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여행6 - 캐널시티를 구경하고는 하카다항으로 가서 귀국 페리를 타다!
우리 부부는 지하철로 후쿠오카 시내 지온역 에 내려 선종의 개조 에이사이 가 12세기에 세운 쇼후쿠지
와 오래된 절로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씨의 무덤이 있는 도초지 를 보는데, 초대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
는 임진왜란 왜군 3군 대장으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전공을 세워 후쿠오카 번주 가 되었습니다.
19세기말 하카타(후쿠오카) 역사와 문화 인 직물, 인형, 종이등 을 제조하는 모습인 메이지시대
풍물 후루사토관 을 보고는 매년 7월 1일 부터 보름간 기온 야마카사 마쓰리 가 행해지며
오쿠시다상 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일찌기 757년 에 세워졌다는 쿠시다 진자 를 구경합니다!
후쿠오카시의 야마카사 마쓰리 는 1240년에 시작 되어 780년 을 이어 온다는데 하카타에 역병 이
돌자 조텐지의 개조 쇼이치가 가마를 타고 길에 물을 뿌려서 전염병을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하며 마쓰리에 등장하는 커다란 가마를 야마카사 (山笠, 신을 모신 장식가마) 라고 부릅니다.
그러고는 이제 귀국을 하기 위해 하카타항 으로 가서 코비호 를 타야 하는지라....
먼저 배낭을 맡겨둔 하카다역 으로 가야 하는데, 그 전에 근처에 캐널시티
하카다 를 보기로 하고 시내 지도 를 보며 행인에게 물어가면서 10여분을 걷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마침내 후쿠오카의 명물인 복합 쇼핑몰 캐널시티 하카타
에 도착합니다. 여긴 자주색과 살구색 이 묘하게 조화되는 건물에.....
붉고 노란 알롤달록한 상징물 을 보니 문득 도쿄 하라주쿠 다케시타 도리 (竹下通り)
와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이 떠오릅니다.
서울의 강남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에 세워진 조형물 간판(문) 은 도쿄 하라주쿠 의
"다케시타도리 ’竹下通り" 입구의 조형물과 닮았었는데 2010년에 철되었습니다.
캐널시티 하카타 キャナルツティ 博多 는 마카오 꼬타이 COTAI 섬의 베네시안
호텔 The Venetian Macao 의 운하 처럼, 인공 운하인 캐널 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복합 시설물로....... 건축가 저디 파트너스 가 설계를 했다고 합니다.
저디 파트너스 는 도쿄 롯폰기힐스 와 여기 후쿠오카 캐널시티 를 만든 다음에 우리가
오늘 오전에 이미 보았던 고쿠라 의 리버워크 키타큐슈 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캐널시티 에는 게임기 세가 어뮤즈먼트 파크, 수십개의 멀티플렉스등 영화관, 하이테크
테마파크, 조이 폴리스, 쇼핑몰, 라멘 스타디움 등 열거하기도 숨찬데
마침 안내 방송 이 나오기에 보니...... 버너 심포니 라고 불리는 분수쇼 가 연출 됩니다?
그 다음에는 전혀 생뚱맞게도 한 녀석이 나와 마술 쇼 같은 것을 펼치네요!!!
그러고는 점심 을 먹을까 생각하는데.... 5층에 있다는 라멘스타디움
에는 홋카이도 라멘 에서 하카타 라멘 까지 종류대로 다 있다니 골라 먹을수도?
라멘 은 중국 내전에서 장개석 군대가 국수를 볶아 건조해 휴대 한걸 보고 만들었다는데 인도인
들이 카레 가루를 인디카 쌀로 지은 푸슬푸슬한 밥에 뿌려서 손으로 비벼 먹는걸 보고....
일본인들은 카레에 고기와 야채를 썰어 넣어 자포니카 쌀로 지은 카레라이스 를 만들었습니다.
1927년 도쿄 긴자 조시야 정육점에서는 프랑스의 크로케트 Croquette 를 모방해 팔고남은 고기를 다져
감자와 섞어 기름에 끓인 고로케 에.... 1929년 궁중 요리사였던 시마다 신지로 는 ‘폰치켄’ 이라는
식당을 열고는 돈카쓰 를 선보였으니, 두꺼운 고기를 빵가루를 입혀 튀겨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완성했으며 나가사키 짬뽕등 남의나라 음식을 도입해 일본화하는 저들의 재주 가 놀랍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오사카에서 라멘 을 먹다가 그 돼지뼈 고운 국물 이 느끼하여 고역을 치룬
터라.... 그리고 다른 층의 일반 음식점들은 단품 요리 가 없어 그만 포기하는데,
그러고는 캐널시티 하카타 를 나와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시내 지도를 보며 걷습니다.
다시 10여분을 걸으니 이윽고 우리가 배낭을 넣어둔 하카타역 에 도착합니다.
하카타역 으로 들어가니 점심때 를 놓친지라 배가 고프기에 구내에
있는 식당을 찾아가서 만만한 우동 을 시켜서는 간단히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우동은 일본과 당나라의 교류 과정에서 출현했으니... 일본은 과거에는 한반도에서 문화를 수입했으나
5호 16국 시대에 남조 여러나라에 사신 을 파견하기 시작해 이후 수나라때에 견수사 를 보냈고
당나라때 630년 부터 894년 까지 235년간 190 차례에 걸쳐 외교 사절인 견당사 를 파견했으며
다이카 개신으로 당나라 율령제도를 도입하고 나라와 교토의 궁궐과 시가지는 장안을 본떠 짓습니다.
8세기에 사이초 (最澄 최징)는 당에 유학해 804년 귀국후 히에이잔 엔랴쿠지 를 세우고 일본 천태종 을
개창했고, 홍법대사 구카이(空海 공해)는 당나라 장안에 머물면서 불공삼장의 제자 혜과로 부터
진언밀교를 전수 받아 고야산 에 새로운 도량을 세웠으니 진언종 이며, 중국에서 선(禪) 이 수입되니
영서는 임제종을 창시했고 선종(禪宗) 종파로 도겐(道元)선사 는 조동종(曹洞宗 소토슈) 을 일으킵니다.
우동 은 원래 견당사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훈둔(混沌·혼돈)’ 이라는 중국식 만둣국
이었다고 하니.... 밀가루 경단에 콩이나 팥소를 넣어 끓인 것으로 끓어오르는 경단
이 빙글빙글 돌며 정신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훈둔(混沌·혼돈)’ 이라고 합니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음식이므로 삼수변(氵) 이 먹을식(飠) 변으로 바뀌면서 ‘곤통
(餛飩·혼돈)’ 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시대가 지나면서 뜨겁게 먹는다는 뜻
으로 ‘온통(溫飩·온돈)’ 이 됐고, 다시 지금의 ‘우동(饂飩·온돈)’ 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복잡한 인파를 헤치고 지하로 내려가서는 코인 로까 에서
가방과 배낭 을 찾아 둘러메고는 하카타역 광장 으로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하카타역 주변 을 한번 둘러보고는 일본은 차량이 영국 처럼 좌측통행 이라
도로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니 버스 정류장 이 있는 데 E 정류장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노선도를 살펴 보자니 여행 가이드북 책에는 하카타항 가는 버스 가
11, 19, 51번 노선이 있다고 했지만.... 이 정류장에는 88번 버스 뿐 이네요?
버스 정류장에는 한국 여학생도 몇사람 보이는 데.....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뒷문 으로
버스를 올라타니 중동의 이란인 처럼 보이는 사내 둘 이 두리번 거리는 데....
일본인 아줌마 가 버스 뒷문 계단 옆에 있는 상자(기계)에서 정리권 이라 불리는 번호표 종이 를 뽑아
주며 내리는 정류소를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보는데..... 일본 버스는 교토 처럼 정액제도 있지만
후쿠오카등 대부분은 거리제 니 버스가 운행하면서 저 정리권에 적힌 번호에 점점 요금이 올라갑니다.
버스는 20분을 달려 종점에 이르니 앞문 으로 내리면서 버스 전면의 전광판에서 정리권 번호에 해당하는
요금대로 통에 넣는데..... 거스럼돈을 주지 않는지라 천엔이나 5백엔 지폐를 돈통 옆 교환통 에
넣으면 잔돈이 나오니 정확하게 세어서 넣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도 재촉하지 않으니 천천히 해도 됩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올린 글에 서울 버스를 타고 내릴줄 알면 서울 생활은 마스터한 것이라던데 일본
버스는 정류장에 선 후에야 의자에서 일어나며 손님이 자리에 앉은 후에야 출발하는데.... 서울에서
정류소에 내리지 못하고 늘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했으며 미처 앉기도 전에 출발하니 버스 안에서 몇번이나
넘어졌다는? 일본을 열번 넘게 갔지만 나도 버스가 서기 전에 일어서다가 운전수에게 주의 를 받곤 합니다!
버스에서 내려 하키타항 국제터미널 博多港 國際 FT 로 들어서는데 터미널 안에서도
이란인들이 두리번 거리며 당황해 하기에, 우선 자판기 기계 에서 터미널
이용료 500엔 짜리 티켓 을 뽑으라고 말해주는데 한 녀석은 한국말 도 조금 하네요....
자기들은 터키인 ( 이란인이 아니네요? ) 이라며 독일과 한국에서 몇년 일하기도
했답니다! 한국도 이제 다문화 사회 가 되어 간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네요?
그러고는 터미널 2층 으로 올라가니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 들이 빨강색
의 강렬한 인상을 주어 시선을 붙잡습니다. 인형을 보니 문득 몇년전에
야나가와 에서 본 여자아이들을 위한 사게몽(さげもん) 마츠리 가 떠오릅니다.
야나가와 사게몽 마츠리 때는 외할머니 가 외손녀를 위해 집에다가 헝겁 인형 을 모빌 처럼
메다는데, 야나가와 특산품인 야나가와 마리 (柳川まり) 로만 사게몽 을 만든다고 합니다.
원래 일본에서는 히나미츠리 (ひな祭り) 라고 해서..... 매년 3월 3일 여자 어린이 들의
무병장수와 행복 을 기원하는 전통축제가 전국에서 일제히 열린다는데... 사무라이
성인식 에서 유래한 남자 어린이날은 5월 5일 이고, 여자 어린이날은 3월 3일 이라네요?
8세기 부터 12~16세때 남자는 '겐후쿠(元福)' 라는 성인식 을 가졌으니 이후 2자루 칼을 찰수
있고 시합에서 상대를 죽여도 면책 받으며 전쟁터에 나갈수 있었고, 여자는 "상 (裳, も)"
이라는 허리로 부터 아래에 걸치는 의복을 입는 의식인 「상복」 을 12~16세에 거행했습니다.
조선 남자도 15~20세에 성인식 을 했지만 붓의 나라라 칼 하고는 거리가 멀었는데, 무과 과거시험은 나무
화살, 철화살, 유엽전 쏘기와 말타고 활 쏘기, 말타고 창으로 허수아비 찌르기 등이었지만 칼과 창으로
상대방과 겨루기 가 없었으니 평생 칼 한번 손에 쥐지 않아도 무과 장원급제에 장군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성인식이 없어졌지만.... 일본에서는 성인식(成人の日) 이 매년 1월 둘째주 월요일 에 행해지나
말 그대로 성인이 되는 젊은이들을 위한 행사로, 주로 출신 고향의 지자체 에서 열리는데.... 1946년
11월 22일 사이타마의 와라비시에서 열린 '청년제' 가 그 계기로 젊은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열렸다고 합니다.
대합실에서 어떤 승객들은 매점에서 컵라면 을 사서 뜨거운 물을 부어 점심
을 때우는 모습을 보는 데..... 우린 비틀호 부스 에서 코비호
승선 수속 을 하며 항만 이용료 티켓 외에도 유류할증료 500 엔 을 냅니다.
그러고는 입장해 출국수속을 마친후 면세점을 거쳐 코비호 에 승선하는데 대부분 손님은
한국인들 입니다. 열흘간의 이번 여행을 돌아보자니...... 우리 부부는 코비호로
후쿠오카 에 내려서 하카다역에서 JR 패스 7일 짜리로 기차를 타고 오카야마 로 갔습니다.
전설과도 같은 옛 키비국 과 에도시대의 옛 정취를 보존한 구라시키 를 다녀와
오카야마의 모모타로 축제 를 보고는 시코쿠 섬으로 들어가 물의 성인
다카마쓰성 을 보고는 유명한 도고 온천 을 보유한 마쓰야마 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백조성으로 유면한 히메지 를 거쳐 돗토리 에 이르러
바닷가에 생긴 사막 을 구경하고는....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에도시대
마을인 시라카베 도조군 과 요괴 동상 으로 유명한 사카이 미나토 를 보았습니다.
코난의 마을 을 거쳐 야스기의 정원이 예쁜 아다치 미술관 을 보고는 시마네현 마쓰에 시내
에서 성을 관람한 후에 해자와 운하를 도는 나룻배를 타고는..... 서쪽으로 신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이즈모 에 이르러서는 이즈모 대사에 들러 무력의 신 스사노오 를 봅니다.
다시 기차로 서쪽으로 야마구치 에 이르러 백제 성왕의 후손 으로 서부 일본 7개국을 지배하며 교토
무로마치 막부를 조종했던 오우치 씨 와, 말래이지아 말래카 일본인촌에서 안지로를 만나 세례를
주고 그의 안내로 1549년 가고시마에 상륙한 일본 최초의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 를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시모노세키 에 도착해 옛 무사마을 초후 를 보고 돌아오면서 단노우라 해전
아카마진구를 보고는.... 페리를 타고 간몬해협을 건너 모지코 레트로 를 보고 다시
고쿠라 에 이르러 유서깊은 옛 성과 운하를 보고는 후쿠오카에 도착해 시내를구경합니다.
이제 8일간의 일본 여행을 마치는 귀국선 코비호 를 타는데..... 좁은 실내에서
캔맥주 하나를 마셨을뿐 3시간을 꼼짝 못하고 의자에만 앉았으니....
배를 타면 몸이 약한 울 마눌이 늘 하던 배멀미 를 하지않는게 천만다행 입니다!
배는 일의대수 라는 현해탄 을 건너 서쪽으로 달려서는 대마도 를 지나는데..... 1592년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보다 더 많은 배를 거느렸던 경상좌수사 박홍이 밤에 작은 배 한척만 여기 대마도
에 보냈으면, 천척 배들이 정박한걸 볼수 있었을 것인데도 그는 정찰이나 훈련 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4월 13일 아침 8시에 대마도를 출발한 고니시군의 700척 수송선단은 오후 5시에
영도에 도착해 밤을 지내고 다음날 부산진에 상륙할때까지 바다에서 전혀 방해 를 받지 않았습니다.
부산진성 첨사 정발 은 영도에서 사냥하다가 일본 배들을 보았지만 처음엔 세견선이라 여겼다가
급히 성으로 들어가는데.... 경상 좌수사 박홍이 판옥선 30척만 부산진앞에 정열하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700척 수송선에 사거리 600미터 대포 를 발사했으면, 사거리 100미터에 불과한
조총 뿐인 일본군의 상륙 자체가 불가능했을텐데.... 그는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하고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에 불지른 후에 수군을 해산시키고는 혼자 서울로 달아났습니다.
임진왜란은 기습이 아닌게.... 사위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과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던 고니시 유키나가 는 전쟁을
막기위해 필사적이었으니 도주를 통해 전쟁을 알리는 사신 을 보냈고, 신무기 조총 2자루 를 선물하니 선조는
시험발사를 하고 그 위력에 진저리를 치고는 저 흉측한 것 은 치우라니 군기시 창고 로 들어가고 끝이었으며
부산 왜관의 400명 왜인들이 다 철수하고 대마도주가 찾아와 전쟁을 막을 서신을 서울로 보내달라 간청합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은 공격이 시작된지 불과 두세시간만에 함락 됐는데... 대구에 모인 제승방략군 5만명 을
지휘할 이일 은 호위 병사 300명을 모으지 못해 서울에서 사흘간이나 출발을 하지 못하니 저 군대는
흩어지는데... 유성룡이 병사 모집은 부관에게 맡기고 급히 가라니 5~6명 측근만 데리고 상주에 도착했
는데, 부산진성이 1~2일, 동래성이 2~3일만 버텨 주었어도 이일이 대구에 도착해 군대를 지휘 했을 것이라?
우리 코비호 는 후쿠오카 하카타항 을 출발한지 근 3시간을 달려서 드디어 오륙도 섬 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부산 에 다 온 것이라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