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을 주제로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러분도 성도라면 이름 앞에 믿음이 주어로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여러분은 이미 완료된 자들이고,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하나님의 성공을 살아낸 자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날마다 실패하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완전한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닙니다. 믿음(피스티스)은 관계의 언어입니다. 성경의 대부분 용어들은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 언어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문자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데, 문제는 성경을 문자대로만 해석을 하면 사전적 의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언어들은 일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있는 그런 의미로는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신뢰, 결단, 의지 등의 개념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믿음이며 능력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는” 이라고 하면서 믿음을 인격화했는데, 맞습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예수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없던 믿음이 그분과 함께 온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믿음이고, 하나님이 믿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미쁘시다고 하잖아요. 이 말도 똑같이 피스티스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이고 예수가 믿음이신데 그분이 오셔서 자기 마음대로 죽은 자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워 붙들고 가시면 우리가 그분의 믿음에 의해서 살아나는 겁니다. 그분에게 붙들리는 순간 살아나서 나를 일으켜 주시는 분에 대하여 눈이 열리는 거에요. 그래서 믿음은 관계의 언어입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없는 자들은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싶어도 불가합니다. 그래서 다른 믿음을 믿음이라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대부분의 세상 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큰 믿음, 작은 믿음이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는 몸 된 교회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같은 질의 믿음이에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란 말이지요.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라고 하죠? 믿음이 오게 되면 세상 욕망을 향해 있던 우리의 바람이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나의 바람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바람은 아들을 통해서 아들들 만들기, 즉 하나님의 가족 만들기, 하나님의 집짓기,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바람은 모두 땅에 속한 것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모르면 땅에서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기껏 아는 것은 심판이 작정된 세상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본 적이 없으니까 죽음이 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진짜 현실은 죽음밖에 없는데 그 죽음조차도 모르고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만 알고 이 역사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묵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 등을 이 땅에서 같이 살아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라는 시간과 층과 질이 다른 묵시라는 층을 같이 살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 세상이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존재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셨을 때 이 세상은 그분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음이 그분을 삼켰지만 죽음조차도 그분을 감당할 수 없어서 토해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적인 생명력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성도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성도는 씨가진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탄생한 사람, 바로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사람’ 만들기를 원하셨는데,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가 선악과에서 출발을 합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사람으로 완성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죄와 사망이 동원되고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꼭 붙들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이 탄생합니다. 나머지는 그냥 흙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랑을 모르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도 똑같이 소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바람과 나의 바람이 일치되게 하는 상태가 믿음 안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잖아요. 성경에 보면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보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말이잖아요.
사도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말씀 사랑입니다. 우리가 보지도 못한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를 사랑하는 것이란 말에요. 성경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고,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사랑하고 문자 안에 담긴 진리를 보게 되면 예수를 본 겁니다. 이것이 ‘호라오’예요. 문자 층 밑에 있는 진리 층이 읽혀지고 세상 역사나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체득되는 것을 ‘호라오’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시각과 마음과 감각을 가진 것이에요. 이게 예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해석공동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라는 말은 예수와 같은 통각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우리 손에 가시가 박혔을 때 온 몸이 아픈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예수의 영을 받아서 역사 속에서 예수와 한 몸으로 교회로 지어져가고 있다면 예수님과 똑같은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슬퍼하셨던 일에 슬퍼하고 분노하셨던 일에 분노하고 기뻐하셨던 일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고 분노하셨던 이유는 아버지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이유로 분노하신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아버지의 말씀이 변개되는 것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손 할례당에게 쌍욕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육적 몸을 벗는 것이 할례인데, 이스라엘이 되려면 생식기의 끝을 자르는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했던 그들을 향해 개새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현상들을 예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고 예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길 수 있고 또 예수의 마음으로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의 믿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그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통증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현상입니다. 생명(조에)이 있게 되면 반드시 생명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살아있음의 현상이 있습니다. 죽은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잖아요. 그런 죽은 몸에 예수의 생명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우리 몸에는 생명 현상이 나타납니다. 생명 아닌 것에 대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분별이 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나를 향한 뒷담화에 신경을 썼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거나 복음을 변개하는 일에 아니오 하고 분노하는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믿음)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우리의 거룩과 지혜와 의는 예수입니다. 믿음이 오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즉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내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꾸 나에 대한 집착과 자기 탐닉과 자기 사랑으로부터 조금씩 손을 놓게 되고 그분을 바라보게 되는 상태가 믿음입니다.
구약에 보면 우리 인간들의 악과 한계를 ‘전쟁하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등으로 표현을 하는데, 만군의 여호와께서 전쟁을 벌이시는 상대, 즉 다른 신이 바로 ‘나’란 말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의 의미가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행하셨을 때 가장 큰 적은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전쟁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좋아할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께 완전히 농락당했을 때입니다. 내가 이러려고 하나님을 믿었나 싶을 때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기회입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기대했던 하나님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 하나님이 진짜 나를 죽이러 오신 하나님입니다. 자주 말하지만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십자가 지신 예수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를 죽여서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한마디로 함께 죽자고 그분이 오신 거예요. 그분이 안 오시면 이 세상은 여전히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자기사람들을 품에 안고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던 하나님 나라(성도들)가 온전케 되고 완성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같이 못 박혀서 죽은 사람들이에요. 그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배우기 위해 인생을 살고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예수께서 여러분을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죄로부터의 구원은 먼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연합 안에 생명이 있는 거에요 이게 십자가의 신비며 역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담의 죄로 인해 죽음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이렇게 둘만 있습니다. 그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창세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번성을 합니까? 하나님의 복은 취소된 건가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생육과 번성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겨냥하신 말씀이지 이땅에서 생겨나는 인류의 생육과 번성이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자들은 죽음 안에서 태어나고 죽음을 향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이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망에서 구원하셨다는 말은 영원한 심판인 둘째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생명을 가지신 분이 생명을 버리심으로 가능한 구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언약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의 죽음이 실현된 것이 이천 년 전 골고다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죽음만을 진짜 죽음으로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본래 생명이 없었습니다. 아담도 하나님적인 생명이 없었어요. 하이 네페쉬 하야, 그러니까 그냥 호흡이 있는 기식하는 생물체였어요. 그런데 진짜 생명이 있는 분의 생명 안으로 우리를 불러들이셔서 그분의 죽음도 여러분 각자에게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십자가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을 우리가 다 받은 것으로 여겨주시고 그 죽음 안에서만 진짜 생명이 나누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복음에서 이 심판을 빼버리고 구원만 챙겨 가지려는 게 오늘날 변질된 기독교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묵시 안에서 완료된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아담의 몸을 고집하고 그 몸만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후에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셨고, 이 땅에 교회가 생겨났으며 그 때부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그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지어져 가는데, 이 몸 된 교회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똑같이 재생됩니다.(고후4:7-12)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사건이 여러분의 삶에 반복해서 재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이천 년 전에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물론 완료된 사건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십자가가 현재 시제로 똑같이 재생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삶과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모든 과정을 여러분도 같은 코스를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자랑했습니다. 그의 삶에 주님의 십자가에 넘기우는 사건이 날마다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나의 인생, 나의 존재성 나의 주체성이 예수의 이름에 의해빼앗기고 그 진리의 죽음에 넘기어지는 사건이 없으면 그에게는 주가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4:12)
이것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나타나는 생명의 현상입니다.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그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신 후에 그냥 뒷짐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 성도들과 동행하시면서 여러분의 삶에 침 삼킬 틈도 없이 개입하시고 관리하시고 채찍질하고 계십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만 빠져도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질의 작은 예수들을 만들어내십니다. 이것이 새 창조입니다. ‘우리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자기 탐닉 자기 사랑에 빠진 나는 그의 손길에 날마다 무너져 내립니다. 그 은혜가 아니면 그 생명이 아니면 자신은 죽은 흙임을 그렇게 확인당하는 거예요. 이게 고난입니다. 세상적인 꿈 희망이 없는 거에요. “Boys, be ambitious”가 없어요. 그러나 그런 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내 안에 새 사람이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말은 여러분이 사는 곳은 이 세상이지만 여러분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 밖에서 나를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는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를 챙기시고 나를 돌보시고 나를 관리하시고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가 계심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현재적 구원입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관계성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음의 주인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시는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육은 세상을 향하고 나에게 탐닉하는 자이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말씀의 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하는 것입니다.그렇게 교회는 그런 말씀의 사건으로서 교회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 말씀에 의해 믿음으로 세상을 별세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들에게만 보이지 않는 소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과 소망을 같은 뜻으로 씁니다. 로마서에선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언어들은 발음은 달라도 같은 뜻으로 주어진 거에요 그 모든 단어가 한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도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요. 은혜와 믿음이 같은 말로 쓰인거에요. 은혜, 믿음, 사랑, 소망 의 거룩...모든 단어를 하나로 줄이면 ‘예수’가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는 없는 것들을 값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ㅜ함이라”
그래서 성경의 구원은 우리에게 있는 가능성을 키우고 개발해서 천국 갈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을 외부의 누군가가 강한 자의 손에서 탈취해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그렇게 죽어있는 자를 주께서 일방적으로 찾아가 살려내신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날 변질된 개혁주의와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합니다.