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발해의 기층세력 말갈은 누구인가?
변방에 살던 사람들의 통칭… 기층세력으로 발해제국 건설 일조
고구려·부여에 편입 선진문명 흡수하며 중원으로 세 확산
수천년 같이해온 고대사 주체임에도 제대로 된 연구없어
말갈인만큼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많이 등장하면서 애매하게 기술되고 있는 사람들도 없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인들은 대체로 강원도 지역사람들인데, 정작 중국 역사기록에는 숙신과 읍루 이후
극동지역에 거주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말갈은 발해의 기층집단을 이루었다는 정도만 알려져있을 뿐 역사기록은 비교적 소략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중국 길림성, 흑룡강성을 비롯해서 러시아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 등 극동
전역에
3~6세기에 큰 세력을 이루고 살아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져 살던 이들은 때때로 고구려나 발해에 복속되기도 하며 점차 선진문명을 흡수하고
발전했다.
말갈 중에는 물고기 껍질을 벗겨서 옷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여름에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잡아서 그 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연어껍질로 어떻게 옷을 만들까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옷은 실제로 상당히 아름답다.
이들은 여름 한철에 엄청나게 밀려오는 연어를 잡아서 그 고기와 알은 훈제하거나 죽을 끓여 먹었으며
뽑아낸 기름으로 겨울을 지냈다.
이들은 말갈중에서도 특히 속말말갈로 불리웠던 사람들인데, 현재 극동지역의 원주민인 나나이족의 선조이다.
말갈이 자신의 이름을 중국에 알리기 시작한 시점은 대체로 부여가 망하는 서기 5세기경이다.
말갈이 부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고구려와 부여로 대표되는 예맥집단의
세력에 편입되면서 발달된 사회로 이어질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초원지역에서 밀려들어온 선비·오환으로
대표되는 북방계 문화에 전통적인 자신들의 문화가 조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말갈은 전통적인 수렵채집 생활 이외에 성을 만들고 발달된 철제무기를 사용
했으며 여기에 목축도 하던 복합경제였었다.
즉, 넓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각 지형에 맞는 생계 경제를 꾸리면서 극동의 원주민으로 살아온 셈이다.
상대적으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사회를 발전시켜왔던 말갈의 저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발해가 기후로 보나 지형으로 보나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극동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을 세우는 데에는 기층
세력인 말갈의 저력도 상당부분
이바지했었다.
말갈을 비롯한 극동의 주민들은 고구려·발해에 편입되면서 그 세력을 키웠고, 이후 여진족이나 거란족들이
극동지역에서 발흥해서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으니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단이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은 왜 발해의 기층세력이었던 말갈이라는 명칭을 우리나라 강원도나 함경남도의 사람
들에게도 붙였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 말갈이라는 명칭은 변방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했던 것같다.
얼마 전까지 서양인만 보면 무조건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우리나라 북쪽의 광활한 지역에서 거주했던 말갈인들은 고려 조선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먼 이웃으로만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말갈을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말갈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현재 중국의 영토가 만주지역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해서 말이다.
한국은 말로만 중국의 역사 왜곡 운운하지만 제대로 된 말갈 전공자도 거의 없으며 말갈문화가 무엇인지
실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연구자도 많지 않다.
말갈이 한국역사인가 중국역사인가라는 단선적인 논쟁을 벌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민족의 주체를 논하기 이전에 이들은 고대이래로 때로는 우리 민족에 복속되었고 때로는 우리와 대립하면서
같이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루어나간 주체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거대하게 성장해가고 있는 한국이지만 최소한 고대사와 고고학에 대한 인식만큼은 한반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사이건 동양사이건 말갈은 여전히 변방이기 때문이다.
말갈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아니라 수천년을 흑룡강과 극동일대에서 우리와 이웃하며 살던
사람들이다.
변경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이들을 다시 거시적인 관점의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로 끌어올릴 때가 되었다.
<22> 연해주의 한국 지명들
한국 뜻하는 '까레야' 붙은 지명 모두 사라져
대국 틈바구니 속 고려인들 삶의 흔적 역사 속으로
필자가 쓴 글을 보거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어려움은 지명들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니꼴라예프스꼬예' '자이사노프까' 등 한국말로는 6,7자가 넘는 게 보통이니 말이다.
게다가 러시아어는 어미의 변화가 극도로 심해서 하나의 어원으로 나올 수 있는 변화형은 수십개다.
예컨대 '이바노프'라는 성이 있으면 이바노프스꼬예 이바노프까 이바노프스까야 등으로 불리운다.
그러니 한국말로 옮길 때 무의식적으로 변화형을 따라서 적다보면 같은 지명도 한국사람한테는 서로 다른
말이 된다.
게다가 표기법도 통일되어있지 않다. 전 대통령 '푸틴'도 '뿌띤' '뿌찐' 등으로 쓸 수 있다. 또 러시아어에는
강세가 있어서 '모스크바'도 읽을 때에는 '마스끄바'가 된다.
러시아어를 음차할 때는 지명을 그냥 소리나는 대로 적기도 하고 쓰는 대로 적기도 하니 정말 난해할 수밖에
없다. 사람 이름의 경우 같은 철자라도 각 가문의 습관에 따라 강세가 서로 다른데, 그런 것은 사전에도 안
나와있다.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 '호흘로프'라는 사람이 있었다. 호홀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쓰는 모자를 뜻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 출신 사람들에 대한 속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베리아 출신의 호흘로프는 대체로 호흘로프라고 읽고 모스크바 출신들은 하흘로프라고 주로 읽는다.
그러니 러시아 사람들조차도 강세나 변화형을 제대로 지켜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위의 경우는 러시아어의 특성 때문에 골치 아픈 경우이니 이해한다고 치자.
하지만, 먼 북해나 동유럽의 지명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일부였던 연해주로 온다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19세기부터 연해주 이곳 저곳에는 고려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만주인과 이 지역의 원주민들이 거주했었다.
또 러시아 사람들이 새로 개척한 동네는 러시아식 이름이 붙여졌다.
연해주의 지명들은 한마디로 근대 이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공존했던 이곳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에 다만스키섬을 두고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중국식의 지명이 향후 영토분쟁의 근거가 될 것을 염려해서 모든 지명을 러시아식으로 바꾸
었다.
중국이건 러시아건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이후였기 때문에 지명으로 자신들의 정통성
을 찾는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국들의 싸움 속에 수천 개의 지명이 일순간에 바뀌게 되었고, 그 와중에 여기에 거주하던 원주민
이나 한국인들이 붙인 지명도 같이 사라졌다.
연해주의 곳곳에는 한국을 뜻하는 '까레야'가 붙은 산이며 계곡이 상당히 많았으며, 블라디보스토크시에는
거리이름 마저 '한국'이 있었다. 이들 지명도 지금은 다 바뀌어졌다.
두만강이 러시아쪽으로 들어가는 지류는 '안개'를 뜻하는 '뚜만나야'로 바뀌었다. 원래 이름과 비슷한 노어로
바꾼 것이다.
한·러 국경인 핫싼지역의 지명은 고려인들이 살았던 탓에 대부분 한국계였지만 모두 1970년대의 개명바람에
없어졌다. '삼거리'라고 불리웠던 동네는 '글라드까야'로 바뀌었고 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붙여진
한씨 마을은 '마야치노예'로 바뀌었다. 그밖에도 '남재거리' '고개' 등 많은 이름 들이 있었다.
옛 기록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한국계 지명들은 러시아어로 음차되어 표기되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어학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그 원뜻을 모두 밝히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국어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지명들이 필자가 조사하는 한·러 국경지역 곳곳에서 발견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필자는 끄라스끼노 발해 성지에서 발굴 중이다.
끄라스끼노의 발해 성터는 바닷가의 너른 평야인 탓에 고려인들이 경작을 많이 했었다.
지금도 발굴하면서 당시 고려인들의 경작지 흔적이 자주 발견된다. 현지인들도 옛 이름대로 고려인들이
부르던 연추리(끄라스끼노),
얀치헤(쭈가노프까 강)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한·러 국경지역의 고려인들은 국적없이 살면서 한국의 보호를 받지도 못했고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다툼에서
러시아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그들의 유일한 삶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명들마저 러시아와 중국의 다툼에 사라져버렸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정작 우리는 잃어버린 연해주의 옛 지명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지 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독도며 꾸릴섬이며 사방의 섬들에 대해 없는 연고도 만들어가면서 억지로 주장하는 마당에 우리는
150여 년 전에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한페이지를 그냥 흘려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23> 연해주의 옥(玉) 제작장
진주 대평리 유물과 유사한 곡옥형 장식 등 교류 흔적 발견
지금은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제일 귀한 광물이겠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옥을 즐겨 썼다.
한국에서도 평남 궁산이나 춘천 교동 같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었으니,
그 역사가 수천 년인 셈이다. 한국에 금이 귀금속으로 도입된 때는 낙랑군이 설치되고 중국의 영향이 미친
후다.
그래도 삼국시대에 옥은 꾸준히 애용되었으니, 신라왕관에 달린 곡옥은 청동기시대 고인돌부터 쓰여진 것들
이다.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귀금속인 옥에 대한 수요는 연해주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후반에 진주 남강댐을 지으면서 수몰되는 지역의 구제발굴을 했었다.
당시 진주 대평리의 옥방이라는 마을에서 발굴한 결과 실제로 청동기시대 옥을 만들던 공방지가 발견되었다.
옥방(玉坊)이라는 마을이름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셈이다.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옥 제작유적인 진주 옥방에서는 원석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해서 원하는 장신구로
만드는 전 과정이 확인되었는데, 아마 여기에서 만든 옥은 주변의 여러 마을들로 공급되었던 것 같다.
진주 대평유적은 남강유역의 청동기시대에 농경을 주로하는 생계경제가 밝혀졌다는 점 이외에, 청동기시대
고인돌을 비롯한 다양한 유적에서 발견되는 옥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주변지역에 공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유적이다.
연해주에서도 비슷한 옥 공방지가 발견되었다. 연해주 한까호 근처의 저수지에 수몰된 쉐끌라예보 21유적이
있다. 2006년도에 마을주민이 물 빠진 저수지 근처에서 유물들을 수습했고, 이를 필자와 다년간 공동조사를
하는 N.끌류예프 조사팀이 근처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사실을 알게되어서 정밀 조사를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유적은 이미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석검, 무문토기, 곡옥 등과 함께 옥을 마연한 찰절구도 다수 확인
되어서 옥 공방지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요즈음의 한국 같으면 수몰지구라면 샅샅이 유적을 조사하겠지만 몇 십년 전 연해주에서는 수몰되는 지역에
눈에 띄는
유적만 조사했었던 터라 이 유적은 그냥 잠겨버렸었다.
곡옥, 마제석검, 옥 공방은 바로 진주 대평유적과도 비교되는 점이다.
게다가 진주 대평에서는 연해주 청동기시대에서 발견되는 곡옥형 청동기 장식도 발견되었으며 매부리형
석기라고 하는 석기도 같이 발견된다.
여기에 반월형 석도, 홍도, 돌대문토기 등 많은 문화요소가 유사하다.
환동해 지역을 따라서 청동기시대 연해주와 한반도 남부지역의 문화교류가 빈번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옥 좋아하기로 하면 중국사람들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내몽고~요령 서부지역의 신석기시대인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다양한 옥기를 중국 옥기의 대표적인
유물로 소개했고 대중적으로도 크게 인기가 있다.
중국에 가보면 아무리 시골서점이라도 옥에 대한 책은 반드시 판매하고 인터넷에도 수많은 옥관련 동호회가
있으니 중국의 옥 사랑은 대단하다.
하지만, 옥은 중국만의 전유물은 아니며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애용하던 귀금속이었다.
자바이칼 지역에서도 옥광산이 많은 탓에 신석기시대 옥으로 만든 도끼를 비롯해서 다양한 예술품이 발견
된다.
곡옥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옥문화가 연해주에서도 발견되었으니 가히 옥은 동아시아 고대의
미적 감각을 대표하는 유물인 셈이다.
여전히 아쉬운 점은 쉐끌라예보 옥 공방지처럼 운 좋게 뒤늦게마다 알려지는 유적보다 여러 건설사업으로
사라지는 유적이 더욱 더 많다는 점이다.
연해주에서 우리문화와의 관련을 밝혀주는 구체적인 자료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는 2012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준비하면서 건설공사를 하면서 여러
유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APEC이 열릴 루스끼 섬에 다리를 놓으면서 석검과 패총으로 유명한 얀꼽스끼패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물론 조사는 하고 있지만 짧은 기간에 적은 인력으로 일부분만을 조사하는 과정을 볼 때 아쉬움이 많을 따름
이다.
더욱이 연해주는 최근 사할린에서 송유관과 가스관이 북한을 관통해서 한국으로 잇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발의되었다.
한국에서는 에너지의 확보라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있지만 대형의 사업에 희생되는 고대 유적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송유관이 지나가는 한·러 국경지역을 포함한 연해주의 여러 지역에 대한 사전 조사가 시작
되었다.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될 예정인데, 이번에는 좀 더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길 바랄 따름이다.
<24> 연해주에 윤관의 9성이 남아 있었을까
한-러 접경 우스리스크성이 '9성' 중 하나일 수도
필자는 유학시절에 동양 고고학의 대가인 V.E. 라리체프(Larichev) 선생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그)대학의 역사학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선생은 중국은 물론 티베트, 몽골,
한국의 고고학·고대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언젠가 연해주 지역에
대해 라리체프 선생과 토론을 하던 중 한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윤관 9성중 하나가 연해주 우스리스크시에 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학자도 있는데, 한국은 관심이 있는가?"
그때까지 필자는 전공도 선사시대 고고학인 탓에 고려시대 북방사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채 막연하게
함흥근처에 윤관 9성이 있었다고만 생각했다.
러시아의 한국학자인 미하일 보로비요프는 현재의 우스리스크시 근처에 있는 유즈노-우스리스크 성과
끄라스노야로프스꼬예성을 윤관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공험진(公險鎭)으로 보았다.
물론, 실제 발굴을 한 것이
아니고 역사기록에 근거하여 추정했을 뿐이었다.
한국학자들은 대체로 윤관 9성이 함흥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 문화와 역사기록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다소 애매모호한 지명의 고증에 의거한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한-러 국경에 접한 지역을 언급하면서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세운 '고려지경
(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이 있다고 했다.
또 선춘현(先春峴) 에서 수빈강(愁濱江)(현재의 수이푼하 또는 라즈돌나야 강)을 건너면 옛 성터가 있고,
더 북쪽에 공험진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 외에도 두만강 건너편에 수많은 성과 마을들을 언급하는데, 남연해주 일대에
산재한 발해-여진계통의
성을 말하는 것 같다.
수빈강 건너편의 옛 성터는 바로 우스리스크시의 성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에 연해주
남부 지역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고려시대에 연해주 남부와 만주 일대에는 발해가 망한 이후에 번성한 거란과 여진문화가 넓게 분포했다.
이들 민족은 고구려·발해로부터 물려받은 축성법, 무기제작기술 등 강력한 군사력과 국가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진과 거란의 유물들은 한눈에 보아도 쉽게 구분이 될 정도로 뚜렷하게 달라 보인다.
그런데 함흥지역 일대에서는 일제침략기 자료건 북한자료이건 간에 여진의 성이나 유물들은 전혀 볼 수가
없다.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던 여진족인지라 그들이 엄청난 세력을 이루고, 윤관이 토벌한 자리라면 분명히
여진족의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지 있어야할 것이다.
그러니 세종실록의 기록을 참고할 때 윤관 9성이 함흥보다 북쪽인 두만강 건너편까지도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렇다면 연해주에 수백 개가 발견된 여진시기의 유적들을 샅샅이 조사한다면 정말 윤관 9성이 나올 가능
성이 있었을까?
윤관의 9성은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만 있었으니 실제 고고학적 발굴로 나올 가능성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고려와 치열하게 투쟁한 여진족들의 유적을 조사한다면 고려와의 관계를 증명할 구체적인 고고학적
유물도 나올 것이니 고려시대 북방사를 연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여진시대 고고학은 러시아 연해주의 고고학에서도 가장 발달된 분야 중 하나이다. 한국사의 연구에 너무나도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학자들은 오로지 발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
이다.
필자 유학시절에 현재의 국경을 초월해서 역사와 고고학적인 성과를 다양하게 연구하는 라리체프 선생을
비롯한 여러 중국 고고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라리체프 선생님은 2001년과 2006년에 만주어로 기록된 금사(金史)와 요사(遼史)를 노어로 번역한 원고를
출판했고, 나는 그 서문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같이 실었다.
처음에는 유학시절의 학은을 돕자는 뜻에서 별 생각없이 맡았지만 중국어, 여진어 지명이 노어로 음차된
표기를 한국어로 바꾸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결국 번역이 그렇게 잘 된것 같지는 않아 죄송하게 되었다.
1970대 중반의 라리체프 선생은 지금도 여전히 정력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시고 있다니 멀리서나마 건필을
기원한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