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살펴본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들은 성경(구약)을 달달 외우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이 생활화 된 사람들이에요. 이마에 붙이고 옷술에 차고 다녔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니들은 성경을 전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영생을 얻기 위해, 자기 구원을 위해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는 성경을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 읽는 것과 예수(약속)로 읽는 것의 차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알아야 성경이 무엇인지를 아니까요. 성경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알고 그 성경이 가리키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안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상태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가 됩니다. 성경을 자기유익을 위해 오용한 것이지요.
오늘날 역시 진리의 영을 받은 성도가 말씀을 증거한다면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반복해서 우리의 오류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 하나님사랑이 아니라 자기사랑이며 하나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취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혹시 어찌할꼬 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 대부분이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영광보다 자기 영광 챙기기를 가르칩니다. 단어만 여호와에서 예수로 바뀌었어요. 이것이 종교의 한계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세계만방에, 모든 민족들 위에 우뚝 서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부심으로 살아왔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민족 메시아입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도 교단도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정치에 이용하고 십자가를 사회 운동에 이용합니다. 세상 이념에 물든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진보적 이라 하는 기독교 매체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 된 민족 노동자들의 세상, 공정한 분배를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하여튼 이 세상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나의 옳음, 내 나라, 내 교회, 내 신학을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지 진정 하나님을 위하고 그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 창세전 약속 안에 있는 자들뿐입니다.그들을 하나님의 피로사신 교회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종교생활을 오래하면 자기 최면에 걸리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혼자 하나님 일을 하시고 인간들은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자기들끼리 섬기는데, 이 둘이 충돌한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말씀은 이단이 침입한 갈라디아 교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오늘도 태극기 집회한다고, 통일운동 한다고, 노동운동한다고 예수 팔고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세상 끝 날까지 십자가만 영원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십자가는 이천년 전에 잠시 있었던 사건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바울이 지금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이라고 질책을 합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참 현실이 아니고 십자가만 현실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 현실을 모르면 결국 다른 것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영이 자기사람들에게는 침삼킬 틈 없이 십자가를 들이밀며 이것만이 진짜 현실이라고 하십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잉태된 자들이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존재는 그 십자가 안에 있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 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입니다. 주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다 이루신 분을 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만 받으십니다.(요17:1)
집을 팔아서 교회에 바쳐도 영광이 아니고, 수천억 예배당을 지어서 바쳐도 영광 아니에요 심지어 주를 위해 내 몸을 불살라도 영광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십자가는 헛것이에요. 이 세상에 종말이 와서도 안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불사르겠다고 하시면 안 돼잖아요. 그런 기특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잘 개혁하고 발전시켜야지 왜 세상의 종말을 얘기하냐고요
이 땅의 교회들이 바울처럼 정직하게 증언을 하지 않으니까 날로 커지는 거지 은혜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교회부터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세상에서 돌이 날아 와야 해요. 여러분도 해보셨겠지만 복음을 이야기하면 인간관계부터 단절이 됩니다. 심지어 세월이 지나면 복음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과도 멀어지는데 세상 사람들이야 당연한 거지요.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예수가 아닌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아들을 통한 영광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자기 목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결과도 하나님이 가지십니다. 그렇게 목적과 결과를 가지신 하나님이 그 영광을 선포하신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지어진 약속의 아들들에게만 계시하신 비밀입니다. 그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의 영광에 참여된 자들에게만 성경은 진리이며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진리로 주신 말씀일 뿐 아니라 이 세상과 역사가 오직 약속의 말씀에 붙들려 있고 이 약속대로 운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이 본문에 담으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늘 이야기하듯이 제가 서론을 이리도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성경을 오해하게 되고 그것 자체로 우리에게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는 말은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인간은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설 수조차 없습니다. 구약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과 언약을 하신 거에요. 교회에게 신구약을 주셨다고 하니까 우리가 마치 하나님 언약의 대상인줄 생각하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이 실행되어 그 결과물로 우리가 거두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대부분의 교회인들은 교회만 나오면 하나님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겁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보면 캄캄한 밤에 쪼개어진 제물 사이로 불이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지나가신 거예요. 고기를 쪼개는 것은 고대 언약 체결 때의 관습인데 쪼개진 제물 사이로 언약 당사자가 지나가는 의식입니다. 이 뜻은 언약을 깨는 자는 쪼개진 제물처럼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부족 간 중요한 약속을 체결할 때에 이렇게 제물을 쪼개어놓고 약속을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약속이에요.
그런데 아브람이 고기를 쪼개었을 때는 하나님만 그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에는 인간이 당사자로 협조하거나 지켜낼 능력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쪼개지심으로 지키시겠다는 것을 앞당겨 보여 주신 복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쪼개지시는 것으로 자신의 약속을 다 이루시겠다는 것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약속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은혜의 약속이지만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불려나온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지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 그러니까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원시 언약부터 시작해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에게 일방적인 언약을 하셨지만, 그 언약의 대상들은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이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모두가 일방적인 언약 체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의 죽음으로 맹세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홀로 다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이 된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고 즐거워 한 것입니다. 사백삼십년 후에 주신 율법은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율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모르는 자,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율법행위의 가능성에 매몰되어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이 자기들 앞에 나타났음에도 돌을 들어 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늘 어떻게 우리가 종이 되었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길가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신 겁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는 자, 자신들의 율법 행위 종교행위가 부정당한 것에 분노하는 자들이 당시의 유대인들뿐이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없느냐에 대한 분노, 왜 우리 존재를 무시하느냐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것이 오늘날의 교회인들입니다. 구원은 로마서의 증언대로 경건치 않은 자 아무 한 것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그동안 자신들의 종교 행위의 실적이 부정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이며 긍휼하심이라고 하면 그들은 왜 우리에게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셨느냐는 항의성 질문이 반드시 나오게 됩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주던지 십자가로 시작하던지 하지 왜 율법을 주시고선 자신들의 행함이 부정당하게 만드시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대로 십자가 은혜도 알고 거기에 더해 착하게 살기 각종 종교행사에 성화까지 이루었는데 왜 우리를 끝까지 죄인의 괴수로 취급하냔 항변입니다. 그들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나가는 말로 들은 것입니다.
자 그럼 모세에게 주신 율법, 즉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과 어떤 방법으로 체결되었는지 다시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4장)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것을 쌍방 언약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약속은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셨던 일방적인 은혜의 약속과는 다르게 쌍방 언약은 그 대상이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래서 희생제물의 피가 말씀에도 뿌려지고 백성들에게도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나중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돌판(말씀)을 던져서 깨버린 거에요. 그러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다 죽기 때문이죠.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진 겁니다. 이렇게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모세는 계명을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죽음을 자기가 짊어진 거에요. 나중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돌판이 깨어짐 같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과 사건들은 다 이것 하나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예요. 사도들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외엔 알지 않기로 한것입니다.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중보자 모세를 통한 율법언약 체결 장면을 보면 모세가 피의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이것이 쌍방 언약 체결입니다. 쌍방 언약은 어느 쪽이든지 어기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체결된 율법언약은 중보자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자 즉시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 등을 가지고 소에다가 장식을 했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섬기던 우상을 만든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스스로 언약을 깨뜨렸고 그들은 모두 심판에 처해졌습니다. 말씀이(언약)이 내려오는 순간 그들은 다 멸망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산에서 받은 계명대로 하자면 모든 이스라엘이 죽어야 하는데, 모세가 레위 자손들을 통해서 3천명을 죽이게 하고 자신은 다시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출애굽기 32장)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하신 기도를 앞당겨서 보여주신 것이지요.
율법언약대로 하자면 이스라엘은 살아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보다 먼저 하셨던 아브라함과의 은혜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은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홀로 지키시겠다는 그 은혜 언약 때문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씨와 땅, 약속의 씨로 말미암은 생육과 번성,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육과 번성인 그 창세전 언약을 하나님 홀로 지키고 완성하심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갈라이아서 3장)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이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처럼 율법 가운데 지킬 만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거짓교사들은 이방인이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에 정한대로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오려면 할례 정도는 행해야 한다고 했어요.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셨던 영원한 언약이라는 겁니다. 제사법은 없어졌지만 도덕법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오늘날 개혁신학과 같은 말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 착하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착하게 사는 행위를 구원받은 증거요 구원의 완성으로 가르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주체도 그 결과물도 내가 챙겨 가지겠다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언약의 기원은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 구속의 역사로 펼쳐진 겁니다. 창세전 언약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역사라는 무대 위에 차례대로 펼쳐지는 거예요. 일반역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것이 구속사인데 이 구속사를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주신 것이 성경 66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의 손길 그 은혜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넘겨주신 구약성경까지 읽어야 하는 거에요. 그렇게 통전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남이라고 합니다.
대구 성경모임에서는 수개월에 걸쳐서 언약의 역사 그러니까 아담언약,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새 언약 순으로 성경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들을 통해서 계시의 점진성을 알 수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계시가 십자가라는 더 분명하고 확실한 그림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는 오늘날 교회들에게 그 계시를 보이시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예수를 알고 십자가를 알면 되지 구약이 왜 필요한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더 풍성한 은혜와 더 크신 사랑을 알도록 하기 위해 구약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의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창세전 약속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펼쳐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습니다.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이든 새 언약이든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취된 언약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늘 확인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이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만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을 보여주셨다면 모세언약을 통해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이 홀로 다 받으심으로 그 죽음으로 그 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이 복음의 자유를 누릴수 있게 사도들의 서신으로 우리 교회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3:22)
복음의 자유를 넘보는 자들(갈라디아서 2장), 즉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들에 의해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음의 자유와 영광의 찬송에 대한 핵심 내용을 바울이 드디어 3장과 4장을 통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 1절에서는 드디어 이렇게 선언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3,4장을 거쳐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을 하면서 이미 구약에서부터 계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 은혜의 복음을 매우 논리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을 미리 제시하면서 왜 은혜의 복음인지를 설명합니다.
앞으로 남은 3장과 4장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반복적으로 나누게 될겁니다. 이것은 아무리 반복을 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는지를 계속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말슴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고 또 그 복음의 진리가 우리 삶으로 살아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말씀의 사건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로 모일때마다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실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서로 증거하고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다른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행위에는 관심이 없으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예수님의 하시는 모든 일만 선이란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믿음 안에서 우리의 행위는 전혀 카운트 하시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나면 우리에게 이 자유가 생깁니다. 그런다고 막 사는 게 아니에요. 막 산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고 의로운 일을 많이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약속의 성취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가족의 완성,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육과 번성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서부터 말씀하신 하나님의 선이며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영광을 받으신 후에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침 삼킬 틈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보살피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나의 있음보다 더 진짜 현실이 주가 계심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들이 우리 안에 소망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 별세의 소망이 다 채워질 때 우리는 마침내 거룩한 아들들로 완성될 것입니다(엡1:3-7)
그런데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인들 아닙니까? 그렇게 예수든 하나님이든 이용해서 세상에서 용사가 되고 네피림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세상과 함게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린 거에요 그러나 성도들에게 세상은 세상을 별세하도록 밀어내는 역할로 세상입니다.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수 없게 도와주는 역할로 세상이란 말이지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고백입니다.
성도에게는 십자가가 진짜 현실입니다. 그들은 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현실이 우리에게 체험될 때 우리는 찬송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찬송은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묵시와 닿아있는 찬송은 하늘이 열릴 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넘겨질 때 그렇게 묵시가 잠시 침노해 들어올 때,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말고 영원한 현실이 잠깐 보일때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휴식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이것 역시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학에서는 이 구절을 복음의 대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한 문장 안에 복음의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 말씀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가 하면 먼저 율법의 이해가 분명해야 복음이 복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안식교는 지금도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의 규례들도 지킵니다. 안식교 교인이었던 이상구 박사가 외견상으로 국민 건강을 걱정하는 듯이 하면서 먹는 것에 대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했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도 그처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부분이 참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술 담배 같은 거지요 물론 그런 것들이 건강에 해로운 것이지만 그것을 한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도 교인들은 그런 거하면 범죄시하잖아요. 아직도 율법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라와 하지마라의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이 본문은 ‘의’ ‘율법’ ‘마침’ ‘믿는 자’ 이 네 단어로만 이루어져 있음에도 성경 전체를 축약해놓은 듯이 보이는 문장입니다. ‘마침’이 텔로스(telos)인데 ‘멀리 있는 목표’라는 의미거든요.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리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에는 유대인들이 애써 자기를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무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의롭게 살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율법이 가리키는 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마침’을 조합해보면 멀리 있는 목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그런 행위의 의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천 4백 년 전에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 시키신 후에 그들이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한 주나 열흘이면 갈 수 있는 땅을 그렇게 40년간 광야에서 헤매도록 하시는 과정 중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것은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주신 것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까지도 율법 아래에 가두신 거에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율법의 용도는 그렇게 모든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는 방편으로 주신 게 아니란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 모세율법 이전에도 율법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신 법이 선악과 금지의 말씀인데, 아담은 그 한 가지도 못 지켰지요 아니 아담은 그 말씀을 지키면 안되요 왜냐하면 그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거룩’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범죄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선악과 범죄 이후엔 자기라는 의식이 생긴 거에요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계시고, 그렇게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바로 죽음입니다. 그 아담에게 예수의 생명이 주어짐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이 있기도 전의 창세전에 확정된 언약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의로 옷을 입게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 성경 말씀이고 아담이 쫒겨난 세상의 역사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출애굽기부터 시작하여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까지... 이 모두가 여호수아(예수)를 앞세워서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예수를 앞세워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전에 왜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범죄 후에 우리의 흉악하고 더럽고 일그러진 모습들을 보게 하시려고 거울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우리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께로 가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불가능함, 우리의 거짓과 추악함을 발견하고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보내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거라고 하는 거에요
율법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이 따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처벌은 모두가 죽음입니다. 율법을 범한 이스라엘이 하루에 삼천 명이 도륙당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하나님이 거룩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들은 율법이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기 때문에 의와 거룩이 없는 자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원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자신은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구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고 긍휼이라는 구절이 바로 율법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 7장에도 보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운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율법의 한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7장 말씀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에서의 탐심은 내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생명나무에 손을 뻗치는 탐심입니다. 율법은 그 탐심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율법이 오면 나는 구원받을 만한 자가 아닌 철저한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의 진의를 깨닫기 전에는 내가 살았더니 율법을 알고 나니까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죽은 시체임을 안 것입니다. 율법을 몰랐을 때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내게 있고, 좀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율법을 제대로 알고 나니 나는 죄로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저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면목없이 그 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까지 인도하는 것이 율법의 용도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함께 주신 것이 희생제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하루 종일 피를 만지는 힘들고 괴로운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잖아요. 날마다 죽임을 당하는 피의 제사, 피의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고 했지요 고대인들에게 피는 생명을 의미했습니다. 피를 흘린다는 말은 생명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생명이 희생되어 살아나는 것이 희생제사의 그림입니다. 율법으로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이 나 대신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렇게 구원이란 절대 부패하고 무능력한 죄인을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죄의 비참함, 형벌의 엄중함을 직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은혜 아닙니다.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율법적인 종교생활에 몸을 담아 본 후에라야 은혜의 복음이 제대로 보입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경험해보지 않고 머리로만 복음을 알면 더큰 문제가 생기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지고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구약 39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구약의 역사를 통해 왜 이스라엘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은 우리의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고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중보자는 모세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믿음이 오기까지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실 분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는 율법인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죄의 무서움, 율법을 범함에서 오는 형벌을 우리로 체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 아래있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율법 아래에 있는 저주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런 과정이 없이 지식으로만 알게 되는 복음은 자기 합리화와 나의 존재 가치 높이기에 이용될 뿐입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그럼 율법은 어떻게 예수님에 의해 율법의 마침이 되었을까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갈4:4-5)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율법에 담긴 온전한 거룩과 의가 아니면 절대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ᄒᆞ님처럼 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담긴 완전한 하나님의 거룩이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전한 의와 거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로마서에서도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실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 고 하니까 우리에겐 어던 능력도 방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이 해결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말입니다.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말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살아야 할 천국의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는 다 그렇게 살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이미 범죄함으로 인해서 그런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죄있는 육신으로 율법 아래 오셔서 우리를 품에 안고 언약의 죽음을 죽으신 겁니다. 그 십자가로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이 충족된 것입니다.
이 그림이 예수님 공생애 시작 때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께서 우리와 같이 율법 아래로 들어가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와 같이 죄인으로 세상에 합류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요.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세례인데, 예수님은 죄를 씻으실 필요가 없으셨잖아요. 그렇게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와 같은 세계로 연합되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우리 죄인과 일치시키시고 율법 아래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저주를 담당하신 겁니다.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 나셔서 율법이 되시고 율법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로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이제 율법이 더 이상 정죄의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기에서 ‘마음’은 ‘생명’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죽기까지 순종하심.. 반대는 믿지 않는 불순종)
이렇게 영단번에 십자가에서 드려진 속죄의 제사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키셨습니다. 말씀이시고 율법이신 그분이 스스로 율법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어떤 정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혜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율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인간들이 만들어 낸 어떤 종교에 신이 죽는 종교가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처음자리가 무엇인지를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혼자서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루신 것들을 우리에게 의의 선물로, 피로 빤 흰옷으로 입혀주심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망을 가졌사오니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 성도의 삶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님께서 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