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는 여자¸
◀≪ 빨간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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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못 견디겠어. 걔가 너 처다보는 눈빛도 아주 싫어 죽겠고, 그걸 참아야하는 내 신세도 싫어! 헤어져."
"안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내가 니 여자친구야, 걔가 아니라! 근데 너희 어머니는 그거 알면서도 내 눈앞에 별 희안한 기집애 갖다놓고 그랬어. 너같음 참을래?"
"그렇다고 헤어지자니 말도 안되는 소리지. 니가 화내는 건 이해가 가지만 절대, 헤어지는 건 안되."
가람은 코웃음치며 뒤돌아섰다. 내가 매일 이 소리 입에 달고 다닌다고 들어먹을 생각도 안하네, 이제. 화가 난 가람은 성큼성큼 빨리 걸어 도로가로 걸어갔다. 얼른 택시잡고 집에 가야지. 발도 욱씬거리고 아주 죽겠다.
"이가람!"
승재는 가람을 빨리 붙잡았다. 가람이 약간 이상하게 걸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승재를 속일 순 없다. 승재는 바로 가람을 들어올렸다.
"으악! 뭐하는 짓이야?! 안 내려놔?!"
승재는 어깨와 무릎 뒤쪽을 꼭 잡고 가람을 끌어당겼다. 가람은 자연스럽게 승재에게 매달렸다.
"야, 사람들 다 쳐다봐! 안 내려놔?!"
"니가 이쁘게 걸을 수 있음 내려놓을게. 가자."
가람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쳤다.
"창피하다고!"
"니 목소리가 더 커."
정말 그랬다. 신기한 듯 주위사람들이 모두 쳐다봤지만 가람에게 보내는 눈빛은 약간 인상을 쓰면서 보는 눈빛이었고, 가람을 거뜬히 든 승재에겐 황홀한 눈빛을 보냈다. 가람은 한숨을 내쉬며 승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화가 방금까지 났는게 무색하게 마음이 붕붕 뿌듯함이 떠올랐다. 물론 자신에게 향하는 곱지않은 시선은 싫지만 저렇게 승재를 봐주니 괜히 가람 자신이 어깨가 으쓱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봐. 간지러워."
승재가 가람의 머리카락에 대고 말했다. 니가 더 간지럽다. 가람은 킥킥거리며 꿈틀꿈틀 손을 움직여 승재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승재의 목에 소름이 쫙 돋는게 느껴졌다.
"야!"
"안녕하세요?"
눈앞에 왠 여자가 활짝 웃으며 가람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럼 그렇지. 이 여우같은 할망구가 왠일로 나한테 저녁을 사는가 했더니. 혹시나, 아주 만약이지만 혹시나 갑자기 가람에게 마음을 열고 '널 내 며느리로 임명하마'라는 밝은 소식을 가지고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는 거 아닐까 기대를 건 자신이 바보였다.
"승재야, 앉아."
가람은 그 여자의 인사를 대충 고개로 살짝 받곤(아주 건방졌지만 받아줬기에 말로 꺼내 뭐라하기도 좀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의 옆자리로 승재에게 가라고 가리쳤다. 승재는 살벌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쏘아본 후 가람의 어깨를 감싼 손을 내리고 가람이 가리친 자리로가 앉았다.
가람, 승재 대 여우할망구, 저 본적도 없는 여자.
뭐 대충 이런식으로 갈린 것 같았다. 아 스물 일곱 처먹고 이런 유치한 대치상태 같은 걸 겪게 될줄이야. 가람은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한다고 일어서 손을 내민 여자를 쳐다봤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씨구, 나만큼 어이없겠어? 그런 것쯤 예상했다는 듯 여우할망구는 입꼬리만 들어올려 예의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앉으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초면이지? 이 아이는 강연희, ◇◇대학병원, 거기 원장 딸이란다. 인사하렴."
"…그런데?"
승재는 자신의 어머니를 있는 힘껏 노려보다 말했다.
"아니, 승재 넌 아는 아이잖니. 모임 같은 곳에서 종종 봤을 거야. 내가 소개하는 쪽은, 니 옆에 앉은 이런 것은 전혀 알수 없는 아이에게란다."
"아, 그렇습니까?"
이번엔 가람이 대답했다. 분위기 참 살벌하다. 승재의 어머니는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가람에게 말했고, 가람도 역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우리 아들의 서민친구. 아들이 이런 애들에게 관심이 많아. 워낙에 심성이 착해서 어려운 사람들 보면 동정이 간다고 그러더라고."
승재의 어머니가 연희에게 하는 가람의 소개에 승재가 가람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는 표시일 것이다. 가람은 엄지 손가락을 빼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 그랬어요? 어쩐지 옷이 한번도 본적없는 브랜드 꺼라고 생각했더니. 아예 브랜드가 없었나보네." '니 주제에 내 인사를 무시한 거니?'라는 눈빛으로 가람을 훑어보며 연희가 말했다. "어머니, 저희 그냥 나갈겁니다." 승재가 못 참고 벌떡 일어났다. 가람이 승재의 손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어머님께서, 밥을, 사주신다는데, 가긴 어딜가." 가람은 화가 나 말이 끊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할망구, 만약 당신이 승재 엄마만 아니었어도 얼굴에다 침을 흩뿌리며 쌍욕을 난발해줬을거야.
승재는 가람을 한번 슥 보더니 조용히 입다물고 앉았다.
식사내내 가람은 굴욕적이고 대들지도 못하는 질타를 받았고, 상처입었다. "니까짓게, 돈도없고 빽도없고 가진 것 하나없는 상거지 같은게 감히 승재를 넘보느냐." 말로 직접하진 않았지만 그만한 얘기만 잘도 구슬려 얘기했고, 연희라는 여자는 맞장구 치면서 골빈 소리만 잔뜩 늘여놓았다("전 살면서 저런 가방을 본적이 없어요. 봤어도 부끄러워서 들고 다닐수있어야죠. 어머니, 손톱이 참 정갈하네요. 등등) "식사를 마쳤으면 이만 일어나도록 해야지. 그리고 승재 너는, 내일 모임 잊지말고. 거기 파트너는 연희니까 내일 니가 알아서 데려오렴." 가람은 서둘러 일어나 뛰쳐나오듯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흘러나오진 않았다.
나는 거지가 아냐! 난 남부끄러운짓도 한적없고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어! 그런데, 내가 그들의 부류에 들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되?! 뒤로 승재가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너무 화가나고 미칠것만 같았다. 가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어찌어찌 참아도 자신의 가족들과 집안을 들먹일 때는 두 여자의 머리채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범하게 살아왔어. 그런데 승재를 만나고부터 가람 자신은 늘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건 가람 자신도 인정한다. 승재는 누가봐도 탐낼만한 인물이었다. 길가다가도 돌아볼 외모에 다정한 사람이었고(물론 가람에게 한정된) 배경으로 기업을 가지고 있고 지금은 그곳 대표이사였다. 뭐하나 빠지는게 있어야하는데 살다살다 저렇게 모자란게 없는 사람은 처음본다.
그런 남자가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알수는 없지만 무튼 승재는 가람에게 고백하고 지금까지 왔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려고 사귀다 부모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는 순간 가람의 자존심은 날로 갈기갈기 찢겼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헤어진 적은 없었다. 가람은 사귀는 육년동안 천번은 헤어지자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승재는 헤어지잘 때 절대 붙잡았다.
"헤어져!"
"가람아-."
"아, 못 견디겠어. 걔가 너 처다보는 눈빛도 아주 싫어 죽겠고, 그걸 참아야하는 내 신세도 싫어! 헤어져."
가람이 화를 버럭내며 소리쳤다.
"그래, 좋아. 헤어져." "…뭐?!" 가람은 승재가 한 말을 되물었다.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헤어지자고, 이가람."
승재가 생전 처음보는 얼굴로 말했다. 얘 누구니? 얘가 방금 뭐라고 지껄인거야?
"너 미쳤어?!" 가람은 승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람보다 이십센티미터는 더 큰 승재가 그런 가람의 손은 가볍게 쳐냈다. "미치긴. 이젠 나도 지겹다. 헤어져." 확실히 미쳤다. 아니 아까까지 손을 꼭 잡아주던 인간이 갑자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도 내가 진짜 마음 있어서 헤어지잔 것도 아니고 화나서 한말에, 지겹다, 헤어져?! 무슨 무서운 말을, 그것도 니가 하는거야?!
"안되! 안되! 니가 미쳐서!!"
"이가람!"
가람은 소리내 울었다. 설마 승재가 정말 돌아선 것일까? 이렇게 갑자기? 말도 안된다. 말이 되서도 안된다.
"안되! 말도 안되! 장난치지마!"
"이가람, 정신차려!"
가람의 귓가로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의 승재가 흐려졌다. 흐려지는 얼굴이 생전 처음보는, 아니, 딱 한번 자신이 아닌 다른사람에게 향했던 무시무시한 얼굴로 되어있었다. 그러지마, 승재야. 잘못했어!
"한승재!!"
가람은 소리를 있는 힘껏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응? 뭐지? 가람은 흐려진 초점을 바로잡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손을 들어 눈을 눌렀다. 눈물이 찍혀나왔다. 후…, 꿈인가. 눈 앞에는 익숙한 장면이 보였다. 잠들기 전까지 누웠던 침대, 이불, 자신의 발끝.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승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악몽꿨어?"
승재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쳤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승재는 놀라서 가람을 쳐다보았다. 근 삼년만에 보는 가람의 눈물.
"안아줘."
승재는 손을 들어 엄지로 가람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람은 아직도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안아줘, 승재야."
가람이 애원하듯 말하자 승재는 얼른 가람을 당겨 다리위에 앉혀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가람은 그런 승재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악몽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가람 자신은 아무리 헤어지자고 해도, 승재는 그런 소릴해선 안된다. 그래선 안된다. 가람은 승재가 붙잡을 것을 알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승재가 하는 말은 다르다. 승재가 그 말을 하면 자신은 승재를 붙잡을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단 말이다.
점점 가람의 흐느낌이 줄어들었다. 몸의 떨림도 멈췄다. 승재가 가람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어 가람의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쳤다.
"승재야." "응." "한승재." "그래." 가람은 확인을 하듯 승재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승재는 그런 가람의 쓸데없는 부름에도 전혀 의문없이 모두 대답을 해주었다. 세상에 이러 남자가 또 있을까. 가람은 자신이 두달치 돈을 쏟아부어 사준 명품 정장을 빼입고 모델처럼 서있는 때보다 지금 승재의 모습이 더욱 멋있어보였다. 한없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빛으로 자신을 처다보는 승재.
가람은 눈물을 손을 들어 닦아내고, 웃었다. 너무 황홀한 인물이야, 넌.
"이제 웃네." "응." 가람의 대답을 듣고서야 승재는 안심했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까 화는 다 풀렸어? 씻자마자 말도 없이 자고." 장난스레 뿌루퉁하게 말하는 승재. "화는 원래 일찍히부터 풀렸었거든."
그냥 말없이 자본거야. 니가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여 뿌듯하다고, 나 발아플까봐 걱정 한번 해줬다고 금새 화풀리면 좀 어이없잖아. 너무 쉬워보이잖아. 육년동안 뭐가 이렇게 질리지도 않니, 넌. 가람은 속으로 부가설명을 하곤 웃었다. 자세가 좀 불편해 꿈틀거리면서 자세를 바로 잡으려하자,
"야! 야, 움직이지마." 승재가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경직되어서 말했다. "응?" 가람은 계속 되물으며 무릎쪽으로 꿈틀꿈틀 가 편히 앉았다. "으윽, 내가 돌겠다." "어라? 이거, 뭔가. 헉." "니가 이렇게 만든거야. 원래 아까 니가 잠든 거보고 내가 억울해서! 남에 뒷목 쓰다듬을땐 언제고!" "자, 잠깐. 승재야!"
승재의 입술이 가람의 입술을 겹쳐왔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을 가람은 부추긴 결과 남은 밤을 홀딱 샜다.
"짐승."
가람은 침대에 누워 광나는 얼굴로 출근준비를 하는 승재를 노려보며 말했다. "땡스. 자, 우리 갈. 일어나서 서방님께 뽀뽀." 눈 앞에 볼을 들이대는 승재를 보다 가람은 옆에 놓인 베개를 들어 휘둘렀다.
"어이쿠."
얼른 몸을 뒤로 뺀 승재는 씩 웃으며 빠르게 다가가 가람의 팔을 붙잡고 가람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입 내밀어봐." "싫어." "니 입이랑 내 입 오미리도 안 떨어져있다. 입만 내밀면 되게 내가 다 차려놨잖아. 니가 먼저 해줘야 내가 니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약았어."
가람은 인상을 살짝 썼다 픽 한번 웃고는 승재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그러다 문득 씩 웃으며 승재의 머리와 등으로 손을 가져 대었다. 가람의 손을 놓으며 승재도 아직 옷도 입고있지 않는 가람의 등과 목으로 손을 옮겼다. 출근 준비를 다 끝낸터라 승재의 머리카락은 뒤로 다 넘겨져 왁스와 함께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늘 정갈해. 후후. 가람은 어느새 농밀한 키스로 바꾸었다. 점점 무게를 더하며 넘어오는 승재의 몸이 느껴졌다. 숨이 가빠오는게 느껴졌다. 흥분하는 승재가 느껴진다. 킥킥. 가람은 입을 떼며 웃었다.
"…으. 이가람, 너. 나 출근해야한다고!"
"누가 뭐래니? 근데 나 왜 이렇게 웃기나 몰라."
승재는 괴로운 얼굴로 침대로 기어올라왔다.
"뭐야, 회사가야지?" 가람은 설마하는 목소리로 올라오는 승재를 밀어내며 말했다.
"오전일정 취소하면 되." "그럼 잠을 자자, 아까까지 불태웠잖아! 설마 또 하잔거야?" "니가 다시 장작을 지펴줬잖아. 이 몸은 니가 피워줌 그냥 활활 타올라서 니가 아님 또 꺼지지도 않아."
이, 이게 아닌데.
가람은 계획이 틀어진 것에 경악하며 승재를 밀어냈다. 정장 다 구겨진다, 인간아. 원래는 흥분시킨 후 회사로 보내 괴로움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내, 내려가! 나 더하면 죽을 것 같아!" "나도 더참음 죽을 거 같다." "그 죽겠다는 소리가 아니잖아. 왜 그래? 우리 밤샜어, 밤 샜다고. 그것도 그냥 샜나? 뭐, 새벽 네시부터 일곱시까지 우리가 바둑뒀는 줄 알아?! 육체적 운동을 세시간 동안이나! 이 짐승같은 놈아!"
"그래, 그래. 이제부터 다시한다고, 그 새벽 네시부터 일곱시까지 꺼."
"승재야, 이건 아니라고 봐."
가람은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느끼며 말했다. 도망치자. 이 짐승같은 녀석. 옛날에는 삼일 밤낮을 뒹굴었던 적도 있다. 그 꼴 나선 안된다. 그 삼일 밤낮 후 가람은 또 삼일 밤낮을 몸살로 지새야했다. 물론 그 이후로 무리한 요구는 안할려고 하는 승재지만.
"저, 전화 넣어. 회사에 전화해야지." "할거야. 우선 한번 한 후에 할." "어허! 승재야, 니가 여자에 미쳐서 회사까지 내팽겨쳤단 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난 죽고싶을 거야. 더 이상 내게 어머님이 꼬투리 잡을 거리를 주지마."
가람의 짐짓 엄한 목소리에 승재는 쳇, 거리며 몸을 일으켜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여기서 통화할라고?" "그럼?" 니가 여기 있음 내가 옷 입고 도망을 가야하는데 못하잖아! "안되! 나가서해! 원래 실한 남편감은." "하체가 받쳐주는 나같." "인간아! 아니, 짐승아. 제발 헛소리말고 나가서 전화해. 회사일은 절대로 집으로 끌고오기 없다고 했다."
가람이 이리저리 별별 핑계를 들어 도망갈 궁리를 만들어냈다.
"그냥 전화인데 뭐가." "그러니까, 아예 집에 안 들여오기로 했는데 내가 내 눈앞에만 없음 된다고 하잖아, 전화라서. 얼른 나가서 통화하고 들어와요." 가람이 서둘러 일어나 승재의 등을 밀었고, 가람이 일어난다고 훤하게 들어난 몸을 승재는 멍하게 쳐다보다 얼른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힘과 동시에 벌떡! 가람은 약 이분만에 옷을 다 챙겨입었다.
오전에 강의없어서(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할일도 없었는데, 우선 집을 나서고 보자.
가람은 문을 살짝 열어 밖을 정찰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등을 보이며 승재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뒷태 좋고! 아니 아니지. 얼른 나가야지.
"아, 예. 그렇습니까? 이번 ☆☆시 공장건립 계약체결은 내일인 걸로 알고있는데요. 이실장, 다시 말해주십시요. 누가 무엇을 반대한다고요? 시장이 돌았답니까? 알겠습니다. 당장 회사로 가겠습니다."
…응?
가람은 귀에 들어오는 통화내용에 문을 열고 나가려던 몸을 멈췄다. 그리고 멍하게 승재를 쳐다보았다. 승재는 뒤를 돌아 가람을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놀라지도 않네?"
가람은 어정쩡한 몸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니가 뻔하지, 뭐. 들었지?" "뭘." "통화내용. 나 나가야 될 것같으니까 굳이 피곤한 몸 이끌고 나갈 생각말고 자. 오후쯤되서 전화해 깨워줄게."
왠지 아쉽네. 장난치는 거 재미있었는데.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재는 현관으로 향했고 가람도 뒤따랐다. 구두를 꺼내 그것을 신은 승재는 뒤돌아 가람을 보았다.
"신발까지 신으니 완벽하군. 이리와."
가람은 혼자 자화자찬하는(언제 말해줬는데 그게 가람 자신을 웃기기 위함이란다. 전혀 안 웃기는데.) 승재를 쳐다보다 부르자 냉큼 다가가 안았다.
"얼른 말해줘."
가람이 승재의 품에서 말했다. 승재는 풋, 웃으며 가람의 귀에다 속삭였다.
"안되지."
"뭐야?! 왜!"
가람이 펄쩍 뛰어 승재의 품에서 떨어져나가려고 했지만 승재는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입술만 내놓으랬더니, 혀도 내놨잖아."
"…혀고 자시고 그렇게 노골적이게 말하지 말랬지?"
"행동으로 하는 건 자기도 적극적이면서 빼긴."
가람을 한대 쥐어박고 싶지만 자신을 꽉 끌어안은 승재의 팔에 막혀 중얼중얼 욕만을 할수밖에 없었다.
"빨리 말해줘!"
가람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아, 빨리 결혼하고 싶다. 우리 딱 부부같은데 남들은 동거인으로 밖에 안보잖아."
승재가 뭔가 아쉽고 슬픈듯 읊조렸다. 미안함도 다분이 있겠지. 결혼의 장애물은 자신의 어머니이니까. "흥, 동거고 나발이고. 계속 말 안해주고 튕기면 홀랑 도망갈거야, 나." 가람이 삐진 듯 말을하자 승재가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그런 말 하지마. 내가 도망간다는 말은 장난으로라도 하지말랬잖아." 승재가 한껒 낮은 목소리를 더 낮춰 말했다. 우울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가람은 살짝 미안해졌다.
"그래, 그래. 근데 출근 안해?"
"해야지. 가람아-."
승재가 갑자기 가람을 그윽하게 불렀다. 귀에 소름이 도도 돋는 느낌.
"사랑해."
이 울림을 좋아한다. 이 말을 할 때 승재의 목소리, 그 울림, 그 느낌 모두. 드디어 말해주는 구나. 나쁜녀석. 내가 이 말에 늘 매달리는 거 알면서 일부러 질질 끄는 거 보면 너도 착한 놈은 아니야.
"응, 나도. 한승재 미치게 사랑해."
서로 몸을 떨어뜨려 얼굴을 쳐다봤다. 어떻게 봐도봐도 이렇게 질리는 거 없이, 적응되는 것 없이 잘생긴 사람이 다 있을까. 살짝 입술만 촉- 닿았다가 떨어졌다. 둘은 이제 완전히 떨어져 승재는 현관문을 열었다.
"나 갔다 올게." 승재는 기분이 좋은지 계속 킥킥대며 웃었다. "응, 근데 언제와?" "오늘? 모임갔다 오면 많이 늦을거야. 그래도 자정 전에는 들어올거야." 모임? 아, 그러고 보니 어제 그 할망구가 그렇게 지껄였지. 가람을 확 얼굴이 굳는게 느껴졌다. 강연흰가 뭔가랑 파트너로 가는 거라고 했던가. 참, 이가람 신세도 구질구질하네. 꼭 숨겨진 첩같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승재 옆자리 차지한 애들은 다른 여자들이고, 자신은 이렇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배웅이나 하는.
"그럼, 나도 늦어도 되겠다. 오늘 안 그래도 애들끼리 모인다는 소리있던데, 나 빠질려고 그랬는데 가야겠다." 가람은 문득 친구들의 초대가 생각나 말했다. "그래, 잘 놀다와-."
승재는 현관문을 닫으며 말했다. 얼굴 굳은 거 뻔히 보고도 아무말도 안한다 이거지? 나쁜자식. 아, 진짜 헤어질까보다.
……아니, 이젠 이런 얘긴 농담으로 하지 말아야지. 으으, 그 꿈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 그 자체일뿐이다. 가람은 침실로 돌아가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이고 이 힘없는 하체여. 아니, 온몸 다 인가? 제발 악몽같은 거 없이 잠만 푹- 잘 수 있기를.
"으음." 가람은 귀를 울리는 벨소리에 몸을 뒤틀었다. 누구야, 대체. 끊어졌다 싶으면 다시 걸려오고, 다시 걸려오길 한참.
"아, 짜증나게." 가람은 수십번이나 벨소리의 반복을 들은 끝에 일어나 휴대폰을 들어 봤다.
발신자 - 서방님
"얘가 왜 벌써 전화를 한데?"
가람은 자신이 잠든지 거의 삼십분밖에 안 지난것 같은데 전화를 거는 승재를 욕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벌써 전화하는거야?" 여전히 잠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리니.
[뭐가 벌써야. 너 오늘 2시에 상담있다며. 지금 벌써 한시 넘었거든.] 얘가 뭐라는거야. 가람은 지금 시간이 겨우 아홉시나 됐을거라 생각했다. 장난 그만 좀 쳐라. 내가 잠에 예민해. "헛소리 하지말고, 끊어. 잘거야." [시계나 보고말해.]
가람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려 침대 옆 탁상에 놓인 시계를 봤다.
01:12
"고장났나?" […시계보고도 시계마저 의심하니 내가 할말이없다, 이 잠꾸러기야.] 가람은 기함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나 분명 삼십분만 잤는데!"
[됐다. 나 회의 들어가야되서 이제 끊어야 될 것 같다. 잘 놀다와. 나중에 봐.]
서둘러 끊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샤워하러 달려갔다. 학교까지 이십분! 씻고 옷입고 화장하고! 그걸 이십분만에 어떻게 한다니.
"늦었군요, 이가람학생."
"헉, 헉. 예. 죄송합니다. 뛰어오는데도, 헉, 늦었네요."
가람은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못 이었다. 숨을 고르자. 후아후아. 그래도 두시 오분밖에 안됐다. 기적적인 일이지.
"우선 앉으세요." 최교수가 가람에게 자신의 책상 마주보는 자리에 있는 의자를 권했다. 가람은 숨을 고르며 그 의자에 가 앉았다. 대충 가람이 평정이 된다 싶자 최교수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자퇴서를 제출한 겁니까?"
"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음이 먼저 나갔다. 왠 자퇴서?
"왜 자퇴서를 냈는냔 말입니다."
누가? 내가? 가람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최교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날 부른 이유가 그건가? 난 자퇴서 안 냈는데? "안 냈는데요?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이가람 학생은 자퇴서를 제출했고, 지금 그것이 수리되어 오늘부터 이 학교 학생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뭐라는 거야? 가람은 말도 안되는 소릴하는 최교수를 봤다. 정신 나갔나? 누구랑 헷갈렸나? 아니, 내가 다니는 과에 이가람은 나 하나뿐이다. 다른 과랑 헷갈렸나?
"예? 아니, 저 안 냈다니까요? 호텔경영, 이가람. 맞습니까?"
가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달라는 듯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확인을 다섯번이나 했으니까요. 조금만 있으면 졸업이면서 그만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과정을 마친 다음 취업을 하든 뭘 하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테를 두른 안경을 바로 쓰며 최교수가 말했다. 청록색보더 어둡고 재질이 특이한 양복을 입은 최교수는 농담 할줄모르고 뭘 봐준다는 거나 하는 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아주 깐깐하고 재미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생애 처음 농담이라도 던지는 것일까. 그런데 이건 질이 너무 나쁘고 씨알도 안 먹히는 거짓말 같은데.
"교수님, 뭔가 잘못알고 계신것 같습니다. 저 낸적 없습니다. 교수님 말대로 조금있으면 졸업인데 제가 왜 몇개월 앞두고 자퇴를 하겠습니까. 그것도 전 지금 취직이고 뭐고 지금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데요." 가람은 침착하게 최교수를 설득했다. 니가 틀렸다.
"아니, 확인해보세요, 가람학생.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지만 가람학생의 자퇴서는 이미 수리되어 더이상 학생명단에 없습니다. 여기 교학부 전화번호 입니다."
최교수는 조그마한 종이에 숫자를 휘갈겨 썼다. 그리고 그것을 가람에게 전해주었다. 가람은 얼떨결에 그것을 손에 쥐곤 최교수를 노려봤다. 그러다 헛웃음 한번 보이곤, 교수고 뭐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그의 방을 나왔다. 왠 잡소리.
하지만, 그래도. 그냥 마음 편해볼 작정으로. 가람은 손에 들린 곳으로 전화를 했다. 두번의 신호음 후, 달칵거리며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저, 이가람학생 자퇴수리 되었나 확인하려구요." 가람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가람 학생 말씀이십니까? 호텔경영, 이가람씨. 예, 절차 모두 마치셨습니다."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가람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뭘 마쳤다고? "…네?" "자퇴절차 모두 마치셨습니." 가람은 그 여성의 목소리가 끝나기 전에 휴대폰의 폴더를 닫았다. 무슨 미친 개소리를 들었는가 싶다.
"하, 하…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가람은 어이없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뭐야, 누가 자퇴를 했다고? 하, 참나. "이가람!!" 가람은 뒤에서 누군가 불러도 뒤돌아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거 참 어이가 없으려니. "야, 이가람!" 자신의 바로 옆까지 달려와 가람을 붙잡은 사람은 가람의 친구 민정이었다. 대학교 때부터 죽이 맞아 여기까지 계속 단짝 친구로 지내는.
"너, 자퇴했다며?" 잠시 숨을 고르던 민정은 가람에게 또 한번 쐐기를 박아주었다.
"말하더라, 소문 쫙 났어! 너 미쳤어?! 그 성적으로 유학도 안간다고 하더니 이젠 자퇴냐? 그것도 얘기도 없이?" 가람은 자신의 팔을 흔들며 말하는 민정의 말을 듣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도 오늘 알았어." "응?" "나도 내가 자퇴했단거 오늘, 방금 알았어." "뭐라는 거야?"
가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진저리 치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깐, 나 전화 좀 받자." 가람은 폴더를 열어 귀에 갖다대었다.
[이가람씨?] 수화기를 통해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이가람씨 자퇴 확인하셨습니까?] 가람은 눈에 불똥 튀기는 걸 느끼며 고함쳤다. "누구야!" [이가람씨 좀 뵈었으면 합니다만.] "…누군데, 학교 관련 사람이야? 교수? 학생?" 이젠 자퇴되었겠다 가람은 막말을 하며 물었다. 니가 교수라고 해도 난 말 놓을거야.
[아닙니다. 단지 얼마정도의 설명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 "어디서 볼까?" 가람은 끝까지 반말을 했지만 상대방을 끝까지 존댓말을 썼다. [학교 앞 'tranquil'이란 카페 아시죠?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와주십시오.]
가람은 폴더를 닫으며 걸음을 옮겼다.
"뭐야, 너 어디가?" 민정이 그 자리에 서서 물었다. "넌 강의실에나 들어가. 시간 다 됐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민정이 화를 냈다. 가람은 자신도 모르는 이 상황에 대해 민정에게 뭔가를 말해주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그냥 뒤돌아서 걸어갔다. 뒤에서 몇번 가람의 이름을 부르는 게 느껴졌지만 얼마안있어 '나 들어간다! 나중에 연락해!'라는 고함이 이어졌다.
가람은 서둘러 건물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 그 카페로 향했다. 카페는 크지만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가람이 들어서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가람이요."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람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종업원은 얼마 안 있어 한 남자 앞에 멈춰섰다. 가람은 그 남자의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종업원이 깔끔한 태도로 물어왔다. 눈 앞의 남자는 이미 혼자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뭔가 딱히 먹고 싶은 건 아닌데, 안 시키기도 그렇고. "얼음 넣어서, 레모에이드." 메뉴판도 보지않고 가람은 대충 말했다. 종업원은 알았다고 한 후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갔다.
"누구십니까?" 눈 앞에 자신보다 대여섯살은 더 많아보이는 사람이 보이니 반말대신 존댓말이 알아서 튀어나갔다. 그 사람은 주머니를 뒤져 명함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얹어 가람에게 밀었다. 가람은 그것을 집어 들고 봤다.
□□기업 회장 비서실장 이규태.
가람은 눈에 익은 회사이름에 규태를 쳐다보았다.
"사모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아, 사모님이란 한승재의 어머니를 말하는 겁니다." 깍듯한 태도는 좋았지만 무언가 기분나쁜 느낌을 풀풀 풍겼다. 그건 그렇고 그 여우할망구가 뭘 지시해? "앞뒤 자르지 마시고 제대로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가람은 짜증난다는 어투로 말을하며 명함을 내려놓았다.
"자퇴, 사모님께서 처리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뭐?" 가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것은 그동안의 경고를 무시해온 것에 대한 또 다른 경고라고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저 남자가 하는 말이, 오늘 내 자퇴소동이 그 여우할망구가 펼친 일이란 소리야? 경고? 미친거아니야? "진짜 미쳤나. 그렇다고 학교를 잘라?" 가람의 말에 규태는 비소를 날렸다. 눈은 가만히 있는데 왼쪽 입술 끝만 살짝 올라갔다 떨어지는.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규태는 말을 한 후 바로 일어나 걸어나갔다. "이봐! 그 할망구한테 전해, 절대, 절대, 절대! 안 헤어진다고!!" 가람은 악에차서 조용한 카페가 울리도록 소리쳤다. 규태는 싸늘한 눈을 한번 가람에게 시선을 준 후 카운터에 가 계산을 하고 나갔다. 아직 레몬에이드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얘기가 끝났다. 괜히 시켰다. 가람은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곁으로 종업원이 다가왔다.
"손님, 실내에선 정숙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레몬에이드 나왔습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하곤 테이블로 잔을 옮기는 종업원을 쳐다보다 가람은 그를 지나쳐 카운터로 갔다. 계산을 끝내고 뒤돌아 보니 어이없다는 얼굴로 아까 그 테이블에서 자신을 처다보는 종업원이 보였다.
지금 승재가 필요하다. 가람은 카페를 나오며 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승재는 받지 않았다.
"받아, 제발 받아."
가람은 무서워지는 것을 느끼며 빨리 승재가 전화를 받고 자신에게 오길 바랬다. 얼른 자신을 안고 토닥이고, 달래줘서, 그 듬직한 어깨를 내줘서 안심하게 해주길 바랬다. 가람은 집으로 향하는 내내 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23번의 전화 중 한번도 승재는 받지 않았다.
가람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불안해졌다. 왜 전화를 안 받지? 이런적이 없었는데?
육년간의 연애 중 이렇게 통화가 안되는 승재는 처음이었다. 지금은 네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쓰러지 듯 들어온 가람은 소파로 미끄러지듯 걸어가 푹 고꾸라져 기대앉았다.
회의가 아직 안 끝난건가? 회의를 해도 승재는 휴대폰을 들고간다. 전화를 못 받는다고, 다시 연락(문자정도)이 온단말이다. 아, 혹시 내가 계속 전화를 걸어서 틈이 없었던 걸까? 가람은 휴대폰을 쥔 손을 늘어트리곤 천장을 처다보았다. 물결무늬의 자잘한 장식이 보였다. 저거나 세고 있을까?
가람은 천개쯤 세아렸을 때에도 진동이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갑자기 수신이 안되는 건가? 가람은 옆에 놓인 집전화를 들어 자신의 휴대폰으로 통화를 걸었다. 바로 ♩♪♬~ 거리는 소리와 함께 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정말로 슬슬 걱정되기 시작됐다. 수신도 잘되는데, 혹시 보냈는데 중간에 잘못되어서 문자가 안 온걸까?
가람은 다시 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번이나 걸고 다시 십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휴대폰은 조용했다. 무슨일이 났는걸까? 자신이 걱정할 것을 알기에 승재는 절대 이렇게 연락을 안해줄 인물이 아니었다. 정말 연락을 못할 사정이 아닌이상 승재는 가람에게 연락을 했을것이다(그리고 정말 연락을 못할 사정은 없다).
가람은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승재의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인 세훈에게 통화를 걸었다. 두어번의 신호음 후,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승재, 연락해봤어?" 가람은 바로 용건을 물었다.
"응? 승재?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삼십분 전까지 승재랑 같이 있었는데?" "뭐? 괜찮아? 승재 많이 바쁜거 아니야? 아니, 무슨 일 없지?" "무슨 소리야. 몇분 안 있긴 했지만 인상 살벌하게 해서 사지 멀쩡하게 잘 있더구만. 바쁘지도 않고. 일은 내가 갔을 때 끝나고 있는 참이었어."
…그럴리가 없는데. 그럴리가.
"내가 전화를 아무리해도 안 받아. 왜 그러지?" "응? 전화를 해? 승재 휴대폰 박살났어."
"뭐?" "시끄럽다고 박살내더라." 시, 끄럽다고? "언제? 언제 부순거야?" "언제긴, 한 사, 오십분 전부터 진동이 줄기차게 오길래 열받는지 뭔지 살벌한 얼굴로 집어던지던데?"
사, 오십분이라니. 그건 나잖아.
"아니지. 니가 뭔가 오해를 해서 그래. 승재 무사하다니 됐어. 연락이 안되서 전화한거야. 그럼 끊을게." 가람은 세훈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얼른 휴대폰 폴더를 접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어. 내가 전화건 걸로 시끄럽다 그럴린 없고, 대체 왜 그러지? 무사하다니 다행이지만, 진짜 무슨 일있나? 자정 전엔 들어온다고 그랬지? 그때까지 기다려서 물어보는 수밖에.
가람은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정리를 해놓질 않아서, 어제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그 특유의 냄새와 열기, 그리고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침대.
밖에 나갔다오니 방 냄새가 더 잘 맡아졌다. 가람은 겉옷을 벗어 방 중간에 위치한 테이블에 빽과 함께 올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이불과 시트를 들어내 세탁실로 가 둔 다음, 다른 이불과 시트를 꺼내 가져와 침대에 깔았다. 아, 이거 그거다. 가람은 흰 이불 위에 낙서가 되어있는 것을 한참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승재의 말이 생각났다. 거의 이불과 시트는 매일 가는데, 그건 승재의 주문때문이었다.
'일주일은 일곱개니까 이불도 요일별로 일곱개 사자.'
지극히 부르주아적인 발언이라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가람이 이불을 일곱개를 산다고 가난에 허덕일만큼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돈낭비는 한 적이없기에 든 생각이었다. 키는 남산만하면서 이상하게 귀엽게 군단 말이야. 가람은 픽, 웃으며 청소를 시작했다. 어차피 침대보도 다 간거, 청소도 하자. 어제 안했으니, 오늘은 해줘야 되겠지? 가람은 청소가 끝나면 빨래, 빨래가 끝나면 밑반찬 만들기 등, 시간을 때우며 승재를 기다렸다.
자정 전에 들어온다던 승재는 아침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가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현관문만 죽어라고 처다보았다. 동거 생활 삼년동안 승재는 외박의 외자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절대 자정을 넘겨서 들어온 적도 없었고 열시가 넘어가면 꼭 전화를 해주었다. 출장을 가도 길어야 이틀이었다. 삼일, 사일일정이라도 얼른 마쳤다. 국외 출장은 거의 가지 않았고 반드시 가야한다면 가람도 데려갔었다. 이런 일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어째 어제오늘 승재가 새로운 모습을 너무 보여주는 걸? 하, 나참. 좋은 짓 처음 다 놔두고 왜 나쁜 짓 처음을 행하는거야?!"
가람은 화가나서 소리쳤다. 모임가서 연희란 기집애한테 붙잡혔나? 아니, 그럴린 없다. 걘 라이벌이라고 하기도 우스운 존재다.
승재는 정말 가람만 사랑했다. 그건 가람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가람만 알고 있으랴, 그 여우할망구도 알고있을만큼 승재는 오로지 가람이었다. 만약 자신의 연적이 나타난다면 그건 자신의 카피정도?
오기만 해봐라, 내 당장 헤어지자고 고래고래 소리칠거야! 무슨일이 있었어도 연락은 했어야지! 몸 멀쩡하면 연락하면 되잖아?!(그만큼 가람은 자신이 최우선이란 걸 알고있었다. 승재는 눈 앞에 사람이 죽어간다고 해도 가람에게 연락을 하고 그 사람을 보살필정도로 가람이 최우선이었다-물론 아직까지 승재 눈 앞에 누군가 죽어간다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진 않았지만 예를 들자면-.)
그때였다. 가람이 씩씩대며 있는데, 삐빅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승재가 들어왔다.
지금 시각 여덟시 이십삼분.
연락없이 외박. 너 나한테 죽었어.
가람은 소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그의 앞에 갔다. 승재는 구두를 벗고 피곤한 얼굴로 가람을 비껴서 방으로 향했다. 가람은 어이가 없어서 승재를 쳐다봤다.
"야! 너 거기 안서?! 변명 안해?" 승재는 방문을 열다 멈칫, 했지만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람은 기가막혀 그를 따라 그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여행가방을 꺼내는 승재가 보였다.
"뭐하는 거야?" 가람이 이해가 가지 않아 화가 난것도 잊고 평소 목소리로 물었다. "야, 뭐하는 거냐고. 어디 출장가?" 가람이 모르니 여행갈린 없고 출장이라도 가는 가보다. 그런데 그럼 그런거지 왜 말도 없이 저러는 거야? "출장가냐고." 여전히 대답없는 승재로 인해 다시 슬슬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람이었다.
"아니, 집 나가는 건데."
"응?" 가람은 생각할 겨를 없이 되물었다. 얘가 뭐라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나 너랑 동거 안해. 집 나가려고."
"응?" 가람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그냥 되묻기만 할뿐이었다. 짐을 싼다고 가람과 얼굴한번 제대로 본적없던 승재가 고개를 들어 가람을 쳐다보았다.
가람은 뒷걸음질 쳤다. 저게 무슨 얼굴이야?
승재의 얼굴은 한없이 차가울뿐이었다. 단 한번도 자신에게 지었던 적이 없는 얼굴. 싸늘한 눈이 가람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은 어제 본 그 눈과 닮아있었다. 그 이규태라는 비서실장의 눈빛과-. 승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헤어져."
"뭐?"
"헤어지자고, 이가람."
비정한 목소리가 가람의 귀를 강타했다. 철렁, 어디서 뭔가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승재, 무슨 소리하는 거야. 갑자기."
"갑자기 아냐. 나 어제도 니가 헤어지자고 하는 소리 들었다. 밤새 생각하는데 화가나 미치겠는거야, 내가 무슨 니 봉도 아니고 니가 시도 때도 없이 헤어지자고 한 걸 생각하니 짜증나서 참을 수 있어야지."
안 들려. 안 들린다. 아니, 들려도 이해가 안 되. 가람은 허옇게 질려가는 얼굴을 느끼면서 손을 들었다.
"그…만. 장난은 그만하면 됐어. 하나도 안 재미있고, 안 웃겨. 그러니까 됐어."
가람은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은 안나는데 목이 메였다. 왜 이러지? 장난일텐데, 명치가 아파서 죽을것만 같았다. 누가 명치를 비틀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뭐가 그만이야. 헤어지자니까."
가람의 애원섞인 말에도 승재는 변함없이, 오히려 꼴보기 싫다는 얼굴로 말했다. "한승재, 헤어지자는 말 장난으로 하지마. 나도 이제 그 말 함부로 안 쓸테니까 너도 하." "나 딴 여자랑 잤다."
"뭐?" 가람은 쇠망치가 뒤통수를 후려친 듯한 느낌을 받으며 승재의 돌발선언을 되물었다.
"나 모임갔다가 연희랑 잤다. 아, 사실은 여자 한명 더 있었어. 셋이서 하니 죽여주더라."
"…뭐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그러니까 말하지마." 가람은 승재의 말이 실체가 되어 자신을 공격하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한마디 한마디 할때마다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칠리 없잖는가.
"지난 육년이면 충분하지 않나? 너도 나도 볼짱 다 봤잖아." "…갑자기 왜 그래." 정말 갑자기 왜 그러냔 말이야. 우리 어제 아침까지 사랑을 속삭이다 떨어졌다 지금 처음 만났어. 근데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러냐고.
"갑자기? 솔직히 난 니가 헤어지자고 할때마다 쌓아둔 거야." 한번도 받아 본 적없는 무서운 눈길로, 무서운 말투로, 무서운 말들을 내놓으면 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거지?
"니 몸 이제 슬슬 질려오고, 지지리 궁상인 니 서민적 생각도 마음에 안 들고. 근데 어제 오랜만에 다른 여자랑 자보니 몸이 확 달아오르더라. 너 만족시킨다고 밤낮봉사하는 짓거리도 이제 우습단 생각밖에 안 들고." 가람은 눈을 감았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까지 질린 얼굴.
"말하지마. 그런 말 하지마, 승재야. 그런 말 하지마." 가람은 애원했다. 도저히 참고 듣기가 힘들어서 였다. 헛구역질까지 날려고 한다. "또 어제 어머니가 와선 너랑 계속 만나면 회사고 뭐고 상거지로 쫓아내버리겠다는 거야. 그 때 정신이 확 들더라. 내가 너같은 볼일 다 본 애 하나때문에 그걸 놓칠 순 없잖아?"
누가, 누가 제발. 제발 저 남자 입 좀 막아주세요. 가람은 빌었다. 누구에겐인지 모르겠지만 승재가 제발 저런 말을 자신에게 하지 않길 바랬다.
"그러니까, 우리 헤어지자, 좀."
가람은 승재와 눈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승재를 봤다. 어제 이시간쯔음에 저 목소리로, 저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무슨 말을 들었더라?
'가람아-, 사랑해.'
귀에 담기고 마음에 담겨서 꺼내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수없이 해주었던 말. 한승재가 늘 이가람에게 해준 말. 가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승재는 날 사랑해. 가람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헤어지자고 해도 넌 나 붙잡을 수 있지만, 니가 나보고 헤어지자고 하면 난 너 못 붙는거 니가 더 잘 알잖아. 니가 헤어지자고하면 끝이야. 정말 끝을 선언한 거란 말이야. 되돌려. 용서해줄테니까, 지금 장난이라고 말하면 니 말 아무리 심했어도 그냥 넘어가 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헛소리라고 해줘." 마음을 다잡았지만 결국 끝에가서는 애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식. 가람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승재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바람빠지는 듯한 비웃음을 날렸다.
"누가 누굴 용서해. 헛소리 아니니까 헤어지자고. 진심이라고." "…뭐?"
"진심이라고. 그러니까 너나 이러지 말고 헤어지자, 우리." 가람은 이제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게 느껴졌다. "…제발 이러지마아……. 무섭잖아, 승재야." "왜 이러냐. 욕 한마디만 들어도 도끼로 맞은 것처럼 펄쩍 뛸만큼 자존심 높은 애가 왜 이렇게 짜증나게 굴어. 니가 천번쯤 뱉어냈던 말이잖아. 헤어져. 그거 하자고-." 가람의 눈앞이 흐려졌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자존심 없어.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마. 승재야, 제발 이러지마. 제발, 이러지마." 가람은 결국 펑펑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을 한번 깜박일때마다 두세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정말, 정말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아, 우리 깔끔하게 좀 헤어지자. 나 간다. 이 집에 있는 내 물건 니가 알아서해라. 팔든지 버리던지. 집은 너 줄게. 위자료라고 생각해." 승재는 가람을 지나쳐 방을 나갔다. 가람은 휙 뒤돌아 따라나가 그를 붙잡았다. "뭐야." 승재는 인상을 있는대로 구기고 더러운 벌레가 붙었다는 듯 가람의 손을 쳐냈다. "가지마. 그대로 가지마! 가면 우리 정말 헤어지는 거 잖아. 니말로 끝나는 거잖아!" 가람은 이제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승재는 고개를 숙이고 '이걸 쥐어 팰 수도없고'라고 중얼거렸다.
"떨어져. 이제 뭐하는 짓이야, 추하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마.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다 고칠게. 헤어지잔 얘기 입밖으로 절대 안 꺼내고, 니가 시키는 것도 다 할게.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하지마. 승재야, 너 나 사랑한다며……." 가람의 마지막 말에 승재는 얼굴을 더 일그러트렸다. "사랑? 아, 진짜 살다살다 별." 승재는 짜증난다는 듯 말하다 갑자기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가람은 이 다리를 놓으면 정말 끝이란 걸 알기에 승재의 낯선 모습을 참고 견디며 버텼다. 승재가 조금 있으면 후회한다고 말할거야. 그러니까 내가 조금만 붙잡으면.!
"아, 상철이냐? 나, 승재. 어, 오랜만이지? 야, 여기 △△아파트 123동 1204호거든? 애들 몇명 데려와. 기집애 하나가 사람 미치게한다. 여자한테 굶주린 애들로 데려와. 얘가 밤봉사기질이 뛰어나거든."
가람은 승재의 통화내용을 듣고 펄쩍 뛰며 그의 다리에서 떨어졌다. 지금 승재가 뭐라고 한거야?
여기 주소 말했어? 뭐가 뛰어나? 내가 밤, 설마. 가람은 이젠 확실히 온몸을 덜덜 떨며 승재를 쳐보았다. 승재는 가람이 붙잡았던 바지를 몇번 털더니, 전화를 마저했다. "아아-, 이 기집애 떨어져 나갔네? 됐어, 안 와도 되. 나중에 내가 밥 살테니까 날잡아라. 그래. 끊자."
가람은 멍하니 있었다. 누가, 좀 살려줘요.
목소리가 되지 못하고 굳은 몸속에서 돌고 돌아 가람의 마음 속으로 들려온 소리.
누가, 좀 살려주세요.
분명 누군가가 내 목을 짓누르던가 머리를 짜부러트리고 있는 걸거야. 아니면, 심장발작이 일어났다던가 갈비뼈가 모조리 다 부서졌다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플리가 없어. 이런 고통이 느껴질리 없어. 승재는 넋나간 가람을 슥 쳐다보곤 욕설을 내뱉으며 집을 나갔다.
쾅-!
현관문에서 나는 소리?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 가람은 구분할 수 없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희 엄마가 나 학교도 못나오게 했어." 가람은 이제 아무도 없는 현관에대고 말했다.
"그럼 니가 와서 나 끌어안으면서 미안하다고 해줘야지." 가람은 바닥에 엎드렸다. 속에서부터 뭉쳐있던 것이 소리가 되어 뛰쳐나왔다. 지나가던 사람이든 옆집으든 누가 듣든 상관없었다. 가람의 울부짖음은 몇분이고 몇시간이고 계속 되었다.
"죽기라도 바랬어?" 가람의 비꼬는 응답에도 민정은 안타깝게 볼뿐이었다. 가람은 여전히 그 집에 틀여박혀있었다. 집, 나가버리는게 좋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은 그냥 이렇게 있겠지. 죽는다고 하면 또 몰라. 승재에게 가 데려올 생각은 꿈에도 못한다.
하지만 떨쳐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승재가 헤어지자고 한 순간 얼마나 가시같고 독같은 말을 했어도 지난 육년간의 승재가 고작 삼십분도 안되는 순간에 잊혀질리가 없다.
민정은 피죽 한사발도 못얻어먹은 것 같은 몰골의 가람을 처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봐주고 있자니 가슴이 아픈가보다. 가람은 우스웠다. 너도 그런데 승재는 지금 내꼴을 보면 얼마나 난리를 치겠어. 나 이렇게 만든 놈 잡아죽여버린다고 발광할테지. 아, 그게 자기니까 아닐라나.
"나 피곤해. 잘거야." "너 그날부터 계속 자기만 했다며." "그래도 잠이 계속 오네. 원래 그렇잖아. 잠은 잘수록 더 오는거. 잘란다." 가람은 거실에 민정을 세워두고 침실로 향했다. 민정과 세훈은 자주자주 여기로 놀러왔기때문에 제집같이 굴었고 가람과 승재도 별 위화감없이 대했다. 그러니까 나 저 세워두고 잔거 한두번 아니니 알아서 있다 가겠지.
가람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때 이후로 청소를 안 해서인지 햇빛이 드는 창가에 먼지가 한없이 둥둥 떠다니는게 보였다. 흰이불위에 누워 유일하게 무늬가 새겨진 낙서에 시선을 옮겼다. "이불 무늬 참 볼품없다. 그냥 다 흰색이지 왜 정중앙에 유치하게 그림?" 어느새 따라온 민정이 방안 테이블에 책을 들고와 두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꼬마? 그림도 참 못그린 그림을 박아놨네." 민정이 조용한게 싫은건지 어쨌든 농담이라도 해 보여야겠는지 계속 그림에 대해 들먹거렸다. 자기 딴엔 이 암울한 사태에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게 하려한 거지만.
"승재가 그린거야."
"……." "승재가 그렸어. 난 여기에 눕고 자긴 저기에 눕는데."
우스꽝스런 꼬마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난 왼쪽, 승재는 오른쪽에 눕는다. "그 사이에 이런 애가 있는거야. 천둥이 치면 무섭다고 우리 사이에 파고 들어 우리 손을 꼭 붙잡고 잠이드는 우리 아이." 결혼도 결정 안된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애를 가지게 할 수 없기에 승재는 아무말도 안했지만 가끔씩 이렇게 우리가 얼른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얘길하곤했다. "그런데 내가 그때 둘째를 가지고 있는데 천둥소리에 놀라 진통이 시작되는 거지." 가람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그런 얘기 해줬어-.라고 전하기만 하는양.
"이 이불 위엔 네 가족이 누워있대. 나랑 자기랑, 우리 아들, 뱃 속에 우리 딸. 너무너무 행복한 가정이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아서 진통이 시작되도 내가 웃어버린다는 거야."
가람이 조심스레 그 그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승재와 나의 아들……. 민정은 차마 못보겠다는 고갤 돌려 흐느꼈다.
그런데 단 삼십분만에 그 사랑이 뒤집어져버렸어.
나는 이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때때로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잠을 자는 것 말고는 내가 할줄아는게 모조리 사라진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주일째 물한모금 안마시고 있었다. 이대로 죽어가는 것도 좋아. 승재야, 그럼 넌 다시한번 날 돌아볼테지. 내가 널 부를 수 있는 방법이란 이정도밖에 안되.
정말, 잠들고만 싶어. 이 잠에서 깨어나면 승재니가 눈앞에서 걱정했단 얼굴로 있는거야.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걱정했잖아, 잠꾸러기야.' 이렇게 말하며 내 코를 살짝 비틀었다 놔주지. 그럼 난 이렇게 말해. '악몽을 꿨어. 니가 나보고 헤어지자고 하는 꿈.' 내가 슬프고 무서워서 이런 말을하면 승재는 나를 꼭 안아줘. '내가 그럴리가 있어? 나 너없음 죽어. 근데 헤어지자니 그건 악몽이 아니라, 개꿈이야. 말이 안되도 너무 안되.' 승재의 이런 말에 나는 안심하고 미소를 짓지. 내가 미소를 지으면 승재도 그제야 미소를 지어. 그래, 잠들고 싶어. 잠들고 잠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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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승재가 갑자기 왜 헤어졌어요ㅠㅠㅠ? 번외 있나요?!?ㅠ
허...이거 번외 없나요? 대체 남자가 왜 갑자기 저러는지.. 무슨 사정이 있는건지.. 너무 궁금해요!
번외번외!!
번외꼭써주셔요!!!!! 궁금합니당!!!
번외 무지 기다릴꼐요~~
번외원츄강츄~~~>ㅡ<
번외 보고 싶어요 ! 꼭! ㅠㅠ 승재가 이렇게 변하는건.. 정말 무섭다ㅠ
남자의 번외편 기대합니다 꼭 궁금해요 ㅠㅠ
번외요^^!!ㅋㄷ
번외를 기다리고 있어용 ㅋㅋ
번외 기다립니다 ㅎㅎ !!!!
번외~!!! 원츄합니다!!!
억!!!갑자기...........흑흑 ㅜㅜ 정말루 딱히 다른 사정없이 단순히 여자가 질려버린 건가요?? ㅜ
헐 폭풍눈물 ㅠㅠ 번외기다릴게요
번외부탁해요!
헐... 승재가 왜그랬는지 이유는요??
그리고 가람이는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결론은 승재는 딴 여자랑 살고 가람인 혼자 슬픔에 잠겨 기다리다가 인생 망치는 건가요??
결말!! 그리고 승재번외!! 궁금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