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날
일요일이라 하루 쉬는 누나와 그 동안 미루어 두었던 밭과 집 주변 환경정리를 하기로 하고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일을 하기로는 하였지만 사실은 일은 누나가 하고 나는 정리만 할 뿐인데, 그래도 아침부터 부산하다.
나는 이런 날이 싫다.
내가 힘써 일을 할 수가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니 미안해서 그렇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로 여지껏 미루어 두었던 일 들이다.
하지만 그 동안 푸르게 살았던 것들의 낡은 잔해를 치우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심심치 않게, 싱싱한 애호박부터 늙은 청둥호박까지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던 노란 꽃의 호박 줄기가, 이제는 다 바스라 져서 울타리를 감고 있는 갈색 잎의 빛바랜 흉물이 되었고, 청포도 시렁을 감고 있던 호박덩굴은 마치 축 쳐진 늙은 구렁이처럼 남실댄다.
며칠 전에 대강 따서 널어 말린 결명자는, 줄기가 너무 억세어 낫으로 베어야만 하고 거저 뽑아서는 잘 뽑히지도 않는다.
반짝이는 조그만 삼각형 모양의 잘 영근 결명자 씨는 시력을 좋게 한다고 하여, 시력이 점점 안 좋아지는 나와 우리 가족의 한해 수확한 먹을거리로 이곳저곳에 조금씩 나누어 주고 일 년 내내 물을 끓여 마신다.
이른 봄 긴 울타리를 온통 노란색 천지의 터널로 만들어서, 지나는 사람들의 칭찬을 온몸에 받으며 봄볕에 햇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 닭의 벌레 사냥터가 되어주고, 뜨거운 여름에는 닭들의 그늘 쉼터를 만들어 주던 늙은 개나리 나무들의 쳐진 가지를 잘라내며 내년의 첫봄을 기다린다.
울타리 가를 점령하고 있는 구기자는, 잘라 주어야 내년 봄에 파릇한 새순이 깔끔하게 돋아나서 그 잎을 따서 상큼한 나물을 무쳐 먹을 수 있다.
여름내 자라서 가을에 빨간 열매가 익으면, 아버지께 드릴 불로장생 영약주 라고 만들고서는 내가 반 너머 마셔버려서 신선이 못되신 아버지께 미안해하면서 예쁜 색깔의 구기자주를 담그고, 온 가을을 돋아 계속 익어가는 열매를 따서 좋은 가을 햇볕에 깔끔하게 말리고 갈무리하여 추운 겨울에 차를 끓여 마시면 그 색과 맛이 아주 일품이다.
그렇게 온 계절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던 것들이, 가을이 지나 겨울에 들어서니 칙칙한 모습으로 변하여 흉물스러운 모양과 색깔만으로 남겨진다.
그것들을 모아 태우면서 화려했던 지난여름의 고마움을 전하고, 미안하여 내년 봄을 기약해 본다.
그런데 나는 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자르고 긁어모아서 날라다 주면 그것을 태우는 일이 내 몫이다.
그래서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를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읽으며 커피 향을 찾아본다.
긁어모아 태우는 것들이 낙엽이 아닌 줄기들 이어서 그런지 커피 향은 찾을 수 없고 다 익은 호박향이 달작지근하게 난다.
힘을 들여 작업을 하는 누나에게 미안하여 호박향도 애써 피하고, 매운 연기에 눈물을 질금거리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다.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내가 나의 무력감을 느끼며 제일 싫어하는 때가, 이사 집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 누가 일하는데 힘을 보태주지 못 할 때에는 미안해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사 집에는 이삿짐이 다 정리가 되었을 법한 일주일 후쯤에 방문을 하는 성격인데...
하물며 낙엽을 태우자고 하면, “그냥 놓아두면 거름도 되고 운치가 있는데 굳이 낙엽을 태울려고 그러느냐?”며 애써 피해버린다.
사실 낙엽은 그렇다.
집안에 오래 묵은 멋진 느티나무와 그것과 필적할 정도의 느릅나무는, 활엽수들이라 가을이면 멋들어지게 낙엽이 내린다.
그 밑을 살살 걸으며 듣는 사각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는, 시몬도 없이 나 혼자만으로 라도 다 들을 수 없는 멋진 음악이다.
그 두 그루의 오래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은, 바람이 불면 사방으로 흩어져 아침이면 잔디밭이 온통 낙엽이불을 덮어쓰고 있다.
그러면 누나는 낙엽이 썩으면 잔디밭을 망친다고 성화이다.
그래서 가끔 갈퀴로 긁어 태우자고 하지만, 난 일을 못한다는 핑계로 낙엽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
그렇게 쌓인 낙엽을 오늘 덩굴들을 태우면서 긁어 함께 태우자고 한다.
일하기도 어렵고 그러기도 싫은데, 마침 친구가 들이 닥친 것이다.
나는 신이 나서 핑계를 대고 외출을 할려고 궁리하고 있는데~~
누나는 염치 불구하고 친구에게 낙엽을 좀 긁어모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니 친구도 어쩔 수 없이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갈퀴를 잡았다.
긁어진 낙엽을 모아오면 태우는 것은 내 몫이다.
늙은 덩굴을 태우면서 호박향이 나던 연기가 그 위에 덮여져가는 낙엽에서는 이제야 커피향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친구도 그 냄새를 맡았는가 보다.
“누나, 커피 한 잔씩하고 일하죠.” 한다.ㅎㅎㅎ
이 친구도 이효석을 알고 있고, 낙엽을 태우면서 커피냄새가 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런 멋진 정서를 가지고, 낙엽을 태우며 커피를 청하는 친구 녀석은 얼마 안 있으면 작가로 등단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는 낙엽을 보면서 불가에 서서 마시는 커피 향속에는, 노란 개나리 색의 아지랑이 김이 오르고 여름의 호박 향과 달콤 쌉사름한 구기자향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싫었던 날이, 친구와 함께 커피에 사철을 섞어 마시는 멋진 초겨울이 되었다.
친구야 고맙다.
니가 아니었으면 난 연기 속에 파묻혀 커피 냄새도 못 맡고 눈물, 콧물 범벅이었을 텐데. ....
이제 우리 집 느티나무의 잎이 색이 변하기 시작할 것이고,
울타리의 호박잎도, 늦호박으로 달린 애기호박들도 아직 많은데 벌써 구멍들이 숭숭하다.
벌써 조락의 계절을 준비하는가 보다.
가을은 야누스이다.
풍요를 가지고 언제 왔는지 모르게 오다, 언제 가는지 모르게 온 땅을 누렇게 만들고 떠난다.
오고감이 참 빠르게 겹친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데리고....
이른 벼는 이번 추석에 햅쌀밥을 해 먹는다고, 추수를 하기 시작한 곳도 있다.
빠르다. 이러면 또 간다.~~
올해는 이런 추억도 없겠지만.....
그래도 아린 추억이어서, 지난 만추를 돌아보며 적어 보았다.
첫댓글 유옹선생님 가을비 내리는 아침 좋은 수필을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일교차에 건강조심 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저도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를
생각하며
커피를 마십니다^^
호박 줄기를 태우시면~~~ 달작지근한 양촌리 커피향이 난답니다. ㅎㅎㅎㅎ
제 등단작도 불을 피우며라는 제목인데 시골에서 불을 피워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제한적 감정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