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유 너의 자유
“ 난 속박 받는 게 싫어요. 내 인생인데 왜 내 마음대로 못사는 거예요. 학교도 내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에요. 수업 시간에 앉아 있기 싫어서 자는 건데 왜 선생님들은 깨우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두면 되잖아요 ” (2학년 중학생)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결혼해서 45년을 속박 속에서 살았는데 더 이렇게 살기 싫어요. 이젠 몸도 아프고 살면 내 나이에 얼마나 더 살겠다고 난 더는 이런 삶이 지겨워요.” (70세부인)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구속당한다는 것, 어딘가에 구속된다는 것은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죄를 지는 사람은 교도소에 가두는 것으로 죄를 묻게 되었고 더 큰 죄는 무기 징역으로 자유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인 < 죄와 벌>에서 주인공은 노파가 저렇게 사는 게 틀렸다고 판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사는 노파를 죽이는 것이 정의라고 자신의 신념으로 행동했으나 이러한 행동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단정하여 판단하는 오만함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만 정의롭다는 착각은 가장 무례하고 무식한 언행이다. 누가 누구를 틀렸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단정 짓고 비난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실을 최근 우리나라 정치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죄를 짓고도 무조건 모른다고 하면 된다는 인식이 자가당착(自家撞着)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세뇌하는 것으로 자신도 기만하게 되는 것이다. ( 이를 정신과에서는 자기애적 성격장애, 경계성 성격장애라는 진단기준에 들어간다.)
특히 경계성 성격장애는 눈치가 백단이라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감지능력이 강하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말과 행동을 바꾼다 ( 말을 이리돌리고 저리 돌리는 행위) 이때 주로 쓰는 행동으로 피해자 고스프레(costume play)를 한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최고의 권력자라고 인식하던 시절 학생들이 잘못하면 복도 밖에 나가 서 있게 함으로 교실 안에서의 학습할 권리를 빼앗고 밖에서 서 있으라는 지시로 몸의 자유를 구속했었다. 당시는 잘못했으니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같은 교실의 학생들도 인식했고 이러한 벌칙에 대해 누구도 학생의 권리와 자유의지에 대해 고민은 하지 않았다. 단지 밖으로 나간 학생의 마음은 창피하거나, 기분 나쁘다거나, 선생님이 원망스럽다거나 감정적 불편함은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수용하고 들어올 때 머쓱한 자세로 들어온다. 구속으로 잘못된 행동에 대해 벌로 보상했으므로 해제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재는 어떠한가? 선생님에 대한 학습권 보장이라는 학생 인권으로 학생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자도 깨우는 행위가 학생을 구속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되어 버린 학교 현장. 위의 사례의 아이 말이 맞을 수 있다. 학교에 가기 싫은 데 가라고 하는가 말이다. 의무교육임으로 중학교까지는 나와야 하는 교육법 기준이 있어 보호자는 학교를 보내고 학교는 학습을 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언어가 생기며 소통이 필요했고 산업혁명 이후의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모여서 하는 학교가 생겨났다. 이전은 집에서의 과외학습이나 도제식교육과 기숙사에서 집합 교육으로 이동한 것이다. 현대 사회 구조에서 이동의 자유로움은 학교를 집에서 통학하는 형태로 만들었고, 가족 단위의 집의 구조가 이동을 하지 않고 지역화가 안정화 되면서 동네 안 학교를 마련하고 동일연령별 학습형태가 마련되었다. 자신과 맞지 않은 학습을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아이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고 아이들이 모여 있자 경쟁 원리가 작동한다.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 헤르만 헤세 의 [ 데미안]이다. 남자아이들이 집단이 되면 힘의 원리로 움직이게 되는 인간 본성이 나타나는 현장이 학교가 된 것이다. 학교가 지식을 배우는 그곳만 아니라 공동체를 통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는 공동체 학습 공간이 되었음에도 이것이 깨어지고 있다. 즉 개인화가 우선시 되는 현상이다.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 내가 싫은데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지가 전혀 되지 않은 체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습된 인간이 아닌 본능적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학교에서 토론 학습을 늘리고 있다. 토론에서의 키워드는 논쟁, 주장이 아니라 인간 존중을 기본 한 협의고 토론을 통한 의견교환임을 가르쳐야 한다. 국회에서 어른이 이러한 인간 존중의 기본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데 학습 현장에서 가정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톨스토이의 [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농장에서 농노들과 풀을 베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 간다. 이는 돈도 아니고 그냥 인간끼리 존중하면 존중 받으며 사는 질서를 깨닫는 것이다. 학교와 가정은 공동체 공간이다. 혼자만 사는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며 타인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다.
힘으로 하는 모든 것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역사가 알려준다.
타인공격은 언젠가 본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