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3:23-29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늘 본문이 갈라디아서의 코어(핵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시면 갈라디아서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1강 제목은 ‘믿음이 오기 전에’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계명은 선악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지의 법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그 법조차 지키지 못했지요. 그러면 혹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법은 어쩌면 범법을 위해서 있을 수도 있다... 법이 있기 전에는 금지된 욕망이 없다가 법을 만나게 되면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금지한 것을 소망하는 DNA가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두 마음은 아담의 범죄의 탓도 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같이 나누었듯이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앞으로 공부하게 될 갈라디아서 4장에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갈이라는 율법을 만나서 종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에요.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또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라라는 은혜의 아내에게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낳는데 하늘의 어머니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명은 은혜로만 출생되어지고 율법으로는 죄만 낳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서 은혜와 믿음, 그리고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3장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대하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음을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서 1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에요. 선악과를 물고 태어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한계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 죄인이어서 죄 밖에 나올 게 없으므로 막 살자고 하고, 은혜를 알기 위해 더욱더 죄인이 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는 자기들의 전유물인양 행세하지요 현대판 영지주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죄인 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부터 빗나간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분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통일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엡1:10) 그런데 종교인들은 죄 문제에 집착을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죄에서 벗어나서 의인이 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다시말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관심과 인간들의 관심은 접점이 없는 거에요 그렇게 죄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자기 구원에만 관심을 둔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로 생각합니다. 아까 오면서 보니까 서울역 광장 천막에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라고 적어놨던데, 이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옥 가기 싫으면 예수 믿으라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런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를 구원시킴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온 우주에 알리는 거에요. 이 둘의 차이가 어쩌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현대 기독교가 너무 구원론에 치우치다 보니 교인들이 교회를 평생 다니고서도 예수를 믿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가 생겼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른다는 말이에요. 목에 십자가를 걸고 다니긴 하는데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갈2:20)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의 한계를 모르셨을까요? 모르신다면 하나님이 아니시겠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애초에 아담의 범죄를 아시면서 선악과 먹지 말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당시 에덴에는 아담과 하와가 살기에 불편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을 해야 생존이 가능한 것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저주로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서 그랬던 것이지 그전에는 자기생존을 위해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아담과 하와가 살았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조건이었음에도 단 하나밖에 없었던 선악과 법을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킬 수도 없는 법을 주시면서 그 법을 지켜야 에덴에서 영원토록 살수있다고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을 시험하시기 위해 일부러 선악과를 두신 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생산한 신학이 자유의지를 말하고 한편으로 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냐고 항변하는 거에요.
오늘날 기독교가 그런 하나님을 조작해놓고 섬기고 있습니다. 처음 자리를 이탈한 자들이 얼마든지 자신의 지식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생산한 ‘거듭남’과 ‘성화론’이 근거로 주어집니다.. 성령 받은 후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거지요. 무엇이든지 시켜만 주시면 조금 부족하긴 해도 열심히 말씀 지켜서 하나님을 멋쩍게 만들어 드리겠다는 인간들의 오기입니다. 모든 교회에 만연해 있는 성령 만능주의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런 인간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 주신 게 아니라 그런 인간들이 늘 착각하고 오해하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 성령이라는 것부터 알아야 하는거에요. 그리고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일을 성령이 하신단 말입니다. (요16:8) (고전2:12)
그러니까 오늘날 세상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거에요, 즉 성경을 모르고 믿음과 종교성의 차이를 모르는 겁니다. 왜 은혜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면서 은혜는 입에 달고 살지요 다들 교회 열심히 다니고 교회가 시키는 것 열심히 하면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은혜 받겠다고 이름있는 목사 찾아다니고 산으로 들로 기도하러 다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교회 다니고 지옥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열심을 내는 것 자체가 탐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그 육신대로 사는 게 바로 각자 자기가 조작한 예수, 하나님을 섬기는 거란 말입니다.그래서 사도는 그 육신 영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 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런 우리의 육이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육적 몸을 벗는 세례라고 한 것입니다 (골2:11) 그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된 자들만 예수의 생명도 주어지게 되고(고후4:11)그들만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거에요. 요한복음에선 그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요17:3)
그렇게 언약의 죽음, 진리의 죽음을 통과한 자들만 자신이 조작한 하나님과 성경으로 계시한 하나님의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육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생명나무를 향한 탐심이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종교인들에겐 그런 영적 현실보단 보이는 교회, 목사에게 충성하는 게 믿음 좋은 집사, 믿음 좋은 권사님이 되죠.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해서 아브라함이 자기 열심으로 이스마엘을 낳듯이 대부분의 교회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 마음으로 받아서 교회(자기)를 위한 열심을 내는 것을 순종으로 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거에요 열심히 교회나가고 성경 읽으면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줄 안다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믿음이에요.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주님의 믿음이란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주 예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이 믿음이에요. 그리고 그 관계는 인간이 찾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관계이기에 주님에 의해 찾아진 자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이루어지는 관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죄인들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것부터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려는 자들이 오늘날 부흥이란 욕심에 충만한 교회지도자들이다 보니 교회가 커지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들 오해하고 있는 거에요. 쉽게 말하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믿는 나를 믿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인들입니다. 그렇다 보니 교인들이 많은 교회일수록 수천 수만개의 신주단지를 모시고 있는 거지요. 그런 현실 속에서 성령에 의해 찾아진 성도가 있다면 그 사람은 내가 믿는 예수는 가짜라는 것부터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시작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편적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들어야 정상입니다. 아담에게서 난 인간들은 모두 나 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분이 주신 말씀을 곡해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나누는 것도 한편으론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럼 말씀이 왜 문제가 될까요? 우리 모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때문이에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십자가든 모두 내가 듣고 내가 보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판단하잖아요. 모든 것은 다 나에게로 되먹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처럼’의 선악과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에 보암직하고 탐스런 선악열매를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죽어서 생명나무이신 예수께로 가서 완성되는 아담인 것입니다 그들만 말씀을 알아듣고 진리의 말씀으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와 관계(믿음,사랑 소망, 용서,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말씀을 오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기능입니다. 그들에 의해 말씀이 혼잡하게 되고 교회가 어지럽게 되는 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본래 죄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죄와 사망이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죄를 집어넣으셨다고 했어요. 그래서 죄는 한시적인 겁니다. 구속의 역사가 끝나면 죄도 사망도 없게 됩니다. 계시록을 보면 그곳은 눈물도 애통도 사망도 없다고 하잖아요, 고린도서에서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고 합니다. 이렇게 죄도 사망도 하나님의 자기 사람들을 위해 있어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발생됩니다. 죄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생적으로 발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착각이 뭐냐하면 죄까지도 인간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렇게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다면 그 죄는 객관적인 죄가 될 수 있지만 우리 인간들은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죄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아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몸, 즉 선악체계의 몸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자기중심의 사고로 끊임없이 선과 악을 나눕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좋은 것은 선으로 취하고 나쁜 것을 악으로 여겨 버리는데, 이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선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의 처음자리에 있는 것을 선이라고 하는 거에요. 앞에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장에서 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겁니다. 죄와 상관없는 처음자리가 바로 그리스도 안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이 그리스도 안, 엔 크리스토스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으실 수 있는 분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으나 죄는 없으신 예수님 한 분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독생자’ 번역을 했습니다. 모노게네스 입니다. 선악을 한 마음으로 가진 자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보시는 선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골로새서에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시길 나는 위(하늘)에서 왔고 너희는 땅에서 났다.. 하늘에서 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가 본 사람이 없다.. 땅에서 난 너희들은 나를 모르면 나를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죄로 오염된 인간은 위에서 오신 분과 질이 다르고 출처(근원)가 다릅니다. 어떤 공유부분이 없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두신 것 그리고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신 모든 것이 이 땅에 오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앞당겨 예표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온 것부터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한몸된 교회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신부로 이미 묵시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도 스스로 충만치 않으시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입니다.(엡1:23) 여러분은 그런 존재에요.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세례는 죄 없으신 분이 죄의 세계에 편입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자기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음을 맛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죄없으신 분의 죽음이기에 언약의 죽음이며 진리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안에서 새피조물, 곧 하늘적 존재인 아들들이 출생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며 역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교회들은 아예 이 십자가를 파묻어버렸어요 아무도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그들의 십자가는 죄나 씻어주고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장식해주는 십자가 정도로만 아는 거에요 그래서 목에 걸고 차에 붙이는 십자가로 알지 자신이 주님과 함께 못 박힌 십자가는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게 사단은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 이천년 동안 인본의 신학으로 교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에 다니시면서 유대인들에게 오해된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하나님과 세상의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을 제일 잘 알고 가장 열심히 섬긴다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섬기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경건한 니들의 애비가 마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다시 오셔서 대형 교회 강단에서 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엄청난 소동이 일어날 겁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 입구에서부터 출입을 막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의 영을 받아 세상에 대해서도 십자가로 못 박힌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한몸 된 진자 교회라면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이 세상에서 겪었던 같은 사건과 상황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세상이기 때문이죠. 지금의 세상이 예수님 당시의 세상과 본질에서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학문명이나 문화 등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지만 예수님을 살해한 세상이라는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고있는 종교인들 역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의 영을 받은 여러분들이 세상과 충돌 없이 그들과 원만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것은 여러분 안에 세상에서 죽임 당하신 그분이 계시고 그분의 운명에 연합되어 있는 여러분 안에 예수의 심장(마음)이 뛰고 있어요. 여러분에게 말씀이 주어졌고 예수의 영이 주어져서 예수와 연합된 운명을 살고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거쳐 가셨던 모든 과정과 믿음의 선배들이 이 땅을 거쳐 갔던 그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부터 그렇게 여러분의 현실은 세상과 다른 현실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좀더 말씀을 드리자면 여러분들은 믿음을 자신이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믿음을 여러분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실천할 것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믿음이 왔다는 말은 여러분이 알고있는 그 믿음부터 부정되면서 주어진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믿음의 띠가 띠어져서 여러분이 원치 않는 길, 즉 하나님의 목적지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길이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거쳐 갔던 여정입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계집종 앞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을 했던 그것 주님께 그리하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가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씀을 들었던 과정들, 이방인들과의 외식 사건 때문에 새카만 후배인 바울에게 지적당한 일... 바울의 경우는 더 하죠. 배만 타면 태풍이 불고, 독사가 다른 사람 놔두고 자기 손만 물고, 도시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을 당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여러분들 삶에 복음으로 인한 이런 고난이 있습니까? 형태는 다를지라도 이런 자기부인의 과정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별세하도록 밀어내어주는 그런 일들이 여러분 인생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여정이에요 히브리서 11장이 전부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믿음이 주체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지로 이끌고 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교회에게 그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보고 확증하라고 한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이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같은 이야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니들이 믿음의 실천이라고 내어놓는 그런 율법행위나 제사가 아니라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여 들려주곤 했습니다. 모든 율법이 가리키는 것이 이땅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까지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었습니다. 하나님게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셨을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를 쓴 바울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율법은 항상 완전하게 지켜야 율법의 의를 얻게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그렇게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탐심)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라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계명을 몰랐을 때는 살았더니 계명을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할 만큼 바울은 율법을 열심히 지켜보려 했던 것이 바로 죄(탐심)이었다는 것을 로마서 7장에서 실감있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끝까지 율법에 대한 오해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율법의 하나님은 그 하나님대로 섬기면서 자신들의 유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이방 신들을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을 발굴한 결과를 보면 이스라엘 역사 내내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답니다. 여호와 신전과 바알 등 우상의 신전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은 여호와란 이름의 우상을 숭배하다가 결국 망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 교회가 그들처럼 교회 지붕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복에 환장한 종교인들이 모여서 예수믿는 교회라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현하는 하나님의 원수 된 교회입니다.
사사기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문명과 문화가 탐이 났기 때문입니다.(철병거로 인해 그들을 쫒아내지 않았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나 다 자기 생존, 자기 행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생존이나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시는 통로로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 없던 거란 말입니다. 믿음이나 사랑 이나 소망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진짜 귀한 것들은 이 땅에 없던 것들이고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오게 되면 먼저 우리의 믿음 없음이 들통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도록 우리 귀에 복음이 들려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간 같은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남은 자들(하나님의 창세전 약속 안에 확정된 백성들)만 알아듣도록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고, 성신을 보내어서 그들의 귀를 열어 말씀을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그들만 이스라엘이라고 하신 거에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오실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담으로부터 오늘의 성도들까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능욕을 진 그 십자가의 행렬이 종교의 성전을 떠나 영문 밖 십자가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선 골고다 거기가 야곱이 꿈꾼 벧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성도들의 그 행렬은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그 행렬 안에서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있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