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가장자리에 선 나는 오랫동안 자동차들의 물결, 신호등의 빨간불, 파란불이 켜지고 꺼지는 모습, 그리고 강 건너편 오르세역의 시커먼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길을 돌려 다시 돌아왔을 때 리볼리 가의 아케이드에는 인적이 없었다.
나는 파리에서 한 번도 이처럼 무더운 밤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유령 도시 한복판에서 느끼는,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감정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었다. 혹시 유령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나는 어디엔가 매달릴 데를 찾고 있었다.
피라미드광장의 회벽을 칠한 옛 화장품 상점은 여행사로 변해 있었다.
생잠 알마니 호텔 입구와 홀은 개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밖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그렇게 나직이 되뇌어보았자 나는 이 도시에서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도시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발길을 멈추고 철책을 드리운 카스틸리온가의 상점 진열창에 내 모습을 비춰보아도 그 그림자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도시는 내가 다가가면 닫혀버렸다.
====
나는 비로소 커튼을 젖히고 여닫이 창문 양쪽을 모두 열었다.
공기는 방안보다 바깥이 더 더웠다.
발코니에서 몸을 굽히고 내다보면 어스름 속에 잠긴 방돔광장, 그리고 저 멀리 카퓌신대로의 불빛이 보였다.
간혹 택시가 멈추면서 차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 이딸리어나 영어로 주고 받는 대화 한 토막이 내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또다시 나는 밖으로 나가서, 발길 가는대로 쏘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 이 시각에 어느 누군가는 난생처음으로 파리에 도착하여 호기심과 셀렘이 가득찬 시선으로 거리와 광장을 가로질러갈 것이다.
오늘밤 내 눈에는 이미 죽은 것 같아 보였던 이 도시에서……
====
나는 아직 이 한 목숨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하지는 않았지만, 당신 책에 나오는 변호사처럼 말이오, 혹시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면 당신이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될 거요.
그럼 엠브로즈 가이즈에게 모든 성공과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하오.
로크루아
그러나 그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오 년 후 런던, 나는 몽펠리에 광장 부근 신문 잡지 가판점에서 프랑스 간행물들 쪽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 어떤 석간신문에서 내가 읽었던 그 기사가 지금 이 편지 봉투 속에서 나온 것이다.
파리 재판소의 전 변호사 다니엘 드 로크루아 씨가 어제저녁 파리 자택에서 자살했다. 다니엘 드 로크루아 변호사는 전쟁 전에 파리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고 연수원 원장을 지냈다. 명성 높은 민법 전문가로서 그는 큰 사건을 많이 맡았다.
====
나는 다니엘 드 로크루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끝내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그 무렵 내게는 파리 시절의 삶이 너무나도 아득하게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생활이나 그때 내가 알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또다시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로크루아의 죽음조차도 내겐 덤덤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런데 오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의 죽음은 해답을 찾지 못한 그 무엇처럼 고통과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둠에 싸여 있는 곳에 빛을 던져줄 유일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지곤 했던 모든 질문을 나는 왜 그에게 때맞춰 물어보지 못했던 것일까?
===
샹젤리제의 원형 교차로에 이르러 나는 잠시 분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관광객들이 분수 근처의 쇠로 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 나도 이 도시에서는 이방인이다.
이곳과 나를 이어주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삶은 이제 이 거리에도, 건물의 벽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어느 네거리에서, 혹은 어느 전화번호에서 우연히 솟아오르는 추억들은 딴사람의 삶에 속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수많은 장소들은 과연 지난날의 그 장소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날 저녁 로크루아와 함께 건너갔던 원형 교차로는 바로 이 원형 교차로일까?
하여간 오늘밤에는 이 원형 교차로가 그때의 교차로와는 전혀 닮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분수 앞에서 끔찍한 공허감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
그렇지, 틀림없어. 마요는 트루아용가의 호텔 창문에서 몸을 숙이고서 탁한 목소리로 탱탱, 하고 부르곤 했었다.
탱탱……내 앞에 앉아 있는 탱탱은, 잠시 전 테라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과거에 내가 알던 소녀, 지금은 세월이라는 요술지팡이에 의해 마흔 살 먹은 여자로 변해버린 그 소녀 못지않게 나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몸무게가 두 배로 불어나버린 늙은 탱탱.
====
녹색이 감도는 청동 난간에 세워진 가로등 하나가 내 옆에 서 있는 카르팡디에리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노란 불빛 아래서 그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무겁고 피로에 지쳐 보였다.
골이 난 듯한 표정 속에 두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제 막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나 나에게 구구한 변명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지나고 나서 탱탱과 닮아 있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리라.
====
그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는 내게 이름이 무엇인지,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아케이드 아래 카페 하나가 열려 있었다.
나는 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날이 밝았고 후덥지근한 김이 이미 거리와 튈르리공원을 뒤덮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생수 한 병을 시켰다.
나는 아직 피곤함을 못 느꼈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해서 요동치는 기차에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여행자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물론 나는 저 아래 있는 키 작고 뚱뚱한 사내에게 탱탱의 정확한 전화번호를 다시 물어볼 수도 있다. 그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모른다고 하면 영화 촬영팀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또 브뤼넬가 5번지를 찾아가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미리부터 내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내내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고 반복하는 저 부드럽고 싸늘한 목소리에 그저 귀를 기울이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에겐 상상력을 부추겨주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나 역시 차츰차츰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눈을 뜬 채로 그녀의 가벼운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털에 내 뺨을 갖다댔다.
촛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고 나는 그걸 꺼야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창문을 통해서 파리의 나직한 웅얼거림이 바람에 실려 내가 있는 곳까지 밀려왔다.
밖에, 저 뜰의 철책 뒤에는 알마광장, 그리고 내가 오후 줄곧 정처없이 걸어다니고 앉아 있었던 카페테라스.
나는 이 도시와 나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 나뭇잎이었고 빗물로 번들거리는 도로에 비친 그림자였고 웅성대는 목소리였으며 거리의 저 수십 수백만 개의 먼지들 중 하나였다.
===
19살 먹은 카르멘은 통행금지 시간에 지하철 출구를 걸어나와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 건물의 전면, 보도, 분수 모두가 그대로다. 그 시절 파리에도 오늘처럼 찌는 듯한 여름날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지만, 나는 우리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무심한 도시에 오날밤 왜 나 혼자만 다시 찾아오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그리운 로크루아, 이 책은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입니다.
어지간히도 뒤늦게 보내는 편지군요.
당신은 이 편지를 절대로 받아볼 기회가 없겠지요.
오직 기타만이……다른 사람들은 다 사라져버리고 없어요.
어쨌건 카르멘이나 조르주 마요는 독서라고는 하는 법이 없었지요.
우리 둘이서 그런 얘기를 한 것도 기억나는군요.
당신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지요.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는 책을 쓰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책 내용과 같은 삶을 사는 중이라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들은 책을 살고 있는 거라고. 바로 그런 말이었지요.
로크루아? 내가 잘못 말한 건 아니지요? 카르멘과 조르주는 바로 두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어요.
====
“다니엘, 파리에서는 언제나 이토록 재미있게 지내나?”
그는 마주잡은 두 팔을 베고 누워서 풀 한줄기를 씹으며 하염없이 떠가는 구름떼를 눈으로 좇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이젠 파리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없어.” 로크루아가 코트 데포세 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것 같더라니까.”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철책 저쪽에는 바람이 마로니에 잎사귀들과 알마광장과 센강 건너편 건물의 꼭대기를, 그리고 에펠탑 꼭대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시절 파리는 내 심장의 고동과 일치하는 도시였다.
20살, 나의 인생은 그 도시의 거리에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혼자서 기분 내키는 대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해도 행복했다.
===
“그렇다면 서운할 게 없군. 내가 로마로 가서 살기를 잘했는걸.” 마요가 말했다.
“열 번 백 번 잘했지.”
“난 말야, 파리에서는 유령으로 변해버린 듯한 기분이라니까.” 마요가 말했다.
그는 두 팔을 쳐들고 유령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생각해보면, 그날 오후 끝자락 카르멘의 집에 모여 앉아 있던 그들 역시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 그들은 마치 영원히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혹은 아주 침몰해버린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
“그런데 장, 당신은? 아직 견딜 만해요? 아니면 어디에다 내려드릴까?”
그는 나를 가볍게 놀려댔다. 내가 카르멘한테 반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젠 우리가 정말 ‘최후의 보루’ 로구먼.”
로크루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마요는 체념한 듯했고 ‘최후의 보루’에 끼이게 된 것이 쓸쓸한 눈치였다.
앞에서 헤이워드의 차가 우리에게 따라갈 길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파란불. 빨간불.
나는 내게 작은 손짓을 보내거나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내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로크루아가 ‘최후의 보루’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
한번은 호텔방에 돌아와 나는 그녀에게 “별일 없는지”, 또 내가 좀더 같이 있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별일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했다.
이제 나도 잠을 자야 했다.
나만한 나이 때에는 잠이 부족한 법이니까……
나만한 나이……그렇다, 이제 나는 그 당시 그녀의 나이만큼 나이를 먹었다.
39살. 나도 이제 아침 6시경이 되면 그녀를 엄습하던 그 불안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에덴로크 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의 모습과 비교해볼때 왜 그녀의 미소가 전보다 흐릿해졌는지 그 까닭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왜 잠이 찾아와주지 않는지 그 까닭도.
===
나는 밧줄을 당겼다. 도르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떤 저항을 느끼자 밧줄의 끝을 베란다의 난간에 비끄러맸다.
나는 깃발이 과연 깃대 끝까지 잘 올라갔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저 위로 올라간 깃발은 녹색 부분이 약간 찢어지기는 했지만 미풍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흰 부분은 누리끼리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기수들과 순종마들과 마부들에게 그리고 카르멘의 청춘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그 깃발을 올리는 것은 보잘것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사람은 인생의 목표를 정해 가지고 있어야 해요. 안 그랬다가는……
나는 그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그때 나는 충고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충고해주는 사람들의 말이 도무지 헛수고로만 여겨지는 그런 나이였다.
인생의 목표라……그날 저녁 공기는 따뜻했고 샹젤리제대로의 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눈부시게 빛났으며 저 아래 공원에서는 마로니에 꽃들이 내 어깨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
“우리 오래전에 이곳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군요……블랭 부인이라고 하는 사람 집에서……안 그래요?” 그가 내게 사교계식 대화로 말했다.
“네……그런 것 같아요.”
“그 여자는 오 년 전에 죽었어요.”
죽었다. 왠지 모르게 탱탱 카르팡티에리의 뚱뚱하고 벌그레한 얼굴이 내 기억 속에 떠올랐다. 그의 모습이 어찌나 생생하게 떠올랐는지 한순간 앞좌석에 팔을 괴고
앉아 내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헤이워드가 아니라 카르팡티에리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가 파리를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요. 은퇴해서 코트다쥐르에 살았다는 말이 있어요.”
그날 밤 카르팡티에리는 늘 하는 버릇대로 조르주 마요의 유령 자동차를 뒤쫓아갈는지 모른다. 알마광장은 그 코스의 일부였다. 헤이워드에게 마요의 하얀 란차 자동차와 카르팡티에리의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우리도 그들 뒤를 쫓아가보자고. 몽테뉴대로. 샹젤리제광장. 다시 몽테뉴대로. 알렉상드르 3세 다리……
====
시동을 걸기 전, 저녁 모임이 밤늦은 시간까지 길어질 염려가 있을 때면 매번 내게 던지던 질문을, 헤이워드는 이십 년 후에도 똑같이 내게 하는 것이었다.
“호텔로 다시 모셔다드릴까요?”
그러나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그건 그가 늘 하는 장난이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는 내가 그 끝날 줄 모르는 저녁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임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르멘을 빼내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냐, 아냐. 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호텔로 데려다 주지 마.”
카르멘이 헤이워드에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그 목소리와 그 반말하는 말투를 듣고서 그녀가 보통 때보다 더 많이 취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핸들에 손을 얹은 채, 목과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운전하고 있는 헤이워드를 보기만 해도, 아콰 디 셀바 냄새를 맡기만 해도, 이십 년 전의 그 모든 세세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미국 자동차 속에서 느껴지는 둥둥 떠 있거나 표류하는 기분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
“난 일을 한다고……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일어날 필요 없어……오늘 저녁에는 잠을 자지 않을 거니까……너마한 나이에는 힘든 일도 아니지……”
너만한 나이에는……그렇다. 그들은 모두 우리보다 나이가 더 많았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라는 말이 그 떠도는 미국 자동차 안에서는 기이하게 울렸다. 나는 밝은 대낮에 만나는 헤이워드 부부, 푸케, 그 밖의 모든 사람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새벽의 첫 서광이 밝아오기만 하면 분명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대낮에 뤼도 푸케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리고 장 테라유는? 마리오는? 파바르는? 그리고 회색 눈의 그의 아내는?
마치, 그 시절에 이미 그들이 유령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들을 오로지 밤에만 알아볼 수 있었다.
======
위렐은 내 앞에 뻣뻣하게 서서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윗옷을 살롱에 벗어두고 왔기 때문에 나는 다시 그 여러 개의 방을 거쳐가면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리라는, 모든 것이 이미 과거에 속해버렸다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안으로 인해, 내가 지금까지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장식 나무벽에는 금이 가서 갈라진 데가 보였고 카르멘이 그동안 하나씩 둘씩 팔아버린 그림이 걸려 있었던 자리는 그 자국이 더욱 선명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양탄자는 올이 보이도록 닳아 있었다.
그리고 카르멘은 가구와 박제가 잔뜩 쌓인 거대한 창고 한복판에서, 이 비로드 실내화를 신은 옛 마부와 함께 늙어갈 것이다.
그는 내가 어둠 속에서 지하철 정거장으로 내달을 때에도 포치 아래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내 거동을 살피고만 있었다.
======
나는 마음이 놓였다.
카르멘, 마요, 로크루아, 뤼도 푸케, 그 밖의 모든 사람들……그런 식으로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타가다……타가다……타가다……메크로놈처럼 고집스럽게 그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빨라져가는 꿈의 속도를 다스려보려고 했던 그 가엾은 사람……
드디어 총소리가 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회전 목마는 멈춰버렸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그러나 안 될 일이다.
경찰이 호텔 숙박계를 뒤져 찾아낼 그 장 데케르에게는 이제 다시 이곳에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나를 등뒤에 남겨둔 채, 유년 시절과 소년기와 청년기의 처음 몇 해를 보냈던 파리를 가능한 한 신속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 나는 자위하기 위해 혼자서 이렇게 말했다 -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법.
=====
“이봐요 장, 드 로크루아가 항상 나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아뇨.”
“그이는 나보고 늘 전화번호부를 보면 원하는 건 뭐든지 있다고 했어요.
다만 그걸 보는 방법만 안다면 말이에요.”
======
우리는 세뤼리에대로 76번지 벽돌 건물을 향하여 나란히 걸어간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벌써 더워지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코트를 입은 채다.
그녀는 이십 년 동안 많이 변하지 않았다.
똑같은 흑갈색 머리, 그러나 약간 더 짧게 잘랐다.
푸른색 눈, 중키, 창백한 안색……
“어디서 오는 길인가요?”
“남프랑스에서요.”
“남프랑스에서 돌아오는 사람치고는 그다지 타지 않았군요.”
그녀는 그보다도 훨씬 더 먼 곳에서 돌아오고 있다.
카르멘. 로크루아. 라바렌생틸레르. 파리. 그 모든 경사진 길……
그녀의 트렁크는 무겁지 않다.
나는 그녀를 슬쩍 훔쳐본다.
이마에 커다란 상처가 보인다.
어쩌면 시간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삶에 대한 기억을 모두 상실하게 만든 저 우발적 사고 중 하나가 남겨놓은 흔적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오늘부터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