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저주의 기준이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사랑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빠지지 않고 기록된 것이 엔 크리스토스 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랑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사도는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외에 다른 어떤 사랑과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보여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예수, 그 복음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을 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랑은 없어요, 하나님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내 몸을 불태울지라도 그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우리 인간은 동기만 부여해주면 몸에 신나를 부을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몸을 불태운다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한 마디로 개죽음입니다. 그건 사랑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즘 걱정이 되는 것이 뭔가 하면 기독교에 이념과 사상이 들어온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 매체들이 세상 이념에 물들었습니다. 남북통일, 노동자의 인권, 민주화등을 외치고 목사란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몰려가는데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자기 사상이나 이념을 실현하려고 몸을 불태워도 하나님은 그거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저주받아야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믿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것 모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담을 그릇도 못 되고 그 사랑을 알지도 못합니다. 이 땅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마중물처럼 먼저 부어져야 사랑을 겨우 알게 됩니다. 사랑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그냥 죽은 시체입니다. 죽은 자들이 무얼 알겠습니까? 사랑(언약의 피, 은혜, 믿음, 용서..)이 죽은 시체에 부어지면 그 시체가 살아납니다. 그렇게 살아나면 하나님에 대해 눈과 귀가 열리는 거에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예언자)입니다. 앞일을 말하는 예언자(豫言者)가 아니라 예언자(預言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같이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내가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놓으시고 말씀을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담긴 사람들을 성경은 직분자라고 합니다. 구약의 표현으로는 이스라엘의 병기 든 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난다는 표현을 하는데, 자라나서 장성했다는 말은 말씀을 맡은 자로서 영적인 싸움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먼저 살아난 자들이 죽어있는 시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겁니다 (겔37:1-6) 이렇게 천지 만물과 역사는 그들의 배양을 위해 보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묵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완성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하나하나 역사 속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저주와 심판의 현실로부터, 다시 말하면 아담의 후손으로 죽어있던 자리에서 일으킴을 받아서 똑바로 서게 되는(부활)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비로소 주가 되신 분을 알게 되고 그분의 순종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은 그래서 있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난 자에게는 반드시 생명현상이 나타납니다. 교회를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죠?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 감각, 통점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분과 같은 관점으로 눈, 귀, 그리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세상의 저주의 현실이 보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 아니라 별세할 곳으로 보이는 거에요 그리고 그런 성도의 별세를 돕기 위해서 모함, 핍박, 거꾸러뜨림 등의 세상과의 충돌 분리 현상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생명 있는 자라면 그런 말씀으로 말미암는 사건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을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이 모두 예 할 때 아니오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세상과 섞일 수 없는 다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과 분리된 경계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됨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이런 분리 즉 거룩은 세상과의 충돌과 찢어짐을 통해 잠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거룩을 위해 여러분은 저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의 저주가 무엇인지 체휼하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분이 흘리신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4:11-12)
여러분에게 새 생명을 주신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말하길 우리가 전하는 것은 우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됨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연합된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인들의 종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분의 증인 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종 된 인생을 살면서 말씀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그길을 가게 됩니다. 싫다고 뿌리쳐도 소용 없어요. 주께서 나를 이기심으로 반드시 그 길을 가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이 복된 길이며 생명 길이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알 때, 그 사랑에 함몰되었을 때, 그 사랑으로 인해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나토스의 죽음, 진리의 죽음이에요 그런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생명이며 생명현상이란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던 복음의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일으키시는 사건 앞에서 먼저 성도가 죽습니다. 성도 안에서 저주와 죽음이 역사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와 십자가가 증거 됩니다. 이게 사랑 나눔이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고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라고... 우리 카페 대문 그림을 보면 양떼들이 줄지어 가고 맨 뒤에 개가 있습니다. 이 개가 셰퍼드입니다. 그 세퍼드는 양을 지키고 있다가 양이 다른 길로 가면 쫒아가서 몰아냅니다. 우리에게 넘겨주신 사도들의 서신이 전부 그런 거에요
성경에는 원래 목사라는 직분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고 목자입니다. 목사는 종교개혁 시대에 만들어낸 직분이에요. 목자, 그러니까 양을 섬기는 사람들은 집사도 장로도 교사도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은사를 주시면 은사의 기능으로 교회를 섬기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을 불러 당부를 합니다. 내가 떠나면 이리떼들이 몰려 올 텐데 너희들을 은혜의 말씀에 맡기고 간다고... 그러면서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 ‘피로 사신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이며 거룩인데 이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너희의 능력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이 지켜주실 거라는 겁니다. 은혜의 말씀이 지켜주신다는 말의 의미는 그런 거짓 교사들을 막아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 교회 안에서 갈라냄이 있을 거라는 뜻입니다. 이리떼들이 들어오면 거기에 미혹되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교회 안에 충돌과 분열이 생길 텐데 나는 은혜의 말씀에 너희를 맡기니까 장로인 너희들은 다만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셰퍼드(목자)라는 뜻입니다.
셰퍼드는 양 도둑이 나타나면 그들을 향해 반드시 짖어야 하지요 이게 장로의 역할입니다. 다른 것으로 말씀을 혼잡케 하고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에게서 교회를 순전한 말씀으로 지키는 직분입니다. 단 한사람의 성도를 위해서도...
자 이제부터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믿음은 각자가 생산하거나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해요. 선물은 원래 없던 것을 받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주시는 분의 때에 주신 분의 뜻대로 그 분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주시는 것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그릇마다 용도가 다른 거에요
앞에 말한 사랑도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알게 하실 때는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담을 그릇부터 만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담을 그릇이 못되니까요. 요한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겁니다. 그렇게 사랑이 부어져야 우리에게서 사랑이 나오는 것처럼 믿음 역시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땅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이에요 우리는 믿음을 막연하게 느낌이나 의지, 결단, 결심, 교회에서 헌신적 열심, 기타 종교적 열심, 영적 체험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역동적 능력이며 하나님의 권능의 나타남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하잖아요. 믿음은 세상을 이길 정도의 힘입니다. 여기서 이김이란 세상에 대해 못 박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 승리에 참여 된 자로서 이김이에요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원래 믿음이 없다는 뜻이고 믿음을 모른다는 뜻이고 그래서 믿음을 오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면 자신의 믿음 없음부터 드러나는 거에요 “내가 믿은 예수는 가짜였구나...” 이게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음도 사랑도 나를 위해서 써먹으려는 죄인이다 보니 태생적인 종교성으로 예수도 하나님도 나의 목적대로 이용하려고 하지요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저주의 현실입니다 (창3:24)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용사들이 나옵니다. 노아, 아브라함, 다윗, 모세...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의 주어는 이런 용사들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주어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그렇게 믿음이 그들을 하나님의 목적지로 끌고 간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소유해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믿음은 주와 되신 분과의 관계입니다. 그분과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모든 것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 안에서 우리의 부정함과 거짓됨과 불신의 역사가 폭로되고 그 은혜와 긍휼만 꼭 붙들게 되는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했고 대적하고 이용하면서 살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광야 40년을 살게 하신 이유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싫어하는 자신을 보게 하시기 위함인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 자인가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가면 다들 믿음 있는 척하면서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도 하고 그러잖아요 교회 분위기가 그러니까.. 그렇다 보니 남들도 속이고 자신도 속는 거에요 마치 믿음있는 것처럼.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더합니다.
이렇게 믿음 없음을 들키는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에요. 진자 현실로 눈을 돌리게 하시는 성령의 다스리심이란 말입니다. 진자 현실이 뭐에요? 주님의 십자가, 그 저주의 현실을 바로 알아야 피의 용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십자가를 몰라요 다들 구원은 받고 싶은데 십자가를 얘기하는 교회가 없단 말입니다. 십자가를 우회해서 천국가는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교회에서는 죄도 심판도 저주도 금지어가 된지 오래입니다. 십자가는 그냥 차에 붙이고 목에 걸고 다니는 악세사리 정도로 알지요. 그러나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 그 흔적이 있는 자들만 생명의 부활에도 연합된 것입니다. 그들만 산자에요
믿음은 여러분과 주님 사이 둘 만의 은밀한 관계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이 선진들이 주님과의 관계에서 살아낸 여정, 궤적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의 기록은 그들의 최종 목적지에서 역으로 바라본 시각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를 다시 써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이고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지혜나 믿음을 인격체로 설명을 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3:23)
믿음이 온다고 표현을 하죠? 믿음이 온다는 말은 때가 차매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가 오신 것을 말합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나 선지자나 율법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해주러 오실 그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의 때까지는 세상 전체가 율법의 저주에 갇혀 있었는데 이제 믿음의 실체요 주체요 주인이신 그분께서 오심으로 율법의 저주와 상관없는 죄의 권세 아래 갇힐 수 없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믿음을 오역한 부분이 있는데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19:11)
여기에서의 ‘충신’은 믿음의 오역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진리(알레떼이아)를 말합니다. 충신과 진실은 믿음과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백마를 타신 예수님이 믿음이요 진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믿음과 진리에요. 그 믿음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교회가 출생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믿음에 의해서 물과 피로 탄생되어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이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출생 되어지는 겁니다. 예수로 출생 되어 진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교회를 낳고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고 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그분의 십자가 곧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축복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생육과 번성은 말씀에 의해서 말씀의 사람들이 출생되어지고 믿음에 의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자라나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19:13)
계시록에 보면 나중에 우리가 그 나라에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신 예수에 의해서 예수라는 씨로 태어난 이들이 피스토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말씀이고 우리 자신이 믿음이고 우리 자신이 사랑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일하고 계신 거에요 우리가 믿음의 행위를 하지 않아도, 사랑의 행위를 하지 않아도 우리 존재 자체가 사랑이고 진리이고 말씀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없던 믿음의 행위 사랑의 행위가 나오면 그건 다 주께서 하신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교회에게는 분명한 믿음의 방향성과 대상이 있고 믿음의 주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능력은 부활에 참여 된 자들의 날마다 죽음이며(고전15:31)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믿음이며 사랑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에요.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기신 승리의 내용에 참여된 것을 증언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이미 이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도 그 승리의 영광을 배우기 위함이에요 그렇게 십자가의 승리에 참여된 자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고린도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멋진 표현 아닙니까?)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이 보기에는 욕됨이고 악한 이름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악한 이름으로 본다니까요. 속이는 자 같고 무능한 자 같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고 가난한 자 같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묵시 안에 하나님의 자녀들로 완성되어 있는 거에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 십자가의 승리에 참여된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는 세상 미말에 끌려가는 자처럼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교회는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맨 마지막에서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사랑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죽기 때문에 그냥 토닥토닥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죽음의 길과 파멸의 길에서 나오게 하려는 사도의 사랑이에요)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성도 안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이 찾아오십니다. 시도 때도 없이 늘 찾아오십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이 말씀의 뜻은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들이 예수를 약한 분으로 알고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무서운 말이지요. 믿음 안(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믿음과는 전혀 다르지요. 예수님이 믿음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음을 키우고 믿음을 따로 챙길 수 없습니다. 예수가 찾아오심으로 그분과 연합된 사람은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그분으로부터 받아 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철야를 하고 새벽기도를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은 아직 예수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이미 그분과 나는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에 있잖아요.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그 하나님을 받았으면 다 받은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필요한 것 따로 받고 싶은 것이 있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성도는 그릇된 기도를 해도 주께서 우리의 정욕과 탐심을 들추어 내시면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입을 가리게 되는 거에요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책망입니다. 이미 받은 그 은혜에서 떠나지 말고 그 은혜로 부족함이 없게 하라는 거에요 그러나 그런 책망과 돌보심이 없으면 그는 믿음 안에 있는 자가 아니요 예수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우고 학습하기 전에 말씀이 여러분을 찾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양날 선 검이 되어 여러분의 골수와 육신을 쪼개어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양날 선 검으로 이 마음이 산산이 찢겨지는 것을 마음의 할례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아담의 혈통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자에요 이제 세상으로 돌아가려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못 박히시고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신 십자가가 바로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에 의해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고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원치 않는 길로 띠 띠어 데리고 가십니다.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 믿음의 여정에는 우리 선배들이 겪었던 많은 사건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로역정이지요 눈물 골짜기 더듬으면서 주께서 쥐어주신 지팡이만 의지하는 하늘가는 밝은 길입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주 예수를 배우고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자들로서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자기 구원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 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선과 의를 챙기려고 아등바등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면서 삽니다. 그럴 때에 성도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너는 너를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야.. 너는 이미 예수께 모든 것을 빼앗긴 자야.. 예수로 충분한 자라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주를 위해서 하게 되는 너희가 바로 하늘 백성이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여러분의 진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 이 복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에 실제화가 될 때 여러분에게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주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구원과 복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많이 오해한 사람들이 가장 경건하다고 했던 바리새인, 율법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엘 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이 말은 바리새인의 의와 차원이 다른 의, 질이 다른 의를 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바벨론 포로의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로 귀환 후에 율법을 점 하나도 빼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예로 드시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아님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산상수훈에 율법의 항목들을 열거하시면서 죽었다 깨어나도 너희에게서는 율법의 의가 나올 수 없으니까 내가 값없이 주는 한 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는 그 의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에서 났고 너희는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서 너희들은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올라가지 않으면 너희들은 땅에 갇혀서 끝이 난다는 뜻입니다. 땅에 갇힌다는 말은 말 그대로 지옥을 의미해요. 예수님이 말씀을 하셔도 참 매몰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해의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여러분은 지금 실감이 잘 되질 않겠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들은 구약에 능통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금방 알아들었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의 의가 아닌 다른 의를 설명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율법 한가지도 지킬 수 없음이 폭로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들의 무능과 불가능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주신 거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깨닫게 하는 용도로 주신 거에요 그래서 성전 제사 제도와 언약궤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장치인 것입니다. 그것들이 다 오실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언약궤는 우리의 죄와 그 죄를 덮어주는 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동 할 때나 전쟁을 치를 때 언약궤를 앞세우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에요 다윗이 아들의 반란 때문에 도망을 가야했을 때 언약궤를 가져가자는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면서 언약궤를 두고 갔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던 거에요 이스라엘 왕은 자신이 아니라 오실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자가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궤라는 모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인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언약궤를 일부러 두고 갑니다. 다윗의 믿음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믿음은 내가 사유하고 발휘할 수 있는 믿음(행위)이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약속의 주체에게 나를 위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 자신을 타자에게 의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믿음을 통해서 그런 자신부터부정되는 것입니다. 믿음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정하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강제로 그분의 저주 안으로, 죽음 안으로, 용서 안으로, 은혜 안으로 연합시키심으로 그분의 믿음이 내게 주어지고 그분의 용서가 주어지고 그분의 진리가 주어지고 모든 것이 다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 몸은 예수께서 우리가 아니면 스스로 충만치 않기로 하신 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에요. 원래 스스로 충만하신 분이 창세전 약속의 성취가 아니면 충만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로마서에서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그렇게 애써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을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실패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를 위한 실패였다고 할 수 있지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눅16:17)
이 구절을 오해하여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율법이 모두 살아있기 때문에 최대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의 제사나 정결규례 같은 것들은 필요없지만 율법의 도덕 윤리같은 내용들은 지켜야 한다는 거에요 이런 율법에 대한 오해 때문에 무율법주의 신율법주의가 나왔습니다. 하여튼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말씀을 변개하는데는 천재들이에요 이 구절의 본래 뜻은 그게 아닙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때가 율법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을 때가 이미 종말이며 율법은 이미 완성이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셨다고 하잖아요 이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는 자들이 오늘날 세상교회의 선생들입니다.
이렇게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 곧 말씀을 맡은 자에 의해서 성도들에게만 은밀하게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성경 백독하고 신학 공부한다고 깨달아 지는 말씀이 아닌거에요 그런 거하면 사람만 교만해 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해도 들을 생각을 안해요 이미 다 안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청년들이 신학하겠다고 하면 말립니다. 가서 배울 것도 없고 신학이 믿음을 주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게 아니기 때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의문의 증서(율법)를 도말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성도에게 있어 율법의 기능은 끝이 났습니다. 성도는 율법이 가리키는 율법 외의 한 의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요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은 예수의 다 이루심을 우리에게 전가해 해주십니다. 우리의 것으로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피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는 구절이 이해가 되시지요? 예수께서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부터가 저주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시고 이스라엘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전체 삶이 저주였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마다 나무에 달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겁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를 자기 삶에서도 똑같이 살아낸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것을 고린도후서에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모두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다 가신 내용이에요. 그런데 이 저주가 신명기 28장에 그대로 다 나옵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런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살다 가셨고 바울 자신도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에요.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살다가 갈 것입니다. 다 같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알맞은 맞춤 저주 아래 살게 하십니다. 바울이 말한 저주의 내용과 모양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부정의 십자가입니다. 나를 위해서 살 수 없는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가 임할 때마다 여러분의 눈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육을 살찌우는 세상 복을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보다 더 힘들다고 하죠? 주께서는 여러분을 그 구멍을 통과하게 만드시려고 여러분의 육적 자아를 없음의 자리 처음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날마다 찾아와서 그 죽음에 연합되고 그 삶에도 연합되는 것이 십자가라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만 율법을 대할 때마다 자신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육적 자아가 부정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한 그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율법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 산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피로사신 교회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면 여러분에게는 그 십자가만이 영원한 현실이 되는 거에요 율법 한점 한획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어졌는지를 체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침노해 들어오는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꿈꾸는 그런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꾸시는 꿈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막연한 믿음, 막연한 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고 분명한 방향성이 있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성을 볼 수 있는 자들이에요. 여러분은 그 한 성을 바라보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하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갔던 길을 울미불미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것이 찬송입니다. 찬송은 그 때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로 지어졌고, 여러분 자신이 찬송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럼 나는 뭔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적 존재로 완성이 됐어요. 인생을 살면서 그 내가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완성되었는지를 잘 배우고 돌아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 고난의 바다를 건너가면서도 가끔은 예수 안에서 이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빕니다. 저주까지도 감사함으로 받을수 있는 성숙한 교회가 되시길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는지, 우리에게 주신 그 진짜 복 말고 다른 복을 달라고 떼를 쓰면서 살아왔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하나님 앞에 삿대질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덮쳐진 하나님 나라, 우리에게 이미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 두 이레 눈뜬 강아지만큼 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찾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도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랑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창세전에 준비하시고 때가 차매 저희들에게 실행해주신 사랑이요 믿음인줄 아오니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이 믿음으로의 삶을 찬송하면서 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오늘 이 아침에 십자가의 저주와 사랑,이라는 이 복음이
나의 믿음없음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말씀마져도 나의 유익을 위한 욕망을 끊임없이 버리지못한 자로 드러나는 일로 사건으로 현실로 폭로되는 현장에서 껵어내고 경험하고있는중입니다
그래서 오늘아침 이복음의 말씀이 나를 온전케하시려고 깊은곳에 감추어져 드러내지않은것들을
십자가의 저주의 현실로 이끌고계시고 진행중 입니다
너무 놀라고 충격입니다
이 아침 이글을 읽고 묵상하게하심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적대로 이끌어 가심을 믿게하시니
어느때보다 더
이 말씀 복음을 전파하여 증언해주신
생명의 이 복음앞에
기쁨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이 복음 때문에 생명의 힘을 얻고 십자가안에 있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아멘~~~~감사합니다
죄인을 향한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