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빨갱이'
남한에서의 주홍글씨는 '빨갱이'아라는 낙인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다수가 이승만 세력에 의해 제거되고 제주 4.3 양민학살도 이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 때문이었다.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이 낙인은 박정희 군사 정권하에서 극에 달했고 그의 경호처장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정권까지 대물림하였다.
세상에 처음 밝히지만 나에게도 이 주홍글씨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새겨져 있었다.
빨갱이 주홍글씨가 내게 달린 것을 알게 된 것은 1977년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그 해 한전 공개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나서였다.
합격한 지 얼마되지 않아 목포경찰서 산정 파출소 경찰 분으로부터 한 번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 한전에서 신원조회가 나왔는데, 내가 4살 때 작고하신. 할아버지 전력 때문에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유를 설명했다.
6.25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들이 도초도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도초지소 등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각 동네에서 인민군들을 도울 이장들을 뽑았다.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은 사람 위주로 뽑았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하필 내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유엔군이 북상하자 도초도에 주둔하던 인민군들은 모두 철수하고, 인민군들에 의해 죽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부역자들을 색출해 내어 손을 등 뒤로 한 채 철사줄로 묶어 바다에 수장 시킬 예정이었다.
마침 다음날 대한민국 육군 소대장이 이끄는 부대가 도초도에 입성했고 이러한 부역자 처벌 계획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이 소대장은 도초도 한발리 출신이었고 철사줄로 묶여 창고에 갇힌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켜 주었다.
그 소대장은 나중에 서울 회복 후 최초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은 군인으로 유명해진다.
우리 할아버지도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셨지만 부역자로 빨간줄이 올라가 손주인 내가 공직에 진출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름하여 연좌제(緣坐制).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빨갱이란 주홍글씨가 내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마침 내 신원조회를 담당하던 그 경찰 분께서 또 도초도 한발리 출신이었는데, 모든 것이 잘 풀려서 최종 합격자명단에 들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힌전에 입사하고도 일이 잠못되면 주홍글씨 때문이 아닌가 긴장하곤 했다.
아부지 동기분들 내외가 마지막으로 살아생전에 함께 모여 할아버지와 할매 산소에 다녀오신 적이 있다.
아마도 지금부터 20년 전 일 같다. 할아버지 산소가 가까워 오자 외남리 고모부님께서 바로 이 주홍글씨 이야기를 가족으로서는 처음 알려주셨다.
모른척 듣기만 했고 나는 이 이야기를 가족이든 누구든 간에 다시는 입 밖에 내지않았다.
그리고 내게 새겨진 주홍글씨도 이제 지우련다.
유년시절에 명당리 해안가는 아이들 놀이터였다.
그곳에는 철사줄로 묶여 수장 돼 떠밀려 온 이름 모를 분들이 함께 묻힌 곳이 군데군데 있고, 돌무덤 속에는 뼈만 남은 사체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6.25 전쟁은 인민군과 국군의 부역자 간에 서로의 목숨을 빼앗아 간 전쟁이기도 했다.
남과 북, 심지어는 같은 마을에서도 원수 집안이 된 경우도 많았다.
서울에서도 한강 철교가 끊겨 미처 피난 가지못한 사람들이 부역자로 몰려 처형 당하거나 주홍글씨를 되물림 당했다.
우리나라 5대 수출국은 중국 미국 베트남 홍콩 일본이다.
공산국가인 중국 베트남 홍콩, 여기에 러시아를 빼버리면 우리는 절반의 수출 시장을 잃게 된다.
또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한 영원한 섬나라 신세를 면치못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로 쉽게 재단해 버리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언제쯤 우리는 김일성 부자를 화형시키던 군사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서로 존중하며 서로의 주홍글씨를 지워주는 것, 우리들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24. 6. 26(수) 추원영
https://youtu.be/2LWt00Z2Rv4?si=B7IiN1xtvMSsmY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