을 놓고 그 위를 작은 돌, 고운 흙과 토기조각 등의 유물로 덮은 형식이다. 대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머리를 틀어 서침을 하였으며 펴묻기(伸展葬)를 하였으나 엎드려 묻은 것(俯身葬)도 있다. 한사람씩 묻었으나 2호 무덤의 경우 합장의 풍습도 보여준다. 껴묻거리(副葬品)도 많이 나왔다. 토기는 입술 및 그 가까운 부분에 미세한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이나 빗금무늬(斜線列文)를 찍거나 누른 종류가 대표되며 이러한 시문방식이 사용되는 시기를 ‘부산기’라고 한다. 대체로 무늬들이 매우 작고 미세하며 따라서 그릇의 두께도 얇은 경우가 많다. 토기는 목이 생기거나 손잡이가 붙는 경우가 많다.
이 무렵이 되면 남해안지방에서는 뗀석기의 비중이 줄어드나 석기의 종류는 이전보다 다양해져 타제의 돌도끼, 자귀(手斧), 화살촉 등이 나타나며 뼈로 만든 물고기잡이 도구(낚시·작살 등), 생활용구 등이 나온다. 이 시기에는 물고기와 조개종류 등 자연유물의 출토가 매우 늘어나는데, 이는 물고기잡이 도구의 증가와 일치하는 현상이다.
오산리 토기는 몸체가 줄어들며 바닥이 상대적으로 넓어져 안정감을 주게 되었다. 목단지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석기들은 묶음낚시, 돌칼, 추모양 석기들이 나와 이전과 거의 같다. 서포항에서는 원형 집자리 4채가 나왔다. 여기서 나온 토기들은 모두 납작밑이며 짧은 목이 생겨난다. 무늬는 몸체부분에까지 베풀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민패토기도 나오며 새김무늬, 특히 어골문이 쓰이기 시작한다.
전기 무렵에는 서해안지방의 유적이 많아진다. 서해안의 암사동에서도 B.C. 5000년을 넘어서는 연대값들이 있으나 많지 않다 보니 그 중심연대는 신석기 전기를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는 가장 전형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만들어져 유명한데 평남 궁산리와 황해도 봉산 지탑리, 한강유역의 암사동과 미사리 유적 등의 집자리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의 집자리들은 평면이 대개 원형 내지는 모죽은 네모꼴이다. 중부 내륙지방에서 보자면 동굴이나 바위그늘이 주거지대용으로 여전히 사용되기도 하는데 상시 바위그늘이 초기~전기에 해당한다.
서해안지방의 토기들은 뾰족밑에 반쪽계란 모습으로서 그 생김새의 변천 과정을 이용한 시기구분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 즉 빗살무늬토기는 입술·몸체·밑부분의 세 부위로 나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늬 베푸는 면적이 줄어들어 밑에서부터 생략되어 나간다는 것과 각 부위별로 독특하게 베풀어지던 무늬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규율이 흐트러져 간다는 것이다. 전기의 토기는 모두 뾰족밑이며 입술부분에 평행밀집의 빗금무늬(斜短線文·點線列文 등)를, 몸체에 어골문 또는 그 변형이라 여겨지는 평행사선문이나 사내끼무늬(斜格子文), 밑부분에는 방사선식 단선무늬나 평행사선문이 베풀어지는 것이 정형적(定型的)이다. 이때 입술과 몸체 사이에 이른바 종속구연문이라고 하는 점물결무늬(波狀點線文·重弧文) 등이 들어가기도 한다. 서해안지방 빗살무늬토기들의 크기는 대부분 남해안 및 서포항 지역의 납작밑 토기보다 커서 저장기능의 역할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석기가 많이 출토되는 곳으로는 궁산, 지탑리, 암사동, 상시 등이 있다. 대부분의 유적들에서 간화살촉이 가장 많이 나오며 버들잎 모양의 긴 화살촉 같은 찔개살도 많이 출토된다. 서해안지방에서는 물고기잡이 도구로 특히 이러한 찔개살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 같고 이와 함께 납작한 자갈돌의 양면이나 네 면을 쪼아만드는 그물추도 많이 나오고 있다. 도끼는 날부분만 간 사릉부(四稜斧)가 위주이나 단면이 렌즈 모양의 편평도끼도 있다. 그리고 대패날, 끌, 자귀, 창끝, 마치, 크고 작은 숫돌과 찰절구(擦切具), 닦음돌, 발화석 등 다양하며 집자리 안에서 석재를 같은 크기로 잘라놓은 반제품도 나온다. 갈돌·갈판 세트도 무척 많이 나오는데 이들은 지탑리 2지구의 보습과 낫, 금탄리의 괭이·보습, 암사동의 괭이·돌낫·보습 등과 함께 농사짓기로 인한 곡물가공의 의존도가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탑리와 마산리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나오기도 하였다.
뼈연모는 궁산과 상시에서 나왔다. 궁산에서는 뼈송곳(찌르개)과 예새가 가장 많이 나왔는데 짐승의 해체나 조리에도 많이 쓰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슴뿔로 된 뿔괭이와 뒤지개 등 농사도구가 나온 것이다. 또 산돼지의 송곳니로 만든 낫 6점과 함께 칼, 삿바늘, 베실이 꿰여 있는 뼈바늘과 짐승뼈 반제품도 나와 아기자기한 신석기 살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상시에서는 찌르개, 송곳, 창끝, 긁개, 밀개, 째개 등의 뼈연모가 있고 자라의 배밑 판을 이용하여 구멍을 뚫고 만든 치레걸이, 투박조개 팔찌 등이 나왔다. 투박조개는 원래 남동해안이 산지인데 상시와 같은 내륙지방에서 전복 등의 바다조개와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남동해안 지방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전기 무렵의 남해안지방에서 보자면 모든 유물들이 양적·질적 측면에서 확대되며 무덤도 나타나 바다에 의존하는 붙박이 살림이 궤도에 올랐다고 하겠다. 이시기에 해당하는 연대도 무덤은 신석기시대 집단무덤으로 처음 나온 확실한 예로서 당시의 사회구조나 풍습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또 형질인류학적 연구 자료가 많아져 앞으로 한국민족의 기원 연구에 기여할 바가 크다.
신석기 중기문화 : 남해안지방에서는 굵은 빗살무늬라고 할 수 있는 태선심선문(太線深線文)을 베푼 토기들이 주로 나오는 시기로서 ‘두도기’라고도 불리운다. 한국의 전 지역에서 이 시기의 흔적이 있어 신석기 중기문화의 확산을 알 수 있다. 중부 내륙지방에서 보자면 도담 금굴 유적 등에서 빗살무늬토기, 석기 등이 찾아지고 있어 아직도 동굴이 사람들의 활동지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중기의 조개무지로는 김해 수가리 조개무지 등이 유명하며 돌산 송도 유적에서는 평균 5사람 정도가 기거할 수 있는 집자리 2채가 나왔다. 내륙지방의 합천 봉계리에서도 원형의 집자리가 많이 찾아졌다.
이 무렵에 해당하는 탄소연대는 수가리에서 많이 얻어졌는데 4510 B.P., 4490 B.P., 4430 B.P., 4380 B.P., 4290 B.P. 등이 나와 대략 B.C. 3000년을 전후할 것으로 보인다.
오산리에서도 서해안 지역 계통의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나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서포항에서는 집자리가 모두 네모꼴로 바뀌는 변화를 겪는데 이것이 동북지방 신석기 중기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서포항 토기에서는 타래무늬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서해안지방의 점물결무늬와 같이 곡선무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서포항의 석기는 괭이와 삽, 화살촉, 칼, 긁개, 그물추, 도끼, 자귀, 끌, 마치, 숫돌, 갈돌, 갈판 등으로 다양하며 이전보다 석기의 종류가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칼이나 화살촉, 긁개 등에 흑요석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뼈연모로는 창끝, 화살촉, 작살, 찔개살, 흘리개, 송곳, 예새, 바늘 등이 있어 이전 시기의 것들과 같다. 서해안지방에서 신석기 중기의 토기들은 입술 바로 아래에 점물결무늬가 발전하여 허리 전체에 베풀어지거나 입술부분에 새로이 사내끼, 삿자리무늬 등이 베풀어지기도 하나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무늬 베푸는 면적이 줄어들어 밑부분의 무늬가 없어지는 점, 입술과 몸체부분이 전부 어골문으로 채워지는 점, 그리고 무늬가 정형성을 잃고 성의없이 베풀어진 점 등이다. 대야 밑처럼 완만한 납작밑도 나오고 있다.
신석기 중기의 흔적은 곳에 따라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상노대도 상리 유적의 경우 신석기 초기-전기-후(말)기의 자취는 강하나 중기는 빠져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에 최고조에 달한 해수면상승으로 사람들이 활동장소를 옮겨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대신 동삼동에서 보자면 물고기잡이가 계속 이루어지면서도 짐승사냥의 증거가 더욱 늘어나 살림의 증가현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괭이, 반달칼 등도 출토되어 이 시기에 농사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서포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신석기 중기 무렵에는 서해안지방의 전형 빗살무늬토기문화가 전국으로 보급·확산되는 가운데 농사짓기도 전국적으로 시험되고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최근 발굴된 일산지역의 토탄층에서는 대형의 벼꽃가루가 나와 이 무렵 벼농사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봉계리 집자리에서는 도토리, 호두, 살구, 보리수 열매 등이 탄화된 채로 나와 여러 계절에 걸친 채집활동을 보여준다.
신석기 후기문화 : 남해안지방에서는 매우 특징 있게 생긴 겹입술토기가 만들어지는데 이 시기를 ‘영도기’라고도 한다. 겹입술토기는 모래질이 매우 많이 포함된 흙으로 만들어 단단하고 사각거리며, 크고 무겁고 검은 빛을 띈다. 입술부분을 1겹 덧대어 겹입술로 만든 것이며 이른 무문토기의 하나인 겹입술의 팽이형토기(角形土器)와 관계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겹입술토기는 남해안지방에서 조사된 거의 모든 유적에서 찾아져서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던 시기임을 잘 보여준다. 겹입술토기만의 층으로 이루어진 단순 유적들도 있는데 사천 구평리, 부산 금곡동 율리, 김해 농소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율리 바위그늘의 경우 사람들이 살기도 하였고 또 무덤으로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수가리의 경우도 태선문 시기는 짧으며 겹입술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수가리 등에서 보면 두터운 겹입술 아래에 띄엄띄엄 빗금무늬를 베풀었지만 점차 후기로 가면서 겹입술의 모양이 흐트러지면 구평리, 율리 등에서 보듯이 다시 홑입술에 가깝게 회귀하며 입술은 바라지고 무늬가 거의 베풀어지지 않게 된다. 즉 무문토기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수가리 3문화층, 율리, 상노대도 2층, 동삼동 영도기에서 재어진 방사성탄소연대로 보아 대개 B.C. 1500년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 오면 남해안지방에서도 보습, 괭이, 여러 간석기, 갈돌, 갈판, 주먹괭이 등 농사짓기와 관련되는 도구들이 자주 나타나서 살림살이가 전환되어 갔음을 유추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상노대도의 경우를 참고하면 짐승뼈, 물고기, 조가비의 이용도 늘어난다. 서포항에서는 계속해서 네모집이 만들어지며 토기는 납작한 사발류가 많으며 들린굽이 출현한다. 늦은 시기의 표지(標識) 중 하나인 번개무늬(雷文)가 나왔으며 더 늦은 시기로 가면 무늬 없는 무문토기들이 더욱 많아지다가 마침내 토기 겉면을 다듬는 끝손질(表面處理)이 등장한다. 즉 토기 겉면을 매끄럽게 갈고 갈색 윤이 나게 한 갈색 간그릇이 나오게 된다.
이 시기의 석기로는 괭이, 갈돌, 갈판, 활촉, 그물추, 칼, 도끼, 자귀, 끌, 마치 등이 나와 전과 별다름 없으나 손잡이 아래가 옆으로 퍼져 어깨가 붙은 것처럼 보이며 대표적인 농사도구로 여겨지는 곰배괭이가 나온다. 또 새로이 대패날이 나온다. 이 무렵에 해당하는 농포나 무산 범의 구석 유적에서는 칼, 찌르개, 긁개, 화살촉, 여러 점의 돌날 등 흑요석 석기가 많이 나왔다. 후기의 뼈연모로는 활촉, 창끝, 멧돼지 이빨로 만든 칼, 작살, 낚시, 찔개살, 예새, 송곳, 바늘, 고래뼈로 만든 노(櫓), 뼈숟가락 등이 나온다. 이때부터 굽은 낚시도 많이 나오고 있다. 가장 늦은 시기가 되면 뼈바늘이 들어 있는 뼈바늘통, 뿔괭이, 조개껍질을 이용한 반달돌칼도 만들어졌다.
서해안지방에서 신석기 후기의 토기는 소야도, 덕적도 등 서해도서지방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았음을 보여준다. 토기는 무늬를 베푸는 면적이 크게 줄어들어 주로 입술부분에만 무늬가 새겨지며, 이것도 매우 퇴화된 양식으로 되어 무늬가 거칠고 엉성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또 1~2줄의 빗금 무늬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결국은 어골무늬가 해체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른 지역의 후기 토기와 마찬가지로 모두 무문화(無文化)의 경향을 띄고 있는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대규모의 집자리인 남경과 금탄리 유적이 포함된다. 남경에서는 31호 집자리(공공건물)에서 탄화된 좁쌀과 함께 3,000여 개의 그물추, 갈돌대 12대 등이 나와 신석기 말의 거창한 살림을 보여준다. 석면, 활석 등 태토에 첨가되는 여러 종류의 비짐이 점차 모래 한가지로 단일화되어간다. 그릇의 무문화 경향으로 보나 비짐의 단일화 경향으로 보나 다음 시기인 민무늬토기로의 점진적인 변이를 보여주는 시기이다.
당시의 관념형태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술품 및 치레걸이가 있는데, 신석기시대에서는 아직 치레걸이(裝身具)나 조각품이 많지 않으며 연구도 거의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신석기 후기로 가면서 출토 예가 늘어나는데 서포항과 농포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것들이 유명하다. 생활도구로 쓰면서 치레걸이가 되는 것들이 있으나 일종의 호신부, 즉 당시의 신앙과 관련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서포항 3기(신석기 중기)부터 출토된다. 뱀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길고 구멍뚫은 조각들은 여성을 상징한다고 해석된 바 있다.
또 사람얼굴 조각품도 나오고 있다. 선사시대에 있어서 사람얼굴의 상징이란 때로는 구멍 3개로도 표현되는 만큼 간단한데서 출발하며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듯 한데 이는 동삼동, 오산리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삼동의 것은 국자 가리비의 껍질에 커다랗게 3개의 구멍을 뚫어 사람을 표현한 것이며 오산리에서는 흙으로 만든 것인데 꾹꾹 눌러서 눈과 코, 입을 표시하고 있다. 그밖에 농포동에서는 흙으로 만든 여성과 개의 머리, 납석으로 만든 새의 조각이 나왔다.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울산 신암리의 흙으로 빚은 여성 조각과 부산 금곡동 율리의 흙으로 빚은 자안패 모양의 조각이 있다. 무덤의 껴묻거리로는 투박조개로 만든 팔찌(발찌)가 가장 많다. 신석기시대의 조각품이나 치레걸이 등은 말 그대로 치레걸이, 또는 호신부, 껴묻거리 등으로 쓰이거나 어떤 기원(풍요나 다산 등의), 관념(토템 등)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 정도로만 추측되고 있다. 앞으로 많은 연구가 잇따라야 할 것이다.
국립 중앙박물관 신석기실이 위치한
1층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