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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박물관 서화Ⅰ
전시실 소개
서화書畫(서예와 회화)는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한 선조들의 생각과 마음을 획劃과 면·색채·문자 등으로 표현한 고도의 예술이다. 옛사람들은 글씨와 그림을 ‘같은 뿌리에서 자란 것’ 으로 보아 함께 쓰고 그리며 감상했다. 서화는 일찍이 문인文人의 예술로 애호되어 시・서예・회화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 전시실은 서화의 재료와 제작기법, 장황粧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전시품과 영상을 통해 필묵의 운용과 기법, 서화를 족자・병풍・첩・횡권으로 꾸미는 장황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돌과 금속에 새긴 금석문金石文이나 이를 본뜬 탑본搨本 등을 감상하면서 문자 미美의 다양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서화Ⅰ 전시실 소장품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자를 사용해 뜻을 기록하고 전달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한자가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붓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한 기록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때의 귀족 사택지적이 654년에 세운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해서체楷書體로, 삼국시대의 서예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생金生(711-?)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김생은 왕희지王羲之(307-365)와 안진경顔眞卿(709-785) 등 중국 서예가의 필법을 소화했을 뿐 아니라 강하고 활달한 필치로 개성을 드러내며 명필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태자사太子師 낭공대사朗空大師 비석’은 통일신라의 국사國師였던 낭공대사의 행적을 기려 고려 광종 때 세운 비碑로, 김생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해 글씨를 새겼습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동생으로 당나라에서 문과에 급제했던 최인연崔仁渷이 지었습니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거의 전하지 않으므로 ‘신라의 왕희지’,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은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는 귀중한 비석입니다. 비석 옆면에는 조선 중기의 문인인 박눌朴訥(1448-1528)이 정중한 해서체로 비석을 다시 발견한 감동을 새겨 놓았습니다.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예술의 가치를 이 비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장사아미타불상을 만든 내용을 새긴 비석 : 신라 39대왕 소성왕昭聖王(재위 799~800)의 왕비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상북도 경주 무장사 아미타전阿彌陀殿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봉안한 그 내용과 과정을 새긴 비석이다. 중국 왕희지王羲之의 행서行書풍으로 능숙하게 글씨를 새긴 이 비석은 부서져 흩어졌다가 18세기 이후 조선시대 때 발견되며 재조명되었다. 가장 큰 비편은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발견하였고, 그 후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작은 비편들을 찾아 그 감흥을 비편 옆면에 새겨 기록하였다. 금석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 신라 말 ~ 고려 초의 선승禪僧인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869~940)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으로, 조선 중기에 파손되어 비석 내용의 전모를 알 수 없으며 전체 비석 중 아랫면입니다. 비문은 고려 태조 太祖(재위 918~943)가 지은 것으로 유일무이하며, 글씨 또한 최광윤崔光潤이 중국 당唐 태종太宗의 행서行書를 집자한 것으로 유일하게 전합니다. 비의 뒷면에는 진공대사의 글이 구양순歐陽詢의 엄정한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에 흥법사터가 남아있습니다.
흥덕왕릉 비석 조각 : 이 비편들은 경북 경주에 위치한 신라 제42대 임금 흥덕왕興德王의 능陵에서 수습된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전서篆書로 ‘흥덕興德’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편이 발견되면서 흥덕왕릉비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흥덕왕(재위 826~836)의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수종秀宗 · 경휘景暉입니다. 비편의 내용으로 흥덕왕의 생몰년과 책봉시기 뿐만 아니라 신라의 김씨 왕조가 태조太祖 성한星漢을 시조始祖로 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에 글씨를 쓴 인물은 신라의 명필가 중 한 명인 요극일姚克一로, 그는 구양순歐陽詢의 필법을 터득하여 필력이 힘찼다고 전합니다.
채인범 묘지명 : 고려에 귀화한 중국 남당南唐 출신의 문인文人 채인범蔡仁範(934~998)을 위해 세운 묘지명墓誌銘입니다. 묘지명이란 무덤의 주인공의 행적과 품성 및 그 찬시讚詩를 새겨 무덤에 넣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본 묘지명은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글씨는 빗돌에 가로세로로 정간井間을 친 다음 단정한 해서楷書로 새겼습니다.
삼천사 대지국사 비석 조각 : 삼천사三川寺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에 있던 법상종法相宗의 중심 사찰로, 지금의 서울 은평구 북한산에 위치하였습니다. 이 비석 조각들은 당시 고려 불교계를 대표하던 삼천사 주지住持를 지낸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것입니다. 대지국사비의 비액碑額은 고려의 제11대 임금 문종文宗(재위 1046~1083)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며, 비문은 이영간李靈幹이 지었습니다. 비의 앞면과 뒷면의 글씨는 모두 최홍검崔弘儉이 구양순歐陽詢풍의 반듯한 해서楷書로 썼는데, 윗면에 전시된 앞면보다 뒷면의 글자가 더 큰 것이 특징입니다. 삼천사는 11세기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융성했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비록 사찰은 남아 있지 않고 비 역시 파편으로만 전해지지만 고려 전기 불교계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서화Ⅱ
전시실 소개
서화Ⅱ는 한국 서화의 미와 핵심적인 가치를 체험하는 감상공간이다. 서화Ⅱ는 크게 세 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있다. 명품실은 한국미술사를 대표하는 작품을 집중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으며 영상으로 작품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다. 두 개의 주제전시실은 한국 서화를 주제에 따라 전시하는 공간이다. 서예와 회화가 어우러진 전시물을 통해 옛사람들이 꿈꾼 아름다움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빛과 열에 쉽게 손상되는 서화의 특성에 따라 서화Ⅱ의 세 전시실은 연중 3회 정기 교체전시를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전시실 내에 마련된 디지털 아카이브 코너에서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단원 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을 비롯한 대표적 서화작품들을 고해상도로 감상할 수 있다.
현재 전시 중인 주제
○202-2호 : 조선시대 책장 그림 (2023. 8. 21. - )
조선의 왕실이나 양반 집 사랑방에 있었을 것 같은 책장이 병풍 위에 그려졌습니다. 가지런히 쌓여있는 책들, 각종 문방구류, 향로와 골동품, 꽃가지가 꽂혀있는 화병 등 귀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을 책장 그림, 책가도冊架圖라고 합니다. 정교하게 그려진 각종 물건이 무얼까 궁금해 자꾸만 들여다보게 됩니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한 책가도 속 여러 물건은 선비의 고상한 취향뿐 아니라 부귀, 장수, 다산, 관운 등과 같은 현실적인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책가도 병풍과 영상을 찬찬히 보시면서 진귀한 물건이 가득한 책장 그림을 곁에 두고 싶었던 선인들의 마음도 더불어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202-4·5호: 서화 감상의 즐거움
‘서화 감상의 즐거움’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주요 서화를 다양하게 선보이는 전시입니다. 서화書畫, 한 글자씩 떼어 읽으면 글씨와 그림일 뿐이지만 붙여놓으면 먹 향기 그윽한 낱말이 됩니다. 상고시대 사람들이 그림 같은 갑골문으로 하늘의 뜻을 점친 이후 동아시아에서 글씨와 그림은 늘 짝을 이루어 왔습니다. 서화 감상은 즐겁습니다. 종이와 비단 위를 쓸고 간 붓 흔적을 더듬어보아도 좋고, 솜씨 부린 채색의 맛을 보아도 좋습니다. 서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문학과 상상, 현실과 소망이 한데 뒤섞인 옛 서화가의 마음자리가 드러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예와 산수, 화조와 궁중장식화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서화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옛 사람들이 누린 서화 감상의 즐거움을 오늘 당신의 마음에 담아가시기 바랍니다.
*서화Ⅱ실 임시휴실 안내
- 서화Ⅱ실(202-2,3호): 2024.4.8.(월)-4.14.(일) *4.15.(월) 재개관
- 서화Ⅱ실(202-4,5호): 2024.4.15.(월)-4.21.(일) *4.22.(월) 재개관
서화Ⅱ 전시실 소장품
순화각첩 : 중국의 역대 글씨를 정리한 법첩法帖으로, 북송北宋 태종太宗 순화淳化 3년 (992)에 처음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를 중심으로 역대 황제, 명신, 명필 등의 글씨까지 포괄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이 서첩은 훗날 순화각첩 자체를 모각하거나 증보增補·수정한 첩들이 꾸준히 제작되며, 서예 학습서로 동아시아 서예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금석청완 : 삼국시대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역대 금석문金石文 120여 점의 탑본搨本을 모은 첩으로, 17세기 후반의 것까지 수록하였습니다. 이 첩은 인조仁祖의 손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 1693)의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와 더불어 우리나라 탑본첩으로는 편찬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금석청완’은 총 3가지 다른 본이 전하고 있는데, 전시된 본은 10권으로 구성되어 조속趙速(1595~1668)의 사후死後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금석문 가운데 일찍 망실되었거나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 없는 탑본도 다수 수록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육일첩 : 조선시대 역대 명필가들의 글씨를 중심으로 엮은 서첩書帖입니다. 총 16책 중 중국 서예 모음과 김생金生의 글씨를 제외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 에서부터 김수증金壽增(1624 ~1701)등 조선 전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인물 들의 필적筆跡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서첩에는 간찰簡札이나 시문詩文 등 사사로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습니다. 이 서첩은 제작연유와 편집구성 등에 대해 알 수 없으나, 구성으로 보아 당시 안목 높은 수장가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방대한 분량과 풍부한 내용으로 조선시대 서예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인장1 : 비불비선非佛非仙을 새긴 인장
인장2 : 평생일편심平生一片心을 새긴 인장
인장3 : 석경루인石瓊樓人을 새긴 인장
인장4 : 아애막정我愛莫靜을 새긴 인장
인장5 : 오원吾園, 장승업인張承業印을 새긴 인장
인장6 : 상심시도常心是道를 새긴 인장
인장7 : 양襄을 새긴 인장
인장8 : 광풍제월光風霽月을 새긴 인장
인장9 : 치중화致中龢를 새긴 인장
인장10 : 종오소호從吾所好를 새긴 인장
인장11 : 낙천진樂天眞을 새긴 인장
인장12 : 삼연재三硯齋를 새긴 인장
인장13 : 정윤규인鄭倫規印, 성재誠齋를 새긴 인장
인장14 : 정윤규인鄭倫規印을 새긴 인장
인장15 : 성재誠齋를 새긴 인장
석파 이하응 인장 :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1898)의 인장. 석파石坡, 대원군장大院君章을 새김
어필석각 : 조선의 임금들은 대부분 문예에 뛰어났습니다. 세자 시절부터 오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올라서도 공부를 계속했기에 문장과 서예에 남다른 필력을 뽐낸 인물이 많았습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임금은 선대 임금들의 글씨를 수집하고 돌에 새기는 이른바 ‘어필석각御筆石刻’을 제작했습니다. 이는 역대 임금의 위업을 계승하고 효를 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역대 임금의 문예文藝가 새겨진 어필석각은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왕실의 문화적 우월성과 정통성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어필석각을 만든 또 하나의 목적은 임금들의 글씨를 탑본搨本해 널리 보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은 어필석각을 탑본해 엮은 서첩으로, 여러 부를 제작하여 유포했습니다. 역대 임금 가운데서도 선조宣祖는 명필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선조는 스스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석봉石峯 한호韓濩라는 당대 최고의 명필을 발탁하고 후원해 한국 서예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서화실에는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문종, 성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의 글씨를 새긴 어필석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어필석각에는 왕이 쓴 시문과 서찰, 큰 글씨의 서예 작품 등 다양한 글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격조 높은 문예의 자취가 돌에 새겨져 영원히 전해집니다.
책가도 : 책과 중국 고동기, 꽃병, 은입사 함, 먹과 벼루 등 귀한 물건들이 놓인 책장을 그린 그림을 책가도라 한다. 이 그림은 다른 책가도에 비해 선반의 너비와 높이가 다양한 점이 특징이다. 제2폭 첫 번째 선반 오른편에 유리가 끼워져 있는데, 이는 다른 책가도에서 볼 수 없는 요소이다. 유리에 매화 가지가 은은하게 비쳐 보인다. 책장은 갈색 위주로 칠해져 바닥은 황토색, 뒷벽은 고동색, 옆면은 깊이감을 주기 위해 앞쪽은 갈색으로, 뒤쪽은 검은색으로 나누어 채색되었다. 책장 곳곳에 주전자, 유리잔, 철제 은입사 향로 등 19세기의 생활용품이 그려져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를 더한다.
하늘로 오르는 용 : 심사정의 묵룡墨龍은 당대 견줄 이가 없었다고 한다. 1764년, 이웃에 살던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방문했을 때에도 심사정은 도사道士가 용의 승천을 바라보는 그림을 제작하고 있었다. 옆의 작품과 유사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용을 그렸는데, 긴 수염을 휘날리는 용은 고개를 돌려 감상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용의 코 아래와 뿔에 각각 ‘김영로金永老’라고 적혀 있는데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양陽을 상징하는 용이 음陰의 기운이 가득한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운룡도는 대길大吉이나 입신양명의 상징을 갖고 있다.
하늘로 오르는 용 : 용은 비구름을 다스린다고 믿어져 조선시대 기우제祈雨祭(비가 오길 기원하는 제사)에서 용 그림이 사용되었다. 용이 구름 속에 있는 운룡도뿐 아니라 물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승룡도乘龍圖, 두 마리의 용을 그린 쌍룡도, 호랑이와 짝을 이룬 용호도, 인간과 싸우는 격룡도擊龍圖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1700년 이전에 제작된 용 그림은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 18세기 문인화가 심사정은 산수, 인물, 동물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으며 특히 수묵으로 그린 용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먹만을 사용해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용을 그렸는데 농담을 탁월하게 조절한 먹구름과 세찬 비바람 표현이 돋보인다.
여동빈과 용 : 동굴 앞 벼랑에 한 명의 도사道師가 앉아 구름에서 나온 용과 마주하고 있다. 도사가 착용한 두건과 도포, 동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칼로 미루어 볼 때, 이 인물은 팔선八仙 중 검으로 용을 제압한 여동빈呂洞賓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동빈과 용은 서로 싸울 생각이 없어 보이며 평화롭게 노니는 두 마리의 학까지 그려져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 오른쪽에 심사정의 호 ‘현재玄齋’가 쓰였고 인장으로 「현재玄齋」, 「이숙頤叔」이 찍혔지만, 심사정의 고사인물화에 비해 구성이 어색하고 인물 표현의 자연스러움이 덜하다.
여의주를 갖고 노는 두 마리 용 : 황룡과 청룡이 바다 위에서 여의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다. 이처럼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도상을 쌍룡희주雙龍戱珠라 한다. 이 도상은 조선시대 명나라에서 들어와, 왕의 상징물인 교룡기蛟龍旗나 어좌 위 천장 보개寶蓋에 사용되었다. 17세기 중반 창덕궁 후원이 조성될 때 존덕정尊德亭 천장에 쌍룡희주 그림이 그려졌으며 19세기 왕실용 청화 백자 항아리,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의 천장에도 이와 같은 도상이 그려졌다. 쌍룡을 묘사한 활달한 필선, 구름과 파도의 과감한 표현, 먹과 채색을 아우르는 뛰어난 채색기법으로 볼 때 기량이 높은 화가가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용 : 오른쪽 그림은 바다에서 뛰어나온 용이 여의주를 움켜쥐려는 순간을 포착했다. 가는 필선으로 용을 그리면서 몸통의 비늘, 등줄기의 지느러미, 4개의 발톱 등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용의 몸통과 하늘은 연한 먹으로 칠했으며 바다는 엷은 푸른색으로 채색했다. 왼쪽 그림에서는 사자 한 마리가 왼발로 거북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이 화첩은 용, 사자, 거북, 호랑이, 늑대 등을 그린 그림 8점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동물은 길상, 장수, 벽사 등을 상징한다. 화가는 중국에서 들어온 서수瑞獸 그림을 따라 그린 것처럼, 가는 필선으로 동물을 충실하게 묘사했다. 배경이 되는 각진 절벽이나 흑백의 수묵 대비가 보이는 암석 처리, 지면에 찍은 호초점, 물가의 경계 표현 등에서 17세기 절파 화풍이 보여 17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구름 속 용 : 옛 사람들은 용이 물을 다스려 비구름을 몰고 온다고 믿어서 구름과 용을 함께 그리곤 했다. 이 작품에서도 화면 전체에 먹구름이 파동쳐 번지듯 표현되었고 그 사이에서 용 한 마리가 배를 내밀며 등장했다. 흰 눈썹과 턱 아래의 수염,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 갈기로 인해 용의 얼굴은 늙은이처럼 보인다. 윤덕희는 아버지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영향을 받아 용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목판에 새긴 운룡도를 비롯해 그가 그린 용 그림 여러 점이 전해진다.
조용한 산속의 긴 하루 : 자연에서 누리는 우아한 생활을 읊은 시를 묘사한 그림이다. 원래 여덟 폭이었으나 현재 2·4·7·8폭만 전해진다. 도화서 화원 이인문이 능숙하게 그린 그림에 서예가 유한지가 예서隸書로 시 구절을 적었다. 이 시구는 중국 남송 문인 나대경羅大經(1196-1242)이 지은 「산거山居」를 인용한 것이다. 가장 오른쪽 그림(2폭)은 마음 가는 대로 책을 읽는 ‘수의독서隨意讀書’이고 다음(4폭) 그림은 거친 보리밥을 달게 먹는 ‘맥반흔포麥飯欣飽’ 장면이다. 시와 그림, 글씨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지만, 유한지의 실수로 이 두 그림에 적힌 글이 서로 바뀌었다. 세 번째 그림(7폭)은 ‘의장시문倚杖柴門’으로 저물 녘 산속 풍경이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석양을 감상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네 번째 그림(8폭)은 ‘월인전계月印前溪’로 달빛 비추는 밤 풍광을 감상하는 그림이다. 세부표현에서 그가 각각의 화제에 나오는 내용을 충실히 화면에 담아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해질녘 긴 강 : 이인상은 명문가 서얼 출신으로 관직 활동에 신분적 제약이 있었다. 대신 그는 글과 그림으로 수양하며 격조 높은 문인화의 세계를 이룩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드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이 그림도 강을 중심으로 양쪽에 둔덕을 배치한 구도로 고즈넉함이 감돈다. 앞쪽 둔덕 아래 강가에 정박한 배에서 멀리 바라보는 인물에 관람객의 시선이 머물게 된다. 부채 왼쪽 글은 주희朱熹의 시 「차운택지만성次韻擇之漫成」 중 몇 글자를 다르게 하여 적은 시다. 이 시에서 읊은 해질녘 아련해지는 분위기를 그림으로 잘 표현했다.
달밤 풍경 : 김두량은 도화서 화원으로 영조英祖(재위 1724-1776)가 ‘남리南里’라는 호를 내렸을 정도로 화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 그림은 달 아래 안개 낀 숲과 계곡을 그린 밤 풍경으로,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적막한 숲 속, 계곡의 세찬 물줄기가 정적을 깨는 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의 구도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나뭇가지는 게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바위 표면은 짙은 먹으로 흑백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이는 조선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까지 유행한 절파浙派 산수화풍의 표현기법이다. 그는 18세기 유행한 붓을 가로로 뉘어 찍어 산의 표면을 표현하는 남종화풍도 구사했다. 이처럼 그는 그림에 따라 화풍을 다르게 하여 제작했다.
번개의 신 : 천둥소리를 내는 북과 망치를 짊어지고 칼을 쥔 번개의 신, 뇌공이다. 뇌공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한쪽 다리를 내려 뻗었는데, 마치 악인惡人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순간인 듯하다. 뇌신은 조선시대 불화에서 여러 신 중 하나로 그려지는데, 이 그림은 뇌신을 그린 단독상이다. 이 그림을 그린 김덕성은 김두량의 조카로,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정조正祖 시기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으로 활동했다. 그는 특히 신장상神將像을 잘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도 뇌신의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체모가 숭숭 나서 매우 역동적이다. 근육에 음영이 표현되어 있어,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온궁영괴대도 : 사도세자가 행차하여 활을 쏘았던 온양행궁溫陽行宮의 영괴대靈槐臺를 그린 그림이다. 영괴대는 당시 사도세자가 심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자, 이를 기리기 위해 축대를 쌓고 붙인 이름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正祖(재위 1776-1800)는 그 옆에 비석을 세워 기념했다. 비석의 글씨는 정조가 직접 쓰고, 뒷면의 글씨는 정조의 어제를 신하 윤행임尹行恁(1762-1801)이 썼다. 그림에는 정조의 어제 비명과 함께 윤행임 일가에게 상을 내린 일이 기록되어 있다.
화성전도 :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세운 화성 일대를 조망한 병풍으로, 지형과 건축물을 지도처럼 알기 쉽게 묘사했다. 정조는 군사 요새이자 상업 도시로 화성을 건설했고, 저수지를 설치해 주변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었다. 화성 건설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궤에 실린 〈화성전도〉는 이 병풍과 구도가 비슷하다. 화성 완공 후 큰 병풍으로 〈화성전도〉 세 틀을 제작했다고 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 모습을 전해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병풍으로 추정된다. 화성이 병풍으로 널리 그려진 평양에 비견될 만한 이상적인 도시임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윤급 초상 : 관복 차림의 윤급(1697-1770)이 표범 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있다. 66세인 그의 얼굴에 양미간 주름, 곰보 자국과 검버섯, 사마귀가 숨김없이 표현되었다. 모자와 옷의 세부 표현도 탁월하다. 얇은 사紗를 겹쳐 만든 오사모의 양쪽 날개 문양이 어른거리고, 구름무늬 비단으로 지은 단령團領의 질감은 실물처럼 느껴진다. 쌍학무늬 흉배와 신발을 올려놓은 화문석 문양도 촘촘한 붓질로 묘사되어 있다. 윤급은 영조英祖(재위 1724-1776) 때 문신으로 1762년 종1품 판의금부사가 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때를 기념해 초상화를 제작했을 것이다. 『근역서화징』에 변상벽이 윤급 초상을 그렸다고 적혀 있어 이 그림을 변상벽이 그렸다고 추정한다.
눈길을 지나 장으로 가는 행렬 : 화원 화가 이형록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화훼도, 산수인물도, 운룡도 등으로 이루어진 25면 첩 중 제5면과 6면이다. 오른쪽 그림은 눈 덮인 길을 소를 앞세우고 짐을 잔뜩 실은 말의 행렬을 그렸다. 말에 실려 있는 짐의 양으로 보아 장에 물건을 팔러 가는 길로 보인다. 왼쪽 그림은 한 선비가 달빛 가득한 밤, 소나무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다. 선비가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수양 중 하나였다.
가을과 겨울날 전원에서 사냥하는 성대한 모임 : 화면 세로가 약 7cm, 가로가 180cm가 넘는 긴 형태의 두루마리로 봄과 여름을 그린 그림과 한 쌍을 이룬다. 두 그림 모두 작품 제목과 제작 시기·작가를 알 수 있는 글이 그림 앞에 붙어 있다. 봄과 여름 두루마리에 영조 대 활동한 도화서 화원 김두량이 밑그림을 그렸다고 적혀 있고, 이 두루마리 그림 앞에 김덕하가 색을 입혔다는 글이 있다. 글 다음으로 겨울과 가을 각각 두 장면씩 이어진다. 들녘에서 꿩이나 노루를 사냥하는 장면, 집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고, 선비 둘이 담소를 나누고, 여인이 길쌈을 하는 장면이 겨울 풍경이다. 다음 추수가 한창이고 여인이 새참을 들고 가는 장면과 마당에서 도리개로 타작하는 장면이 가을 풍경이다.
몸을 긁는 검은 개 : 나무 아래 풀밭에서 검은 개가 뒷발로 몸을 긁고 있다. 경주 김문 화원 화가 집안 출신 김두량은 영조가 ‘남리南里’라는 호를 하사할 만큼 아끼는 화가였으며, 특히 개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는 개의 털을 잔붓질로 섬세하게 표현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개의 털 한 올 한 올을 세밀하게 그려 몸통에 밝고 어두운 부분이 입체감 있게 묘사되었다. 이는 배경의 나무와 잡초를 거칠고 성글게 처리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겨울 풍경 : 이교익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꽃과 풀, 벌레 등 다양한 장면이 묘사된 화첩 중 한 면이다. 이교익은 특히 나비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알려졌지만, 산수도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아홉 번째 면인 이 그림은 황량한 겨울 풍경을 담고 있다. 화면 가운데 먹의 농담을 달리 표현한 앙상한 나무들이 있고, 주변에 가옥이 있는 쓸쓸한 풍경이다. 나무들 오른쪽으로 물길이 지그재그로 놓여 더 깊은 산속으로 시선을 이끈다. 시선이 닿는 저 먼 곳에 초가집 몇 채가 안개에 싸여 소슬한 분위기를 풍긴다.
지팡이를 짚으며 한가로이 거닐기 : 김희성(본관 전주)은 영조 때 화원화가로 1748년 숙종의 초상화 모사 작업과 1760년 청계천 진흙을 파낸 사업을 기념하는 《준천첩濬川帖》 제작에 참여했다. 그의 명성이 높았으나 전해지는 그림이 적은데, 깊은 산속 지팡이를 지닌 한 인물이 못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이 그림으로 그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당시 유행한 남종화풍南宗畫風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그림 위쪽 멀리 있는 나무를 붓을 가로로 뉘어 찍어 표현한 미점米點과 바위와 산등성이 표면을 구불구불 선을 길게 그어 그린 피마준披麻皴은 남종화풍의 표현기법이다.
예서 칠언절구 : 정학교는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난 서예가이자 대나무와 난초, 특히 돌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다. 이 예서 대련에서 그의 전형적인 예서체에 감각적 필치로 변화를 준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씨에서는 청대 비학파의 고졸한 서풍이 두드러지며, 서체와 시구 내용이 잘 어울린다. 한나라 비석에 대해 언급한 이 시구는 정학교가 창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조선에서 김정희 이후 금석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을 반영한다.
사계절 풍경 : 19세기에 활동한 중인 화가 김수철은 간략한 필치로 대상을 과감히 생략하는 참신한 조형 감각의 산수화를 많이 제작했다. 이 그림에서도 윤곽선을 그릴 때 힘을 들이지 않은 듯 가볍게 긋고, 나뭇잎도 점을 툭툭 찍거나 몇 가닥 선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간결함과 자유분방함이 김수철 그림의 매력이다. 산수에 비해 인물을 작게 그렸는데, 붉은색과 청색을 칠해 돋보이도록 했다.
대나무 : 신위는 시詩·서書·화畫에 뛰어난 삼절三絶로 불리며 특히 대나무를 잘 그린 화가이다. 그는 대나무 대를 유연하고 우아하게 처리하고 대나무를 사선으로 배치했다. 전체적으로 여백을 많이 두어 그의 대나무 그림은 담백하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또한 두 그루 이상의 대나무를 그릴 때, 한 대나무는 짙게, 다른 대나무는 연하게 표현했다. 신위 특유의 대나무 표현 방식과 화격이 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은 중국에서 수입한 냉금지冷金紙를 사용해 바탕에 반짝이는 금분이 있다.
새 : 까치와 매화, 자풀과 해오라기, 줄과 백로, 기러기, 달밤 기러기와 갈대, 청둥오리, 설산과 가마우지, 설죽과 숙조 등이다. 사계절의 8경을 묘사한 것으로, 계절감이 느껴지는 배경에 다양한 새가 등장한다. 먼저 매화나무와 까치는 봄의 풍경인데, 그림의 새들이 물새인 관계로 매화나무 역시 물가를 향해 뻗은 도수매倒水梅이다. 까치의 날개도 비에 젖은 듯 과장되게 부풀어 있다. 개솔나물과 부들 사이의 백로 그림은 여름 풍경이다. 달 밝은 밤에 갈대꽃 아래의 기러기 그림과 강으로 내려오는 기러기 그림은 가을 풍경이다. 기괴한 바위처럼 우뚝 솟은 눈 덮인 산을 배경 삼은 가마우지 그림과 눈 덮인 대나무에서 졸고 있는 새 그림은 겨울 풍경이다.
주희의 시 「희답양정수문신이소」 : 조선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이자 서예가 백하白下 윤순은 중국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芾(1051-1107)을 비롯한 옛 대가처럼 ‘메마른 듯 힘이 있고, 속된 아름다움에 치우치지 않은(蒼勁拔俗)’ 글씨를 추구했다. 윤순은 중국에서 편찬된 법첩法帖을 널리 모아 당·송 대가들의 서예 이론을 폭넓게 연구했다. 이 글씨는 남송의 문인 주희의 시를 행초行草로 쓴 것으로 자유로운 붓놀림이 돋보인다. 정열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중국 남방 문학의 정취와 활달한 필치가 잘 어울린다.
국립 중앙박물관 [서화Ⅰ& 서화Ⅱ ]이 위치한
2층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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