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는 길이 이렇게 힘들다.
몸은 꼬이고 고통은 심해지는데 길은 이리도 막히는지….
젊은 날, 과도한 음주는 기어코 장을 탈 나게 하고야 말았구나.
참고, 참아서
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 층 계단을 오른다.
심신 心身이 불편할 때 그나마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옥탑방이나마 있어 고맙다.
그토록 갈망하고 고대했던,
대야만 한 변기에는 번개와 천둥이 한꺼번에 쏟는다.
실수 없이 마무리되어 천만다행이다.
뱃속에 뜨거운 기운이 일시에 빠져나감으로써
몰려오는 환기에 몸서리쳐진다.
대단한 카타르시스다!!
*카타르시스(catharsis 그)[명사]
1. 정화(淨化). 배설(排泄).
2.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행동이나 말을 통하여 발산함으로써 정신의 균형이나 안정을 회복하는 일.
나이 오십이 낼 모랜데 그동안 마신 술(酒)이 얼마인가?
술 좋아하신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술은 일상이었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인생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즐겁게 마신 적보다는 화풀이로 마신 게 더 많은 듯 화 화술이다. 병으로 뚤뚤 뭉쳐서 몸 어느 구석에 똬리 틀었을 터인데, 언제 어느 때, 노도와 같이 고개를 쳐들려는 지 일편 두렵다.
오늘 하루의 고개를 맘 졸이며 넘는다.
어제도 내 형 兄과 함께 좀 과할 정도의, 그놈의 정치 이야기로 또 열을 받아서인지 일하면서도 내내 기분이 좋지 않다.
아랫배에 통증이 시작되더니 불안해지는 게 다행히 거처가 멀지 않으니 얼른 집으로 들어가자!
운전대를 잡고는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데 짧은 길은 왜 이리도 막히는가?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진땀까지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집에까지만 가자. 집!
술 좀, 덜 마시자!
무릎에 상처를 입고 그것에 딱지가 앉고, 딱지 속살이 새록새록 살아날 즈음에는 그 근질거림에서 기어코 딱지 속에 새살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근성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포가 죽은 딱지는 자연스럽게 비닐 벗겨지듯 할 터 이인데도 굳이 굳은 딱지와 생살의 경계선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복숭앗빛 새살이 보일 때까지 살을 찢는다.
뒷골이
찌릇 찌릇~
발가락이
짜릿짜릿~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딱지를 들어내고야 마는 이 자학을 자행함은 인간이 지닌,
카타르시스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칠닥이가 첫 직장을 얻은 곳은, 실성 사이다이지만 겨우, 오 년의 퇴직금을 반납조건으로 퇴사를 하였으니 길고 험한 시간을 그곳에서 완전히 생 머슴을 산 셈이다.
80년 때 전두환 정권 때 가장 주목받던 신생기업은 라면 업계의 돌풍아, 청보 라면이었다. 세간에는 무성한 소문이 난무했는데 사람들은 청와대의 이순자가 주인이라는 추측으로 ‘(청)와대 (보) 지라면’이라 불렀다.
실성 사이다, 오 년을 머슴 살고 새경 한 푼 챙기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한 후, 청보라면 안동 대리점의 판매 주임이 된 칠닥이가 영양, 청송구역 판매 나가는 날에는 늘 마음이 설렜다.
이제 새 거래처를 닦은 영양상회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사장 여동생이 늘 가게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 고추 아가씨에 나가도 될시더!”
“내 친구가 고추 아가씨 나가서 진 眞이 되었는데 갸는 읍장빽이 있어요. 나는 갸가 그 빽으로 됐다고 봐요.”
그런 것에도 뭣인가 그런 것이 있는 모양이다.
칠닥이가 그녀와 함께 그 댁의 주문배달지원을 마치고 영양 어느 골짜기로 들어가 작은 내가 흐르는 동네 어귀의 정자나무 밑에서 땀을 식히고 있다.
“아, 물도 좋고 바람도 시원해라. 나는 촌으로 시집가서 농사짓고 살고 싶어요.”
“나도 장래 희망이 농사이시더, 왜?”
칠닥이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먼저 미모가 뛰어난 것이나 책을 즐기는 거나, 삶의 희망까지 자신과 비슷하거나 같다는 걸 확인했다. 돌고 돌아서 찾아 헤매던 결혼상대자를 이제야 만난 듯하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영양판매를 나가는 날에는 그래서 설렜다. 어쩌면 이상에 꼭 맞는 이 아가씨와 곧 인연이 될 것만 같았다.
그 댁과 오래 거래한 제일상사 판매원을 시장에서는 만나서 슬쩍이 떠본다.
“아, 그 오양 말이지요?”
사회적 관습에서나 법적으로나 동성동본 결혼은 불법인 시대에 그들은 살고 있었다.
녀석은 극도로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뭐로 거 그냥 저녁이나 같이하자는 말이다.”
마지못해 나오는 녀석을 노원역 교각 밑에 있는 곱창집에서 만났다. 두 사람분의 음식을 시켰고 칠닥이는 먹음직한 곱창 뚝배기에 막 숟가락을 꽂을 때 녀석은 음식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까칠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니는 안 되는 이유가 뭐로?”
“안돼? 아, 내가 부랄 밖에 더 있나? 디딜 언덕이 있어야 뭐든 되는 게 아이라?”
“그라믄 하남이는 우째 됐겠노? 한 번 갸 가게 가 봤는데 손님 버글버글 하드라!”
“야 야, 갸는 지 처갓집에서 삼천만 원이나 안 가져왔나? 그게 어데로?”
칠닥이가 문득, 자신에게 도움을 준 강 대일에게 고마움이라도 표시해야겠다고 전화를 했는데 대일이는 의외로 퉁명스러웠다.
칠닥이가 뇌리에 스치는 것이 녀석이 또 돈이나 빌려달라고 할까 봐 의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불쑥 오기가 생겼다. 녀석을 반드시 불러내어 차라리 서러움을 톡톡히 받고 싶다는 반감이 불쑥 솟았다. 칠닥이의 반복되는 요구에 강 대일은 마지못해서 식당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강 대일이가 그에게 차가운 경멸을 해 주도록 칠닥이는 교묘히 유도하고 있다.
“제수씨와 아들 생각해 봐라! 니가 우째해야 하는가. 정신 좀 차리거라!”
대일이는 칠닥이가 마지막 국물까지 후루룩 마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밥값을 치른다.
“야 아, 내가 살라꼬 한 건데 니가 계산하믄 우에노!”
“됐다!”
“그라믄, 요 오 가서 커피 한잔하자. 내 살께.”
“ 거 봐라! 아 커피는 집에서 타 머그먼 되지. 돈 주고 사 먹나?”
그러니 니 꼬라지가 그 모양이다는 표정이다. 칠닥이로서는 제대로 서러움을 받는 셈이다. 그래서 속이 후련했다. 아리아리한 아랫배를 움켜잡고 겨우 대야만 한 변기에 엉덩이를 얹자마자 천둥 벼락을 치는 설사와 같았다.
"대일아, 고맙데이! 덕분에 박혀있던 대장이 뻥 뚫렸어."
카타르시스!
열차가 전복되었다.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경, 부산광역시 하행선 구포역 인근 삼성종합건설 공사 현장에서 무궁화 열차가 전복되어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를 낸 한국 철도사고 중에 최악을 기록했다. 삼성종합건설은 열차 운행선 노반 밑을 통과하는 지하 전력구를 설치하면서 당국과 협의 없이 발파작업을 감행함으로써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삼성종합건설은 2,550만 원의 과징금을 물고 6개월간의 영업정지와 사장 구속 등의 처분을 받았다.
1993년 7월 26일 오후 2시 20분경 승무원, 승객 106명을 태운 아시아나항공 733편은 김포국제공항을 이륙했다. 목적지는 목포 공항이었다. 목포 공항은 기상 상태가 나빴다. 항공기는 세 번이나 착륙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짧은 교신 후 공항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목포 공항에서 10㎞ 떨어진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뒷산에 추락한 것이다. 이날 사고로 66명이 사망하고 당시로써는 국내 항공사고 중 최대참사였다.
다리가 무너졌다.
그것도 대교가,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티브이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이른 시간에 성수대교의 상판 50여 미터가 떨어져 강으로 추락을 했다. 다리를 건너던 승용차, 승합차, 16번 시내버스에 사망 32명, 부상 17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망자 중에는 여중생 여고생 여대생과 외국인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화점이 붕괴하였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다음 해인 1995년 6원 29일 오후 여섯 시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삼풍백화점이 일순간에 몽땅 내려앉고 말았다. 1,400여 명의 종업원과 손님이 함께 매몰되었으며 건물의 파편은 주변 넓게 튀어서 재산과 인명피해를 끼쳤다. 피해자 중 최명석, 유지환 박승현이라는 여성은 17일이나 건물더미에 갇혀 있다가 구조되기도 하였다.
그 후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하남이의 경멸의 눈초리는 완연하였다.
“아, 우리찌리 한다는데 말라꼬 왔나?”
“야 야 내가 뭐 할 일이 있나. 니가 이사한다는데, 한 손이라도 거들어야제.”
하남이가 오랫동안 희망해 왔던 일은 처갓집에서의 일금 삼천만 원을 얻어 온 것이었다. 그의 그 희망이 이루어지고부터는 칠닥이로 부터 하남이가 급격히 멀어져 간다는 감을 진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우유배달 한다는 거? 그거 권리금 육십만 원은 쟈, 국 우원이한테 빌렸다. 그라이 니가 이십만 원만 빌려준다면 자전거 한 대 사가지고 함 시작 해볼라꼬 한다이.”
하남이는 대답이 없었다.
칠닥이는 오늘 큰 집으로 이사하는 그를 가락동으로 찾아 들린 것이다. 하남이에게 매달릴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칠닥이가 전 재산인 장사 밑천을 몽땅 도둑맞고는 헤매고 있는 중에도 하남은 유난히 타박하였다.
"너 형, 개동이 형? 하이고야 나는 그래 살라믄 차라리 자살을 해뿐다! 사람이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어데 있노. 허불록하게 해 가…."
하남이는 핑계 삼아 개동이를 끌어들였지만, 실상은 칠닥이를 매섭게 구박하는 중이다. 형이든 동생이든 이러나저러나 칠닥이로서는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왠지, 하남이에게 좀 더 진한 서러움을 받고 싶은 심정이 불끈 솟아올랐다.
“산다는 게 어데 지 맘대로 되나. 나도 답답하지만 내가 사는 기 이 모양인데 할 말은 없다.”
말에 베인 상처는 칼에 베인 상처보다도 더 깊고 오래가는 법이다.
“니, 함 봐라! 내가 요번에 장인이 삼천만 원 봐주면 가락동 시장을 휘 잡을 끼다. 나는 그래는 못 산다. 청과도매로 터를 잡아 식당 차릴 것이다.”
정 하남이는 그가 소원하던 대로 되었다.
강 대일이가 노원역에서 칠닥이더러 경멸을 퍼부으면서 역성을 든 이가 하남이었다. 하남이는 가락시장에서 일 차로 돈을 벌어서는 그 밑천으로 태릉의 한 건물에 세 들어 횟집을 차렸다. 장사수완이 뛰어난 하남이는 나중에 세든 건물을 사들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그랬던 하남이가 고마웠다. 덕분에 진한 서러움을 몸서리 지게 느껴봤다.
"고마워~ 정 하남~"
카타르시스!
* 크리스마스이브의 추억
구 九양은 일 년 후배의 삼업 蔘業조합에 다니는 아가씨다.
칠닥이네 집은 읍내에서 오래된 고물상이었기 때문에 그는 간간히 그곳에 가서 폐기물을 수레에 실어 오기를 하는데, 폐기물 처리 담당이 구 九양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를 만날 수 있었고 그런 일은 서구적 미모에 늘씬한 그녀와 같이 작업하기란 상당히 설레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꾀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때로는 큼직한 인삼 뿌리를 폐 포장지 속에 끼워주곤 하여서 그녀가 칠닥이에게 호감을 느꼈는가 싶기도 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서 갔고 그러다 보니 집이 언 고개라는 것도, 그 또래에서는 인기가 높은 아가씨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째 거나 그는 그녀의 친절을 의심치 않았다.
그해 겨울에는
정 하남이와 칠닥이는 상주에 있는 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하기로 하고 산법에 있는 그네의 과수원 움막에서 입시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거기서 잠도 자고 밥도 해 먹고 지내기를 여러 날, 스산했던 가을바람도 어느덧 제법 날카로워지더니 12월 하고도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 어느 날 과수원으로 동창 몇 녀석이 찾아와서 긴히 부탁하고는 돌아갔다.
살만한 집안의 녀석들은 크리스마스를 그냥 넘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이브에 여자들과 짝 맞추어 밤샘하고 싶은데, 움막을 빌려 달라는 것이다.
거절도 못 하겠고 같이 놀기를 권하지도 않는 녀석들에 서운한 마음에, 자연 같이할 여자들에게 화풀이가 돌아갔다.
"어떤 년들인 줄 모르지만 좌우간 말세여~요즘 년들은 몸땡이들을 함부로 돌린다니깐……."
칠닥이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남이는 약속한 날이 되자 깨끗이 방 청소를 하고 군불까지 뜨끈히 지펴놓는다.
녀석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둘은 과수원을 빠져나와서 읍내로 향하는 철길을 걸었다.
"에이~씨, 이제 우린 어디가 뭘 하노?"
"역전에 가 가, 술이나 한잔 하제이!"
"니~얼마 있노?"
두런두런 철길을 걸어 읍내로 향하고 있을 때 반대편 저쪽에서 한 무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댓 명의 남자들은 맥주 상자를 두 녀석이 나란히 들고는 봉지, 봉지 먹을 것에 통기타며 야외용 천축이며 이런저런 무거운 둘러메고 먼 길도 잘도 내려온다.
그 뒤에 역시 똑같은 수의 여자들이 뒤를 따랐는데, 칠닥이가 순간적으로 섬뜩한걸. 느낀 건, 맨 뒤에 검은 코트에 붉은 목도리를 한 여자가 틀림없는 구양이었기 때문이다. 철길에서 교차하는 둘과 그네들은
“미안하데이!”
“괘안테이~ 잘 놀거라.”라는 말을 교환하며 멀어졌다.
"저 한 여자는 삼업조합 아가씨가 아이가?"
"구양? 정가이가 거기 다니잖나, 그래서 자아들이랑 잘 어울려."
스치는 그녀의 무표정한 모습이 의외였다.
가끔 가는 역전의 술집에서
그 둘은 또 한 번의 서러움을 당해야 했는데, 오늘 같은 대목에는 안주를 시키지 않으려면 자리를 비워 달라는 주인의 부탁이었다.
“야들아, 너그들 안주 뭐 할까?”
“안주요? 돈이 어데 있느껴. 기냥 막걸리만 주소!”
“야들이 여~ 오늘 그리스모스 아이가. 미안하지만 대목을 지나서 담에 온나. 내, 잘해 줄께!”
오늘따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작은 알전구가 번쩍거리는, 역전에 가건물 술집은 동네 양아치 광수가 하는, 그래도 조금은 분위가 있는 술집인데 그마저 쫓겨나고 말았다. 둘은 하는 수 없이 선술집인 <길손 집>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거기서도 둘은, 충분히 목을 축이지는 못하였다. 하남이나 칠닥이나 가진 돈이 얼마 되질 않았었다.
길손 집 유리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천지가 하얗게 변하여 눈이 발목을 덮을 정도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어있었다.
백설이 꽤 두껍게 뿌려 놓은 길에 방금 찍어 놓은 듯한 짐승의 발자국이 보였다.
"구미호九尾號같으니라고는!!"
산다는 것,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처럼…….
- 찰리 채플린 -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지만 이伊나 전前이나 벗어 놓으면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저급한 노동이 주로인 그런 일을 묵묵히 숙명처럼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지인 知人이 물었다.
“할 만합니까?”
“할 만해서 합니까. 할 수 없어서 하는 겁니다.”
“노가다, 어떻게 합니까?”
“수행하는 수도승처럼 하지요.”
차라리 잠이라도 잤으면 좋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큰 고통이지.
인생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운명의 대가이다.
“강남 사람들, 자신을 스스로 5% 안쪽의 상류층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별종 別種 5%인 셈이야. 별종이란 더불어의 개념이 없는 경제 동물이라는 뜻이야. 경제적으로 부유할지 몰라도 인간성은 극빈자들이 떼거리로 몰려 사는 곳이지. 가난한 사람을 천대하거나 각종 비리와 부패에는 늘 앞장 서가는 편이지. 가끔은 자신이 ‘조국’ 교수를 흉내 내어 ‘강남 좌파’라며 부 副와 개념 槪念을 동시에 지닌 듯 뽐을 내지만 강북에서 보자면 어김없는 우파일 뿐이야. 우리나라 최고의 인간성 부재 으뜸 지역이요, 천박하기 짝이 없는 동토 凍土의 땅이야.”
힘에 겨운 노동의 하루는 그래도 어김없이 (마침)의 시간은 지켰다. 긴 한숨과 함께 주저리주저리 새어 나오는 시기 猜忌 어린 독백이었다.
마을버스 운전수는 시내버스와 달리 비정규직이다.
수당, 보너스, 퇴직금이 없는 연봉제로 딸랑 한 달에 125만 원 받는다.
가장으로는 도저히 가정을 유지할 수 없는 적은 돈이다.
그러나 여기만 그런 건 아니고 서울 인천 수원 모두 거기서 거기이니 그런 갑다. 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렇고 그런 안산의 3번 마을버스 기사는 오칠닥이다.
3번 마을버스로 출, 퇴근하는 외국인 근로자 부부가 있었다.
화정동에서 수암동에 있는 세탁공장에 다니는데, 오 기사는 그들 부부에게 친절히 대했고 그 들도 매번 고마워하는 듯했다. 친절뿐 아니라 주제넘게도 그 들이 한 보따리 쇼핑이라도 해서 오는 날에는,
"아니~ 그렇게 돈 펑 펑 쓰면, 언제 돈 모아 고국으로 갈 거요?" 하면서
칠닥이, 일종의 훈계까지 하고는 그랬는데 아마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비교우위에 직분에 있는 일종의 선민의식이었음이라….
한 번은, 출발 대기 중인 버스 운전대에 기대어 지긋하고 애처로운 눈초리로 사내에게 물었다.
"그래~ 그렇게 일하면 한 달에 얼마나 받소?"
"한 달, 백 니십 바다요."
"백 이십? 혼자서……. 둘이 아니고?"
"하나가 백 니십 바다요."
순간 칠닥이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심한 자존심이 엄습했다.
(아니, 외국인도 120 받는데 마을버스, 이건 뭐야 도둑놈들…. 대체 세상 물정을….)
적잖은 자괴감에 그 후 그들을 봐도 하찮게 보이질 않았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이 칠닥이가 지닌 상전 습성이었다.
그 들이 그보다 임금이 적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남이 나 같아서는 안 된다는 선민의식이 바닥을 기는 칠닥이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 그는 처음 알았다.
늦은 시간대의 마을버스.
이 시간대에 시내 방향은 별반 손님이 없다.
화정동 촌길을 내려 올 때쯤 듬성듬성한 손님 중에 전화 받는 젊은 아가씨가 있다.
"응~ 엄마 이제 마치고 들어가는 길. 응……."
과외선생인가 늦은 귀갓길에 어머니의 걱정 전화인 게지.
"오늘…. 한 팀 또 떨어졌어…. 응…."
전화 그쪽의 이야기는 대충 짐작이 가겠다.
어려운 세상이라 하더니 취직 못 하고 그나마 과외 일자리도 하나둘 떨어지는 갑다.
한참 동안의 차내에는 조용했었고 아가씨는 한양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가씨의 발걸음이 참으로 처연해 보였다.
변산에서 농사를 정리하고, 안산으로 역 귀농하여 얻은 첫 일자리는 수암동에서 중앙역까지 가는 3번 마을버스 운전수이다.
다행이다 싶을 사이도 없이 쏟아지는 지역농협의 영농자금 상환독촉! 또, 독촉….
도대체 말귀를 알아 처먹을 라고도 하지를 않는 담당 새끼다!
"글쎄~ 갚는다니깐! 갚아……."
꾸리 꾸리하고도 서글퍼도 어쨌거나 한탕이라도 더 돌아야 일이 끝나는 것.
하루 일이 끝나자면, 열네 탕을 돌아야 하는데 요번이 몇 탕 채더라?
시발지에서 출발하여, 안산동에서 이 사람들 태우고 화정동에서 저분을…. 동산병원 앞 저 여자, 한양아파트 저 년(맨 날 잔소리하는 씹년) 2단지에 할머니들, 4단지에 초등학교 병아리들이 노랬다.
다음에 그리고 또, 다음엔 저 존 마~(싸움을 한….)
삐리리~ 울리는 전화벨,
"아, 예! 그거요 사모님 제가 월말에 꼭 입금시키려 했거든요. 안 그래도 막 전화를 드리려고…. 그럼요, 그쪽에서 돈만 나오면…. 예……. 그럼요, 틀림이……. 예……."
주위를 의식지 못할 정도로 다급할 전화의 주인은 바로 운전수 뒷좌석의 중년의 남자 모습이 백미러에 비친다.
딴 사람은 모르지만, 칠닥이는 사내의 긴 한숨을 들을 수가 있었다.
먼 길에 눈길을 주는 사내의 눈빛이 서럽다.
흔들리는 버스.
같은 또래가 같은 고민을 안고,
같은 시간에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격랑의 파고를 넘는
한배를 타고 있던 셈이다.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3번 마을버스가 수암동을 출발하여 화정동을 거쳐 안산 나들목으로 통하는 안산천 다리를 막 건너자마자 만나는 것은 좀머씨의 노상 신발점이다.
도시의 회색 건축물 사이 잡초만 무성해진 작은 공원의 보도 위에는 이쪽에서 시작하여 저쪽 끝까지 종이상자에 담겨진 신발이 도열해 있고 공원 풀숲에는 좀머 씨의 봉고차가 항상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마을버스가, 새벽 다섯 시에 첫 운행을 할 때나 밤 열두 시 마지막 종점행 운행일 때도 좀머 씨의 노점은 항상 그 모습 그 모양으로 물건을 새로 편다거나, 거둬들이는 법이 없이 처음의 것이 마지막 것인데, 다만, 낮과 달리 어두운 밤에는 봉고차의 불빚이 그것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 다름일 뿐이다.
신발을 사는 손님이나, 파는 좀머 씨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가 없는데 운전수가 마을버스 운전을 시작하고 수개월 동안, 그리고 좀머 씨를 눈여겨보기 시작하고부터 여직, 좀머 씨 가게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듯한 모습은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다.
3번 마을버스는 열네 번을 왕복하니, 하루 스물여덟 차례나 또, 격일 근무에 한 달이면……. 삼백 스무 번씩 몇 달을 지켜봐도 그토록 손님이 없기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인근에는 통닭을 구워 파는 바베큐 노점이나, 한 벌에 만 원 하는 츄리닝 노점도 있지만 그들의 노점에는 그래도 생기가 있었다.
대체, 좀머 씨는 뭘 먹고 살까?
그러고 보니 그가 도시락을 먹는다거나 짜장면 등의 음식을 시켜서 먹고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럴 돈이 어디서 생겨날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딱 한 번 지인이 찾아왔는가 사내 두 명과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통닭을 뜯으며 소주를 마시는 걸 봤을 뿐인데, 짐작건대 그 통닭 값이나 소줏값도 그 손님들이 치렀을 만하다.
신발을 거둬들이지 않는 그는 웬만한 가랑비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데, 흙먼지가 튕긴 신발을 누구라도 살 것 같지가 않을 텐데.
정말로 희한한 일이 한 번은 솜사탕 같은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저녁 나름에 역시나 신발은 거둬 들여지질 않았다. 어쩌려나? 하는 궁금증에 다음 차례 운행 때나, 그다음 운행 때도 지켜보지만 신발 위에는 눈 봉우리만 만들어질 뿐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좀머 씨 봉고차는 어김없이 눈 병아리가 되어버린 신발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칠닥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3번 버스에도 고정손님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로부터 좀머씨에 대한 우려가 일기 시작했다.
"엄마야~ 저 양반 보그래이! 저 눈밭에 신발을 하나도 안 치우고는…. 우째, 다 배리겠네~"
50대 아줌마, 눈 오는 날 차창 밖의 걱정 소리다.
"음 마~ 신발장시~ 밤새 장사했는 갑네, 이 새벽에 이슬 맞은 신발…. 웬일이디야?"
출퇴근하는 손님들로부터 시작한 좀머 씨에 관한 관심은 학생들 사이에도 퍼져 나갔고, 급기야는 이런저런 소문이 일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는, 신발 장수가 얼마 전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아내로부터 이혼당하고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노점을 하는데, 장사에는 의욕이 없을 정도로 폐인이 되어가고 있더라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또는, 원체 가난하게 살아 온 그가 단둘이 사는 아들에게 선물하려고 신발 도둑을 하다가 옥살이하고는 출소하여 헤어진 아들을 찾는 중이다고 했다. 그런 건 다 헛소문이고 실제는, 중앙동에서 안산 제일의 신발가게 주인이었던 그가 작년 겨울에 큰, 화재로 전 재산을 불태우고 남아있는 물건을 펼쳐 놓고는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다고도 했다.
어쨌거나...
운전수는, 무성한 그런 소문들이 막연하지만, 그의 현실과는 다를 거라는 생각이다.
주변에서 바라다보는 의도일 뿐이지 신발 장수 그는, 그일 뿐임이라.
그의 현실은 뭇 사람의 추측과는 달리 어쩌면 너무나 싱거운 이유이거나 대단히 특이한 원인으로 여러 사람의 상상을 불러내는 현상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현실을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그일 뿐으로써 그저 그대로 두면 될 일이다. 동화 주인공, 좀머 씨처럼,
"그러니, 제발…. 나를 그냥 놔두시오!" 소리칠 것만 같다.
.........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한 공간으로 그는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안산천 옆 공원에는 그의 노점상이 펼쳐져 있으리라….
육십 년 대,
한국전쟁을 치른 총알구멍이 숭숭 한 국민학교의 마룻바닥 교실에서 희한하게 생긴 신발(실내화)을 신고 다닌 아이는 녀석, 단 하나였다.
가죽으로 표지가 된 국어, 산수, 자연…. 종합으로 묶인 공책이며, 수십 가지 색의 크레용 하며 기죽을 만치 화려한 사진이 박힌 어린이 잡지, "소년 세계"를 정기구독하는……. 당시에 지방의 토호 세력인 정미소집 아들이었다.
곱게 성장한 녀석은 대학을 마치고 열쇠 세 개로 대변되는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했고, 장가를 들 때가 되어 맞선 보게 되는 상대는 병원장 집안이나 운수회사 사장 댁 같은, 맨 그런 수준의 지방 토호 세력이었다. 한 참 그러고 다닐 때, 동창들의 술자리에서 녀석은 자기가 만나 본 택시회사 사장 말로는, 택시기사의 월급제는 무망한 일이며, 그렇게 될 시에 운전수들이 월급도 챙기고 삥당도 챙긴다고 하더라.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하더라. 하며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내보였다. 그런 그의 개념을 안주 삼고 있는 칠닥이는 구십 년 대代 그 당시에 시내버스 운전수였다.
3김 金이 대권 후보 당시,
김대중은 전 농민의 농가 부채를 탕감해 주겠다고 공약했다.
그 점에 대해 녀석은,
"농민들이 빚지는 게 부엌 고치고 가스레인지나 싱크대 들여놓아 빚진다며?" 하였다.
8~90년대 부엌에 싱크대쯤이야, 어느 빈곤층도 그 수준은 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빈곤이 빈곤하지 않음을, 경멸하는 듯하였다.
칠닥이가 농사짓다가 지쳐서 돌아왔을 때, 그때도 녀석은 당연한 현상인 듯,
"농촌이 빚지는 게 자동차 굴리고 애들 학비 대느라 빚진다며?"
십수 년 전과 조금도 변치 않은 녀석은 IMF를 겪어도 아랑곳없이 회사의 간부가 되어있었다.
"농민은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지……?"
계층 간에, 상당한 근로소득의 격차도 심각하지만, 더 우려되는 것은 재산소득에 대한 격차이다 갈수록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근로소득의 차이는 재산, 부동산 축적으로 이어져서 수정되지 않는 사선으로 고착된다.
나라의 경제력이 신장한 만큼이나 싱크대도, 자동차도, 학생의 학비도, 가져야 할 농민 아닌가? 당연한 소득 분배를 인정치 못하는 상전 습성이다.
상식 밖으로 특별나게 소비하는 부류들의 행태는 이미 상당 부분 평준화되어 생활상을 거부하여 차별화를 시도하려는 상전의 습성. 말이 좋아, 자유경쟁 체제이고 시장경제라 하지만 출발선에서 그 등수 等數가 정해져 있다면, 또 그것을 끊임없이 강요하기란 머슴이 밑에 있어야 안심되는 상전 습성의 중환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더불어의 개념이라고는 없다.
이 땅에 있어서 13대 대통령선거는 의미가 깊은 역사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말임 시, 대통령 박정희가 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지 않았당가?, <서울의 봄> 혀며 저마다 집권 의욕을 불태우던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3김씨는 그 기회를 고스란히 전두환에 강탈당하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된당께.
아, 정국이 극심하게 혼란한 틈을 타 신군부의 수장인 전두환이 정권을 거머쥐고는 철권을 휘두른 지 오랜만에, 우여곡절을 겪고는 민의의 힘으로 정권을 굴복시키고 얻어 낸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13대 대통령선거라 이 말씀이 시.
특히나 김대중은 박정권 시절부터 이어지는 납치사건과 사형선고를 받으며 인고에 인고를 거듭해야만 했쑤라우. 그러나, 그러던 그도 김영삼과 함께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두 사람은 민정당의 노태우에게 또 한 번의 좋은 기회를 잃게 되었지라우.”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미친놈, 미친놈!”
상지는 방금 악수 인사를 나누고 급히 돌아서는 사내 뒤통수에다 욕을 퍼붓는다.
“저 사람 누구로?”
“아 왜, 대우건설에서 상무 했다던, 전번에 국민당 국회의원 후보였던 놈 아리라. 거 어 떨어지고 요번에는 김대중한테 붙은 모양일세! 대중이 온다꼬 마중 나왔단다.”
참, 류 상지는 그대로 생쥐였다.
반 토막만큼이나 조그마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얼굴이나 톡 튀어나온 이빨에 행동거지조차도 살살거리며 오지랖을 넓혀서는 모르는 것 없고, 안 가 본 데 없는 쌩쥐였다.
“저 사람을 우에 아노?”
“별거 다 알라 한다?”
역 광장은 제법 궁중이 모여 있었고 역사 驛舍 입구가 분주해진 모습에 상지와 칠닥이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그 후보였다던 사내가 대표로 나서서 역사를 빠져나오는 김대중을 모셔서 연단으로 안내하였다. 두꺼운 오리털 점퍼를 입은 웅장한 경호원들이 그의 주변을 호위하였다.
칠닥이는 묘한 김장감을 느낀다.
영남의 북단, 김대중에게 적진이었다. 노태우나 김영삼이 방문할 때와는 심히 다른 분위기를 그가 감지하고 있다. 김대중은 매서운 눈초리를 하며 우렁차고 꼿꼿한 자세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적진에 우뚝 선 장군의 느낌이다. 그는 농가 부채 탕감을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김기운 조합장이 인삼 싣고 전라도 가 주유소 갔디이, 그 새끼들이 선생님 만 세 세 번 불러야 기름 준다 케서, '아' 하고 전화해서는 동수네가 기름 싣고는 전라도까지 갔다 안카나?”
상지는 볼멘 표정으로 여기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있다.
그렇게 칠닥이는 김대중을 처음으로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이 땅에 13대 대통령선거 출마 후보자는 전두환을 이어서 노태우, 경남을 기반으로 하여 야권진영에 기반을 두고 중립지역과 중산층 지지가 높은 김영삼, 역시 야권을 기반으로 하여 재야에 상대적인 지지가 높으며 절대적인 호남의 지지를 얻고 있는 김대중, 고령자와 유신의 향수를 자극하여 김종필 이렇게 네 사람이 대결하게 되었다.
칠닥이가 국수 공장의 일원이가 월남 참전용사가 되었고 일영이가 미군 일회용 커피로 골목인심을 쓸데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기였다. 학생들이 영화관에 단체 입장을 하면 대한뉴스에 첫 영상이 애국가에 이어 (월남 소식)이었다. 대체로 한국군이 월남 주민에게 생활 봉사를 했다는 것과 베트콩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더불어서 한국의 연예인들이 파월 장병을 위로하는 위문 공연 소식도 빠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월남전 참전의 계기로 국내정치에 있어 안정을 찾았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시발로 해서 국민은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참전용사들은 엄청난 비율의 금액을 착취당함에도 불구하고 전투수당 수령은 한 가정을 일으키는데 충분한 목돈이 되었다.
국내 열악한 상태의 초기 기업들은 재벌성장의 분수령이 된 것이 베트남 진출이었다.
국내기업의 본격적인 베트남 진출은 1966년 3월 한진상사가 725만 달러 규모의 항만 및 운송계약을 체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진은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미군 물자를 운송하는 트럭업체에 불과했다. 1965년 베트남을 방문하던 조중훈 회장은 퀴논의 항구에 30척의 선박이 하역 대기 중인 모습을 보고 사업을 구상하다가 주한 미군의 알선으로 퀴논에 주둔 중인 미군 2사단과 한국군 맹호부대 1개 사단에 대한 군수물자의 하역과 운송을 맡으면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수송 트럭이 월맹군의 기습공격을 받는 일이 빈번했지만, 위험부담이 큰 만큼 수익성도 좋았다. 한진은 이후 1971년까지 5년 동안 누계 1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일거에 한국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한 기업이 되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가용 외환 규모가 수천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라 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 번 돈을 바탕으로 1960년대 동양화재보험, 한일개발, 한국항공 등을 인수했고, 1969년 3월에는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국영기업인 대한항공공사를 사들여 대한항공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대건설 역시 초기부터 베트남에 진출했다. 1966년 1월 미군은 캄란만 건설공사를 발주했는데 현대는 준설공사 경험자가 한 명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따냈다. 현대는 계약한 지 한 달 만에야 일본에서 준설선을 조달하고 현지 기능공들을 준설공사에 동원하면서도 예정보다 일찍 공사를 끝내 미군을 놀라게 했다. 덕분에 현대는 이후 다른 대규모 공사도 경쟁자를 물리치고 따낼 수 있었다.
현대건설과 삼환기업의 뒤를 이어 경남기업, 한양건설, 대림건설, 고려개발, 공영토건 등 79개에 달하는 국내 건설업체들이 베트남에 진출하여 떼돈을 벌었다. 이와 함께 삼성, 효성 물산, 동아무역, 삼양사, 삼호 무역, 대한농산, 신선 무역, 영농상사, 삼도물산, 정금물산, 동화산업, 천우사, 대한농산 등의 무역업체들도 베트남특수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밖에 빙그레의 전신인 대일 유업의 경우 베트남 미군 부대 앞에 트럭을 몰고 가 그 위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돈을 벌었다. 베트남 철수 후 대일 유업은 당시 벌어들인 돈과 함께 아이스크림 기계를 국내로 들여와 빙과업체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운송업체, 건설업체, 무역업체가 주로 월남특수를 누렸지만 다른 사업 분야의 한국 기업들 역시 직간접으로 많은 수혜를 입었고, 그 결과 1066년부터 1971년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 주가지수는 300% 이상 상승했다.
특히 건설업체의 경우 베트남에서의 토목공사 경험은 이후 해외 진출의 큰 밑바탕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건설업체들은 모두 대형공사의 경험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브라운 각서’의 도움으로 쉽게 공사를 따내고, 그러고 나서 노하우를 배우는 사업방식을 취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무모한 사업방식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항만, 도로, 주택, 군사시설공사 등을 수행하면서 미국 건설업체로부터 배운 노하우는 이후 1970년대 중동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국내 1세대 건설 기업인 삼환기업은 1966년 월남전 특수 당시 가장 먼저 사이공으로 진출해 해외 건설 금탑 산업훈장을 받았고 1980년에는 건설 수출 10억 불탑을 수상, 대한민국 토목건축대상도 여러 차례 받은 우량 중견 업체가 되었다.
월남전 파병 용사 1인당 약 1만 7천 달러씩 한국경제에 기여했다고 한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이었음을 고려할 때 실로 엄청난 수준이다. 그런데 수혜 대부분은 파병 용사와 가족이 아닌 재벌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재벌들은 월남파병에 따른 후속 조치로 미국의 도움으로 수출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은 재벌 급성장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재벌들이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월남전 파병 용사를 위해 따로 어떤 금전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다.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월맹 사이에 휴전협정이 시작되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군대 철수가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 11월 6일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주재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데 합의하고,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다. 한국군 파병은 8여 년 동안 총 34만여 명이 참전했다. 월남전 참전 전우들의 희생으로 한미동맹이 강화됐다. 미국으로부터 M16 자동소총과 팬텀 전투기 등 첨단 무기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파월 장병 해외 근무수당의 80%가 국내에 송금됐고 8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월남전 특수를 누렸다. 참전 경제 효과가 67억3000만 달러로 조사됐다. 이 돈으로 박정희 정부가 경부고속도로를 깔고 경제개발계획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어두운 그늘도 베트남에 남겼다. 월남전 파병 한국군이 전투 하는 동안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지른 일이 많았다. 구체적인 증거 중 하나로 베트남 빈호아 마을의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
증오비에는 '하늘을 찌를 죄악, 만대에 기억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고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내용이 쓰여 있다. 베트콩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학살은 빈호아 마을에서만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세 이상의 노인 6명을 포함 5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또한, 월파 한국군에 의해 강간당해 낳게 된 아이나, 그곳에서 가정을 만들고 살았던 한국군들이 전쟁이 끝나자 모두 한국으로 돌아와 베트남에 있는 가족들과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림으로써 베트남에서는 '라이따이한'이나 강간당한 베트남 여성분들이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분들처럼 지금도 시위를 하고 계신다고 한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야당은 파병에 대해 반대했고, 1966년 추가 파병 시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과 정부 측 일부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맹호·청룡 부대의 파병만으로도 미국이나 자유 세계에 대한 신의를 다한 것이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사단을 빼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세계 여론이 베트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에서 한국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파병이 있을 때는 한국에 뚜렷한 국가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어야만 한다는 회담을 거쳐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 항의 사전보장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국회에서는 이 보장의 효력 등에 대해 많은 시비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며, 군사기술 및 군 장비 등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미국과 군사적 관계를 증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월맹 사이에 휴전협정이 시작되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군대 철수가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 11월 6일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주재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데 합의하고,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다.
15쪽, 223매.
(현대사- 열차 아시아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사고, 13대 대선, 월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