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의 정신문화와 가야불교의 성격 도명스님 : 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오랜 시간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집단생활을 발전시켜 왔고, 그 최종 결과로 국가가 탄생했 다.
오늘날 사용하는 국가라는 개념의 연원이 되는 고대국가의 탄생 시기와 정의에 대해서는 명권에 따라 그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청동기, 철기의 사용과 강력한 왕권이 확립된 시기로 보고 있다. 18 세기 청나라에 선교사로 왔다가 중국의 사서를 연구한 장 밥티스트 레지 신부와 러시아 역시학자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틴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고대사 연구자들이 고대 동아시아에는 거대한 제국이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한민족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가리키고 있음은 주지의사실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국제사회에서 과거 로부터 현재까지 실재의 역사조차 정치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지금도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힘의 논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러니 정치는 정치이고 역사는 역사로 있는 그대로 볼 때 사실 규명이 학문의 본질이라는 그 목적어 부합할 것이다.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는 태양을 숭배했던 고대인들의 관념에 따라 일찍 이 태양이 뜨는 끝지점인 한반도로 몰려와 정착했다고 하며, 그것은 이른 시기의 구석기와 신석 기인들의 흔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또한 육지와 바다의 접점이라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대 륙 세력인 중국의 해양 진출과 해양 세력인 일본의 대륙 진출이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침략의 근거가 되어 왔다.
그러나 1980 년대 현 중국의 산동성을 중심으로 세게 4 대 문명보다 앞선 ' 홍산문화'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발견은 전 세계 역사학계에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서양문명을 인류의 시원 문명으로 고정시켜며 서양을 높이고 동양을 낮추어 보는 ' 오리엔달리즘'이 만연한 서양의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이 모두 현대 중국의 선조인 한족 ( 漢族 ) 이 아나라 동이족 문명이란 게 밝혀지면서 그들은 국가적인 주도하에 사실을 왜곡하며 동북공정을 자행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인류 문명의 시원을 개척했던 한민족의 뿌리 인 동이족은 한반도를 벗어나 동북 아시아를 무대로 중앙 아시아까지 영향력을 미친 문명 대국 이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고조선이 수준 높은 문명을 향유한 문명국임을 알 수 있는 유물로 지름 20 센티미터 내외의 작은 거울의 뒷면에 1 만 3 천개의 동심원을 새겨 놓은 다뉴세문경과 세 형 동검, 비파형 동검 등을 만든 뛰어난 금속 제조 기술력을 통해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고조선이 문명국임을 증거하는 또 다른 근거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 고조선조 > 에 나오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철학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창건은 개국 군주가 이전의 국가 나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세운다는 용명한 무용담을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고조선 이전의 배달국 시대부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 弘益人間 ) 과, 세상을 도리로써 다스린다는 재 세이화 ( 在世理化 ) 의 철학 사상은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찾기 어러운 건국이념이다. 이러한 철학 사상의 등장 배경에는 발달한 물질문화의 기반위에서 정신문화가 개화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지 며 위정자는 위민 ( 爲民 ) 정치를 하는 지혜로운 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이처럼 서양에서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인 정치 모델인 철인 ( 哲人 ) 정치가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현되고 있었다는 점 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서기 42 년 한반도 남부에 김해를 무대로 성립한 가락국을 비롯한 육가야는 고조선의 맥을 이은 흔적들이 드러난다. 또한 국가경영의 핵심 사상들도 전승되어 그대로 이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 다. 본고에서는 가야의 기록을 더듬어 가야 정신문화의 원류와 그 핵심 사상들이 어떤 가치가 있 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서기 48 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진풍탑인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는 상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이 땅에 최초로 전래된 가야블교의 성격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자 한다. 그리고 가야불교가 불교사와 우리 역사에서 점 하는 가치에 대해서도 알아 보고자 한다.
1 ) 가야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멸망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는 가야의 수장국인 가락국의 성립 시기를 서 기 42 년이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 에서는 ( 金庾信王京人也 十二世相 首露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 ~ 其地開國號曰加耶 後改為金官國 ) " 김유신은 왕경 사람이 다. 12 세 조상 김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후한 건무 8 년 ( 서기 42 ) ~ 그 땅에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라 했는데 뒤에 금관국으로 바꾸었다. " 라며 김유신의 12 대 선조가 가야를 건국한 김 수로왕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또한 「 삼국유사 가락국기 」 조에서도 ( 其於月望日即位也 示現故障首露感云首陵 國稱大駕格又稱伽 耶國 卽六住耶之一也 ) "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먼저 나타났다 하여 이름을 수로라 하였으며 혹은 수릉이라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칭하니 곧 6 가야 중의 하나이다." 김 수로왕이 서기 42 년 음력 3 월 15 일에 왕위에 올랐고 나라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칭하 니 6 가야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건국 년도와 날짜. 건국자와 나라 이름까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 삼국유사 오가야 」 조에는 가락국인 금관가야를 제외한 나마지 다섯 가야를 ' 오가야'조에 따 로 기록했는데 아라가야 ( 함안 ). 고녕가야 ( 함녕 ), 대가야 ( 고령 ), 성산가야 ( 경산 ), 소가야 ( 고성 ) 를 언 급하며 다섯가야의 이름과 위치를 명확히 말하고 있다.
현재도 가야의 명칭과 위치에 논란이 되 고있는 창녕의 비화가야에 대해서는 저자인 일연스님도 대가야의 오기 ( 誤記 ) 로 부연 설명까지 하 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도 금관가야의 건국자인 수로왕부터 마지막 10 대의 구형왕까지 이름 가 재위 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 가락국기'조에는 왕명과 본명 그리고 치세의 년도까지 나 2 며 왕비의 이름과 출신 태자의 이름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가야도 건국자 대로왕을 시작으로 마지막 도설지왕까지 16 명의 왕이 통치했다는 기록과 설화가 전해져 온다. 다만 함녕 김씨. 성산 김씨, 고성 김씨 등의 족보를 통해서나 그 지역에 전 승되어 오는 민담. 설화. 전설 등을 종합해보면 가야 각국의 존재에 대한 윤곽을 대략이나마 알 수 있다.
비록 후대에 알려져 검정이 필요하지만 국학박사 반재원이 번역한 홍사한은 ( 鴻史桓殷 ) 를 보면 육가야의 시조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학계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일단 금관가야의 김수로 ( 全首露 ). 고녕가야의 김고로 ( 金古露 ). 대가야의 김대로 ( 金大露 ). 벽진가야의 」 벽로 ( 金碧露 ). 아라가야의 김아로 ( 金阿露 ). 소가야의 김말로 ( 金末露 ) 라는 왕명을 동해 가야의 건 국한 왕들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2019 년 3 월 고령에서 발견된 토제 방울에 새겨진 그림들은 육가야가 구지봉 탄강이라는 동일한 건국 신화를 공유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성립된 가야는 건국할 당시부터 각각의 국명과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국가의 기 을 갖춘 고대국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정한론을 고착화한 일제의 관제사학자들과 . 그 사관을 이어받은 국내 학자들의 영향으로 가야는 고대국가가 아닌 ' 6 부족 연맹체'라고 폄하되고 있다. 가야는 국가로 시작한 게 아니라 원시 부족 집단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장사회 ( 君長社會 ) 라는 개념을 가야에 덧씌우고 있는데. 군장이란 ' 원시 부족사회의 우두머리'를 말하며 이 명칭은 세계적으로 국가 이전의 단계를 지칭하며 일본의 고고학에서도 통용되는 용어 이다. 또한 강단사학계는 가야와 삼국의 건국 시기에 원삼국시대라는 시기를 끼워 넣어 삼국의 건국 시기를 3 ~ 4 세기로 늦추어보는데. 이 또한 우리 역사를 왜곡 축소하는 일제의 주장에 아직 까지도 동조하는 후진적이고 반역사적인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가락국을 모태로 하는 금관가야는 철기 제조술을 기반으로 하여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서기 77 년인 삼국사기 ' 파사 이사금조'의 기 록에는 가야와 신라의 군사적 충돌 장면이 나오는데 가야는 당시 정병 1 만명을 동원했다는 기록 이 있다. 이는 가야 초기의 기록으로 부족국가나 군장사회로는 동원하기 어러운 강력한 군사력이 다. 또한 중국의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변진조에는 가야의 철 수출이 낙랑, 대방, 왜국까지 미쳤다고 기록한다. 당시의 철기술은 요즘의 최첨단 IT 기술과 비견되며 이로 미루어 가야는 건국 초기부 터 우수한 기술력과 해상 네트웍을 통해 강력한 국가 체제가 구비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 가락 국기'에 나오는 두 가지 사실로 비추어 가야 초기의 국가 체제에 대해 알 수 있다.
서기 48 년 허 왕후의 도래 후 수로왕은 당시의 선진 대국이었던 한나라의 관료체제를 도입하여 구간의 명칭을 바꾸었다. " 이로써 주나라 법과 한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는 왕이 옛것을 바꾸고 새것을 창조할 때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수로왕이 석탈해와 대결할 때 500 대의 선단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해상 강국 가야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현대의 발달한 과학기술로 기원 전후의 고 김해만을 보면 현재의 김해평야는 바다로 이루어진 내해 ( 內海 ) 로 천혜의 포구였다.
이러한 입지를 이용해 가야의 해상 력은 급속히게 신장되었을 것이다. 또한 2 ~ 3 세기 가야의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엄청난 양의 덩이쇠와 수준 높은 가야 토기들은 가야의 발달된 물질문명을 알게 해주는 증거들이다.
이렇듯 발전해가던 가야가 어느 시점을 기화로 갑자기 세력이 약화되었는데 그 이유로 몇 가지 가 거론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포상팔국의 난으로 불리우는 가야 제후국들의 집단적 반란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5 세기 광개토 대왕의 남진에 의해 금관가야는 약해지고 대가야가 득세 했다라는 견해가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삼국과의 경쟁으로 피로하였던 가야는 일본 열도라는 새 로운 땅에 관심을 가져 대거 이주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인구 변화를 연구한 일본 민속학 박물관 의 고야마슈조 교수에 의하면 죠몽시대 (기원전 3 세기 ) 를 거처 야요이시대 ( 기원후 3 세기 ) 와 고 분시대 (기원후 6 세기 ) 의 폭발적 인구 증가는 본토의 자연적 인구 증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 이며, 이는 외부에서 인구의 대량 유입이라야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가야인의 대대적인 이주 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가야의 쇠락에 관한 정확한 근거는 불확실하지만 건국 초기 신라보다도 강성했던 금관가야는 서 서히 약화되어 서기 532 년 구형왕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신라 법흥왕에게 이양하여 그 수 명을 다하게 된다. 대가야는 30 년 후인 서기 562 년 대가야의 도설지 왕이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열망하게 된다. 고녕 가야를 비롯한 나머지 가야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고녕 가야의 시조왕과 왕비 무덤과 이후 상주에서 출토된 왕관이 상주박물관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 육가야 초기는 분명하게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2 ) 가야의 정신문화
가야는 일찍 역사 속에서 사라진 관계로 문헌 기록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특히 6가야 중 비교적 일찍 멸망한 고녕가야나 성산가야는 물론이고 아라가야 소가야 등의 문헌 기록도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나 구지봉의 육란설화나 최치원의 ' 석이정전'을 참고해 보면 가야의 건국자들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또한 가야는 그 시작부터 연합적인 국가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가락국기의 기록이나 육가야 시조왕의 명칭들만 보아도 그 연관성을 알 수 있다. 학계 일부에선 신라와 가야의 근원이 같다고들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야는 고조선의 후예 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 삼국사기 혁거세 」 조를 보면 신라의 근원이 사로 육부촌으로 는데 그들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가 고조선의 유민이 야도 역시 고조선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갑골문자라고 한다. 갑골문은 그 형태와 제자 ( 製字 ) 원리를 연구하는 과 그것을 소리내어 발음하는 음운학으로 나뉜다. 갑골 음운학의 권위자 최춘태 박사의 따르면 조선 ( 朝鮮 ) 은 고대에 ' 가사라'로 발음되며 이는 고대의 음운 법칙에 의해 ' 가라'와 로 분화된다고 말한다. 고대 시절의 음절 분화는 일정한 법칙성을 가졌으며 이로 미루어 가야의 이전 국명이 가라였으며 신라의 이전 국명이 사라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각자도생의 길을 걸은 여러 부류들은 제각각 흩어졌을 것이다. 그 한 부류가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을 아울러 BCE 57 년 신라를 건국하였고 다른 부류는 CE 42 년 가야를 건국하였다고 보인다. 가야의 물질문명을 보면 뛰어난 철 제조기술과 독특한 양식의 가야 토기가 있다.
또한 가락국기 에 나와있는 동오 ( 銅線 ) 는 구리로 만든 물시계로 세종대왕이 만든 측우기보다 1500 년이나 앞선 기술이다. 가야 초기 가야의 국력 신장에 걸정적 역할을 했던 가야의 철 제련 기법은 대륙 아닌 인도와 동일한 기법이라고 홍익대 박장식 교수는 2017 년 제 23 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 논문을 통해 밝혔다. 또한 동오를 제작했을 정도의 기술력은 가야가 고조선의 후예임을 말해주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고조선은 다뉴세문경을 제작할 정도의 기술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고, 그 전통을 이어받은 가야도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가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또한 가야의 뛰어난 천문 사상은 2018 년 12 월 아라가야의 왕릉으로 추정도 안 말이산 13 호분 덮개돌에 새겨진 벌자리들로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망자의 칠성을 그려 넣는 전통이 남아있다.
가야의 원류로 인식되는 고조선의 정신문화는 홍익인간. 재세이화로 대변되며 당대 전 세 로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하면서도 차원 높은 철학적 가치가 있다. 한편 환웅의 홍익인간 : 화의 정신은 김수로의 동치 이념에서 엿보이고 있다. ' 가락국기'에는 수로왕과 석탈해의 대결 장면이 나온다. 석탈해가 수로왕에게 "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 하니 " 하늘이 나로 ·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 없고 내 나라와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때 나라안을 안정시키고 ( 令安中國 ) 백성을 편안케하려 한다 ( 而桵下民 ) 은 재세이화 홍 의 정신과 상당히 닮아있음을 본다. 석탈해의 오만한 도발에 대해 거친 말과 행동으로 응징 하지 않았고 자신이 천손임을 당당히 말하며 천명을 받은 천자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와 무관하지 않는 근거가 승전전비의 비두 부분에 있는 태양 문양인데 밝음을 의미하는 우리말 ' 환하다'와연관한 한민족의 시조 환인 환웅의 후계임을 증명해 보이는 비석이다.
또한 「 가락국 태조릉 숭선전비 」 에"구경 ( 九卿 ) 의 관직을 제정하시고 태자를 세움에 적통의 중함을 엄히 하셨으며" ( 立九卿以定官職之制 建太子以嚴嫡統之重 ) 이라는 글귀를 보면 가야는 적통의 인식이 핏줄속에 이미 존재한 관념이었다. 이때 적통이란 한민족의 적통인 고조선을 의미한 다고' 보아진다.가락국 태조릉 승선전비' 를 보면 거등왕을 시작으로 가야 역대 왕들의 별호가 나오는데 道.成.德.明 .神 .恵 .莊 .肅. 讓 등의 식인데 마치 수양한 사람 같은 별호들로 가야의 정신문화를 간접적으로 엿보게해
준다. 가야 정신문화의 바탕이 되는 및 가지 사상들이 있다.
① 불교적 요소
「 가락국기 」 에 "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잎과 같다.그러나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 나한을 머물게 할만한 곳이다. 더구나 1 에서 3 을 이루고 3 에서 7 을 이루어 칠성이 거쳐하기에 적합하니" ( 此地狭小如琴葉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主地何況 自一成三自三成七七聖主地圖合干是 ) 위의 내용은 수로왕이 임시 궁궐을 짓기 전 신답평에 나아가 좌우를 둘러보고 풍수를 논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초기불교의 이상적인 성자인 십육나한이란 명칭이 등장하는데 불교적 용어가 분명하다.
또한 칠성은 과거 칠불 ( 七佛 ) 을 지칭한 듯하며 이로 미루어 김수로왕은 불교적 소양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 어산불명 」 조에 " 그때 당시에 ( 가락국 ) 경내에 옥지가 있고 그 못에 독용이 있었는데 만어산에 는 다섯 나찰녀와 왕래하며 사귀었다. 그때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 년 동안 오곡이 되지 않았다. 왕이 주술로 이것을 금하려 하였으나 능히 금하지 못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를 청하 설법을 한 후에 나찰녀가 오계를 받았는데 그 뒤로는 재해가 없어졌다"
( 當此時境內有玉池池 毒龍焉 萬魚山有五羅剎女往来交通 故時降雷雨歷四年五穀不成 王呪禁不能稽首請佛說法 然後竊 受五戏而無後害 ) 여기에서도 부처와 설법 그리고 불교 설화에 등장하는 나찰녀를 보아도 불교적 요소가 다분하다. 또한 불교의 수계 의식 중 하나인 오계는 역사에 등장하는 우리 문헌 최초의 기록이다. 이밖에도 범천, 대화불. 삼귀, 아누보리, 결가부좌, 수기. 적멸 등 다수의 불교적 용어가 등장하는데 불교는 가야 초기 가야인들의 정신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② 유교적 요소
「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 」( 1915 ) 에 " 왕께서 보위에 오르셔서 황무지를 개척하여 좋은땅을 만드시고 만물의 속성을 드러내고 밝혀 천하의 일을 성취시키니 풍속이 순박하고 정이 두터워졌고 다스릴 때 교화를 두텁게함을 숭상하였다. 인의를 숭상하고 검양의 예의를 흥하고 하시었고 홀로 사는 홀아비나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휼하셨다. ( 王旣登大位 破荒啓士開物成務 治尚惇化 崇仁義與禮讓位孤獨哀矜寡 ) 가락국기 이전에 가야의 건국 기록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개항록 ( 開皇錄 ) 이 있었고, 가락국가 ( 異本 ) 이 있었을 것으로 유추되는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가야에 대한 은 더 많았을 것이다. '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는 비교적 후대에 지어진 비문이나 가야에 대해 전해오던 이전의 기록을 참고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유교 ( 儒敎 ) 의주요한 강령을 오상 ( 五常 ) 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의 ( 義 ) 그리고 예 ( 禮 ) 를 말하고 있다.
또한 「 가락국기 」 에서 " 이에 나라를 다스림이 집안을 다스리듯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러졌다." ( 於是乎 理國齊 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 이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 ( 仁)
으로 백성을 사랑하였고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린 유교의이상적 인간상인 군자 ( 君子 ) 의 면모가 보인다. 또한 허왕후 도래 시 수로왕이 진해 용원의 주포 마을까지 몸소 행차하시어 허왕후를 맞이한 것은 먼곳에서 온 신부에 대한 예 ( 禮) 를 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③ 도교적 요소
「 가락국태조릉승선전비 」 에 " 왕이 되신지 121 년에 스스로 ( 정무에 ) 권태를 느끼시고 황제가신선이 되었음을 흔연히 사모하여 왕위를 태자 거등에게 전하고 지품천의 방장산 속에 별궁을 지 어서 태후와 함께옮겨가 수련을 하셨다" ( 王年百二十日 自以倦勤欣然慕黄帝之升仙 傳位于太子居登築別宮于 知品川之方丈 居而修鍊 ) 수로왕은 신답평에 임시 도읍을 정할 때 풍수를 직접 보았으며 가야불교 연기사찰 장유사. 부암, 모암, 자암. 신국사, 진국사 등의 사찰에 가보면 전방이 훤히 트이고 호인지기의 기상이 느껴지는 명당터에 자리하고 있다. 한민족 고유의 선도 ( 仙道 ) 사상은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도 나올 만큼 그 근원이 뿌리 깊다 할 것이
다. 이로 미루어 수로왕은 도교적인 소양과 풍수를 보는- 능력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
또한 「 가락국기 」 에 가야 6 대 좌지왕 당시 신라가 가야를 치려할 때 점장이가 해괘(解卦)를 얻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걸로 보아 가야시대에 이미 주역 ( 固易 ) 을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 가야불교의 성격
오늘날 인류가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문화 또는 문명의 형성 근간은 제정일치 ( 祭政一致 ) 체제의 한 부분인 철학과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인 영 ( 靈 ) 을 배제하고는 정체성 자체를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철학과 종교 사상이라는 핵심이 빠진 문명은 존재하기 힘들다. 인간의 역사도 이집트, 인더스. 수메르. 황하 4대 문명과 함께 중국 발해만과 요하 주변에서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 ( 遼河文明 ) 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왔다.
모든 문명은 예외 없이 고유한 사상과 철학 그리고 종교적 전통을 남기고 있으며 그러햔 정신적인 요소는 해당 문명의 발전과 특질을 규정한다. 그래서 문명과 문화는 지금도 지구촌을 나누는 주요한 기준이 되며 세계 각국은 기독교 문화권, 불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등으로 되기도한다. 이와 함께 지역과 민족 그리고 환경에 의해 다양한 종교적 특질이 형성되며 조금씩 또는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옛 가야 지역에 도래한 한국 최초의 불교인 가야불교는 어떤 성격을 가졌 을까? 가야불교가빜 대승불교다' 또는 ' 소승불교다' 대 · 소승이 혼재한 불교다' 등의 다양한 주장들 근거가 부족해서인지 삼국의 불교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흡하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가야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그 실체를 탐색해 밝혀야하는 연구 분야마다. 가야불교는 가야문화의 기반 위에서 형성됐으므로 가야불교의 성격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체 ( 母體 ) 격인 가야문화의 성격을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야문화는 김수로왕의 대륙문화와 허왕후의 해양문화가 합쳐진 융복합 문화로 인식 되며 가야불교도 이러한 융복합의 성격을 가졌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한반도 끝자락 대륙문화 끝이자 해양의 시작점에 위치한 가야의 지형적 특수성도 융복합적 문화를 형성하기 쉬운 조건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음복합은 특히 철학이나 문화 분야 에선 종합. 혼재, 잡 ( 雜 ) 의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모든 것을 포괄하는 · 통' ( 通 ) 과도 같은 의미이다.
흔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 통불교 ( 通佛教 )' 라고 하며 그것은 선 ( 禪 ), 교 ( 教 ), 정토 ( 淨 土 ), 토착신앙과의 습합 ( 習슴 ) 등으로 합쳐진 종합불교, 혼합불교라는 의미이다. 일반 통불교의 시작을 원효스님으로 보는 경향이 많으나 가야불교를 탐색하다보면 통불교 가 이로부터기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효는 그 완성자로 보인다.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은 엄경인데 추구하는 궁극적 세계를 ' 화엄세계'라고 한다. 화엄이란 원융과 다양함이며 시작부터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가야불교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대승불교, 소승불교 밀교 뿐 아니라 도교, 민족신앙, 힌두이즘, 호국불교 등의 다양한 요소를 발견할수 있었고 이는 곧 원통불교 ( 圓通佛教 ) 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럼 가야불교가 왜 화엄인 ' 통불교'의 성격을 띠는지 옛 기록을 따라 살펴보자.
① 대승불교의 요소 대승 ( 大乘 ) 이란 큰 수레를 말하며 개인의 해달만을 우선시하는 소승 ( 小乘 ) 의 상대적 기와 타인을 똑같이 보고 함께 해달을 지향하는 불교의 부류를 일컫는다. 대승불교는 어서 공동체의 영 ( 靈 ) 적 진보를 위한 헌신에 가치를 두고 있다. 이처럼 허왕후와 장 락국에 온 것은 문명 전파와 함께 중생 구제의 자비심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1915 년 허엽이 지은 「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 」 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 화성 있을 때부터 수도에 뜻이 있었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멀리서 돌배를 타고 옴에 파미르 보다 빨랐도다" ( 和尚公子而修道念 度衆生彌遠及 石舟疾於葱嶺馬 ) 그 뜻은 장유화상은 왕자로 있을 때부터 출가 수행하였으며, 그가 이 땅 가야에 돌탑 이유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또한 남매인 허왕후도 결혼만을 위하여 라에서 목숨 걸고 이 땅에 오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중요한 이해가 달려있는 정략결혼 도 생면부지의 신랑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향해를 감행하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 마도 그들이 이 땅에 온 진정한 목적은 중생제도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것 된다.
② 소승불교의 요소
수행의 성격과 궁극적 목표에 따라 불교를 대승과 소승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대승 ( 大乘)불교는 많은 이들을 해달로 이끄는 큰 수레이고. 소승 ( 小乘 ) 불교는 개인적 해탈을 중시하는 작은 수레로 비유한다. 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티벳과 한, 중, 일이 대승 불교권에 속하고 태국, 감도 오스 등 동남아시아는 소승불교권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소승불교권이라는 동남아의 불 가보면 소승불교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대승불교가 우월하다고 이들이 이론과 출가 승려 중심의 경향인 ' 소승불교'를 상대적으로 열등한 개념으로 인 어를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불교에는 대승뿐 아니라 소승불교의 요소도 보이는데, 이 땅에 불교를 처음 전한 시 초조 ( 海東 初粗 )' 장유화상의 행적이 적힌 「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 」 에는 다음과 같은 ㄷ 장한다. " 화상은 신부의 친정 사람으로서 부귀보기를 뜬구름 같이 여기더니 드디어 진세를 초월 모산에 들어가 길이 노닐며 돌아오지 않으니 세칭 ' 장유화상'이라 함은 이 때문이다" ( 和 之親 祝富貴如浮雲 途超塵相 入佛母山長遊不返世稿長遊和尚以是也)
이 글에서 장유화상은 세속을 초월하여 살림속에 들어가 은둔 수행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칠불 사 언기설화에도 장유화상이 일곱 명의 조카를 데리고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와서 함께 수행하 며 지도한 스승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함께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은하사, 장유사, 흥부 암 등이 산 속의 넓지 않은 터에 자리잡은 점을 감안하면 최초에는 자그마한 아란야 ( 토굴 ) 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장유화상과 칠 왕자의 은둔 수행은 소승불교의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수 행 방식이다.
한편 신라시대 담나라에 유학하여 국제적인 지식인으로 인정받았던 고운 최치원이 지은 「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보물 138 호 ) 에는 ' 삼국사기'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불교 전래 기록과는 다른 주목 할만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 지중대사비문'에는 대승과 소승이 전래된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 교 ( 불교 ) 가 일어나는데 비파사가 먼저 이르렀으니 곧 사군으로 사체의 바퀴가 달렸고 마하연 이 뒤에 이르니 한 나라에 일승의 거울이 빛났다"
( 其教之興也 毘婆娑先至則四耶 驅四諸之輪 摩 訶衍後來 則一國耀一乘之鏡 ) 보통 비파사 또는 비바사는 소승 ( 小乘 ) 으로 마하연은 대승 ( 大乘 ) 으로 번역하는데 위의 사실은 비 바사인 소승이 먼저 들어 온 후 마하연인 대승이 나중에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일연스님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최치원도 대승보다 소승이 먼저 전해졌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종교적 법통을 매우 중요시하고 소승이란 말만 나와도 화들짝 놀라며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나 종교적 법통과 역사적 사실을 따로 분리해서 봐야지 함께 연결하여 종교적 도그 마에 빠지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불교에서 진리를 깨달은 스승이 제자에게 진리를 전하는 과정을 법동이라 하는데, 법의 전승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진리를 전하는 법통과 불교의 역사는 별개로 보야야 한다. 법통은 법동이고 역사는 역사인 것이다. 법통이 소중 하다고해서 사실을 능가할 수는 없다.
③ 밀교적 요소
우리 불교의 요소 가운데 하나로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은밀하게 표출하는 밀교 ( 密教 ) 가 있다. 밀교는 현생의 성불 ( 成佛 ) 뿐 아니라 개인과 국가의 재난을 물리치고 안녕을 기원하는 문법과 수 행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방식에는 암송, 주문 등도 포함된다. 신라와 고려대에 민중과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불교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 삼국유사'의 수로왕 관 련 내용에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 2 탑상편 「 만어사이산불영조 」 에는 수로 구절이 나온다. 왕이 독룡과 나찰로 인해 농사가 되지 않을 때 그들을 굴복시키려고 주술 ( 呪術 ) 을 사용하였다는 " 오곡이 되지 않았다.
왕이 주술로 이것을 금하려 하였으나 능히 금하지 못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한 후에 나찰너가 오계를 받았는데" ( 五穀不成 王呪禁不能 稽首請佛說法 然後 羅利女 受五戒 ) 이 기사는 독용과 나찰녀 ( 여자 악귀 ) 의 영향으로 농사에 피해를 입자 수로왕이 주술을 형하여 그 들을 굴복시키러 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안 되어 부처께 청하여 해결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 용을 봉해 수로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기도 했지만 제정일치 ( 祭政一致 ) 의 고대 사회에서 뛰어 난 영적 능력을 지닌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나찰녀들이 오계를 받았다고도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불교 최초의 수계에 대한 기록 이다. 이를 통해 가야불교에는 바른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 계율불교적 요소'도 녹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
「 가락국기 」 에서 수로왕과 석탈해가 환술 ( 幻術 ) 을 펼치 도 다분히 밀교적 요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④ 도가적 요소
가야불교는 도가와 습합 ( 점 合 ) 된 흔적도 보이고 있는데 만어사에서 수로왕이 행한 : 이면서 도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로왕이 신답평에 도읍을 정할 때나 나라를 뺏으 와 신통 ( 神通 ) 대결을 벌일 때의 각종 환술들은 다분히 도가적 요소로 보인다. 「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 더구나 일에서 삼을 이루고 삼에서 칠을 이루어 칠성이 거처하기에 적합하니" ( 1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 여기서 풍수지리에 인용되는 구궁 ( 九宮 ) 의 방위에 1 은 북쪽, 3 은 동쪽, 7 은 서쪽이 북쪽과 좌청룡인 동쪽, 우백호인 서쪽의 지세를 풀이한 말이다.
수로왕의 풍수에 대한 안목은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허왕후와 처음 만났던 명월산 좋은 터에 신국사, 진국사, 홍국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수로왕이 아버지를 위해 지은 부암과 어머니를 위해 의 연기사찰에 가보아도 모두 명당자리이다. 한편. 수로왕 노년에 허왕후와 함께 입산하여 수도한 내용을 「 가락국태조릉숭선전 같이 설명한다. " 왕이 되신지 121 년에 스스로 ( 정무에 ) 권태로움을 느끼시고 황제 음을 혼연히 사모하여 왕위를 태자 거등에게 전하고 지품천의 방장산 속에 별궁을 와 함께 옮겨 가서 수련을 하였다." ( 王年百二十一 自以倦勤 欣然慕黃帝之升仙 築別宮于 知品川方丈山中 與太后移居而修練 ) 이 대목에서 수로왕 부부는 윗대 조상이라 여기는 ' 황제'가 신선이 된 것을 흠모 께 지리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고 하니 자연 속에서 수행하였던 도가적인 풍모를 한편 수로왕이 붕어할 때 158 세였고 허왕후가 별세할 때 157 세라고 한다. 현 사 람의 많은 나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존재를 가공의 인 학자들의 의견이 있다. 그러나 청나라 말 256 살을 산 이청운과 아제르바이잔 출신 죽은 스리하리 무스리모프는 169 세를 산 역사적 사실도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⑤ 민족신앙적 요소
「 가락국사장유화상기직비 」 에 보면 질지왕 때 장유암을 창건하고 화상의 진영을 칠성각에 모신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 해동의 한 모퉁이 연화도량에 법당과 당간을 세우고 경 외우는 자는 다 화상의 후예이리라. 질지왕 대에 이르러 장유암을 창건하고 화상 각에 모셨는데.. ."( 海東一隅 蓮花道場 建法幢 說經誦偈者 皆和尚之衣鉢也 至銍知 和尙貞影 干星君閣 ) 이 내용은 해동의 끝 가야 지역에서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자는 모두 장유화상의 있으니 해동불교의 초조 ( 初祖 ) 는 장유화상임을 말했다.
또한 장유암 창건 후 장유 모셨다는 기록은 장유암이 장유화상으로 인해 지어진 사찰이 분명하다는 뜻이며, . 이 아닌 칠성각에 모셨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칠성각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 있다. 칠성각에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는 기록은 불교와 칠성신앙이 습합된 결과로 불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 조상들은 북두칠성과 별들을 신성시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지금도 우리는 생일을 의미하는 신
(生辰) 이라 단어가 삶속에 들어와 있다.
또 가야불교의 유산인 은하사법당 앞 계단 옆에 새겨진 ' 신어통천' ( 神魚洞天 ), 무척산 정상 부근에 있었던 ' 통천 부은사 삼성각 뒤 바위에 새겨진 ' 통천도랑' ( 通天道場 ) 등은 하늘과 통한다는 의미를 > 민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 ( 天孫 ) 사상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⑥ 힌두이즘
인도는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힌두교는 불교 이전부터 ' 바라문교 으로 나라 전체에 전파되어 인도의 보편적 종교가 되어 있었다. 불교가 성립된 후에는 쟁과 함께 때로는 맞서기도 하면서 서로 교류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의 공론 ( 空論 ), 무아론(無我論)등의 고급교리가 힌두교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고, 힌두교의 여러 신들과 다라니 ( 불교로 건너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고대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풍속의 하나인 남근. 여근 신앙처럼 인도에는 ' 링가'와 ' 요니'라는 토속신앙이 있는데 링가는 남성성을 요니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석물이다. 공교롭게도 장유사, 모은암, 홍국사, 만어사 등의 가야불교와 관련한 사찰들에서는 인도 힌두이즘의 흔적인 요니와 링가가 남아 있다.
장유사 법당 앞마당에는 작은 돌절구처럼 보이는 석물이 여러개 있고 그 안에는 둥그런 돌이 들어 있다. 동국대 세계불교연구소의 정진원 박사는 이것이 요니 원시 형태라고 말하였다. 부은사 용왕당 옆에도 요니와 링가가 있는데 요니는 완벽한모습으로보존되어 있지만 링가는 본래의 것은 분실하여 다른 돌로 대체하였다 한다. 부은사의 요니는 얼 핏 보면 맷돌 같다. 하지만 이 요니가 맷돌과 다른 점은 석물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구멍이 링가가 들어가는 홈이다. 모은암 동굴 나한전에도 나한 석상 두 개의 돌이 있는데 그것 역시 링가이다. 그리고 부산 강서구의 흥국사 미륵전에 가 부처님은 없고 돌 두 개만 덩그러니 있는데 그것이 링가이고, 돌 아래에서 1 / 3 지점을 보면 색깔이 다른데 이는 링가가 요니에 박혀 있었던 혼적이다. 밀양 만어사 미륵전에 가도 불 커다란 돌만 있으며 그것 역시 링가인 것이다.
이렇게 가야불교 관련 사찰에서 보이는 가는 인도의 힌두이증 속에 녹아든 토속신앙이 가야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물로 보인다. 그리고 허왕후가 이 땅에 처음 도착해 명월산 산신에게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독특한 풍속이다. 서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있는 산토쉬 굽 인도 북부 부다가야 주변의 소도시 ' 가야' 출신이다. 그의 고향인 북인도 지방에는 처 가기 전, 자기가 입을 옷을 신에게 먼저 바치고 나서 착용하는 풍속이 남아 있다고 증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다만 기록을 남기지 않는 인도인의 전통에 의해 문헌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하는 대목이다.
⓻ 호국불교적 요소
가야 초기 수로왕이 명월산에 지었다는 신국사 ( 新國寺 ). 진국사 ( 鎭國寺 ), 흥국사 ( 興國寺 ) 는 모두 나라 국 ( 國 ) 자가 들어간다. 이들 사찰의 이름은 ' 새로운 나라' . ' 지키는 나라' . ' 흥 라'를 뜻하며 일종의 진호국가 ( 鎮護國家 ) 사상이 반영된 호국불교 ( 護國佛教 ) 의 요소로 해석된다. 또한 장유화상이 나라의 부흥을 위해 창건했다고 전하는 흥부암 ( 興府庵 ) 도 있다. 이러한 의 건립은 수로왕과 장유화상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가야불교의 대표적 근거인 「 금관성 파사석탑조 」 에 보면 파사석탑이 오랫동안 왜구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 역시 호국불교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겠다.
⑧ 기타
그밖에 가야불교의 성격을 보면 연기사찰 가운데 부암 ( 父庵 ), 모암 ( 母庵 ), 자암 가족과 관련한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다른 지역 사찰에는 없는 특징이다. 이 명월산에 신국사, 진국사, 흥국사의 삼사 ( 三寺 ) 를 지었는데 이는 3 ( 三 ) 이라는 며 의미를 부여했던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숫자 관념이 반영됐다. 이렇게 3 으로 찰들의 존재와 그 중심인물들을 크게 선양했다는 사실은 한국불교사에서 찾아 교마의 독특한 특징이다. 허왕후을 추모하는 왕후사와 수로왕을 기리는 성조암이라는 원찰 ( 願剎 ) 이 존재 화상을 모시는 장유사가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야불교의 주요인 이 따로 창건될 정도로 후대인들이 이들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방증이되기 때문이다.
맺는말
가야는 500 년 이상 이땅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보늦게 건국하여 100 여년 일찍 멸망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가야가 역사에서 지워져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이후로 이전보다 현격하게 강해진 배경에는 가야의 정치 체계와 철기 제조술 그리고 수준 높은 가야의 문화가 신라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때문에 신라는 가야의 병합이 신라의 국력을 신장시킨 주요한 원인임을 받아들이기 싫었을 것이다. 신라의 자존심을 유지해야했기에 가야의 흔적들을 지웠고 그 흐름은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가 승자이기에 기록이 부족한 가야는 역사의 패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기록조차도 일제강점기에 멸실되는 불운을 겪는다.
일제는 정한론에 입각하여 임나일본부라는 가공의 역사를 만들었고 임나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는.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임나일본부가 성립되려면 가야 초기 가야가 강력한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면 안되었기에 그들은 멀쩡한 남의 나라 기록을 문제 삼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 기록이 믿을수 없다는 소위 '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변질된 논리를 만들어 내었다. 인식하였기에 삼국유사 초기기록을 불신하기는 당연한 것이었다. 초기기록이 믿을 수없는데 중기 후기 기록은 왜 믿는지 알 수가 없다. 문헌 전체가 아닌 특정 시기만 들 선택적인 시각 자체가 삼국의 초기 역사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려는 그들의 의도가 농후하게 깔려있는 것이다. 가야를 약화시키는 또 다른 논리는 가야는 고대국가가 아닌 부족 연맹체라는것이다.
그래서 군장사회를 운운하며 가야의 고대국가 성립 시기를 4 ~ 5 세기로 늦추려 한다. 그리되면 과연 가야문화는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문화는 하루 이틀만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가야의 고대국가 성립시기가 늦어지고 임나마저 끼어들면 가야가 설 자리는 전혀 없기대문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이르기를 ' 추석 차례의 시작이 수로왕께 차를 올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가야문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 문화의 한 축으로 면면히 이어져 그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 보면 가야의 정신문화는 가락국기를 주로 볼 수 밖에 없는 한계 상황이 있다. 그러나 다른 오 가야의 정신문화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2019 년 고령의 고분에서 출토된 흙방울 토기는 가야도 구지봉의 탄강신화를 함께 공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가야는 삼국보다 늦게 건국 되었지만 대륙과 해양의 융복합 문화였고 서로 이질적인 문화의 결합 으로 문화적인 부분은 앞서가는 부분도 엿보인다. 가야의 개방된 문화는 가야의 정신문화에도 그대로 접합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불교, 유교, 도쿄. 전문 등의 요소가 아있으며 가야에 이식된 가야불교 역시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수용하고 있는 특징을 나타낸다.
역사는 순환한다. 일제는 임나를 세우기 위해 가야초기 불교전래를 부정하였고 일제 관학자의 학풍을 이은 흐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일제의 영향을 받은 이병도 박사는 1962 년 논문 < 수로 고 > 에서 " 육가야의 하나인 고녕의 위치에 대하여 일단은 지금 함녕이라 註 하고 일단은 가리현 된다. 라고 註 하여 두가지 설을 전하고 있으나, 모두 잘못된 비정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함녕 함창의 옛 이름으로 지금 경북 상주군의 일대를 이루고 있거니와 고녕을 여기에 비정한다면 강역에서 너무나 떨어진 먼곳에 있어 다른 가야와의 위치와 상응치 않은 곤란한 점을 가지 있으며"라고 하는 한편 고녕가야를 * 진주의 옛 이름인 「 거열 ( 居列 )」 이 「 고녕 」 과 음이 비슷함 보아 그렇게 비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렇듯 명확한 근거 없이 사료와 위치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상주, 문경의 고녕가야는 역사에서 라져 갔다.
그러나 다행히 근자에 지정스님을 중심으로 한 ' 고녕가야선양회'를 비롯한 향토사학 의 언구에 힘입어 고녕가야가 다시 복원되려는 움직임이 있으며 그 귀추가 주목된다. 마찬가지 가야 초기 역사의 한 부분으로 가야사 복원의 실마리가 되고 있는 가야불교와 허왕후 도래의 사성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부족한 사료 속에 편린으로 남아있는 가야의 정 문화와 가야불교의 성격을 재구 ( 再構 ) 해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행간의 부족분은 리적 가설과 추측으로 매울 수 있고 후대에 새로운 발견에 의해 가야의 뛰어난 정신문화는 증 되리라 본다. 한 가야 초기 역사의 근거가 되는 가야불교는 단순히 종교사나 가야사의 일부라는 틀을 탈피 여 잃어버린 한국 고대사의 일부를 되찾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대승과 소승을 포함하는 읍 합직인 가야불교의 성격은 통불교와 호국불교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만든 원형임을 알 수 있 다. 00 년의 긴 잠을 깨고 가야가 다시 부활하려는 것은 세계속에 빛나는 ' 한민족의 개화'와 무관하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영성가들과 미래 학자들이 예측한 21 세기를 세계를 이끌어 갈 진 문명국 대한민국의 미래가 머지않아 보인다. 그것은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의 근원에 한민족 역사와 문화. 홍익인간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튼튼한 초석이 되어 줄 것이다. 대 동북아시아는 역사전쟁 중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민족사학계와 강단사학계가 치열한 내전 치루고 있으며 그 정점에 가야사가 있다. 가야불교와 함께 고녕가야가 복원되어야 할 역사적 가 여기에 있다. 가야불교의 실체와 삼국유사속에 실재했던 고녕가야의 복원은 본래의 가야 정립할 수 있는 초석이 되며 우리 고대사를 바르게 재구하게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나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침탈을 막는 든든한 수문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참고문헌
정영도 「 가야사 자료집 」 2004
반재원「 홍사한은 」 2020
허명철「 가야불교의 가야불교 고찰 」 1987
심재훈「2000년 가야불교 뿌리를 찾아서 」 2020 「가야불교문화 재조명」2017년도아시아불교문화학회 추계 학술대회
하정룡.이근직「삼국유사 교감연구」1997
이종기「가야공주 일본가다」2006
도명「가야불교 빗장을 열다」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