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정(僉正) 증(贈) 참판(參判) 강공(姜公) 수곤(秀崑) 행장
공의 휘는 수곤(秀崑)이요 자(字)는 여진(汝鎭)이다.
강씨(姜氏) 성은 그 선대가 진양인(晉陽人)이다. 옛날 수 양제(隋煬帝)가 동쪽으로 쳐들어와 고구려를 정벌할 때 고구려 도원수(高句麗都元帥) 이식(以式)이 수 나라 병사를 대파하여 명성이 삼국(三國)에 떨쳤는데, 이분이 진양 강씨(晉陽姜氏)의 시조이다.
그러나 세대가 멀어 보첩(譜牒)에는 대수(代數)가 나타나 있지 않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국자 박사(國子博士) 계용(啓庸)이 김방경(金方慶)을 도와 일본을 정벌하고 개선하여 돌아온 공으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더욱 성대해지면서 5세를 거치는 동안 벼슬한 자가 잇따랐다.
아조에 들어와서 회백(淮伯)은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지냈고 회중(淮仲)은 도총제(都摠制)를 지냈는데, 형제가 모두 국초(國初)에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 회중의 증손인 영선군 지(永善君漬)는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녹훈되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판서가 세침(世琛)을 낳았는데 군기 첨정(軍器僉正)을 지냈고, 첨정이 질(礩)를 낳았는데 사마시에 합격하여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었다. 집의가 응운(應運)을 낳았는데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考)이다.
당초 종실(宗室)인 문천정 수갑(文川正壽甲)에게 딸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반성(潘城) 박응순(朴應順)에게 시집가서 우리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낳았고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졌으며, 또 한 명은 이조 참의공(吏曹參議公)에게 시집가서 가정(명 세종의 연호) 을묘년(1555, 명종10) 7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난 지 7년 만에 아씨(阿氏)를 여의고 또 7년 후에는 고아가 되었다. 집이 본래 가난한 데다 조모 홍씨(洪氏)는 연세가 매우 많았으므로 부부인이 가련하게 여기고 데려다가 자식처럼 기르니 공도 어머니처럼 섬겼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장성하여 장가들 때까지 부부인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아침저녁으로 조모를 찾아가서 매우 성실하게 살펴드렸으며 춥고 더울 때나 바람 불고 비 올 때에도 거르는 때가 없었다.
하루는 부부인이 공에게 맛있는 고기 음식을 주었는데, 공이 받아서 싸가지고 말하기를,
“노인 계시니 혼자서 차마 먹을 수 없습니다.”
하니, 부부인이 그 효성에 감격하여 매일처럼 맛있는 음식을 주어 그의 뜻을 이루도록 하였다. 15세 무렵에 교관(敎官) 배모(裵某)에게 가서 글을 배웠는데, 제자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며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교관이 병을 자주 앓으므로 공이 동문(同門)인 참찬 유간(柳澗)과 함께 좌우에서 시중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약을 드릴 때는 반드시 맛을 보고 드렸으며 부축할 때에도 반드시 직접 하였다. 교관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기일(忌日)이 될 때마다 초상 때처럼 음식을 먹고 재계하며 거처하였는데 늙어서도 그렇게 하였다.
임오년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전임하여 한성 참군(漢城參軍)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상이 서행(西行)할 때 호종(扈從)하였는데, 도중에 적보(賊報)가 날이 갈수록 다급해지자 양궁(兩宮)이 길을 나누어 가게 되었다. 이때 금군(禁軍)은 황급한 상태였고 후비(后妃)의 가족이 서로 따라 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상이 공에게 명하여 영호(領護)하도록 하고 대소의 신료를 모두 따르게 하였으니, 이는 상이 평소에 외척 중에서 특별히 공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공조 좌랑에 옮겼고 이듬해 계사년에 행조(行朝)로부터 고창 현감(高敞縣監)을 제수 받았다. 당시 난리를 겪은 데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판이었는데, 공이 도착하여 최선을 다해 잘 다스려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니, 인근 지방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먹여주기를 바라는 자가 마치 시장에 가는 사람들과 같았으며 북쪽에서 찾아오는 친구나 친척들이 날마다 수십 수백 명이나 되었다. 공이 탄식하기를 “국가에 법이 있는 줄은 내가 본디 알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모두 곤궁하여 나를 찾아 왔는데, 나만 어찌 차마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지내겠는가.” 하고, 드디어 근검절약하여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주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구제해 주었다.
그런데 몇 년 뒤에 향선(餉船)이 침몰된 일에 연루되어 공이 파직되자, 백성들이 말하기를, “훌륭한 태수(太守)가 떠나니 우리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고, 안찰사에게 호소하고 천곡(千斛)으로 속(贖)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드디어 서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대접하고 울면서 전송하였다.
그 뒤에 또 상원(祥原)ㆍ안산(安山)ㆍ괴산(槐山) 세 고을을 역임하고 들어와 돈녕 첨정이 되어 광해(光海) 때에 10년 동안 옮기지 않았는데, 경신년에 병을 앓다가 5월 16일에 임종하니, 향년 66세였다. 9월에 광주(廣州) 구천리(龜川里) 인좌(寅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이는 선조(先兆)를 따른 것이었다. 이날 친구들이 모두 모여 마치 그들의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고,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친척들도 천 리 먼 길에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와 모두 목이 쉬도록 곡하였으며, 우거(虞車)가 국문(國門)을 나설 때에는 조문한 자가 5백여 명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슬퍼하라고 명하지 않아도 슬퍼한다.”는 것인가.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감모(感慕)하게 했단 말인가. 조정에서 공을 호성(扈聖)의 공로로 기록하여 처음에 승지에 증직하였다가 그후에 아들이 귀하게 됨으로 인하여 추은(推恩)하여 숭질(崇秩)을 더하고 아경(亞卿)에 오르게 하였다.
공은 자품이 온순하면서도 의지와 생각이 곧고 지조가 있었으며, 용모와 태도가 엄숙하고 행동이 침착하였다. 평소 쓸데없는 담소를 하지 않았으며 다급한 상황에서도 말이나 표정에 침착성을 잃지 않고 조용히 침묵하며 자신을 바르게 유지하였으므로 친한 벗도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감히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였다. 언제나 먼동이 틀 무렵이면 일어나서 종일토록 청아하게 앉아 주위가 더없이 조용하였으며 기상이 한가롭고 단아(端雅)하였다.
몸이 성시(城市)에 있어도 초연하여 처사(處士)나 유인(幽人) 같았고 높은 관직에 이름이 올라도 담박하기가 마치 한미(微寒)한 서생과 같았다. 천성적으로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으나 독실한 행동은 자기 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선조를 받드는 데는 정성을 다하여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따랐고 여러 백숙부(伯叔父)를 섬기는데 있어서도 극진히 공경하였으며 구씨(舅氏)에게도 역시 그러했다. 난리를 겪고 난 후에 계부(季父)가 호연(湖堧)에서 불우하게 지내고 종모(從母)가 파산(坡山)에게 유랑 생활을 하자 공이 애통하게 여기고서 집에 있을 때나 관직에 있을 때나 반드시 시간을 내어 찾아가 뵙고 술을 올려 장수를 빌었으며 친족을 모아 즐겁게 지냈는데, 이렇게 하기를 거른 해가 없었다.
종자(宗子)의 집이 가난하여 제수(祭需)를 풍성하게 차리지 못할 경우 공이 반드시 대신 그 일을 행할 수 있게 해 주면서도 신중을 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백씨(伯氏)에 대해서는 정성이 더욱 지극하여 재산을 분배할 적에도 많이 사양하고 조금만 가지면서 말하기를 “장자는 임무가 막중한데, 조상의 제사에 혹시 부족한 것이 없겠습니까.” 하였고, 얼마 후에 백씨가 죽었을 때에는 장례상 필요한 도구를 모두 공이 부담하였다.
사촌 아우 수대(秀岱)가 일찍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자 공이 집에서 양육하며 마치 동기간처럼 대하였다. 그 마음을 미루어서 촌수가 먼 일가까지도 널리 사랑하고 인정을 두루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처럼 곤궁한 자를 보살펴 주는 인자함과 어려움을 구해 주는 의로움을 모두 기록해야 할 것이나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반평생 관리로 지냈으나 전토를 늘리지 않아 집안 살림이 날이 갈수록 더욱 곤란해졌는데, 급료를 받아서 먹고 집을 빌려 휴식을 취하면서도 공은 태연하게 거처하여 남에게 구걸하는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의롭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세상을 뜨던 날 옷장에는 두 벌 옷이 없어 염할 때 일체를 빈객의 수의(襚衣)로 사용했으니, 청백한 지조와 굳은 절개가 이러하였다. 남을 대하고 외물을 접할 때에는 화락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엄격한 성품은 늙어서도 변함이 없어서 한 가지라도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상대하여 말하지도 않으니, 당사자는 마치 시장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부끄럽게 여겼다.
조심하고 근신하여 조정의 잘잘못과 당론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았으며, 항상 행동은 엄격하게 하고 말은 겸손하게 하라는 경계를 지켰다. 그러나 세도(世道)가 날로 잘못되자 국가를 염려하는 일념으로 한가롭게 거처할 때면 매번 크게 탄식을 하였고, 자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가르쳤다. 맏아들 동지공(同知公)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관직이 높아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낭서(郞署)에 자취를 감춘 채 10여 년을 지냈다.
요직에 있는 동서(同壻)가 좋은 벼슬로 꾀며 자기와 한편이 되어 주도록 요구하자 동지공이 화를 내고 절교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이 바야흐로 화복(禍福)의 권한을 쥐고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게 여겼으나 공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니, 식자(識者)가 이르기를 “사람은 훌륭한 부형(父兄)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다.” 하였다. 문호(門戶)가 중년에 쇠퇴해졌으니 노년에는 자손의 과명(科名)을 염두에 두어야 했을 텐데도, 혹 학문이 부족한데도 요행히 점유한 자가 있으면, 공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분수에 알맞게 얻은 것이 아니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철회하도록 명하였다. 질적인 것을 힘쓰고 화려함을 배척한 것이 대체로 모두 이런 식이었다.
공의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무오 당인(戊午黨人) 평사(評事) 이목(李穆)의 증손이며 병조 정랑 증 승지 이갱(李鏗)의 장녀로 공보다 18년 먼저 별세하였는데, 공의 벼슬에 따라 증직되었으며, 공과 같은 혈(穴)에 장사하였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휘 선여(善餘)는 바로 동지공으로 참의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벼슬이 동지돈녕부사 겸 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다. 차남 선경(善慶)은 목천 현감(木川縣監)이다. 장녀는 부사 최규(崔珪)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부호군 조성후(趙成後)에게 시집갔다. 공은 또 방실(傍室)의 딸 한 명을 두었는데 양식(楊湜)의 처가 되었다.
동지공(同知公)이 처음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감찰(監察) 초(礎)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원록(元祿)은 동몽교관(童蒙敎官)이고, 딸은 선산 부사(善山府使) 권공(權公) 휘 성원(聖源)에게 시집갔는데 그분은 나의 할아버지이다. 뒤에 완산 이씨(完山李氏) 좌랑(佐郞) 돈(惇)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원진(元禛)은 봉직랑(奉直郞)이요, 원지(元祉)는 학생(學生)이다. 현감은 모군(某郡) 이모(李某)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한성 판관인 원희(元禧)이다. 최규(崔珪)는 2남을 낳았는데, 석량(碩量)은 참봉(參奉)이고 의량(毅量)은 감찰(監察)이며, 4녀는 현감 이한구(李翰衢), 생원 김식(金栻), 학생 안굉(安鋐), 진사 유중은(柳重殷)에게 시집갔다. 조성후(趙成後)는 4남을 낳았는데 인(演)ㆍ양(湸)ㆍ호(灝)ㆍ완(浣)이다. 양식(楊湜)의 두 아들은 만기(萬紀)와 만령(萬齡)이다. 내외 증손 현손의 남녀가 모두 1백 20여 명인데, 나의 선자(先子)가 가장 알려졌으니 휘는 격(格)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집의와 지제교에 이르렀다.
아, 이제 공이 세상을 뜬 지 60년이 되었다. 훌륭한 덕(德)은 모두 묻혀 버리고 가승(家乘)도 상세하지 않으니 보잘것없는 내가 잔약한 후손으로 어디를 통하여 선세(先世)의 덕(德)을 만분의 일이나마 알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대대로 벼슬해온 가문에 전해 오는 말을 삼가 들어 보건대, 이따금 웃음을 띠고 공에 대하여 말하는 이가 있는데, 지금도 그의 기풍을 듣노라면 야비하고 인색한 자를 소멸시키고 쇠약하고 나태한 자를 격동시키기에 충분하니, 여기에서 또한 공의 방불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다. 온화한 정취로 보면 화락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던 것도 같고 신중하면서도 위엄있는 거동으로 보면 엄숙하고 장중한 선비였던 것도 같다.
아니 청고(淸苦)함으로 절개를 지켰으니 또한 장차 고사전(高士傳)에 전하기에 넉넉한 인물이 되지 않을까. 효도와 우애로 안을 다스리니 종족들이 법으로 삼았고 인애(仁愛)와 염치로 관직을 수행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의 덕을 노래하였다. 옛날에 태사공(太史公)이 유림(儒林)과 순리(循吏)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제각기 그들의 아름다운 점을 드러냈는데, 공은 한몸에 전부를 구비하였으니 이런 경우는 어떻게 칭송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내가 듣건대 공은 어렸을 때부터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늙을 때까지 제생(諸生)을 가르치면서 매번 외워서 전수하니 제생이 모두 우러러 경모하며 들었다 한다. 또 듣건대 공이 풍옥헌(風玉軒) 조공 수륜(趙公守倫)과 함께 막역한 친분을 맺어 밤낮으로 서로 따르며 책상을 마주하고 강론을 하였다고 하는데, 풍옥헌의 학문은 실로 우계(牛溪)로부터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스승과 제자 그리고 교우의 사이에 서로 도와서 학문과 덕을 닦은 요지로 필시 볼 만한 것이 더 있었을 텐데 지금 다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그 전해 오지 않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다행히 전하여 겨우 남아 있는 것마저 날이 갈수록 스러져가니 기술해 두지 않으면 늦게 태어난 후생(後生)들이 어디에서 상고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성렬(聲烈)을 드러내어 후세에 알리는 일은 대개 근고(近古) 이래로 계속해 왔던 일이니 그렇게 한다면 공의 덕과 행실이 어찌 인멸되고 말겠는가.
상하(尙夏)가 삼가 집을 방문하여 그 전의 실상에 대한 몇 가지를 얻어 오래전에 들었던 것과 참고하여 위와 같이 기록해서 감히 후세에 말을 전하는 군자(君子)에게 책임을 맡기니 바라건대 이 내용을 바탕으로 채택해 주었으면 한다. 무오년(1678, 숙종4) 2월에 외손(外孫) 화산(花山) 권상하는 삼가 행장을 쓴다.
첫댓글 문암 선생께서 행장을 올리시는 수고를 또 하셨네요
통계공 관련하여 진작부터 귀한 행장이라 아끼고 있었는데
원문을 달지 아니하셔서 제가 추가로 또 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가급적 선조님들의 사적과 관련하여는
현종님들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하여 번역글과 함께
원문글도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미처 그 부분을 생각치 못했으며, 앞으로 자료를 올릴
경우에 유념하겠습니다.
참판공 선조님은 외14대조부님이 되시는 분이신데 행장을
읽으면서 당시 백성들의 신망을 많이 받으신 점이 무엇보다도
기뻤습니다.
부임하시는 지역마다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봉사를
하신 모습에 존경의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장을 찬하신 한수재 선생은 우암 선생의 고제로 알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니 한수재 선생의 조모님의 친정 아버지가
참판공이 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덧붙이면 한수재 선생의 진외가가 진주강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판공이 학문에도 조예가 깊으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도 발견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풍옥헌 조수륜 선생과
친분이 두터우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분이 우계 선생의
학통을 계승하셨다고 하시니 참판공도 우계 선생의 학문에
관심이 있지 않으셨을까? 추정을 해봅니다.
2021년 5월 11일(화) 문 암 드 림.
위 글중
첨정이 지(礩)를 낳았는데
오타발견~!!
질(礩)로 수정해 주세요...ㅎ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