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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리뷰
박찬욱의 신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이하 <싸이보그>)는 정신병원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정신병자들을 다룬 영화라 봐야 옳다. 동시에, 의사나 환자가족의 입장에서 정신병자들을 바라보는 영화가 아니라, 정신병자들의 망상이 곧 이야기의 주요 얼개인 영화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필시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뻐꾸기 둥지로 올라간 새>나 <케이펙스>등을 <싸이보그>와 비교하려는 시도는 <싸이보그>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를 두고 ‘산만하다’거나 ‘이해가 안 된다’며 불평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정신병자들의 망상이란 게 산만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런 면에서 “환상 장면을 볼 때, 관객들이 그것을 내러티브의 일부로 쳐주지 않는 것 같다. 이 영화는 환상장면을 통해 내러티브가 전개, 진행되고 있는데 괄호를 쳐버리니까 자꾸 나올수록 불필요하고 지루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박찬욱 감독의 분석은 일리가 있다. <싸이보그>는 분명 전통적인 서사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처음엔 주요 인물들의 환상세계를 다소 어지럽게 병렬해 놓다가, 어느 샌가 영군과 일순과의 로맨스로 흘러간다. 기승전결의 구도는 존재하지만, 그 흐름은 흐릿하다. 평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그간 봐왔던 영화들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예단하고 감상한다면 당혹감에 빠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데이빗 린치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플롯전개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장면 장면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는 <싸이보그>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감상법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싸이보그>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그럼으로써 완벽한 소통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중반에 등장하는 영군(임수정 분)과 일순(정지훈 분)의 대화 장면에서 분명하게 제시된다. 영군은 일순에게 끊임없이 뭐라 말을 하지만 관객은 그녀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 없다. 하도 울어대는 통에 의미파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순은 그녀의 입 모양만 보고 용케 알아듣는다. 이것은 이들의 사랑이 시작되는 장면이기도 한데, 상대방의 지극히 주관적인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사랑의 첫걸음이라는 메시지가 함축되어있다. 또한 영군과 일순의 키스신에서 관객은 영화의 주제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일순은 영군의 목이 180도 회전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이는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목이 돌아가고 발에선 불꽃이 뿜어 나오는, 다시 말해 싸이보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기다 틀니까지 하고 있는) 영군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순의 모습은 분명 작가의 사랑관(?)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커플뿐만이 아니다. 정신병동의 환자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의사들, 이들은 모두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환자들은 상대방이 싸이보그라면 싸이보그인 대로, 쥐라면 쥐라는 대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서로의 망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간 정신병원을 소재로 한 영화들에서 억압적인 위치에 놓여있던 의사들마저 <싸이보그>에서는 환자들의 환상에 자신의 상식을 맞추려 노력한다. 환자들끼리 탁구실력이나 동정심, 인사성 따위를 뺏고 빼앗겼다고 우기는 가운데서 중재자의 위치를 자처하기도 하며, 일순이 땅바닥에 쓰러져 울먹이는 소리를 그 옆에 마주보고 누워 (일순이 영군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입모양을 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려 애쓰기도 한다. 그래서 영군의 담당의사가 영군의 커밍아웃(!)을 듣고는 “영군이 싸이보그였구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보듬어줄 때 관객은 의사의 진심을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론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군이 그토록 틀니에 집착하고 할머니의 복수를 위해 하얀맨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것도 영화의 주제와 관련이 깊다. 영군으로선 엄마와 하얀맨들이 할머니가 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쥐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쥐처럼 행동한다. 이런 할머니의 ‘정체성’을 영군은 100% 인정한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객관화된 제3자의 시선은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자아규정이다. 완벽히 타인의 상식을 인정하고 그 세계에서 소통할 것. 다소 위험한 발상이지만 박찬욱은 그것이 핵심이라 전한다. 영군에겐 할머니한테 틀니를 전해주는 것이 지상과제임은 당연하다. 틀니를 전해줘야만 할머니의 빼앗긴 참자아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군의 헌신적인 노력은 끝내 좌절된다. 그것도 할머니에 의해서 말이다. 할머니가 허리에 고무줄(억압, 구속)을 동여맨 채 “틀니를 껴서 이가 빠졌다”(현실에의 굴복)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하며 틀니를 거부하자 영군은 절망에 빠진다.
<싸이보그>에선 망상증 환자들의 병의 원인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다만 영군은 집안내력으로, 일순은 친모의 부재로, 그리고 할머니는 못된 시어머니 때문에 정신병을 갖게 됐다는 짤막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 정신병이라는 비극의 원인이 모두 ‘부모’에게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문화적 의미로 확장되지는 않는다. 대신, 중요한 것은 그들의 병의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짐에 대해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원망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일찍이 박찬욱은 자신의 복수 3부작에서 주인공들이 죄다 자신들이 겪게 되는 고통의 원인을 남에게서만 찾으려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유일하게 남을 탓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린 아이. 어른들의 탐욕으로 자신은 물에 빠져 죽었음에도 “진작 수영을 배워둘 걸 그랬나 봐”(<복수는 나의 것>중에서)라며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천진난만함 속에서 박찬욱은 어른과 아이의 뚜렷한 차이점을 보노라고 고백했다. 결국 <싸이보그>의 주인공들이 비극의 원인제공자를 찾아내려 눈에 불을 켜기는커녕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행복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모습은 박찬욱의 아동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싸이보그>의 주인공들은 복수 3부작의 그들보다 ‘어른스럽다.’
<싸이보그>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테마는 바로 ‘구원’이다. 박찬욱은 자신의 모든 영화는 일관적으로 ‘죄의식과 구원’을 주제로 한다고 공언해왔다. 이는 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나 특이할 만 한 점은 이번엔 ‘구원’이란 것이 ‘기독교적 구원’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영군에게 구원은 ‘굶어죽지 않는 것’이다. 싸이보그든 아니든 간에 밥은 먹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싸이보그(라고 믿어도 괜찮)지만 밥은 먹어야지”다. 결국 영군의 구원은 이뤄진다. 바로 자신의 애인에 의해서 말이다. 영군이 처음으로 밥을 먹는 장면을 주목하자. 그녀는 처음엔 일순이 만들어준 ‘라이스 메가트론’의 성능을 의심한다. 라이스 메가트론이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번엔 괜찮을지라도 나중에라도 고장날까봐 걱정한다. 이런 그녀에게 건네는 일순의 메시지. “그럼 내가 고쳐주면 되지. 난 엔지니어잖아. 고장 났을 땐 연락해. 바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보증기간 평생이야.” 여기서 ‘보증기간 평생’은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말을 혼자 되뇌며, 영군은 드디어 밥을 씹어 삼키는 ‘모험’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기독교적 구원은 본질적으로 ‘죄(죽음)로부터의 해방’이다. 구원은 인간이 ‘평생’ 동안 짓는 죄(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단번’에 속죄되었음을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과 영혼의 사망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선물한다. 정리하자면, 일순이 건넨 ‘보증기간 평생’이란 사랑의 징표를 통해 영군이 ‘고장’의 공포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기독교적 구원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영군의 구원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복수를 통해 얻으려 했던 영혼의 구원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라스트 신. 벌판에 두 남녀가 벌거벗고 포개어 누워 있는 장면을 두고 박찬욱 자신은 정사장면이 아니고 ‘어른들이 보면 기겁할 소꿉장난’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 이 말을 신뢰하지 못하겠다. 박찬욱의 ‘유권해석’은 이렇다. 그 장면 직전까지 제시된 온갖 성적 상징(키스할 때 발에서 화염이 분사돼 나오는 장면, 와인병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장면 등) 가운데서 정작 둘은 “그게 뭔데요? 우리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이란다. 그러나 이보단 그 수많은 성적 암시들이 둘의 성행위 장면을 받쳐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이 아닐까? 무엇보다 엔딩크레딧이 시작됨에도 끝까지 빛을 잃지 않는 거대한 무지개를 떠올리자면 보다 확신이 선다. 이 커플의 합일행위가 충전완료(무지개)로 이어진다는 결말은 정말이지 아름답지 않은가.
박찬욱의 또 다른 거짓말(?). 영화는 시종 ‘영군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일까’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말부분에 가서는 비밀이 밝혀지리라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관객을 오도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이다. 너그러이 봐주면 조크 정도 되겠다. 존재의 목적이 고작 ‘세상의 끝장: 10억 볼트 필요’라니. 여기엔 별 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하나마나한 얘기다. 박찬욱 자신의 분석대로 ‘지극히 아이다운 분노’일 수도 있다. ‘세상의 끝장’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골몰히 생각하는 것은 농담을 정색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꼴이다. ‘존재의 목적’이란 거창한 수사는 결국, 모든 장면에 수수께끼가 있으리라 선입견을 갖고 영화를 볼 평론가들을 위해 세워놓은 ‘잘못된 표지판’ 같은 것이다.
<싸이보그>를 두고 하는 얘기의 주를 이루는 것은 ‘산만하다’ ‘지루하다’ ‘중심서사와 서브플롯간의 긴밀함이 없다’ 등인 듯하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형식에 구애됨 없이 만든 영화에 대한 틀에 박힌 분석은 무의미하다. 보다 개방된 시각으로 영화에 몸을 맡기기 바란다. 감독의 주문대로 ‘심각하지 않게’ 말이다. 정 분석의 메스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것 역시 흥미진진한 감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영화는 시종 모호한 이미지들과 혁신적인 스타일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아름다운 화면들에 눈을 고정시킬 것. 최소한 눈만큼은 즐거우리라 확신한다.
첫댓글 딴 얘기이긴 한데 제친구는 나중에 "싸보이지만 괜찮아"로 결론을 내리더군요..ㅋㅋㅋ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 사회 대중이 결코 쉽게 인정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박감독도 그러했을 것이구요. 하지만 올 해 참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요. 그것은 박감독이 이야기하는 테마의 중심 즉 '소통'의 필요성이 일관되게 나타났고, 이전과 다른 계층의 이야기,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 왔던 정신과 병력을 가진 이들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지요. 개인차에 따라 감독에 대한 영화평이 많이 갈리겠지만, 전 이번 영화를 보고 박감독에 대한 애정이 더 커졌습니다. 자신의 스타일, 그 속에서 꾸준히 우 사회에서 필요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진정성에 박수를 보내니까요.
아..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찬욱이 장르영화 감독임과 동시에 (국내에 몇 안 되는) 작가감독으로도 인정받는 것이겠지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전 박찬욱 감독은 조롱해도 괜찮아 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