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289호(익산 왕궁리 5층석탑)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전북 익산에는... |
전북 익산 지역은 2003년 여름휴가시 공주, 부여와 함께 계획했다가 다녀오지 못한 곳으로 틈틈이 기회를 엿 보던 차에 2004년 7월초에 김제가 고향인 직원의 결혼식이 있어서 결혼식 참석 당일 오전에 익산 지역의 문화재를 둘러보고 결혼식 참석 후에는 금산사와 전주 지역을 둘러 볼 계획을 짰습니다.
장마철로 비가 계속해서 내렸지만 결혼식 참석 당일 오전에 익산 지역은 비가 오락 가락할 뿐, 본격적으로 내리지는 않아서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 5층석탑만 급하게 둘러보았으며, 오후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다른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갔습니다. 마침, 3주 후에 처가집에 갈 일이 있어서 공주에 갔다가 다시 익산에 잠시 들러서 나머지 유적지들을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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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고도리에서 동고도리 방향으로 바라 본 전경 |
호남 고속도로 익산 IC의 톨게이트를 나오면 오른쪽 도로로 빠져 나가야 합니다. 이 곳에서 익산 방향으로 10여분 정도 가다보면 금마면 사거리에 오른쪽은 미륵사지 8Km, 왼쪽은 왕궁리 유적 4Km란 표지판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직진하면 전방에 1번 국도를 건너는 지하도가 있습니다.
이 지하도를 건너지 말고 1번 국도(위 사진) 밑의 도로를 1Km 정도 따라 가면서 오른쪽의 넓은 논을 자세히 보면 우뚝 서있는 물체가 보입니다. 왼편에 다시 지하도가 나오고 이 곳에서 논길로 우회전하면 됩니다. 논길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보물 46호로 지정된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위 사진 왼편 작은 석불 입상)이 보입니다. 석불 입상의 소재지 주소만으로 이 곳을 찾느라고 금마면을 한참 헤매다가 어렵게 찾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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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고도리 석불입상 전경 |
▲ 동고도리 석불입상 |
바로 앞에 있는 석불이 동고도리(동네 이름)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방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석불은 서고도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 석불들을 동고도리 석불입상, 서고도리 석불입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석불들은 왕릉 정도의 크기와 높이의 둥근 흙더미 위에 서 있습니다.
보수를 하는 중인지 주변이 어수선하고 석불이 있는 둔덕은 장마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검은 망사로 둘러 놓았습니다. 이 동고도리 석불입상은 도로를 등지고 있으며, 200여 미터 전방에 있는 서고도리 석불입상과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석불입상의 높이는 4.24m로 길쭉하며, 뒤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석불의 양 팔은 가슴으로 모은 상태이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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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고도리 머리 부분 |
▲ 동고도리 뒤에 있는 비석 |
▲ 옥룡천의 나무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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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 방향에서 바라 본 반대편 석불 전경 |
▲ 새로 놓은 나무 다리(만 3년 후에 촬영) |
동고도리 석불과 서고도리 석불의 중간 지점에는 나무다리가 있으나 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 놓았습니다. 이번 장마에 그랬는지, 나무다리는 한 쪽으로 기울어서 곧 무너질 것 처럼 보였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건널 곳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건넜습니다. 서고도리 석불은 동고도리 석불과 똑 같은 모습이며, 동고도리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만, 동고도리 석불입상은 통돌로 만들었으나 서고도리 석불입상은 몸통과 머리 부분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동고도리 입상은 남자상(男子像)이고, 서고도리 입상은 여자상(女子像)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서있는 사이로 옥룡천이 흐르기 때문에 이들은 평상시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子正)에야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그 때야 두 인석은 서로 건너와서 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에 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1858년 이 고을에 부임한 군수 황종석(黃鍾奭)이 넘어져 있던 석불을 세우고 건립한「석불중건기」에 의하면 금마는 동서북의 3면이 모두 산으로 막혀 있는데, 남쪽만 터져 있어서 마을의 수호를 위하여 이곳에 석불을 세웠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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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고도리 뒷 모습 전경 |
▲ 서고도리에서 동고도리를 바라 본 모습 |
보물 46호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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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에 두 불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冠) 위에 다시 4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4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깍아 대좌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의 석인상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 |
익산 왕궁리 유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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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왕궁리 유적지 전경(문화재청 사진) |
익산 왕궁리 유적은 사적 40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성곽 안팎으로 폭이 약 1m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발견되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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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 유적지 입구 |
▲ 신축중인 박물관 |
고도리 석불입상에서 다시 나와서 정면의 지하도를 건너서 1변 국도 밑의 도로를 조금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왕궁리 유적지가 나옵니다. 입구의 오른쪽에는 왕궁리 유적의 유물을 전시하기 위한 박물관을 건립(위 오른쪽 사진) 중에 있으며, 위의 왼쪽 사진 방향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부여 문화연구소에서 왕궁리 유적 발굴 조사를 하기 위한 가 건물들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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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단이 있는 곳을 지나면 바로 왕궁리 5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이 보입니다. 석탑 주위의 2~3미터 둘레를 제외하고는 좌, 우, 뒤 삼면은 2미터 정도의 흙을 깍아 놓고 유적을 발굴하기 위한 구획 정리를 해 놓았으며, 장마철이라 발굴지 주변을 모두 비닐로 덮어 놓았습니다. 탑은 넓은 바다에 돛단배 하나 떠 있는것 처럼 외롭게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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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백제의 궁궐터로 전하는 왕궁평성 안에 우뚝 서 있는 높이 8.5m 의 왕궁리오층석탑으로 그 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왔었지만 이 탑의 학술적 가치가 높이 인정됨에 따라서 1997년에 국보로 재지정 되었습니다.
이 탑의 해체 수리시 발견된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었으며, 아래의 사진 중에 금제방합과 이 안에 들어 있었던 유리제 사리병의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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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 유적 발굴 전경 |
▲ 금제방합(석탑내 발견 유물) |
▲ 유리제 사리병(석탑내 발견 유물) |
국보 289호 익산 왕궁리 5층석탑 |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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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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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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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쌍릉 중에 대왕릉 입구 전경 |
다시 금마면 사거리로 나와서 익산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2Km 정도 가다보면 도로의 언덕진 곳이 나옵니다. 이 도로의 언덕진 부분을 다 올라갈 즈음(이정표 있으나 작아서 지나치기 쉬움)에 우측의 작은 도로로 진입하여 2Km 정도 들어가면 도로 왼쪽에 익산 쌍릉이 있습니다.
도로 옆의 쌍릉(위의 큰 사진)이 보이기 바로 전에 왼쪽에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이 곳에 차를 세워두고 조금 떨어져 있는 두 곳의 능을 둘러 보실 수 있습니다. 주차장 전방에 있는 것이 소왕릉(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음)이고, 주차장 오른편 도로 옆에 있는 것이 대왕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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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한씨 공덕비 |
▲ 대왕릉 전경 |
저는 대왕릉 옆의 길가에 차를 세우고 대왕릉을 보면서 쌍릉이 왜 봉분이 하나밖에 없는지 의아해 하다가 안내판을 다시 보니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한 기의 봉분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릉 입구에는 석양과 일부 석물들이 뽑혀져 있었으며, 왼쪽에는 청주한씨인 한창교의 공덕비가 있습니다. 공덕비를 조금 읽어보니 쌍릉을 보전하기 위한 일을 많이 하신 분 같습니다.
대왕릉에는 큰 봉분 하나 뿐이며, 봉분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능의 크기는 위 오른쪽 사진의 사람을 보시고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대왕릉의 뒷편 오솔길로 200여 미터를 들어가면 소왕릉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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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왕릉 전경 |
▲ 소왕릉 |
▲ 익산 쌍릉 주차장 |
소왕릉 역시 봉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대왕릉에 비하여 조금(2/3 정도) 작습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니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왕릉 앞에 뽑혀 있었던 석양과 장명등, 상석 등이 있었고, 소왕릉에도 상석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위 사진과 같이 단순히 봉분만 있습니다.
아무래도 백제 왕릉에 아래 사진과 같은 조선조 석물을 세워 놓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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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릉 예전 사진 |
▲ 소왕릉 예전 사진 |
익산 쌍릉은 사적 8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익산 쌍릉은...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무덤으로,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6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없지만 무덤 안의 구조로 보아 백제 후기의 것이 틀림없으며, 근처에 미륵사가 있어서 미륵사를 처음 만든 백제의 무왕과 그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뚜렷한 증거는 없다. |
익산 향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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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향교는 고도리 석불입상이 익산고등학교 옆에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주변을 헤메다가 익산 향교가 보이길래 들렸습니다. 익산 향교는 금마면 사거리에서 금마면으로 들어가서 면사무소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조금 올라가면 익산고등학교 옆에 있습니다.
향교 입구 왼쪽에는 공덕비들이 즐비하며, 입구 오른쪽에도 하마비와 비들이 서 있습니다. 향교의 외삼문이 잠겨 있어서 오른쪽의 관리인이 사는 곳에 들어가서 향교를 보러왔다고 하니 지금은 보여 줄 수 없다고 해서 밖에서 문틈으로만 들여다 보았으며, 담장 너머로 구인제와 명륜당 사진만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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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향교 앞 공덕비 |
▲ 익산 향교 외삼문 |
▲ 외삼문 오른쪽의 하마비 등 |
익산 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지어진 후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그 뒤에 다시 지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류당·동재·서재·제기고·내외삼문· 홍살문·하마비 등이 있다고 합니다. 대성전은 시도유형문화재(전북) 11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2004.07.03, 0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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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인제 |
▲ 명륜당 |
▲ 대성전(문화재청 사진) |
익산 금마면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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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압정이 있는 곳이 고도리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빨간 압정이 있는 오른쪽의 1번 국도를 건너서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왕궁리 유적이 있습니다.
빨간 압정이 있는 왼쪽 도로(익산 방향)의 중간 파란 부분쯤에 익산 쌍릉이 있습니다.
익산 향교는 지도에 표시된 익산 고등학교 옆에 있습니다.
지도 오른쪽 녹색부분이 익산 IC 입니다. |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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