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입향조(入鄕祖) 눌재선생(訥齋先生)
선생의 휘(諱)는 석충(碩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로 단종 2년 (1454년)5월 28일 한성 호현방의 본집에서 태어나셨다. 1474년 상호군 희철(希哲)의 따님인 옥천 전씨(沃川 全氏)를 아내로 맞았고, 엄(儼), 의(儀), 간(侃), 칭(?)의 네 아드님과 이준근(李埈根), 안배곤(安配坤), 권오기(權五紀)에 출가한 세 따님을 두셨다.
선생의 휘(諱)는 석충(碩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로 단종 2년 (1454년)5월 28일 한성 호현방 (현 충무로)의 본집에서 태어나셨다. 1474년 상호군 희철(希哲)의 따님인 옥천 전씨(沃川 全氏)를 아내로 맞았고, 엄(儼), 의(儀), 간(侃), 칭(?) 의 네 아드님과 이준근(李埈根), 안배곤(安配坤), 권오기(權五紀)에 출가한 세 따님을 두셨다. 1477년 생원시(生員試)에 3등으로 합격 하셨고, 선생이 호현방(현 충무로)에 사실 때 한훤당 김선생 (寒暄堂 金先生)이 이사를 와서 두 분은 일찍부터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점필재 김선생(?畢齋 金先生)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 하였다. 1480년에는 한훤당 김선생(寒暄堂 金先生) 외 세분과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맺고 춘추로 호현방 (현 충무로) 사재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도의를 연마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말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어야 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손하게 하는 것이 수신하는 첫째의 방법이 될 것”이란 뜻의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을 써 붙여 놓고 자경문(自警文)으로 삼았고. “말은 느리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것이 옛 사람들의 수신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행동은 민첩하지 못하더라도 말을 참는 것은 가능하다“라고 하며 편액을 ‘눌재-눌옹(訥齋-訥翁)’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본래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나 그 인척들도 모두 대대로 나라에 공훈이 있는 집들이었으므로 조정에는 많은 친척들이 있었지만 두문불출 하며 부귀를 누리는 자제들과는 사귀질 않았다. 당시 환훤선생(寒暄先生)이 후진 양성에 몰두할 때 사방에서 쏟아오는 비방의 소리를 듣고 후진 양성을 중단할 것을 권고 하고는 신병을 핑계 삼아 영주로 이사 하였다. 선생은 낙향한 후 은둔생활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잇을 때 출사할 것을 종용 받았으나 끝내 “나는 말도 잘 하지 못하고 몸도 병이 들어 벼슬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끝내 불응 하였다.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나 김한훤, 최금남등 가까운 현사들이 참화를 당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혼자 슬퍼하며 더욱 자취를 숨기고 살다가 세상을 마침에 사람들은 누차 사화를 겪으면서 그들의 모함을 벗어 남으로 선생의 명석한 처세에 탄복 하였다. 1524년 1월 초7일 향년 71세로 영주 휴천리 본댁에서 작고 하셨고, 묘소는 평은면 괴동(平恩面 槐洞)에 모셨으며, 4년 뒤 역시 71세로 작고한 부인 옥천 전씨(沃川 全氏)도 선생의 묘역 좌측에 부장 하였다.
(현령공 18세손 준태 엮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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