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3 / 심은 대로 거둔다 함은 (갈6:6-9)
수년 전 뉴욕의 한 거리에서 풍선 장수가 풍선을 팔고 있었는데 장사가 안될 때면 풍선을 하나씩 하늘로 날려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면 풍선이 떠 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잠깐이나마 장사가 잘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풍선을 날릴 때마다 각기 다른 색깔의 풍선을 날려 보내곤 했는데 하루는 하얀색, 빨간색, 그리고 노란색을 날리고 났을 때 한 흑인 소년이 풍선 장수에게 다가오더니 “아저씨 검은 풍선도 하늘로 날아갈 수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풍선 장수는 잠시 꼬마를 쳐다보더니 인자하게 말했습니다. “얘야 풍선이 떠 오르게 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색깔이 아니라 풍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달린 것이란다.”
보면 사람들은 대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걸 첫인상이라고도 하고 그게 선입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란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소위 생각이라는 게 있고, 인성이라던가 인격이라는 것이 있으며, 특히나 사람에게는 몸 이외에도 혼이 있고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에서는 사람을 육신과 내면으로 구분한 뒤 내면을 다시 의식과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으로 분류하며 신학에서는 무의식보다 더 깊이 들어간 곳에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람의 몸은 혼과 영을 담는 그릇과 같을 뿐입니다. 그의 됨됨이는 그 몸에 담겨 있는 혼과 영에서 나온다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테이블 위에 똑같은 모양의 그릇 두 개가 뚜껑에 덮여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각기 하나씩 골라 속에 든 걸 꺼내게 했더니 한 그릇에선 사탕이 나왔는데 다른 그릇에서는 휴지 조각만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릇은 똑같았는데 나오는 건 왜 달랐을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안에 들어있는 게 다르니 나오는 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심은 대로’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람이면 누구든 인생에서 알곡을 거두고 싶어 합니다. 복을 거두고 싶어 하고 기쁨과 행복과 강건함을 거두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는 언제나 들어온 게 나간다는 겁니다. 구구단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아이가 구구단을 말할 리가 없듯이 없는 게 나올 수는 없습니다.
생전 처음 서울 구경 오신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는데 내부가 너무 깨끗하고 좋아서 얼결에 신발을 벗고 타셨더랍니다.
몰라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몰랐다는 게 뭔가요?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정보가 없다는 말입니다. 앞서의 할아버지도 엘리베이터에 대해 들어와 있는 정보가 없다 보니 할아버지 안에 예전에 들어와 있던 정보 안에서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무엇에 관한 정보든 알아야 대처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그게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도 엘리베이터를 탈 때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타진 않잖습니까? 그냥 무의식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타고 내릴 뿐입니다. 왜요? 이미 무의식 속에 엘리베이터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로, 가끔 보면 술에 만취해 갈지자로 걸으시는 분도 보면 그 와중에 자기 집은 칼같이 찾아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는 이미 그의 무의식 속에 집에 가는 정보가 들어가 있어서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집에 가는 길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진짜 아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의 행동은 언제든 무의식이 지배하게 됩니다.
가끔 외국인이 나오는 방송을 보면 어떤 이는 유창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어떤 이는 경상도 말을 현지인보다 더 잘합니다.
물론 그게 재밌겠다 싶어 티비에도 출연하게 됐겠지만 왜 그럴까요? 물으나 마나입니다. 그가 처음 한국에 들어와 자리 잡고 산 동네가 누군 전라도고 누군 경상도다 보니 그런 겁니다.
이렇듯 사람은 알게 모르게 듣고 보고 입력된 정보가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취중 진담이라는 말도 있듯이 가끔은 의식적인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식적으로 비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에 의해 판단되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어떤 일에서든 우린 의식을 통해 들어 온 정보들을 무의식이 행하게 해야 합니다.
음식 만드는 걸 예로 들자면 레시피라 해서 큰술로 하나, 작은 술로 하나, 간장은 몇 그램, 설탕 몇 스푼 하는 식으로 음식 만드는 걸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면 누가 하든 같은 맛이 나야 하고 언제 하든 똑같은 맛이 나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엔 예로부터 고유한 레시피가 전해오는데 그게 바로 ‘손맛’이란 겁니다.
전문 쉐프나 어머니들이 요리하시는 걸 보면 저렇게 대충해도 되나 싶게 음식을 만들지만, 맛은 좋습니다. 왜일까요?
그분들의 무의식 속에는 이미 숙달된 레시피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뭐가 됐든 처음엔 의식으로 배우겠지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할 정도가 돼야 매번 한결같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면서 행해야 할 모든 것은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만 이때 간과해선 안 될 것이 무의식 속에 정보가 입력되어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정도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다이어트의 경우, 살이 빠져야 하는 부분은 몸이지만 강한 정신력을 갖고 의식적으로 밀어붙여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단 그런 노력이 의식적으로만 끝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돼야 성공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의식적으로만 하려다 보면 어느 순간 요요가 오고 다시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잘 되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삶의 모든 분야에서 무의식적인 지식이 자리 잡기까지는 부단한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하고 반복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이다. 사랑이다. 기도다. 찬양이다. 봉사다. 전도다. 라고 맨날 말만 해서는 되는 게 없습니다.
물론 의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런 것들이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의식이 행하게 해야 합니다. 즉 자동적으로 몸이 동작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도 꾸준한 참석으로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고 기도도 평소에 자꾸 해봐야 필요할 때 자동으로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학생들이 학교에만 잘 다닌다고 다 공부 잘하게 될까요? 학교에서 단체로 배운 걸 개인적으로 복습하고 예습하고 연습해야 소위 실력이 있게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흔히들 주일성수만 하면 믿음 생활 잘하는 거고 복 받을 줄로 알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주일성수라는 것도 학교 학생들처럼 일종의 ‘단체 신앙 연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좋기 위해서는 신앙의 개인적인 예습 복습이 필요합니다.
주일예배 드리듯 개인 예배를, 회중 찬송하듯 개인 찬양을, 대표기도 하듯 개인 기도를, 그리고 설교 말씀 듣듯이 개인 성경 읽기 등처럼 누구든 교회에서 단체로 배웠다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복습하고 연습해야만 믿음에서도 실력이 있게 되는 겁니다.
믿음을 의식에만 있게 하지 마세요. 정작 필요할 땐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시험을 치면 어떤 아이는 모르는 것만 나왔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아는 문제만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몰랐다 안다의 차이는 관련 정보가 무의식 속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문제 풀이가 의식에만 있다 보면 정작 필요할 땐 생각이 날 둥 말 둥 하거나 아예 생각나지 않아 문제를 못 풀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 연습을 통해 문제 풀이법을 무의식에 넣어 놓았다면 시험 칠 때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 속에서 답이 술술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개별적으로 공부하는 걸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연습을 통해 또는 공부해서 필요한 학습 정보를 무의식 속에 넣어놓지 못하면 결과는 시험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시험을 만났을 때 즉각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깜빡’하는 것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할 때 하나님 찾기를 깜빡하고 정말 해야 할 때 기도하는 걸 깜빡하고 하다 보면 결과는 늘 낭패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믿음의 깜빡증이 있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믿음이 의식에만 머물 뿐 무의식으로까지는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역시나 개별적인 믿음 연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찬송가 325장에서도 보면 ‘시험이 오나 겁 없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성도인 우리에게서도 제일 힘든 게 세상을 살며 당하는 시험일 겁니다. 그러나 실력이 없는 학생에겐 시험이 괴로운 것일지라도 이미 실력이 있는 학생이라면 시험은 실력을 인정받는 기회가 됩니다. 따라서 실력이 있는 학생이라면 굳이 시험을 기다리지야 않겠지만 시험이 있다 해서 쫄지도 않습니다.
앞서 찬송가에서 ‘시험이 오나 겁 없네.’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비록 시험이라는 관문을 피할 수는 없다 해도 또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인생 시험이 피해 가진 않겠지만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시험 앞에서 겁내지 않습니다. 왜냐? 시험이 믿음 실력을 발휘할 기회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습 없이는 믿음도 없습니다. 당장엔 눈 앞에 펼쳐진 시험들을 견뎌낸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의식적으로든 강제로라도 믿음에 몸을 순종시키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는 믿음이 우리 안의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다음부턴 어떤 시험이 와도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여 매사를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을 무의식 속에 넣는 노력.’ 이렇게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심은 대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요? 역시나 원리는 같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예배를 한번 두번 빠지다 보면 이것도 연습의 하나로 간주 되어 무의식에 입력이 되게 됩니다. 이리되면 어느 순간부턴가는 예배에 빠지는 것이 으레 그러려니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믿음은 평소의 개인 연습이 중요한 겁니다.
앞으로의 여러분의 믿음 실력은 의식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무의식이 행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영어 회화를 배우려고 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해야 할 것을 자꾸 의식이 앞서는 것이었습니다. 일례로 ‘아이 러브 유.’라는 한마디를 하려고 의식적으로 주어가 나니까 우선 아이를 써야겠고 목적어가 너니까 유가 있어야 하고 동사 러브를 써서 3형식이니까 주어 동사 목적어 순으로 나열하면 되겠다며 겨우 아이 러브 유라는 문장을 완성해서 돌아보니까 상대방은 이미 가고 없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 말할 때 주어 동사에 어순 따져가며 말하지는 않잖아요? 그냥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오듯이 영어 회화도 그래야 합니다. 처음부터 유창할 순 없기에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귀가 뚫리고 입이 열리는, 즉 몸이 영어로 말을 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의 몸은 정직합니다. 또한 단순합니다.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반복하는 것에 숙달되어 버립니다. 간혹 연예인들의 마약 사건이 뉴스가 되곤 하는 데 분명 의식으로는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되는 거고 그때부턴 의식적으로 끊고자 해도 쉽지 않습니다.
몸의 이런 원리를 우린 역으로 신앙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피곤하고 힘들고 지치고 아파도 몸이 기어서라도 교회로 이동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준이 돼야 그나마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 읽기가 잘 안되는 이유, 기도가 잘 안되는 이유, 봉사와 헌신과 순종이 잘 안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심은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다 ‘믿음 연습 부족’입니다.
처음부터 운전 잘하고 처음부터 공부 잘하고 처음부터 믿음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작은 시내가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듯이 작은 노력이고 적은 연습일지라도 꾸준히 애를 쓰며 심지어 싫고 힘든 것일지라도 믿음을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노력하여 끝내 믿음을 무의식 속에 심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믿음도 심으면 반드시 믿음으로 얻는 복을 거두게 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사람에게서는 들어간 것이 나온다고 할 때 사람에게 들어가는 통로가 의식만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게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바로 무의식의 통로를 통해서도 정보가 무의식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 온 것은 들어온 이상에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꼭 그렇진 않겠지만 독한 시집살이를 산 며느리가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더 독한 시집살이를 며느리에게 시킨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도 모르게 독한 시집살이의 방법들이 자기 무의식 속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인은 아니라고 할 겁니다. 안 그런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본인은 모릅니다. 의식적으로 시집살이시키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보고 듣는 것들도 무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모진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자기는 잘한다고 할지라 며느리나 남들이 볼 땐 독한 시어머니인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일단 사람 속에 들어 온 것은 그대로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가 거하는 환경이나 자리도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무릇 성도라면 믿음에 해가 되는 자린 피하고 항상 믿음에 도움이 되는 자리에 거하려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좋은 것만 들어 오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욕만 듣고 자란 아이가 커서 욕만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머저리 등신 나가 죽으라는 소리만 듣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커서도 머저리 등신으로 살게 되고 사회 나가서도 죽어 지내게 됩니다. 왜 맨날 엄마 아빠 속만 썩이냐는 말만 듣고 자란 아이는 끝내 엄마 아빠 속 썩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선 들어간 것이 나옵니다. 이게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사람의 내면은 하얀 백지와도 같아서 무엇이 쓰여지는냐에 따라 인생이 낙서장이 되기도 하고 예술품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의 영혼은 그릇과 같아서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쓰레기통이 되기도 하고 명품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린 하나님이 하신 말씀 중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씀과 둘째,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두고 들어온 것만 나간다고 했는데 마침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와 있나를 보신다 했으며, 또 우리 속에서 무엇이 나오나를 확인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무의식은 부정적인 일을 행하게 하고 믿음적인 무의식은 믿음적인 일을 하게 합니다. 만약 의식이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면 무의식은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들 중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골라 의식에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의식이 믿음적인 것을 생각하면 무의식은 들어온 것들 중에서 긍정적인 것과 믿음, 소망, 기도, 하나님 같은 믿음적인 것만 골라 의식 위로 떠 오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이제부터라도 믿음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자니 먼저 의식이 믿음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의식으로 들어온 믿음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때가 되면 심은 대로 거두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에 시험이 없는 때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시험이 피해 가지도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심은 대로 거둘지니라.”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이 말씀으로 힘을 얻어 언제 어느 때든 여러분에게서도 무의식적인 믿음이 발동되게 하기 위해 평상시에 의식적으로 믿음의 연습에 전력을 다하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댓글 목사님~
오랫만에 주옥같은 주일 말씀들
자필로 다시 보게 되니 너무나 좋습니다
무의식속에 저절로 기도하는 습관
말씀보는 습관 찬양하는 습관 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도 무던히 노력해야만 하는 거겠죠
말씀 올려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